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나사렛이란 마을 이름이 구약에 없는데 마태는 선지자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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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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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54
7. 질문 : 나사렛이란 마을 이름이 구약에 없는데 마태는 선지자가 말씀하였다고 기록한 이유는?(마2:23) 688(쉬)
나사렛이란 동리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말씀에 나사렛사람이라 칭하리라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마 2:23)
그러나 구약성경의 어느 곳을 뒤져봐도 그런 예언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대체 나사렛이라는 마을 이름도 나오지를 않는 것이다. 마태는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말을 기록해 놓았던 것일까?
답변1 : 신학 상식으로, 마2:23은 사11:1의 예언을 말합니다.
1. 마2:23에서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고 예언한 구약 성경
신약은 헬라어로 적었고 구약은 히브리어로 적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의 '나사렛'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서 '(나무) 가지'라는 뜻이 있는데, 구약 히브리어 단어 중에 '(나무) 가지'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이사야11:1에 있습니다. 그래서 마2:23의 예언은 사11:1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참고로, 사11:1은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고 이 성구의 '가지'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원어가 '네체르'입니다. 즉, 구약의 '네체르'와 신약의 '나사렛'은 '(나무) 가지'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한자의 '守直(수직)'이라는 단어와 한글의 '지키다(直히다)'라는 단어는 같은 뜻을 가진 것과 같습니다. 도둑맞지 않도록 잘 '守直하라' = 도둑맞지 않도록 잘 '지켜라' 이렇게 표현할 때 '수직'이라는 한자와 '지켜라'는 한글은 같은 뜻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물론 '수직'은 '지키다'는 뜻 말고도 다른 뜻을 더 가지고 있고 또 '지키다'라는 단어도 수직이라는 뜻 말고도 다른 뜻을 더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헬라어의 '나세렛'과 히브리어의 '네체르'는 서로 같은 뜻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각 단어는 다른 뜻을 여러개씩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사11:1의 '가지(네체르)'와 마2:23의 '나사렛'이라는 단어는 그 뜻이 같은데, 사도들은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이스라엘 사람이면서 동시에 성경을 헬라어로 적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일제 때 조선사람들이 조선말이 모국어이지만 일본어도 자유롭게 적을 수 있는 것과 같은 환경이었습니다.
2.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일본어와 한글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사람들, 한자와 한글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직(直)히다'라 적거나 '지키다'로 적거나 그냥 눈으로 척 통하게 되지만, 미국사람이 한글만을 배워 '지키다'라는 단어만 알다가 어느날 '직히다'라고 옮겨 적은 나이 많은 노인의 필기를 보게 된다면 한참 어리둥절하게 되는 것과 같은 원리로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답변2 : 원어가 필요 이상으로 강조될까 하여, 한 말씀을 별도로 드립니다.
위의 문답이 자칫 원어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될까 하여, 질문에는 없었으나 답변을 추가하여 보충하고자 합니다. 질문자께서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1. 성경 원어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
마2:23의 '나사렛'은 '가지'라는 뜻의 헬라어 단어인데 한글 성경으로 번역할 때 '가지'라고 번역하지 않고 지역명칭으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냥 '나사렛'으로 그대로 번역하였고, 사11:1의 '가지'는 히브리어 '네체르'라는 원어를 우리말로 '가지'라고 번역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꼭 같은 '가지'라는 뜻의 단어를 마2:23에서는 '나사렛'이라는 헬라어 원어를 그대로 한글성경에 사용했고, 사11:1에서는 '가지'라는 우리말로 번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한글 성경만 읽는 사람들은 신약의 '나사렛'이 구약의 '가지'라고 번역된 한글 성구와 같은 뜻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 성경의 '가지'라고 번역된 모든 원어가 꼭같이 단어가 아닙니다.
세계 교회와 역사의 모든 교회는 원어를 알아야 성경을 안다고 단정할 때는 이렇게 이유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신학이란 원어실력이라는 인식이 유지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은 백영희목회연구회를 방문하는 모든 분들도 일단 이해해야 할 부분일 것입니다.
2. 백영희목회연구회에서는 그런 상황을 알면서도 원어와 신학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① 원어를 무시하는 첫째 이유는, 원어를 사용할 실력을 갖추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원어와 신학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가 있듯이, 그분들이 생각하는 바가 틀렸다고 백영희목회연구회에서 이렇게 분명하게 주장할 때는 역시 그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백영희목회연구회에서 원어 공부를 무시하는 이유는, 헬라어와 히브리어 원어를 바로 파악하여 성경을 이해하려면 우선 모국어 수준에 이르러야 하는데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1-20년씩 영어공부를 주력시키고 있으나 30세에 이른 사람들 중 영어 실력을 정상급으로 갖춘 경우라 해도, 이는 선 무당 사람잡을 정도의 실력입니다. 그냥 대충 의사소통하고 감을 잡는 정도에 그친다는 뜻입니다. 단어의 어감에 따라 결과가 천차만별이 되는 전문적 수준에 접근하려면 모국어 수준이 되어야 하는데 외국어로서 원어를 배우는 사람에게는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② 두번째 이유는, 성경 기록 당시를 접할 수 없다는 것
3500년 전에서 시작하여 2000년 전에 끝난 성경기록은, 한편으로는 문자로 내려오지만, 그 문자에 대한 이해는 그 문자가 기록된 당시 상황이 전제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 고고학이 당시 상황을 여러 각도에서 알려준다고 하지만 학설일 뿐입니다. 쉽게 말하면 짐작이며 추론이며 예측일 뿐입니다. 틀려도 되는 세상 학문이면 대충 알았다가 틀리면 또 수정하면 됩니다만 신앙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원어 실력을 아무리 모국어 수준으로 갖춘다고 해도 당시 상황을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성경을 원어와 신학으로 접근하게 되면, 이는 근본적으로 소경이 손에 잡히는 대로 말하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잡았기 때문에 증거를 들이대며 말하는데 한 사람은 뱀이라 하고 다른 사람은 코끼리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3. 백영희목회연구회의 신앙노선은, 원어와 신학은 상식으로 들을 수 있는 정도면 된다는 것입니다.
