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표준새번역’ 이라는 현대어 성경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200

주제별 정리      

                                   1. ‘표준새번역’ 이라는 현대어 성경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2…

서기 0 32

1. 질문 : ‘표준새번역’ 이라는 현대어 성경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200

개인 메일로 들어온 질문입니다. 많은 면으로 신중하게 또 명확하게 입장을 정리해야 될 중요한 질문이어서 관리자로서 질문자를 대신하여 문의를 합니다. 질문하신 분을 중심으로 답변을 합니다. 그러나 일반인을 고려하여 성경번역에 대한 총공회의 기본적, 원리적 신앙입장을 전반적으로 요약했습니다.


답변 : 또 다른 성경번역은 어떤 형태로든지 단호하게 비판합니다.

(한글 번역 성경을 개정 또는 개편하는 작업에 대하여)

번역이란 완전할 수 없습니다. 더 사실에 가깝게 표현한다면 정확한 번역이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질문 내용이 요12:27만 가지고 그 정확한 뜻을 원하는 경우가 있고, 요12:27을 예로 들어볼 때 여러 번역 성경 중에 어느 성경이 적당할지를 문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 번째가 문제라고 생각하고 요12:27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생략합니다.

1. 대표적인 4가지 번역 성경

현재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성경을 예로 들라고 한다면 ①개역성경 ②공동번역 ③표준새번역 ④개역개정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개역성경은 1911년 최초 번역되었고 1938년 전반적인 재검토가 있었습니다. 1952년과 1961년에는 해방된 우리나라에서 시행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따라 주로 표기법의 수정이 있었던 정도입니다. 내용상 번역으로는 62년째, 맞춤법 기준으로 수정한지 40년째 한국교회 전체가 사용해온 성경입니다.

두 번째 나온 성경은 천주교와 기독교가 동일한 기독교인데 교파만 다르다는 인식에서 성경부터 통일시키면서 장차 교단까지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취지가 있었고 그 첫 순서를 성경번역을 통일시켜 '공동번역'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천주교가 기독교의 한 교단이라고 생각하는 문익환목사님과 같은 이들이 기독교의 대표로 나섰던 정도이며 거의 대다수 교회들은 이를 거부하여 성경번역사에 이름으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나온 성경이 1993년 '표준새번역'이었고 이는 천주교를 배제하고 기독교 내부 각 교단들을 망라하여 번역한 성경입니다. 이 성경은 비록 천주교는 배제하였으나 기독교 교단 중에서 쉽게 말하면 '운동권'에 가까운 사상을 가진 분들이 주도를 하였고, 아직까지 한국교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보수측 교회들이 대규모로 극렬 반대를 하여 일부 자유주의 교회들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나온 성경이 1997년에 나온 '개역개정판'입니다. 지금까지 사용된 '개역'성경을 부분적으로 수정한 것이며 이는 보수측 입장을 대단히 고려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 역시 보수측에 해당되는 교회들부터 그렇게 많이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직까지 현실입니다.

2. 표준새번역을 비롯, 새로 시도되는 한글성경번역 사업 자체를 반대하는 이유

1) 현재 사용하는 '개역'성경을 번역한 분들 이상의 신앙을 기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① 성경번역은 언어능력이 아니라 신앙사상을 기준으로 번역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언어를 매개로 하기 때문에 그 언어 변천에 따라 재 번역 또는 개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라면 한도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어느 표현이 어느 정도의 문제를 가졌는지 그래서 어떤 표현으로 변경되어야 적절한 번역이 되겠는가 라는 문제는 100명의 학자가 100가지 학설을 제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번역이란 '언어적 실력'을 기준으로 번역자를 선정하여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수준 정도의 언어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 자체의 신앙성향을 보고 결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② 초기 선교 시절의 건전했던 신앙 환경보다 더 건전해질 여지는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1911년에는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의 번역이 완성되었고 1938년에 전면적 검토가 한번 더 이루어져 오늘까지 이르고 있는 '개역'성경을 집착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 당시는 어느 교파 어느 교회에 속했든지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된다는 말에는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1993년과 1997년에 제시된 '표준새번역'과 '개역개정판' 성경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교단이 없어졌고 그런 신학자가 없어진 때가 되었습니다. 100여년전 최초 성경을 번역하던 이들과 80여년이 지난 후 '표준새번역'을 번역하는 이들, 그리고 100여년이 된 '개역개정판' 성경을 번역하는 이들의 신앙은 비교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때는 건전했고 지금은 완전 타락을 했다고 표현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번역에 참가할 수 있는 번역진의 세속화는 더욱 가속될 것이기 때문에 현재 가진 '개역성경' 이상의 번역이 나올 수 없다는 성급한 예견을 하는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계의 대동단결과 평화공존에 대단히 반동적이고 편협된 의견이라는 비판을 직시하면서 주장합니다.

③ 신앙과 별개로, 신학자의 언어능력과 변천된 언어 환경을 지적하며 반발할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 성경은 그 번역 완간이 1911년이며 전반적인 재검토가 끝난 것은 1938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초 작업은 1900년에서 1930여년 사이였으니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의 원문 번역은 약 100여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 100여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초기 선교시대와 그들의 첫 번역을 두고 오늘 현대 신학자들은 미개했던 시절로 단정을 해버리며 또 현대 고등교육을 받는 모든 이들은 이를 수긍하고 있습니다. 오늘 1천명에 이르는 해외 신학박사 학위를 가진 한국교회는 일제 초기 말을 타고 다니며 서툰 한국말로 전도하던 초기 선교사들과 그들을 수종 들던 한학 공부 출신의 한복 차림 초기 교인들이 성경을 번역하고 교회를 개척하며 한국교회의 첫 돌을 놓던 시절을, 고맙게 회상하지만 그들의 번역 형편, 그들의 번역 능력, 그들의 번역 결과는 참으로 조잡하기 이를 데가 없다고들 단정을 하고 있습니다.

