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1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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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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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54
6. 질문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1071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세번하시는데 헬라어 원문을 보면 ’아가파오‘와 ‘필레오’라는 단어로 쓰였다고 하는데, 그뿐만 아니라 베드로가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신다라고 할 때도 우리말과는 달리 다른 뜻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내양을 치라’고 할때도 마찬가진데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아람어를 사용하셨고 헬라어를 하실 수 있어도 베드로와 대화하기 위해서는 아람어를 사용해야만 했는데 아람어도 헬라어와 같이 사랑을 아가페, 필레오, 에로스등으로 나누는지, 그 단어에 해당하는 어휘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없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냥 사랑하느냐고 물었는데 왜 요한은 헬라어로 기록하면서 이런 수수께끼 같은 구조를 만들었는지 그 의도가 궁금합니다.
답변 : 사랑을 4가지로 나누는 것은 그리스 사람들의 언어에서 보이는 특색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철학적이고 체계적인 사람들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4가지로 나누어 분리하는 데에서도 그런 일면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영어 불어 독어 히브리어 할 것 없이 이렇게 사랑을 4가지로 나누어 따로 구분하는 언어는, 아직까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질문하신 헬라어 원어의 사랑에 대한 내용은 성경신학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만일 아람어에도 헬라어와 같이 사랑을 몇 가지로 구분하여 사용하는 단어가 있었다면, 비록 아람어를 전공하지 않아서 아람어를 모르는 답변자의 귀에 들리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신학 상식에 속하는 정도는 답변자도 듣고 있는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재질문 : 그러면 예수님께서 헬라어로 대화를 하셨다는 것인지
이 본문의 내용은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것이라 다른 곳과 대조를 할 수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성경상식으로 예수님께서는 아람어를 사용하셨고 베드로는 헬라어 구사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요한은 실제 있었던 에피소드를 재구성하면서 왜 아가페와 필레오로 나누어서 사용하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무엇인가 메세지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리고 이재철목사님의 설교 중에 양을 세단계로 나누어서 설명을 하던데(원어는 다르다고 합니다)그렇게도 볼 수 있는 것인지 내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는 것은 어떤 뜻으로 이해해야합니까?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입니까?
답변 : 예수님 당시은 헬라어와 아람어가 식민지 이스라엘의 일반언어였습니다.
1.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헬라어나 아람어를 평범하게 사용했었습니다.
① 식민지 난민들은 이 나라 저 나라 말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앗수르 사람들이 사용하던 아람어는 예수님 당시에 이르러 이스라엘과 그 주변에서는 공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알렉산더 대왕이 그 일대를 점령하면서 헬라어 역시 당시 국제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민족 고유의 히브리어와 아람어 그리고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일제 때 우리 조선 사람들은 우리말과 함께 일본어를 보편적으로 사용하였고 또 중국어는 잘 못하더라도 모든 글에서 한자를 보편적으로 사용하였던 것을 생각하시면 참고가 될 것입니다.
