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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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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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54
5. 질문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870
요한복음 21장 15절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16절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양을 치라하시고
17절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양을 먹이라
18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절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전에 기독교방송 보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 세번 물으실 때 헬라어로 각기 다른 말로 물어셨다고 봤습니다. 무슨 뜻이 있습니까?
답변 : 성경의 원어적 해석은 최대한 배제하는 곳입니다. 다만 참고로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우선 간단한 답변으로 요약한 뒤, 원어와 관련된 참고 말씀을 길게 덧붙였습니다.
(질문집중)
1. 우선 헬라어의 '사랑'은 4가지가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구약은 이스라엘 나라 글인 히브리어, 신약은 그리스 나라 글인 헬라어로 기록되었고 헬라어의 사랑은 4가지로 나누어 표현합니다. 단어가 각각 따로 있습니다. 일반 교계에서 너무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그냥 일반 상식이라 생각하시고 들어두시면 됩니다. 영어나 우리말에서는 사랑(love)이란 한 단어뿐입니다. 헬라어의 4가지 사랑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오가는 이성간의 사랑은 에로스(eros)
부모와 자녀 사이에 오가는 혈육적인 사랑은 스톨게(stolge)
친구와 친구 사이에 오가는 우정적인 사랑은 필레오(phileo)
조건 없이 주는 기독교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아가페(agape)
본문에서, 예수님은 앞에 두 번은 아가페 사랑으로, 마지막은 우정사랑으로 말씀했습니다. 물론 베드로는 3번 다 우정의 사랑으로만 대답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냐고 묻는데 베드로는 친구의 우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엉뚱한 대답을 2번이나 했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친구의 우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느냐 할 때 베드로가 그렇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원어에서 확연하게 달리 사용되는 '사랑'의 의미 때문에 원어의 단어 뜻을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베드로의 대답이 무엇으로 나왔든지 상관없이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3번 말씀을 하시는데 이 3번 부탁하신 내용들은 그 앞에 주고받은 '사랑'의 원어적 의미와는 상관없이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곳은 '사랑'이라는 원어가 어떻게 사용되었는가에 상관없이 성구 전체 내용이 일관되어 있으므로 특별히 이 '사랑'이라는 단어가 달리 사용된 뜻을 아직까지 따로 살펴보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의미는 구별하지 않았으나 해당되는 분문 전체 해석을 참고하시려면 '1983. 9. 4. 주일오후' 설교내용이 가장 대표적인 설교입니다. 이 홈의 /초기화면/활용자료/원문설교/소선집/13호 '내 양을 먹이라'를 보셨으면 합니다.
(참고 답변)
1. 성경해석을 원어 단어나 문법적으로 접근하는 자세에 대한 몇 가지 말씀입니다.
① 한글성경이면 충분합니다. 꼭 부족하면 차라리 상식수준인 영어성경 참고를 권합니다.
현재 우리 성경 번역 수준은 우리 성경만으로도 불편 없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원어는 아니지만 원어에 대한 이해와 해석 그리고 그 적용에 이르기까지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앞서 있는 영어권 교회의 영어성경이라는 존재는 오늘 우리에게 원어를 바로 익혀 원어성경에서 성경을 이해하는 것보다 장점이 훨씬 많습니다. 원어에 대한 문화 역사 어학적 해석은 학자들마다 다른데, 영어성경의 경우 오랜 세월을 통해 원어에 대한 필요한 분석과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져 있습니다. 최근 교인의 수준으로는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이 영어성경에 의하여 부분적인 문제점을 파악하고 참고할 수 있는 상식수준에 있기 때문에 영어성경을 조금만 참고한다면 원어에 대한 불편은 없다고 보셨으면 합니다.
질문하신 본문도 원어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달리 사용되었지만, 이 원어의 사랑이라는 단어가 만일 꼭 '친구의 세속적 우정'으로 사용되어야 했다면 영어로 번역할 때 'love'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우정적 사랑'이라는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이 영어문화권 교회의 신앙과 신학입니다. 그러나 헬라어의 4가지 사랑으로 각각 혼동될 수 있는 것을 성경이 'love'라는 한 단어로 그냥 표현한 것은 그렇게 한 단어로 표현해도 성경 전체 해석에서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한글성경도 이 'love'라고 단일 단어로 해석한 영어성경과 같이 그렇게 한 것은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참고로, 영어성경이 이렇게 'love'로 번역했던 시절과 한글성경이 '사랑'이라는 단일 단어로 번역했던 그 시절의 교회는 칼빈 때와 비교할 때 별로 처지지 않을 정도로 신앙이 날이 날카롭게 서 있을 때였고 그 번역한 학자들이 원어에 대한 실력이 탁월하여 오늘 신학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이들이 다 알면서 그렇게 번역했다는 말은, 오늘 우리 일반 신앙인으로서는 '영감'으로 깨닫도록 말씀을 실행함으로 알고 깨달아가는 것이 중요하고 또 그 면으로만 힘을 써도 충분하다는 것이고 따로 원어에 대한 소개나 해석은 일반적으로 알아야 할 정도는 아닐 것입니다.