④ 인문 사회계열의 학문이란 이공의 발전과 반비례로 퇴락되는 자연계시를 제시합니다.

이공계와 인문사회계를 나누는 이유를 '정규 대학 출신자'라면 혹 이해할 분들이 생겨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공계에서는 100년을 기준으로 상상도 못할 발전이 있었던 것이 1600년대에서 1900년대까지였습니다. 이공계에서는 10년을 주기로 상상도 못할 발전이 있었던 것이 1900년대 중반까지였습니다. 지금은 그 주기가 제곱비례로 가속되며 하루를 단위로 구시대와 신시대의 기술이 자리를 바꾸는 때입니다. 이공계 범주의 학문에서는 1900년대 초반부를 구석기 시대로 생각하고 전부 박물관에 보존처리를 해버렸습니다.

인문사회계열이 문제입니다. 성경번역 문제는 신학의 범위이며 이는 이공계열이 아니라 인문사회 계열의 학문으로 예를 들고 또 참고를 할 수 있습니다. 수천년 전 소크라테스와 플라토 철학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비교될 철학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자와 맹자의 이론을 능가하는 동양철학 역시 수천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 필적할 철학이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당시 과학은 오늘 5세 유아 수준이며, 반대로 오늘의 철학은 당대에 비하여 5세 유아수준입니다. 정확히 정반대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정치학에 있어 '마케아벨리'는 미소 대결, 오늘 남북 해결에 이르기까지 교과서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돌고 돌아봐야 그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장 근접된 모습은 종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수천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불교와 유교, 또 이슬람교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국가들, 그 종족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생명과 평생을 마음껏 좌지우지하였던 고등철학들입니다. 이렇게 인류사 전체를 쥐고 흔든 종교라고 불리는 고등철학이 수천년 전 공자, 석가, 마호메트 등의 인물들에 의하여 전반적으로 구성이 되었는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인물들을 능가하는 깊은 철학 넓은 아이디어를 내어놓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공계의 발전에 따른 인간 두뇌의 황폐화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과학적 환경과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이 개선되어감에 따라 그런 심대한 철학은 그 출현 자체가 차단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공계열의 눈부신 발달은 '사고'하는 인간, 경험을 통해 재구성될 수 있는 '지혜'라는 영역을 해체해온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먹고살기에 좋으면 배고픔에서만 나올 수 있는 '처세술'이나 '뼈를 깎고 만든 철학'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⑤ 1,500년 전 어거스틴, 500년 칼빈, 그리고 오늘의 신학자들을 비교한다면

초기 성경을 번역했던 100년 신학자들은 그래도 그들의 제자라는 이름이라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들만은 못해도 그들을 쫓아 바로 살아보려는 노력과 중심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100년이 지난 현대의 신학자들은 그 노력과 그 중심의 최소한이 말살되었다고 해야 될 정도입니다. 너무 극단적인 말이라는 비판을 받겠지만, 각 신학교와 신학자의 감춰진 내용을 공개해버리면 그렇게까지 일반인이 모르는 세계가 있었느냐고 할 것입니다. 일반 교인들이 믿어 주지를 않을 것입니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일선 경찰서에는 종교계에 대한 평상적인 정보 수집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경찰서는 해당 지역의 예상 가능한 모든 종류의 치안 불안 요인을 사전에 파악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종교계 인사에 대하여도 여러 차원의 정보 파악은 필요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국가의 이런 행위를 다른 기독교 인사들과 달리 존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실무 담당자들에게 흔히 들을 수 있는 것이 '정치계 이상으로 종교계 지도자들도 썩지 않았느냐'는 그들의 실망, 결코 과장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은 기독교계 내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일수록 인정하는 바입니다. '이중국적'의 간교함, '학위취득'의 사기성, '교수보직'의 정치성, '경제축척'의 부패성에 해당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 명일 것인가? 신학자를 포함한 한국의 교계 신앙은 초기 번역 때의 신앙과 비교하여 최소한 비슷할 정도는 되어야 그다음 '언어 기술적 측면'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인데, 오늘 교계의 신앙과 앞날에 대한 전망은 새로운 번역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입니다.

100년 전 이 나라 초기 선교사와 한국인 초기 교인들이 가졌던 성경번역을 위한 모든 객관적 '장점'들은 100년 후 이 나라 기독교 전성기를 구가하는 1천여 신학자의 '장점'들을 다 모아도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여건들과 실상을 가졌습니다. 인문사회계열에 속한 학문의 특성만 알아도 이해가 될 문제이며, 더하여 '신학'이라는 종교적 사안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더구나 '신앙제일주의'라는 시각을 확정한다면,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100년 전 번역은 '성경다운 성경'으로 가질 있고, 오늘의 여러 가지 시도되는 성경은 '철없는 실험' 정도로 취급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단정입니다.

2) 이해집단의 의견을 절충하는 것이 모든 '평화통일'의 원칙입니다. 성경번역에는 독입니다.

① 세상만사, 인간이 하는 일은 결국 '협상을 통한 절충'일 수밖에 없습니다.

미개시절에는 힘 있는 쪽이 무력으로 밀고 나갈 수 있었습니다. 현 21세기 우리 현실은, 배율 차이는 있을지라도 통합에는 '협상을 통한 절충'이라는 과정을 피해 나갈 수 없는 사회 환경이 되어 있습니다. 옳고 그른 판단을 기준으로 중앙선을 긋고 나갈 수가 없습니다. 이 모서리는 감리교 몫으로 저 모서리는 장로교 몫으로 하다 못해 장애인을 배려하고 여성계까지 배려하며 성구의 표현 하나 하나를 다듬어 가는 것이 '성경번역'입니다.

