6. 성경기록영감과 설교록의 위치(딤후3:16) 2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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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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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54
6. 질문 : 성경기록영감과 설교록의 위치(딤후3:16) 2407
성경은 완전영감으로 축자영감으로 씌어졌다고 하는데 설명 좀 해주시고요, 성령의 조명이 무엇인지요? 또 디모데후서3장 16절-17절 말씀 중에 교훈, 책망, 바르게함, 의로 교육하는 것을 해석 좀 해주세요? 성경에 권위성과 설교록의 권위성도 비교해주세요
답변 : 성경 기록 영감과 설교록의 위치 등에 대하여
1. 성경을 기록할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 라는 문제입니다.
① 완전영감
성령이 성경을 기록할 때, 성경을 기록하는 사람을 완전히 붙들어 전적 영감으로 기록했습니다. 이를 두고 성경은 '완전영감'이라고 표현합니다.
② 축자영감
성령이 성경을 기록하실 때, 그 글자 하나하나까지 전부 영감으로 알려주셔서 기록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일점일획도 가감이 없고 오류가 없다는 뜻입니다.
③ 성령의 조명
성경의 해석은 신학이나 원어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 성경을 기록한 성령이 그 성경을 읽는 사람 속에 마음을 비추어 주어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을 비추어 주신다는 뜻을 ‘조명'이라고 합니다.
2. 참고로, 성경 기록에 역사하신 성령의 역사를 순서대로 살펴본다면
① 성경 기록영감
성경은 성령이 사람을 감화 감동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성경을 기록할 때 역사한 성령의 역사를 '기록영감'이라고 합니다.
② 성경 내재영감
사람의 책은 그 책을 기록한 사람이 그 기록한 내용 속에 직접 잔류하면서 그 내용을 접하는 사람에게 가르쳐 주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성경을 기록하셨을 뿐 아니라 그 성경 내용 속에 항상 대기하고 계십니다. 성경 진리 속에는 성령의 감화와 감동이 항상 내재해 계신다는 뜻입니다.
③ 성경 조명영감
성경은 그 성경을 읽으려는 사람에게 그 마음을 밝혀 성경을 깨달을 수 있도록 역사를 하시니 '빛을 비춘다'는 뜻이 조명입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의 마음을 밝히는 성령의 역사를 '조명 영감'이라고 합니다.
④ 성경 역사영감
성령은 성경을 읽고 깨달아 그대로 실행하려는 사람에게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실행하도록 만드십니다. 말씀대로 살게 만드는 성령의 역사를 '역사영감'이라고 합니다.
3. 성경을 기록할 때, 성령과 성결 기록자와의 관계로 살펴본다면
① 기계적 영감
성령이 펜을 사용하여 성경을 기록하듯, 성경을 기록하는 사람을 도구와 같이 사용했다는 것을 '기계적 영감'이라고 합니다. 이는 잘못 깨달은 것입니다.
녹화설교를 녹음기를 사용해서 들으면 우상이 된다고 서울에 있는 백목사님이라는 분이 교역자회의 때 발언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 근거로 조직신학의 ‘기계적 영감'을 예로 들면서 '녹화설교는 기계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기계적 영감뿐이고 유기적 영감은 없다'고 한 것은 ‘기계적영감' ’유기적영감'이라는 단어 뜻도 몰라서 그렇습니다.
② 유기적 영감
하나님께서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지 않으시고 성경을 기록하는 사람이 가진 자유성으로 스스로 그렇게 기록하도록 했다는 설명입니다. 유기적인 관계로 의논하고 설명하고 타이르고 가르쳐서 성경을 기록하는 사람이 그렇게 적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만들어서 결과적으로 그렇게 흠 없는 기록이 되게 했습니다.
4. 딤후3:16-17
87.1.5.월요일 새벽에 간단하게 요약한 설교가 있습니다. /초기화면/활용자료/주해사전/에서 해당 자료를 찾아보셨으면 합니다. 여기 간단하게 소개드리면
① 교훈
성경을 세상 지식 공부를 하듯이 ‘성경공부'식으로만 공부하면 지식만 늘어나게 되고 교만한 사람이 됩니다. 교훈이라 말은 가르치고 훈계한다 말입니다. ‘네가 이렇고 이렇고 하니 이렇게 해라'는 것을 교훈이라고 합니다. 실제 그렇게 행하여 그런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② 책망
말씀을 기준으로 맞추어 볼 때 잘못 된 것은 책망을 받아 고치기 위해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교훈은 가르쳐 훈계하는 면을 강조했고, 책망은 틀리고 잘못 된 것을 고치는 면을 강조했습니다.