물론 원어의 필요성이 전면적으로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특이한 경우 예외적으로 한번씩 살펴보고 참고할 필요도 있지만, 최소한 현재 교계의 일반적 현상에서 보듯이 원어를 그렇게 쉽게 흔하게 사용할 정도는 분명히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각국의 가장 쉬운 보편어로 번역되어 읽혀지고 전해져야 한다는 것은 어떤 신학자나 교회도 부인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원칙을 조금이라도 깨달았다면 이곳의 주장이 아주 평범한 지식이라야 하는데 오히려 이런 주장이 파묻히게 된 것은 원어에 대한 지식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신학자들의 심리가 깔려 있다고 비판하고자 합니다.
② 요한복음21:15-17의 3번 질문한 '사랑'의 단어차이는 앞뒤 다른 말씀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선 요한복음21:15-17에서는 예수님이 피로 구원하신 사람을 믿음으로 기르는 이 일에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는 전체면을 알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사활의 대속으로 만들었고 또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주고 베드로는 이 사랑을 받는 것이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이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바로 '맡긴 양떼를 먹이고 치는' 양떼 위한 희생과 수고에서 그 사랑이 드러나는 것이고 또 그 일을 하는 것 자체가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바로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으로 만들어 주신 이 구원을 받는 것이고, 받은 구원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21장에서 예수님이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3번 말씀한 이 말씀과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고 말씀한 것은 정확히 일치하고 그 해석이 되어집니다. 이것이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고 원어의 원 문법적 단어나 그 당시 사용되던 용법을 몰라도 성경 깨닫는 데는 하등 지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 어린양을 먹이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대답하는 베드로는 3번 다 우정의 사랑으로 말했으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하느냐'는 말씀은 앞에 2번이 하나님의 사랑, 뒤에 1번은 친구의 우정을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이 우정의 사랑이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그 사랑과 다를 바가 없는 같은 뜻입니다. 만일 꼭 해석을 하여 구별을 하자면 요15:14에서 말한 '친구의 사랑'이 여기 친구의 사랑입니다.
③ 원어가 필요하다는 내용을 시도 때도 없이 끄집어내는 신학자들을 비판하겠습니다.
성경의 원어인 헬라어에 사랑은 4가지라는 대목에만 이르면 목회자들은 갑자기 신이 납니다. 목회자들이 이 부분을 언급할 때는 신이 납니다. 신학교에서 헬라어 시간이나 성경신학 강의에서 처음 이런 말을 들을 때 쇼크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사랑은 그냥 사랑인 줄 알았는데 이성사랑 우정 자녀사랑 무조건적인 하나님 사랑으로 천차만별이구나! 이런 것도 모르고 사랑이라면 같은 사랑인 줄 알고 해석을 하게 되면 성경이 완전히 거꾸러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이래서 원어공부가 필요하고 그래서 신학교가 필요하고 신학교수가 필요하며 원어의 선진국인 미국유학을 갔다 와야 하는 구나 등등으로 이어집니다.
교인들이 전혀 모를 이런 부분을 설교할 때 목회자들은 원어와 그 중요성과 그 원어로 해석하면 본문이 달라지는 것을 열심히 집중적으로 설명하지만 이곳은 그런 자세 그런 시각을 아주 근본적으로 틀렸다는 신앙노선에 있습니다.
④ 요한복음21장 15-17절은 원어 절대주의 신학자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절대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는데 베드로는 친구의 우정 차원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대답하였으니 베드로는 전혀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알아듣고 있다는 것을 본문이 가르치는데 원어를 모르면 이런 성경의 깊은 뜻을 모르게 된다고 이 본문으로 예를 듭니다.
그러나, 이렇게 원어의 단어 사전적 의미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도 물론 성경해석의 한 방법이 될 수는 있으나 이런 방법은 어디까지나 '성경은 성경 자체로 해석'하고 '성경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해석'해야 한다는 더 중요하고 더 근본적인 원칙을 전부 무시한 오류가 있습니다.
요15:14에서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하신 것과 같이 정상적인 신앙의 사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관계까지도 친구로 표현한 곳이 적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런 면의 사랑은 세상이 볼 때는 '친구'이며 또 '친구의 우정 사랑'으로 보이겠지만 그 내면은 '하나님의 참 사랑에서 이루어진 결과나 나타나는 한 형태'가 됩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친구'로 표현할 때가 있는가? 친구 사이에서 가장 쉽게 우리에게 이해될 수 있도록 주님과 동행하는 우리의 신앙모습을 가르칠 필요가 있을 때 그렇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는 것이지 성경을 일반 국어사전이나 외국어사전의 설명을 단순 인용하는 것은 자칫 불신자의 글과 사상으로 성경을 해석하여 성경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성경을 완전 변질 시킬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성경 오번역 작업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