무리한 통합보다 절충하는 배려가 보다 원만하며 그 장구성이 보장되는 것은 현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입니다. 이 원칙이 꼭 한 군데에는 들어가면 안 됩니다. 바로 신앙문제입니다. 성경번역만은 절대로 협상과 절충이란 단어가 존재해서 안 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한국교계가 공동으로 번역하는 작업은 볼 것도 없이 잘못된 것입니다. 협상과 절충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② 성경번역만은 '협상과 절충'이 완전히 배제되어야 합니다. 성경 번역사는 반대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원칙이 '신앙문제' 그것도 '성경번역'에까지 해당된 것은 참으로 기독교 말살 차원에서 살필 문제입니다. 현재 한국의 대주주가 되어 있는 장로교 보수교단들을 고려하며 성서공회는 비양심적인 처신을 해 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공동번역을 하는 것이 그들의 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공동번역을 접어두고 이번에는 '표준새번역'을 시도했습니다. 표준새번역에 대한 반발이 예상외로 너무 커지게 되니까 '개역개정판'이라는 카드를 다시 뽑아 나섰습니다.

성서공회의 기류는 아무리 양보를 하고 타협을 해도 표준새번역 정도 이상으로 양보할 수 없는 자유주의입니다. 그러나 표준새번역이 예상치 못한 역풍을 맞고, 자칫 독점체제로 내려왔던 성경번역 공인기관이 '성경공회'라는 경쟁체제로 갈 수 있는 위기감까지 느끼도록 되었고 그래서 '성경공회'라는 또 하나의 성경번역 기관을 출발시켰던 보수계 교단을 흡수하는 절충과 타협안으로 기존 '개역'성경을 수정 보완하는 정도에서 '개역개정판'을 내놓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성서공회의 본심은 현재 우리가 보는 '개역'보다 '개역개정판'이, 그보다는 '표준새번역'이, 그보다는 '공동번역' 성경이 장차 한국교회 전체를 위한 모델로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현재 한국교계가 초교파 행사 또는 초교파 기관을 가질 때마다 등장하는 코메디는 한 단체 안에 회장이 수십명, 부회장이 수십명, 총무가 수십명이 되는 것입니다. 옳고 그른 판단이 자리 잡을 곳이 없고 타협과 절충, 버무린 비빔밥만 통하는 교계의 교류현장은 '성경번역'이란 두려운 작업을 맡길 곳이 안 됩니다. 초기 성경번역 때도 여러 교파의 입장은 분명히 고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손에 잡혀 있는 현재의 '개역'정도라면 읽는 사람이 자신의 신앙입장에서 얼마든지 문제 있는 부분을 지적해가며 사용할 수 있는 정도이며, 오늘 교계에게 다시 한번 그 일을 맡긴다면 '그 족보가 의심스런 별종'이 나올 것입니다.

③ 종교와 종교를 버무려 '공동번역'이라는 성경을 만든 것이 성서공회였습니다.

성서공회가 전면적으로 개편했던 번역본이 '공동번역'이었습니다. 성경 번역을 천주교와 기독교가 합해서 했다면, 언어적 비평을 할 필요도 없이 '동화'로 취급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물 위를 걸었겠느냐는 신학자와 공자도 천국에 갔을 것이라는 신학자가 번역위원이 되어 번역을 했다면, 그 번역의 구구절절을 예로 들 필요도 없이 이는 틀렸다고 단정을 하고 싶습니다. 현재 성경 제일주의를 주창하는 몇몇 신학자와 교단들이 '표준새번역'이 언어적으로 또 신학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제시하는 부분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우리는 언어적 문제와 신학적 문제점은 큰 예를 한 두가지 정도로 들면서 참고하는 정도에서 그칩니다. 시간낭비라는 것이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천주교, 불교, 유교, 기독교가 합해서 단일 종교운동을 하여 인류 문명사에 이바지하자는 종교통일이 유행입니다. 불교가 진정한 불교라면 타 종교는 없애야 불교인의 양심입니다. 천주교가 참으로 천주교적이라면 다른 종교인은 화형으로 죽여야 합니다. 기독교가 참으로 기독교라면 이런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은 마땅히 인사도 하지 말아야 될 이단입니다. 그러나 그 종교지도자들은 이미 종교를 자신이 몸담았던 '수양'과 '지성의 안식처를 구하는 활동'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진정 그 종교가 출발에 가졌던 것처럼 '이 길만 천국이고 이 길을 벗어나는 것은 전부 지옥이다'는 교리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의 종교는 과학이 발전하여 종교의 본질을 분석해준 뒤에는 모두 자신들의 종교를 '신화적 교훈'으로 스스로들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만은 수양과 지성의 안식을 구하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자녀로 천국가는 잠깐의 세상으로 살고 있으며 이것이 참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그런 데 동참할 리가 없습니다. 이런 종교통일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표준새번역'에는 번역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현재 한국교회가 통일된 찬송가를 사용합니다. 그 찬송가도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예 사용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3) 절충된 성경조차 나올 수 없는 한국교계의 더 큰 병이 있습니다. 그렇게 배가 아픕니다.

① 진화론이 먼저 나서서 교회를 급격하게 '윤리조직'으로 만들었습니다.

초기 한국선교를 시작했던 장로교 감리교 등 여러 교파 선교사들은 천주교를 기독교로 취급도 하지 않았으며, 100년 전만 해도 각 교파는 그 강조하는 교훈이나 또 신앙의 방법론에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건전한 신앙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 분 하나님에 철저했고 성경이 정확무오한 말씀임에 철저했고 예수 믿는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단정했었습니다. 주일성수 등 여러 면에서 그러했기 때문에 교파는 많아도 성경번역에 있어서 별 다른 문제가 없었고 그들대로 있는 힘을 다해서 성경을 번역했던 것입니다.

