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원어의 필요성 문의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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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원어의 필요성 문의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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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질문 : 원어의 필요성 문의 252

성경 번역과 원어와 관련된 내용인데요. 전부터 귀 홈페이지를 보면서 느낀 것 중에 하나입니다. 귀 홈페이지를 자세히 보면 내용들은 대단히 성경적이고 깊은 교리임에 틀림없는데 성경 해석에 필수적으로 되어 있는 원어에 대한 근거가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위의 질문과 관련하여 읽어본 내용에도 성경 번역과 원어의 관계를 언급했지만 지엽적인 것 같고 여전히 의문이 남게 됩니다. 특히 요한복음 21장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을 물으셨는데 세 번 다 그 원어가 각각 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영이나 영혼, 마음, 육체와 육신 같은 단어들은 성경을 번역하는 학자들에 따라서 대용 또는 혼용되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원어를 모르고는 해석이 어려운데 그것을 원어 근거 없이 확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원어만으로 성경 해석의 전 근거를 삼는 것은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원어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도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각도에서 본다면 총공회에서도 성경 해석에 원어는 필요하고 보는데?




답변 : 원어와 성경번역

원어는 대단히 필요하나 없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1. 성경을 다른 민족의 다른 언어로 번역하게 명령했고, 그 번역의 정확성을 담보했습니다.

① 번역이란 정확할 수가 없는 것이 본질입니다.

번역이란 정확할 수 없는 것은 상식입니다. 이를 언어적으로 비교 설명하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일입니다. 여기서는 창11:1-9 본문을 소개합니다.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그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고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습니다.

같은 언어를 가져도 흩어져 살게 되면 그 언어는 아주 달라져 버립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언어의 혼잡을 인간이 번역이라는 기술을 개발하여 바벨탑 이전과 같이 단일 의사소통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은 될 수 없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구약과 신약조차 다른 언어로 기록하였으니, 신약을 기록한 헬라어가 모국어인 사람은 신약만 정확하게 알 수 있고, 구약을 기록한 히브리어가 모국어인 사람은 신약조차도 번역으로 전달받아야 합니다.

② 그러나 성경은 번역을 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인간의 언어 혼잡을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일을 위해 세상 끝날까지 이 일을 하는 사람과 항상 함께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마28:18-20의 말씀입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것이 행1:8의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을 따라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은 모든 족속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는 그리스-로마가 그 지역 일대를 이어가면서 다 점령했었고 따라서 단일 문화 단일 언어가 통용되던 때라고 강변할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자기 나라에 살면서도 자기 나라 언어 해득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리스-로마가 당시 그 지역 전체를 통괄했다고 하지만 히브리어 구약성경이 헬라어로 번역이 된다 해도 정확할 수가 없거니와 그렇게 되었다 해도 식민지 사람들이란 자기 언어의 사용과 침략언어를 사용하는 데에는 늘 큰 간격이 있게 되며, 이런 간격을 크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 실은 절대 다수에 해당되는 것이 상식입니다.

땅 끝까지 전할 복음, 모든 족속 모든 언어에게 전달할 복음으로 우리는 성경을 받았습니다. 그 성경은 전부 번역본으로 전달받고 오늘까지 교회들이 내려 왔습니다. 물론 극소수 특수한 신학자들은 원어를 자유롭게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실은 착각입니다. 모국어가 아닌 사람은 외국어를 학습에 의하여 모국어로 가질 수는 없습니다. 원어에 능통한 신학자는 그 원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자기 두뇌 속에 원어를 자기 언어로 번역하는 기능이 생겨지게 되었고 이 기능이 대단히 탁월하게 작동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원어에 능통하여 번역 성경을 볼 필요가 없는 극소수 몇몇 신학자는 머리 속에 내장 시킨 번역기능을 이용하는 것이며 이것이 밖으로 표시가 나지 않으니까 원어를 원어로 이해한다고 다른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며, 일반 대다수의 사람들은 눈으로 보이는 번역본을 보기 때문에 번역 성경이 아니면 성경을 접하지 못한다고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은, 모국어로 원어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원어에 능통하던 불통하던 '번역'이라는 아답타를 통하지 않고는 성경에 접근할 수가 없으며, 따라서 땅 끝까지 이르러 이 복음을 받을 천하의 교회는 번역으로만 성경을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③ 그 번역의 정확성을 담보했습니다.

