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웨스트민서터 신앙고백 중에서 2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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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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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54
2. 질문 : 웨스트민서터 신앙고백 중에서 238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이런 부분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틀림없는 법칙은 성경 자체이다. 그러므로 어느 성경 한 구절이 내포하고 있는 참되고 충족한 의미에 관하여(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다.) 무슨 의문이 있을 때는 더 분명하게 말한 다른 성구를 통해서 고찰하고 이해해야 한다(벧후 1:2021, 행 15:15, 요 5:46, 미국판에는 must가 아니라 may로 되어 있음).
위 글에서 성경 한 구절은 여러가지 의미가 아니라 하나밖에 없다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의 성경구절이 있다면 사람마다 성령의 감동하심이 다르게 나타난다면 다르게 해석되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면 제가 이 말을 잘못이해 했거나 잘못 알고 있는것(성령의 감동하심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 사람마다 상황이 다르니깐 다르게 나타남)입니까?
답변 :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의 내용 하나 하나에 대한 해설은 외면하는 정도입니다.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장로교의 헌법입니다.
장로교의 사상적 원조는 칼빈입니다.
그리고, 장로교의 헌법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입니다.
모든 장로교 헌법책의 앞부분에는 그 신앙고백 전문이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2. 이곳은 백영희신앙노선을 집중 연구하고 있습니다.
장로교는 백영희신앙노선의 '성(姓)'과 같고, 총공회는 '이름'과 같습니다. 백영희신앙노선은 그 출생이 '장로교'이며 그 역사적 뿌리를 장로교에 두고 자라나왔습니다. 따라서 집안 조상들을 족보에서 대충 알고 감사하고 또 그 중에 꼭 기억할 인물이나 집안 내력은 참고하고 있으나, 오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현실 생활에서는 현재 생존하신 부모님과 처자식과 자기 자신 문제에 가장 많은 시간과 연구를 집중하고 있습니다.
칼빈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같은 것은 일반 장로교 교회들은 오늘 현재도 그 슬하에서 젖을 먹고 매일 아침밥을 먹고 매일 생활을 지도받고 있기 때문에 성경 다음으로 칼빈의 발언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훑어보고 있습니다. 칼빈이 아직도 장로교에서는 살아있는 할아버지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아직도 가정을 주도하는 호주로 모시고 지도를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칼빈의 표현 하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자구 하나에 따라 장로교는 교단이 분열되고 또 신학교가 나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칼빈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돌아가신 할아버지나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정도로 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신대륙을 발견하여 초창기 집안을 일으켜 세운 분으로 분류하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환경은 너무 급변하여 그때 지게를 지고 다니던 상황에서 이제는 제트기가 나는 시대로 보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을 하고 무엇을 조심하며 어떤 사업을 벌여야 하고 미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를 낱낱이 지도하고 있는 현재 호주는 백영희목사님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곳은 백목사님의 기록이나 발언은, 그 토씨 하나까지도 대단히 세심하게 살피고 참고하고 있습니다. 설교록에 나오는 표현은 그 어떤 표현이든지 눈여겨보고 있으며 또 그 내용에 따라 오늘 내가 나갈 방향을 결정하는데 결정적 지도로 삼고 있습니다.
3. 따라서, 질문하신 내용처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일부 내용을 해석하라시면, 사양하는 편입니다.
대단히 죄송하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성경해석법을 잠깐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신앙고백을 제정한 분들이 그 부분을 어떤 의도로 그렇게 표현을 했는지를 알려면 그 당시 작성위원들이 신앙고백 해설집을 만들었는지 살펴야 할 것인데, 그렇게 했다는 기억은 없습니다. 그 신앙고백은 칼빈신학을 요약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신앙고백의 모든 해석은 칼빈이 지은 책들이 바로 유일한 기준입니다.
칼빈이 가르친 것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교리체계를 따라 요약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오늘 모든 정통 교리서들은 그 신앙고백을 다시 설명한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장로교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가지는 의미는 장로교 자체라고 할 정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곳은 우리 신앙의 뿌리를 확인하고 다지는 의미에서는 칼빈의 신앙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살펴보고 관심을 가지지만,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그 표현 하나하나의 의미를 살펴야 하는 차원으로는 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세부 내용에 대하여는 아는 것도 거의 없고 또 답변을 위해 그런 깊은 신학적 부분을 찾아보는 것은 피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4. 인용하신 부분과 관련하여, 백영희신앙노선의 입장에서 말씀을 드린다면
마25:1에서 '그때에 천국은'이라고 말씀하신 천국은, 우리가 죽어서 들어가는 천국도 여기 본문이 말씀하는 '천국'이고, 신약 2천년 전체 기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2천년 기간동안 내내 우리와 함께 하시니 신약 전체가 '천국'이며, 신사참배와 같은 시대적 환란 사건이 생길 때 그 사건에서 주님을 배반하지 않으면 그 사건을 통해 주님과 하나 되는 것이니 그 사건에 대한 승리가 '천국'이요, 매 순간 우리 마음은 주님 없이 살 수도 있는데 자기 마음이 그 현실에서 주님을 잊지 않고 모셨다면 그 현실 하나도 '천국'입니다.
이런 해석 전체를 하나로 묶어 포장을 한 다음, 이 해석이 이 성구에 대하여 하나밖에 없는 해석이라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말하는 것이라면 그 해석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성구에서 천국은 우리가 죽어서 들어가야 하는 천국만 해당되고 그 외의 해석은 배제된다고 한다면 그 신앙고백은 아직 어두운 시대여서 다 깨닫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 그 해석이 꼭 한 단어로만 표시해야 하는 해석이라 해도, 우리 생활에 따라 그 말씀이 우리 각자에게 명령하는 것은 천차만별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은 하나지만, 목사와 교인, 교인 중에서도 오래 된 교인과 오늘 처음 나온 사람은 꼭 같은 그 말씀을 붙들고도 그 말씀 때문에 해야 할 행동은 각각 다릅니다. 그 사람 속에 성령이 꼭 같은 말씀 하나를 가지고도 그 사람의 형편에 따라 각기 다른 명령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5. 참고하실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4백년전 시대를 감당하던 그 당시 최고의 신앙요약입니다. 그때는 종교개혁이 완성되고 교회가 제정신을 막 차렸던 때였습니다. 말하자면 천주교에게 교회가 납치를 당해서 1천년 감금 생활하다가 루터와 칼빈에 의하여 도망쳐서 고향으로 돌아왔고, 이제 막 고향에서 정착하고 새로운 삶을 안정적으로 펼쳐나가던 시점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신앙고백의 전체 방향은 하나님 중심이고 그 터전이 든든하여 어떤 건축물도 잘 지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초입니다. 그렇지만 그 고백 내용만 가지고 오늘 이 시대를 감당한다는 것은 이 시대에서 이룰 건설을 포기하는 정도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 신앙고백 이후 오늘까지 교회에 나타났던 거짓선지자들과 또 현재 나타나고 있는 악령의 유혹은 그 차원과 내용이 그 신앙고백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그 신앙고백이 귀한 것은, 그 신앙고백은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보면 하나님 앞에 두려워 떨며 적은 것이고, 그 내용이 전부 성경적이고 하나님 중심이라는 점입니다. 또한 오늘은 그 내용들이 주일학생도 아는 상식이 되었으나, 그 신앙고백을 제정하던 바로 그 당시는 천지가 개벽할 새로운 이론이었습니다.
6. 원하시는 답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답변은 드리지 못했으나, 질문과 관련하여 몇 말씀을 드림으로 성의 표시를 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