그 후 급격한 과학발달로 성경이 과연 정확무오한 것이냐는 문제를 두고 교회는 급격히 분화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한쪽은 성경에 대한 정확무오를 확실히 믿었고 그런 쪽은 보수라고 하게 되며 그들은 신앙원칙주의에 철저하게 오늘까지 이어졌으며, 반대쪽은 성경은 좋은 말이 기록된 정도이며 정확무오라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세상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교양서' 로 인식하게 되면서 그런 쪽을 자유 또는 진보주의라고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진화론이 교회를 양쪽으로 갈라놓은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② 신사참배가 한국교회를 아주 진보주의 쪽으로 밀어 붙였습니다.

초기 선교시대가 교파에 상관없이 아주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분들이 거의 대다수였고 따라서 성경번역의 필요성, 성경말씀의 정확무오를 두려워하여 그 번역에 정확성과 신중성 등에 이견이 없었고 자연스럽게 성경은 성경 그대로의 번역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한국내 모든 교파들이 같은 '개역'성경을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비영리단체이며 동시에 어떤 한 교파에 소속되지 않는 '성서공회'라는 독립단체를 만들어 성경만 출판 보급하는 기관을 만들었습니다.

1938년, 몇 사람이 수고했던 초기 번역본을 두고 한국교회 전체가 20여년 사용하게 되면서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또 여러 각도에서 번역 미진이 지적되었고 이런 지적을 모아 1938년에 전반적인 재검토를 하게 되어 '개역'성경을 한국교회 전체가 인정하고 출간했으니 이는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교회는 전체적으로 건전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해 신사참배 문제가 생겨졌고, 교파를 망라해서 건전했던 한국교회는 극렬하게 반대를 했으며, 그래도 끝까지 신앙지조를 지킨 교회는 극소수이며 마침내 일제 정책에 순응하게 된 교회는 대부분입니다. 신앙지조를 끝까지 지킨 교회는 이전부터 지켜오던 신앙을 그대로 가지게 되면서 해방이 되었고, 신앙지조를 굽힌 대다수 교회들은 그들의 처음 신앙모습과는 다른 형태로 해방 이후의 행적을 가지게 됩니다.

신사참배를 했던 대부분의 교회들, 그들이 해방을 맞이했고 이제 신앙의 자유를 완전히 되찾았기 때문에 이전 건전했던 신앙으로 돌아오면 될 것인데, 그들의 입에서는 회개하고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논리는 거의 없었고, 신사참배 했던 것이 그렇게 크게 잘못된 것이냐는 반문이 있었고, 또 그런 자신들의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을 대단히 넓게 해석하면서 급격하게 자유주의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꼭 성경을 그렇게 다 믿어야 되며 꼭 이스라엘 민족이 주창한 이스라엘 제 하나님만 믿어야 되느냐는 사상을 깔고 모든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사참배란 그리 큰 죄가 될 것도 없고 또 이렇게 눈을 달리 뜨고 보니까 주일도 휴일의 개념이 되고 모든 신앙생활이 건전한 윤리생활로 전환되면서 예수 믿는 것은 사회 개량 사업에 사용될 여러 방법론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현재 모든 시민운동의 무게 중심에 자유주의 기독교가 자리를 잡게 된 연유입니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반 독재 투쟁을 극렬하게 했던 요체였습니다.

③ 진보주의로 나가는 교회들의 자기 모순

교회가 천국을 잊어버리고 이 세상 사회 개량화를 주업으로 삼게 되는 일을 교회의 자유주의화, 또는 교회의 진보주의화라고 합니다. 약간 다른 면이 되겠지만, 군사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투쟁에는 목숨을 걸고 고문을 견디던 그들인데 하나님을 바꾸고 신앙을 바꾸는 신사참배 사건이 닥쳤을 때에는 민족마다 개인마다 가지는 여러 형태의 신앙방법들이 다를 수 있으니 이스라엘제 방법론을 일본식 방법론으로 한번 바꾼 것이 무슨 큰 죄라고 옭아대느냐? 는 대담한 발상을 가졌던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미국식 민주주의도 있지만 한국민 특수 사정에 해당될 한국적 민주주의도 있다는 박대통령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할 수 있을 터인데 이 문제에는 '민주주의 앞에는 어떤 수식어라도 붙으면 사이비'라고 그렇게 난리들을 쳤을까? 그것도 교회가 앞장을 서고 배후에 서면서, 그것도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한신대 조상들과 그 후손들이. 신사참배에 일제식 예수로 변경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정치에는 원조 민주주의만을 고집한다는 것도 우습지만, 군사정권에 대항할 때는 서양식 원조 민주주의로 대항해놓고 군사정권이 민간정부로 움직이고 나니까 이번에는 북한식 수정 공산주의, 또는 고구려중심 한반도 제일주의 정치를 목표로 나가고 있습니다. 지난 100년의 세월, 숫적으로 대세에 해당되는 한국교계의 움직임은 이름만이 아니라 족보인 성씨까지를 바꾼 것이 몇 번인지.

④ 한국교회의 교권은 보수측, 대세는 자유주의입니다. 성서..공회는 대세를 따릅니다.

신앙인지 도덕인지, 신앙인지 정치인지, 신앙인지 이웃돕기 운동인지 혼동될 교회를 오늘에 평가한다면 수적으로는 한국교회의 다수가 되어 있고 지적으로는 많이 배운 유식자 지성인일수록 그러하며 출신으로는 경남 부산 지방 남쪽 일부만 빼놓고는 전국이 다 그러합니다. 해방직후 이런 윤리적 기독교가 한국교회의 사상적 대세를 휩쓸면서 동시에 외부로는 교단의 분열이 극심하게 일어나게 됩니다. 이 와중에서 '성서공회' 주도세력이 자유주의 신앙으로 그 색채를 급격히 바꾸었으나 초교파 단체이기 때문에 또 기존 성경을 그대로 출판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수교단들은 세력 확장에 절대적인 현장 교회들을 장악하는데만 바빴습니다.