③ 바르게함
어떻게 알고 행하고 살아야 바른지를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④ 의로 교육
‘의'는 하나님만 가지셨으니 우리를 대속하신 것이'하나님의 의'입니다. 대속의 사람으로 살도록 하는 것이 성경이라는 뜻입니다.
5. ‘성경 권위성'과 ’설교록 권위성'
① 성경의 권위성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정확성에 있어서는 일점일획도 가감이 없으니 '정확무오'라고 합니다. 그 실력은 천지를 없는 가운데에서 창조하신 '진리'입니다. 진리를 대할 때는, 우리가 그 진리에게 점L 되고 그 진리 시키는 대로 순점; 하고 그 진리가 원하면 생명도 바쳐 드려야 합니다.
② 설교록의 권위성
설교록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소개하는 책입니다. 성경은 천지를 창조한 ‘진리'라고 다른 사람에게 알려드리는 안내서입니다. 따라서 설교록의 권위는 성경 내용을 잘 알렸으면 잘 알린 만큼 권위가 있는 것이고, 만일 성경 말씀에 없거나 잘못되었다면 아궁이에 불쏘시개로 사용하면 좋습니다.
만일, 어느 주일학생이 동생을 앉혀놓고 설교를 했다 하더라도 그 내용이 성경에 옳고 바른 것을 전했다면? 그때는 그 아이를 우습게 보고 그 아이가 전한 내용까지 우습게 봤다가는 그 아이에게 당하는 것이 아니고 그 진리에게 경을 치게 됩니다. 그 전하는 사람의 유무식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진리를 담았으면 진리 때문에 그 말은 어린아이의 말이라도 진리의 권위성을 가지게 됩니다.
성경 말씀을 바로 전한 한 마디는, 미 대통령의 국정연설보다 훨씬 권위가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인류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큰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면을 아는 사람은 상대방의 남녀노소 빈부귀천 유무식을 보지 않고 오로지 그 사람의 말이 성경대로인지만 집중하고 살펴봅니다. 대개 사람들은 그 말이 성경에 정확한지는 보지 않고 그 말을 하는 그 사람의 신분과 실력과 외모만 부지런히 봅니다. 멸망으로 향하는 사람들입니다.
③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의 권위
이곳이 알고 듣고 보고 살펴본 바로는, 지금까지 존재했던 설교 중에 최고의 설교라고 평가합니다. 루터나 칼빈의 설교, 또 스펄젼의 설교 등 교회역사에는 한 시대를 뒤흔들었던 유명한 설교가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더러 전해져옵니다.
물론 그 당시는 녹음 기록이 없어 그분들의 설교가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지 않고 메모식으로 노트되어 줄거리로만 내려오기 때문에 그분들의 설교 중에서 현재 남아서 전해지는 설교록을 백영희설교록과 바로 비교하는 것은 공평치 못할 것입니다. 그분들의 설교가 당시 설교했던 내용 그대로 다 전해진다면 몰라도, 현재까지 우리 교회가 가지고 있는 기록만을 가지고 비교한다면, 백목사님 설교록은 현 세계 교계가 가지고 있는 설교 중에 최고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녹음 때문에 최근 목회자들의 설교들은 수많은 경로를 통해 듣고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녹음시대라 할 수 있는 최근 목회자들 중에는 목회자라는 이름이 과연 붙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는 문제로 먼저 고민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곳 답변자의 개인 체험으로는, 백목사님 설교록 몇 십권만 제대로 살펴본다면, 세계 신학 전체를 한 손에 쥘 수 있는 길을 환하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곳에 들어오는 방문인들 중에도 더러 그런 세계를 체험하고 넘어셨다고 느껴지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그 설교록 몇 권만 제대로 살펴보았다면, 인생관과 세계관과 자기 가치관 전부를 완전히 바꾸어, 그야말로 완전히 변화된 심령의 세계를 자기가 직접 체험할 수 있으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허다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혹 그 설교 1주일치만 잘 살펴보았다면, 자기 평생 말씀에 대하여는 배고픈 줄 모르고 살 수 있는 양식으로 받았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20세기 마지막에, 교회가 인간적으로 기술적으로 행정적으로 배려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제거하고 오로지 말씀에만 붙들려 교회로 나올 수 있게 만든 분들이 가끔 있었습니다. 이곳이 아는 범위로는 1960년대에 돌아가신 김현봉목사님의 설교가 그러했다고 듣고 있으나 설교의 능력으로는 백목사님만 못했다는 것이 두 분을 함께 겪어본 분들의 증언입니다.
이곳은 같이 비교는 해보지 않았으나 그분의 설교필기를 다수 가지고 있어 잠깐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백목사님 설교차원에 이르지는 못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