우리는 ①번과 ②번에서 번역은 정확할 수 없고, 모든 신약 교회는 번역을 통해서 복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단정했습니다. 그렇다면 땅 끝까지 이 복음을 전하고 또 그 말씀을 다 지켜 행하는 사람을 만들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명령은 원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 외에는 정확무오한 성경이 아닌 오류의 번역만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라고 하신 것일까, 아니면 오류가 있는 번역과 통역만을 상대해야 하는 모든 신약교회에게 정확무오한 성경 내용을 알도록 그 '정확성을 담보'하는 또 다른 길을 주셨을까?

정답은 번역의 오류를 초월하여 원어성경의 바른 뜻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들을 주셨습니다. 원어성경 중에서도 원본성경을 없애버린 것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원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일지라도 원본성경을 가지지 않았고 사본성경에서 원본성경의 내용을 찾아야 합니다. 인간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성령으로만 되는 일입니다. 원본이 없는 상태에서 사본성경만으로 정확무오라는 절대치 기준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모국어 사본성경은 모국어 원본성경을 정확무오하게 복구할 수 없다고 단정합니다. 그것이 가능한 길이 있다면 인간 노력 언어적 기술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습니다. 성령으로만 된 것입니다. 바로 그 능력 그 성령이라면 번역 성경의 오류에 지장됨이 없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번역 성경의 오류는 원어해득이라는 언어적 기술 접근으로는 해결될 수 없고, 성경을 기록한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해결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이며 신앙이라는 시각입니다.

2. 성경 원어는 어학적 습득에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영감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① 원어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원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이라면 원어성경을 바로 깨닫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도 틀렸습니다. 사도요한은 계시록 5장에서 원어로 된 성경이 어린 양 예수님이 떼어 일일이 보여주지 않으면 원어민인 요한부터도 읽을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성경을 읽은 적이 없었겠습니까? 인간의 원어능력의 유무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기록한 것입니다.

더구나 외국인이 원어습득을 열심히 하면 번역의 오류를 넘어 설 수 있다는 것도 착각이었습니다. 그가 반복한 원어습득 과정에서 그의 두뇌에는 숙련된 번역기능이 생겨졌고 이 기능은 번역된 글자의 도움 없이 두뇌 안에서 순간적으로 번역처리가 되는데 이것이 원어를 원어로 바로 보고 이해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번역이라는 과정 없이는 다른 모국어로 넘어가는 일이 없다는 면만 말하고 있습니다.

② 원어는 이미 기록되던 환경이 없어졌고 원어 이해는 이미 불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설사 원어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원어민과 같이 되어졌다 해도, 2천년에서 3천 5백여년 전에 기록된 당시의 원어는 이미 현대의 원어와는 다른 언어입니다. 물론 원어에 능숙하도록 수고했던 원어 숙련가 원어 학자들의 반론이 많겠지만 성경은 성경 전체로 일차 접근하는 것이 인간적 노력이며, 그다음은 성령의 감동으로만 결말 되는 것이어서 원어적 노력은 성경 깨달음에 유익하게 게재될 공간이 실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을 아는 분들은 당시의 언어 환경을 이해하는 것이 선결과제라면, 성경고고학을 동시에 동원하지만 성경은 성경고고학에서 깨달아질 필요가 없이 성경만으로 늘 깨달아질 수 있는 범위가 정해져 있습니다. 세상 학문을 따라가는 신학의 피곤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는 탄식을 하게 되는 것이 '원어공부' '성경고고학' 두 가지가 신학의 출발을 이루고 있다는 현실 신학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③ 원어환경을 가졌다 해도 성경이해는 성령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원어환경을 다 알았다고 해도 성경은 성령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원어란 무용지물인가? 원어습득이 전지전능이 아님을 알고 오히려 전지전능의 하나님께 붙들려 오류 많은 번역 성경이라도 가져야 될 각 민족과 언어사용자들을 위해서 원어에 대한 달란트를 받은 분들이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충성'한다는 자세로 임한다면, 그에게는 그가 번역한 성경을 읽는 모든 이에게 이 복음을 전한 일면의 복이 있을 것이니 원어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과 달리 하나님 앞에 영원히 따로 받을 복이 지대하다 할 것입니다.