보수적 신앙색채와 전 교파적 인식이 하나 되었을 때는 성서공회가 비록 초교파 단체이지만 아무 일을 벌이지 못했습니다. 한국교계 전부가 시어머니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한국교단 전체가 그 실상이 파악도 될 수 없을 정도로 분열되어 한국교회의 주도와 주체를 파악하기도 힘든 상태가 되고 보니까 초교파단체였던 성서공회는 부모 없는 아이처럼 간섭이 없었고 그 운영진의 색채를 기준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첫 작품이 '공동번역'이었습니다. 그들의 신학이 천주교와 하나 될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성경번역을 통해 한국교회를 통째로 움직여 보는 시도를 한 것입니다.

성경의 지나친 구식표현, 천지개벽으로 바뀐 해방 후 한국사회상, 생각도 못했던 한국교회의 자유주의 태동과 그 상승분위기....이런 유리한 환경에다 공동번역의 현대식 표현은 아직도 보수에 강박관념을 가진 한국교회 전체를 완전히 자유주의로 덧칠할 기회로 보았던 것입니다. 천주교와 기독교계의 통일운동이라는 거창한 이름, 통일이라는 구호가 안 통하는 곳은 없으니까 시도했던 것인데, 결과적으로 이 작업은 완전히 실패해 버렸습니다. 아주 극단적인 자유주의 교회 일부분만 사용하는 성경이 된 것입니다.

⑤ 새 번역본들이 실패한 것은, 성서공회의 서툰 솜씨보다 한국교회의 극단적 분열입니다.

공동번역의 '번역오류' 때문이 아니라 '번역진'에 우리 파 우리 학자가 참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 특유의 배가 아픈 병이 도졌던 것입니다. 더하여 교파간 싸움이 극단적으로 나간 상황은 성서공회가 독자적으로 일을 벌리도록 환경을 제공하였지만 동시에 그 싸움은 교파간 누가 정통이냐는 보수간판 전쟁의 양상이었으니 천주교와 공동번역이라는 사안은 어느 교파에서나 매 맞기 좋은 '화풀이감'이었습니다. 성서공회가 한국교파싸움의 본질을 잘못 파악했던 대표적 실패사례가 되었던 것입니다.

성서공회의 전략은 다시 한번 장기적 관점에서 그 입장을 수정하게 됩니다. 천주교와 함께 만든 성경은 미래 어느 시점에서 다시 재론될 때가 있다는 것이 세상역사의 상식이니 그때를 위해 미리 투자해 본 것으로 치고, 일단 한국 기독교 내부만을 위해 통일된 개정 번역을 시도하게 된 것이 '표준새번역'입니다. 표준새번역의 취지는 천주교와 공동으로 번역했던 '공동번역'에서 천주교 입장만을 배제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계 내부만으로 통일된 성경을 만드는 것도 한국교계의 성질상 대단히 합의도출이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10여년 준비기간을 거쳐 교단을 망라하여 대표적 학자들을 초빙하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새번역성경'이니, 한국교계는 '새번역성경'에 대하여 반대할 아무 명분도 또 이유도 찾을 수 없는 정도였습니다.

이것마저도 일부 교단의 누락된 학자들이 자기 전공분야에 자기가 빠진 화풀이로 '표준새번역'을 난도질하고 나섰습니다. 어느 학자가 번역진에서 빠지게 되면 새번역성경이 한국교계에서 차지할 비중과 그 번역진에 포함되지 못했다는 권위상실 문제로 해당 학자는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립니다. 새번역이 자유주의 주도로 잘못된 번역이라고 마구 난타를 하고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런 사람들을 다 포섭키 위해 관련 전공 학자 전부를 포함시킨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표를 세울 수 밖에 없는 것이며 대표로 선임된 쪽은 자기가 한 것이라 새번역이 자유주의 색채가 지나친 데도 번역이 잘 된 것이라고 얼버무리고 말아버립니다. 반대로 더 자유주의가 짙은 교단인데도 자기가 번역진에서 누락이 되면 너무 자유주의 색채로 번역이 되었다고 시비를 걸어오게 되니까 성서공회로서는 하고 싶어도 제대로 못하는 일이 바로 성경번역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인간이 시비를 걸고 잘잘못을 따지는데 하물며 성서공회가 하는 일을 글만 읽는 학자들이 말로서 시비를 걸고 나온다면 걸리지 않을 리가 없겠지요? 그 비판하는 사람보고 번역을 하라 하고 이번에는 비판 받은 사람보고 비판을 해보라고 하면 더 많은 비판이 나올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표준새번역'도 '공동번역'에 못지않게 반대합니다. 반대하는 구체적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백영희목사님 체질의 신앙이 아니라면 공동번역은 몰라도 '표준새번역'까지 욕을 하고 나서는 것은 한국교계 전부를 포함해서 '번역상 이유'보다 '정치적 이권' 때문에 반대를 위해 반대한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고신교파까지 포함이 된 '표준새번역'을 자유주의라고 욕한다면 말이 성립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4) 새 번역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경말씀'은 변화된 언어 환경을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① 성경이 정확무오가 아니라면, 번역을 두고 그렇게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진화론이 나온 뒤 성경은 교회 안에서 신학자들로부터 정확무오를 해제 당했습니다. 교회사는 그들을 과학적 증명의 범위 안에서 믿는 사람들이라 자유주의 진보주의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불신자라고 불러버립니다. 신자라면 탕자가 된 사람이라고 취급합니다.