① 모국어 수준의 원어와, 사용된 시대 상황을 가질 수 없는 줄 하나님은 아십니다.
문자는 그대로 남아 있어도 시대가 바뀌면 그 문자로 표현하고자 했던 환경은 사라졌습니다. 남아 있는 문자로 없어진 이전 환경을 재현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언어의 한계가 이렇게 분명하게 존재하는 줄 알면서도 하나님은 언어로 성경을 기록해주셨습니다. 또한 모국어 수준으로 원어를 습득하여 성경을 깨달으려고 한다면 절대 다수의 믿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수 없다는 것도 아십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읽고 깨달아 구원도리로 삼는 것은 원어 공부를 통해 가능하도록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습니다. 성경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 어느 사람이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평범한 자연환경에서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도록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특수한 환경에서 초인적인 노력으로 겨우 그 몇 글자를 읽을 수 있도록 그렇게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천주교를 제외한다면 이 교리를 부인하는 기독교 교리는 없습니다.
어느 시대 어떤 사람이라도 가장 평범하고 일반적으로 성경을 깨닫도록 한 것이 성경기록이라는 것을 단정한다면, 그리고 위에서 질문했던 마2:23과 사11:1의 내용처럼 원어 자체를 모르고는 이해할 수 없는 경우를 마주치게 되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결을 해야겠는가?
② 백영희신앙노선은, 상식으로 와 닿는 원어와 신학을 자연 계시처럼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백영희신앙노선은, 성경의 원어나 성경고고학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어나 신학 연구에 대하여 특별한 재능을 받은 사람이 노력하고 연구해서 밝혀진 것이 일반 자연계의 현상과 같은 상식으로 받아들일 정도가 되면, 우리는 그런 원어나 신학을 상식의 하나로서는 참고하겠다는 것입니다. 백영희목회연구회에서 반대하는 것은, 모든 교인들이 모든 목회자들이 원어를 알아야 성경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특수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장차 상식에 이를 수 있도록 꾸준하게 연구할 일입니다.
삭개오가 올라갔던 이스라엘의 뽕나무는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2-3m 정도의 작은 나무가 아니라 느티나무처럼 웅장한 나무입니다. 이런 사실은 신학서적을 펼쳐보지 않아도 또 원어를 연구하지 않아도, 이미 역사 교회에서 그런 방면을 연구하도록 하나님께서 특수 재능을 주신 분들이 수고를 하여 오늘 우리에게는 상식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문분야인 원어나 신학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상식차원에서 듣고 참고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마치 '뽕나무'나 '포도나무'라는 나무 자체는 원어나 신학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자연환경으로 주신 일반 상식을 가지고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③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상식 수준으로 알게 하는 것'에 집중하셨으면
일반 교인이면 원어나 신학서적은 완전히 덮고 한글 한자 관주가 있는 성경 하나만 가지고 깨닫고 살면 된다는 정도를 주장합니다. 그만해도 원어나 신학을 전공 전문하는 이보다 구원에 부족하고 모자랄 일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혹 조금 더 궁금하면 목회자들에게 문의하여 알게 되는 정도가 자기들이 알 수 있는 상식의 범위가 될 것입니다.
목회자라면 목회자가 되기 위해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몇몇 과목들이 있고 또 참고할 책이 있을 것입니다. 교인보다는 조금 더 범위가 넓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조직신학의 기본서 한번은 읽어야 할 것이고, 또 유월절이 몇 월 몇 일 인지 참고하기 위해 기독교 백과사전 한권 정도는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상식 수준까지 되어 있는 내용을 참고하는 정도에서 그쳐야지 그것으로 성경 자체를 깨닫는데 힘을 삼게 되면 그 즉시 인간 지식으로성의 원어와 신학에 포로가 되어 진리에는 소경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만일 칼빈처럼 또 박윤선목사님처럼 하나님께서 전문 신학자 원어학자의 길로 인도하여 그 길에 집중하는 사람이면, 그는 역사에 없는 특별한 것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일반 신학자로서 상식으로 알 수 있는 정도를 자기가 알아야 하는 범위로 삼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원어와 신학 상식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자유롭지 못한 이들에게 번거롭고 시간을 낭비하는 수고를 덜어주라는 것이니, 상식으로 전해 줄 수 있는 것을 간추려 교계에 전하는 것으로 사명을 삼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깨달음만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일반 교인이 가장 복이 있고 몇권의 신학서적을 들추어야 할 목회자들이 그 다음이고, 신학을 전공하고 전문할 극소수의 사람들이 가장 불행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화장실을 퍼야하는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신학과 원어에 아무런 은혜를 받지 못한 수많은 신학자들이 세상 대학의 교수와 같은 대우 명예 직장을 탐내어 신학을 하는 것이 큰 고장이고, 상식적인 몇 가지만 참고하면 될 목회자들이 7년씩 원어와 신학에 소진하는 것이 큰 병폐입니다. 이 교계 지도자들이 근본적으로 손대지 말아야 할 것에 손을 댄 다음, 자기들이 아는 것을 공연히 써먹기 위해 교인들에게 원어와 신학을 들추어 과시하고 강조하는 것이 현 교계의 총체적 타락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