② 예수님과 제자들 대부분은 무식했던 천민이었지만, 일반 언어실력은 갖추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대부분은 무식했던 갈릴리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은 뱃사람들이었고 예수님도 목수 출신의 무식한 천민이었습니다. 요7:15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기이히 여겨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했고, 행4:13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예수님과 갈릴리 바다가에서 뱃사람으로만 살았던 베드로나 요한 같은 사람들이 당시 일반 유대인들이 평범하게 사용했던 헬라어나 아람어를 자유롭게 사용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특별한 언어 습득 훈련을 받아서가 아니라 복음에 필요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받아가진 실력들이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볼 때는 당시 언어능력의 일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할 사람들이었는데 일반 수준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기록한 베드로전서 후서, 그리고 요한이 기록한 요한복음 등은 전부 헬라어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일상적인 헬라어는 사용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③ 참고로 몇 가지 더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요7:35, 요12:20, 막7:26 등에서 예수님은 헬라인들과 직접 대화했거나 또는 그들에게 전할 수 있는 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2. 요21:15-17에서 사용된 '사랑'의 원어가 2가지로 기록된 이유는
성경 성구를 연구하게 되면 과학 이치나 문법에 대한 전문 지식이 필요한 성구들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 이곳의 신앙노선은 믿는 사람 누구나 평범하게 또 상식 수준에서 접할 수 있는 정도는 하나님께서 그 성구를 해석하는데 필요한 자연계시로 주셨다고 알고 사용하지만, 특별한 학습이나 전문가가 아니면 알기 어려운 과학 이치나 문법 등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주신 범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성경은 우리 구원을 위해 기록해 주신 이치이기 때문에 특수 계층이나 특수 환경에 있는 사람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고 일반 사람 누구나 읽고 깨달을 수 있도록 쉽게 적어 주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신학의 기본 원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요21:15-17에서 '필로스' 사랑과 '아가페'사랑으로 사랑을 구별하여 원어로 기록해 주신 것은 이곳에서 특별하게 연구해 본 적이 아직까지 없었고 또한 앞으로도 그런 면으로 성경을 살펴보는 일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변명이거나 또는 질문자의 자세를 책한다고 오해될까 두렵습니다만, 이곳의 신앙 기본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혹 이곳의 여러 자료나 글을 읽어보셨다면 원어나 문법 또는 특별한 전문적 지식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전문적이거나 특수한 지식을 배경으로 해야 연구할 수 있는 것은 연구 대상에서 아예 제외하고 있는 것은, 그런 연구가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는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이곳 외에서 성경을 연구하는 곳이 있다면 또는 신학서적을 찾아본다면 이제 질문하신 내용에 대하여 장문의 설명으로 강조하고 또 심층 분석하지 않는 곳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필로스는 '우정'의 사랑이고 '아가페'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인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요한은 감히 그 사랑에 미치지 못함으로 예수님을 거저 선생님으로 또는 인간적 우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며 고백한다는 등입니다. 그리고 이런 해석을 기초로 하여 이 본문은 우리에게 대속하신 주님을 우리가 어떻게 어떤 자세로 사랑해야 하느냐는 것을 가르친다고 많은 분량으로 설명하게 됩니다.
답변자는 일반 교계의 신학과정을 조금 거친 적이 있어 이 정도 내용을 듣고 있으나 문법을 위주로 치중하는 신학과 성경 해석은 백영희신앙노선에서는 첫발을 디디지 않고 있음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단, 아무리 어려운 문법이나 전문지식에 해당되는 것이라 해도,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경우는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원어와 관련된 질문은 이곳 외의 신학사이트에서 아주 쉽게 필요한 내용을 설명 받을 수 있을 것이고, 반대로 이곳에서는 외부 사이트에서 놓치고 있는 바를 주로 안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3. 요21:15-17에서 '먹이라' '치라' '먹이라'고 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그 누구든지 자기에게 맡겨진 '양'이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 처음 교회를 나온 사람은 아직까지 교회를 나오지 않고 있으나 이제 교회를 다녀야 할 사람에게는 목자가 됩니다. 자기가 신앙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누구든지 상대방은 양의 위치에 있게 되고 자기는 목자의 위치에 서게 됩니다.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는 이 성구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성구입니다. 실은 성경 전부가 오늘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 경우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먹이라'는 말은, 신앙의 양식을 주라는 말이니 신앙으로 지도하는 사람은 우선 생명의 양식이 되는 말씀을 그대로 소개해서 신앙어린 사람에게 말씀으로 양식을 먹여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전하는 사람이 자기가 전하는 말씀을 자기가 먼저 먹고 그 말씀대로 살아보고 깨닫고 전하게 되면 젖이 됩니다.
주일학교 반사가 주일학생을 가르치든, 목회자가 일반 교인을 가르치든, 성경에 이른 말이 있더라고 던져주는 것보다는 그 말씀을 깨달고 전하는 것이 낫고 그보다는 그 말씀대로 자기가 살아본 경험과 그 경험 속에서 성령으로 깨달은 것을 전하여야만 참된 양식이 되어집니다. 자기가 신앙으로 책임진 사람들에게 전하는 모든 말씀의 양식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씀했습니다.
'치라'는 말은, 양을 관리하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말씀의 양식으로 먹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 자기가 신앙으로 지도하는 사람이 주어진 현실에서 어찌 살고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길을 가는지를 지도하거나 인도하는 것도 신앙지도에는 빼놓을 수 없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