성경 원본이 정확무오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성경 번역을 두고는 느긋하게 양보하고 타협하며 이 교파의 교리를 잘게 썰고 저 교파의 교리를 둘둘 감아 여러 사람의 여러 의견을 버무린 다음, 마지막 성서공회 직인과 한국교계의 통일된 의견이라는 드레싱을 발라버리면 좋은 샐러드 번역 성경이 됩니다.

성경도 사람이 적다보니까 불경처럼 유교경전처럼 시대 따라 틀린 데가 많고 성경내용들이 세월에 따라 진화도 되고 그럴 것 같으면 성경번역을 두고 이렇게 장문을 적고 있는 사람이 정신 나간 사람일 것입니다. 성경의 정확무오성은 기독교계가 다 받아들였던 교리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지난 날 잘 알지 못하고 미개했던 고로 잘못 알았다면서 전부들 취소를 하고 있습니다. 그 취소하는 숫자가 나날이 늘어나고 폭증을 하여, 지금은 성경을 정확무오라고 알고 있는 숫자는 희귀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와 같이 오늘도 성경은 정확무오라는 입장이 견지되고, 오히려 이런 확신이 갈수록 더 강해지게 만드는 것이 백목사님의 교훈입니다. 이 교훈 선상에서 이글은 진행되는 것입니다.

② 성경은 정확무오입니다. 그런데 정확무오가 없는 번역을 동시에 명령했습니다.

성경이 정확무오하다면, 그 성경이 다른 나라 말로 번역이 되는 것은 필연입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복음으로 주셨고 복음은 모든 민족 땅 끝까지 전할 내용이라면, 그렇다면 전하는 사람이 외국어를 배우던 배우는 사람이 원어를 배우던 성경 번역은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번역이란 정확무오가 없습니다. 정확무오가 있을 수가 없는 '번역'을 이방인에게 주시고 모국어를 하는 이들에게 '정확무오'를 주셨다면 이는 구원의 차별이겠습니다. 하나님이 차별하신다면 우리는 이를 감사히 받는 신앙일 뿐입니다. 그러나 차별하지 않으심을 보여주셨으니,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 강림에서 인간으로서는 넘어갈 수 없는 '번역'의 벽을 성령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번역할 때 번역할 사람들이 오순절 방언의 능력을 다 받아야 하고 그 결과로 번역된 번역본들은 정확무오한 '번역본'이라야 되는가?

③ 원본의 정확무오도 성령으로 깨닫게 하지 않으면 전부가 틀린 말로만 들립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정확무오한 성경이 없어 정확무오하게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까?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스라엘에게 모세가 기록해준 성경에 틀린 곳이 많아 그들이 바로 깨닫지 못했습니까? 마태복음 원본성경에 헬라어 원어로 기록된 내용 중에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준비하라 하신 '검'을 원어로 잘 알아듣는 제자였습니다.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고 했고 주님은 '족하다'고 했습니다. 갈릴리 출신이라 사투리까지도 이해를 하는 완벽한 언어소통자였습니다. 그러나 말고의 귀를 잘랐을 때, 주님은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하리라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검'이라는 말씀을 실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검을 내어놓는 베드로는 그 당시로는 '검'을 알아 들을 성령의 사람이 되지를 못했으나, 돌이킨 후에야 성령으로 그때 검이 그 검이 아님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원본을 보고 원본의 내용을 잘못 깨닫는 사람들이 원본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아예 원본 성경을 역사 교회에게 주지를 않으시고 다 없애버렸습니다. 사본성경은 오류를 전제로 한 성경입니다. 역사 교회는 정확무오한 성경을 가지지 못해서 바른 구원을 이루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원본을 제거하시고 사본만 남겨두심은 그 사본을 성령으로 읽는 사람들에게는 사본의 오류를 찾을 수 있도록 그 오류 때문에 자기들에게 이룰 구원에 지장이 되지 않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먼저 선포하시고 그다음 그 내용을 가지고 심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라는 속성과, '계약성' 섭리 역사를 두고 그렇게 단정을 하는 것입니다.

원본 자체가 없어진 역사교회는 비록 모국어를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성령으로가 아니면 원본의 정확무오에 접근할 수 없도록 되었습니다. 사본의 오류에 성령으로 깨달으면 사본의 오류를 초월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사본이 번역된 번역성경은 그 내용의 정확도가 사본원어 성경에 비할 바 없이 부족하지만, 얼마든지 양심을 기우려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따라 나서면 번역성경의 오류를 초월하고 넘어설 수 있고 따라서 성경이 인도하는 정확무오한 신앙 길을 따라 갈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 성경이라는 교리를 확실히 붙들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주장입니다.

④ 실은 언어변천에 상관이 없는 유일한 번역이 바로 '성경번역'입니다.

성경이란 한번 적혀져서 인간에게 넘겨지면 그다음에는 수정과 개정이라는 작업이 해당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변화된 언어 환경을 가진 다음 시대 교인들에게는 혼란이 되지 않겠습니까? 성경을 대할 때 만큼은 모든 것을 성경에 맞추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적힌 글도 그러하고 성경에 있는 제도와 사상도 그러합니다. 인간이 인간적으로는 대해봐야 성경이 성경으로 보이지를 않습니다. 계시록과 다니엘 에스겔서는 노스트라무스가 저술할 수 있는 수준의 책이며 시편 잠언 전도서는 중국의 명심보감에도 있는 것이며 창세기로부터 역대하까지는 각국의 상고사와 중세사 정도의 역사서에 흔한 수준입니다. 4복음서 등 신약은 불교계에 내려오는 불경과 저자만 다른 것입니다.

성경은 원본에 손댈 수 없고 원본에 언어를 맞추어야 할 유일한 '서적'입니다. 원어로 된 헬라어와 히브리어는 2천년에서 3천5백년전에 쓰여진 그 상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그 원어들의 현대적 사용은 완전히 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2-3천5백년 전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지 바꾸지를 않고 있습니다. 번역본은 시대마다 언어변천을 따라야 한다는데 그 발상 자체가 완전히 틀렸습니다.