단, 그들에게 원어를 장점으로 가졌다고 원어지상주의로 몰고 간다든지, 원어 유일주의로 나가는 실수를 하지 말라는 것이며, 그런 자세가 있게 되면 이미 그 번역본은 비록 언어적으로 더 나을지라도 실용에서는 큰 방해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언어적 기술 뒤에 숨어 있는 교만이나 위험한 사상은 표 나지 않게 더 많은 해를 끼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원어를 아는 분도 모르는 분도 오직 성경은 성경과 성령만으로 접근하겠다는 겸손과 순점G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3. 같은 신앙을 가졌다면 원어능력에 상관없이 깨닫게 하시는 섭리가 따로 있습니다.

① 주어진 상태에서 꼭 같이 충성하고 힘쓴다면 깨닫는 은혜는 따로 주어집니다.

사도행전의 제자들은 그 전도활동이 이미 그리스-로마 영향권을 벗어나던 곳까지 미치고 있었으며 행2:5-11에서 베드로가 15개 이상의 출신 배경을 가진 민족 언어들을 상대로 한 자리에서 복음을 전한 것은 '번역'이라는 인간 기술은 불가능하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는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언어에 막히지 않는 복음전파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원어는 잘 알지만 외국어로 번역하지 못하는 사람, 자기 나라 말은 잘 알지만 원어인 베드로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 이런 두 종류가 뒤섞였지만 성령의 인도는 생각지 못한 역사로 그 상황에서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물론 꼭 이런 식으로만 성령이 역사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 없는 복음전파는 없고, 성령이 함께하는 복음 전파에는 언어나 기타 모든 인간의 불통이 불통으로 남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것을 보이셨으니, 각자에게 주신 그 환경에서 성령이 각각 필요한대로 역사할 것입니다. 따라서 주신 현실에서 자기 할 수 있는 충성만 꾸준히 하면 나머지는 당신이 해결하십니다.

제자들이 늘 행2:5-11의 방언으로 복음을 전한 것은 아닙니다. 평상에는 번역과 통역이 필요했고, 그러나 사람의 충성이 넘어갈 수 없는 곳에는 모든 족속에게 전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어떻게 역사 하던 복음 전파에 '언어장벽'은 없었던 것이 교회 역사입니다.

복음에는 성령의 권능이 빠진 상태로 진행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 경우가 있다면 이미 그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신학자들이 대개 선호하는 논리, 즉 사도행전의 성령의 역사는 당시로 끝났다는 것은 그 신학자들이 성령의 진리 역사와 그 진리 역사에 나타내 주시는 초자연의 능력을 한번도 구경한 적이 없다는 자기 고백밖에 되지 않습니다.

② 원어를 안다는 자신감 때문에 영감을 삭감시키는 양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 가장 위험한 것은 순수한 뜻에서 원어에 대하여 자신의 이 받은 사명을 따르느라고 원어를 집중하는 분들이 조금 알고 나면 원어를 안다는 자신감이 생기고 이것은 어느덧 자만감으로 변질되면서 원어 자존심으로까지 진행합니다. 그다음은 원어 지상주의를 반복하게 되는데, 이는 원어라는 외국어 하나를 습득한 대신 성경을 기록한 저자 하나님을 삭제하는 행위입니다. 들어도 보아도 몰랐던 유대인을 기억해야 합니다.

차라리 원어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 진실되이 번역 성경에 매달리면, 그 번역 성경의 오류를 성령이 깨닫게 하여 원어를 모르는 그가 오역 때문에 자기 구원에 전혀 지장 되지 않는 온전한 깨달음을 가지게 했던 것이 교회의 역사입니다.