⑤ 성경번역 문제만 나오면 '원어학자'들의 세계가 됩니다. 대단한 오해이며 오만입니다.

원어로 기록한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의 원어는 결코 무시하지 않습니다. 대단히 존중하며 그 원어로 기록한 뜻을 알고 싶어 있는 노력을 기우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원어환경을 가진 사람이라고 원어성경을 바로 볼 수 있는지?

한글로 된 한글 시를 한국인이 아니라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12년 간 매일 국어공부를 하고 또 국어 시험을 칩니까? 대학교 국문과를 4년간 전공하는 것은 국어가 모국어가 아니라 그렇습니까? 더구나 2천년 전 한국 언어를 완벽한 상태로 우리가 가질 있다면 그 언어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2천년 전 언어 환경을 구성한 그 시대 사회로 돌아가지 않으면 유물로 남은 파편으로 추론할 뿐, 그 의미를 그렇게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를 보세요'를 줄이면 '여봐라'입니다. 100년 환경과 오늘 환경에 이 말들은 아주 다른 의미들이 됩니다. '여기를 보세요'를 더 줄이면 '여보'가 됩니다. 이 여보라는 단어는 여기를 보세요를 줄임말이라고 국어 언어학자들이 언어 기술상 유권해석을 한다고 치더라도 부부간에 부르는 '여보'의 뜻은 전혀 다릅니다.

이상의 시가 한글인데 한글로 된 이상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는 한국사람이 없다면, 이상보다 더 높은 차원의 하나님께서 적어놓은 원본성경의 원어 뜻을 어학적 입장에서 접근하려는 발상은 비신앙적 신학을 만들고야 맙니다. 이것이 백목사님이 신학의 근본 터라고 여겨지는 원어를 거의 개의치 않으시고 평생을 번역된 '개역 한글성경' 한권에 집중하고 오신 이유입니다. 그에게는 모든 언어환경적으로 볼 때 불가능이라 할 수 있는 수준의 '전무식한 분'이었으나 원어로 통달하고 내려온 2천년 교회 교리와 성경 해석을 그 초월한 차원에서 자유롭게 진리 안에 자신을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⑥ 우리가 가진 오류 있는 번역본, 여기에 저자이신 성령을 모시는 길만이 우리의 길입니다.

성경은 그 저자가 성령이십니다. 성령이 기록하신 성경임은 상식이라 생각하고, 그렇다면 번역이라는 필연적인 오류를 아시는 하나님, 알면서도 번역으로 우리에게 성경을 전하신 하나님의 뜻은, 정확무오한 원문을 주지 않으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이 저자이며 저자이신 성령을 찾는 사람, 성령에 감화를 많이 가진 사람이라면 오류가 있는 번역본에서 원문을 찾아 나설 수 있을 것이고,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실감하고 성령으로 살지 않은 사람이라면 비록 원본성경을 쥐어줘도 그에게는 원본이 원본으로 보여지고 들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따지고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이라 더 유리할 것도 없고 외국어로 원어를 접해야 하는 우리라고 조금도 불리할 것이 없으며, 오직 성령의 사람으로 사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 성령의 감동이면 그 어떤 길이라도 순점8로 따를 수 있는 사람이라야 성경에 정통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⑦ 이러므로, 새로운 번역의 시도를 전면 반대하는 것입니다.

원어학이 위주가 되고 신학 학위의 권위가 번역의 주체가 되는 것이 오늘의 번역현장입니다. 그 사람이 성령으로 사는 성령의 사람인지 여부는 가릴 수도 없고 가려야 한다는 생각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냄새도 없습니다. 성령은 없고 학자만 모였으며, 성령의 음성 영감은 없고 원어만 남아 있는 곳, 그곳에서 비록 원본성경을 발굴하고 재현하더라도 그들에게는 그 원본이 없어져야 할 이상한 서류로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글들이 조각조각 났던 것은 그 시대에만 특수하게 있던 일이 아닙니다.

새로운 번역을 시도하는 것보다 비교적, 또 우리 현실에서는 가장 기대 가능한 범위에서 번역했던 것이 현재 우리가 가진 '번역본'입니다. 이 정도에서 '번역한글'은 고정을 시켜 놓고 그다음 부분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가르치고 알리면 되는 일입니다. '낙타'를 '약대'라고 번역되어 요즘 청년들이 무슨 말인지를 모른다면 '낙타=약대'라고 한 마디 하면 될 것 아닙니까? 성경의 언어는 비록 사본일찌라도 2천년에서 3천5백년 이전에 적힌 그 원어 그 단어 그대로만 배껴 적지 변화된 언어 환경을 이유로 사본을 배껴 적으면서 변화된 단어로 교체하는 일이 없습니다. 번역이야 원어 사본작업에 비할 수는 없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3천 5백년 전 언어환경에서 만들어진 성경 원어를 오늘 시대에 맞게끔 성경 본문을 고쳐 현대인에게 편리성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읽는 이들이 3천 5백년 전에 기록된 글인 줄 알고 있으니까 그 면을 알고 그다음 읽으면 되는 것입니다.

⑧ 세상도 '5-60년 된 가사'들을 그대로 부르고 있습니다.

애국가의 '보우하사'라는 단어는 애국가 외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사어입니다. 그렇다고 애국가는 국가적 권위를 생각해서 그 단어를 유행가 변하듯 변경시키지는 않습니다. 3.1독립선언문을 그대로 읽어보면 그 맛이 있습니다. 성경은 늘상 우리에게 쉬임없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사용되고 있는 성경이기 때문에 '약대=낙타'로 되는 것이 그리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 정도 수고도 하기 싫어 세상 썩은 모든 지식은 대용량 슈퍼컴퓨터를 동원해서 저장하고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 입에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는 잠언 26:15이 해당되어서야, 그런 정성이라면 성령이 오지도 않을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순종에 투자했을 때 비로소 움직이십니다.

⑨ 시와 그림을 일반인이 알기 쉽도록 손을 댄다면,

일반인에게 교육을 시키고 이해를 시켜 문학인 시와 예술인 그림을 접하게 합니다. 만일 수준급에 시와 그림을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한다면서 설명문으로 시를 바꾸어 쓰고, 피카소의 그림에다 한국 화가들이 덧칠을 몇 군데 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도록 하는 일이 과연 있을 수 있겠습니까?

쉽게 이해가 되도록 하여 그 뜻이 다 전달되었다 해도 이미 그 시는 시가 아니고 그 그림은 예술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원문과 원상을 손대지 않는 것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시나 예술에 한결같이 다 고상한 차원을 가진 이들이며 그들이 시나 예술은 손 하나 대서도 안 된다며 하는 사람들이며, 또 그렇게 손대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인간 취급도 하지 않는 지성인들입니다. 대단한 모순입니다. 인간이 도토리 키 재기로 높여 놓은 수준은 있는 그대로를 감상하라고 하고 하나님이 정확무오로 주신 말씀은 인간 키에 맞춰 분해 조립을 새로하여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보잉747 최신형 여객기를 선물 받은 포장마차 장사꾼이 여객기 여기저기를 뜯어내어 최고급 포장마차를 몇 개 만들었다면 그들 세계에서는 대단히 부러움을 사겠지요. 그 여객기를 그 여객기 원래의 용도대로 사용한다면 그 사람은 영어를 배우고 조종사 면허증을 따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런 세계는 먼 훗날일 것이며 또 특수한 몇 사람에게 해당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선 포장마차 장사들만 모여 있는 자기 사회에서는 그 여객기 몸체 여기저기에서 뜯어낸 좋은 재질의 재료로 초일류 포장마차를 만드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변화되는 인간사회에 변동 없는 성경을 변동시켜 인간에 맞게끔 화장을 고쳐 새로 내놓았으니 인기는 대단히 좋을 것입니다. 죄악의 낙일 것이며 악습에 익숙한 사람들의 입맛에는 맞기 때문에 호응도는 시간만 지나면 분명 좋아질 것입니다만 그 대신 성경 이름만 남고 그 내용은 성경이 아니겠지요?

3. 총공회 교단 내부에서조차 이미 '성경번역의 필요성'을 반대할 사람은 없습니다.

무작정 반대하고 나설 이들은 더러 있습니다. 한글성경이 정확무오한 바로 그 성경인 줄로 아는 정도의 교인들도 더러 있습니다. 보수신앙 계열에서 나타나는 아쉬운 면들입니다. 번역성경의 개정이 필요하다는 신학사상을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번역성경에 대한 신학적 문제점을 정확히 그리고 낱낱이 알고 있는 학자들입니다. 그들이 그 신학지식으로 성경번역을 반대하고 나서야 그들 속에 들어있는 신학이 비로소 산 신학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온 신앙노선의 성격상 그렇다는 말입니다.

앞으로 찬송가가 통일되듯이 성경이 만일, 한국 교계적 지지를 받으며 단일 번역본을 배출시킨다면 성서공회는 즉각 기존 한글 성경을 찬송가 통일 때 했던 것처럼 그 저작권을 근거로 회수할 것입니다. 다행히 성경 번역이 여러갈래로 찢겨지고 나뉘어지면 그 틈에 우리같이 '기존 개역성경 보관' 주장자들이 현재 성경을 좀 더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환경을 우리에게 주실런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이미 성경번역을 두고 성서공회가 '표준새번역'으로 또 '개역개정판'번역으로 교계를 좌우로 한번씩 흔들었고 그 파동에 넘어가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예사로 보이지 않습니다.

성서공회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표준새번역'을 발간했을 때, 기독지혜사라는 주석성경으로 유명한 출판사가 판권 등 여러 영업적 문제점을 간파하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맞설 수 있는 보수측 교단을 결집하여 기존의 '성서공회'를 필적하는 '성경공회'가 결성이 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서공회의 '표준새번역'을 아주 반대하는 쪽입니다. 그러나 그 표준새번역의 문제점 때문에 보수교단들이 일시적 충동과 감정으로 또 성서공회가 독주하는 것이 못 마땅한 분들이 일거에 힘을 합해 현재까지 보던 '개역'을 수정한 '보수측 개역보완판 성경'을 내어놓았다는 것은 또 하나의 반동적 폐단이라고 봅니다. 성서공회가 성급했고 서툴렀다면 그 반동의 산물인 '성경공회'는 '급조'라고 해야겠고 '성깔'이라고 해야 될 정도로 성경에 손을 대고 말았습니다.

오류가 있는 현재의 '개역성경', 오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조심하고 더 정확한 뜻은 이 정도 성경이라면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그 정확한 말씀에게 나아가는 것이 지혜롭다고 보며, 오류가 있는 성경에 '오류'를 주시하여 그 '오류'를 바로 잡는다고 나서는 이들이 있다면 결코 더 큰 오류를 만들어 신앙의 근본을 다 흔들어 놓으리라 보며, 그것은 표준새번역이던 성서공회에 반발하는 성경공회 보수교단의 새로운 번역이던 결과는 같으리라고 봅니다.

마지막 한 마디 안타깝게 덧붙일 말씀은, 이 모든 번역에는 교계를 다 삼킨 무서운 적,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돈'이 '학자들의 명예욕심'과 함께 번역성경 사업에 관련된 광범위한 사건들에 길목마다 지키고 서서 번역관련 결정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