2계명의 우상에 대한 성경본문 원어 해석을 몰라서 신학자들이 신사참배를 실패한 것이 아니며, 신사참배를 승리했던 종들이 오류 있는 번역 성경을 보지 않고 원어성경으로 2계명을 알았기 때문에 승리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어에 관한 한, 신사참배 승리자들은 대단히 무지 무식했던 분들입니다. 신사참배를 실패했던 이들 중에 원어에 정통했다고 자부하는 신학자는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③ 원어를 복되게 사용하는 종들을 예비하사 모르는 성도에게 어떤 방법으로도 알립니다.

원어를 알기만 해도 정죄를 받게 되는 정도로 이 글을 읽는 분들이 되었다면 이 답변은 참으로 책망 받아야 할 일입니다. 또 민망할 일입니다. 원어를 바로 알고 바로 사용하여 원어가 전부가 아니며 원어는 일부도 아니며, 단지 번역본으로 전달되어야 하는 복음 때문에 또 하나님께서 여기에 쓰시려고 원어를 알게 하였던 종들, 그 분들이 번역해 놓은 성경이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원어에 대한 상식을 거의 가지지 않고도 한국교회가 말세 제일의 교회가 되었다는 감사를 어찌 잊겠습니까.

번역의 오류를 알지만, 그 오류의 모든 틈은 성령에게 맡기고, 오늘 내가 할 일은 나에게 주신 언어 능력 범위 닿는 데까지 거저 '충성'하겠다는 바로 그 자세를 가진 이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어 모르는 우리에게 원어에 지장 받지 않도록 역사하신 바로 특별역사 기관들입니다.

4. 요한복음 21장의 3번 사용된 '사랑'과 삼분설의 용어들은

① 바로 위에서 말했던 원어학자들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상식이 된 내용입니다.

이 답변은 원어 반대론 원어 무용론이 아닙니다. 원어를 잘 사용하면 선물 잘못 사용하면 저주가 된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원어 교만이 현 교계와 신학계의 가장 큰 폐단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주로 비판을 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지적하신 대로 요21:의 '사랑'은 그 원어가 전혀 다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원어의 뜻을 모르면 안 되는 곳은 성경 전체에서 불과 몇 곳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대목들은 믿는 사람으로서는 지게꾼이라도 듣지 않을 수 없도록 수도 없이 제시되고 반복되는 내용이어서 하나의 자연계시 수준에서라도 알 수 있는 정도입니다. 그 내용 하나 때문에 원어에 필요성이 일반 우리에게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원어의 내용이 참으로 언어적으로 알아져야 할 필요가 있는 곳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누구를 통해서 어떤 과정으로든지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뽕나무는 큰 나무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 현지답사를 해보아야 한다고 하지만, 모르고 싶어도 상식이 되어 있어 모를 수가 없는 오늘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오늘 교회는 그 뽕나무를 보아야 삭게오 신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되 그 방법이 다 있기 때문이며 이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를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② 삼분설 등의 교리는 원어적 접근으로 접근하면 실패함

성경은 성경 전체로 해석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 때마다 가장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삼분설입니다. 원어의 언어학적 접근으로는 천번 만번 접근해도 실패합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필연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고, 죄를 짓지 않는 부분이 우리에게는 있으며, 사람에게는 영물로 된 부분과 물질로 된 부분이 합해져 있으며, 믿고 중생될 때는 영물이 그리되고 물질로 된 부분은 평생을 죄와 의 사이에서 싸워가며 성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라는 것은 성경 전체를 보아 알 수 있는 것이지 사전적 원어 단어 접근으로는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있는 수많은 부분을, 또한 같은 부분을 그 성경에서 기록할 필요에 따라 수많은 각도로 표현을 해놓았습니다. 무한한 진리를 몇 자 되는 인간 언어 중에 몇 개로 표시해 본 정도입니다. 그렇게 기록된 단어를 붙들고 그 의미를 사전을 들고 펼치기 시작하면 먼 곁길로 나가 버립니다. '뽕나무'는 누에를 기를 수 있다. 누에로 비단옷을 해 입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삭게오 신앙을 해석해 들어가다 보면, 뽕나무와 그 나무에 관련된 언어적 백과사전적 지식이 있는 만큼 엉뚱한 데로 가버린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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