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자유주의의 시작 3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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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54
5. 질문 : 자유주의의 시작 3701
자유주의 신학의 시작은 언제쯤인가요? 원어와 고고학을 중요시 했던쯤은 언제쯤인가요? 개인적인 견해로는 원어와 고고학을 배우는 것이 결국은 자유주의 신학으로 들어가는 첫걸음 같습니다. 종교개혁당시엔 원어나 고고학을 그렇게 중요치 않게 생각 했는 것 같습니다.
종교개혁 당시만해도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던, 원본에서 사본- 사본에서 번역본으로 우리에게 절대필요충분 성경을 주셨다는걸 믿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깐 종교개혁 당시만 해도 번역본성경을 하나님께서 그 나라사람들에게 준 원본성경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이후 웨슬리 이후 원어와 고고학을 중요시하면서 원어와 고고학을 제대로 해야지만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원어와 고고학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들을 배우는 것이 자유주의 신학이 아닌지? 그리고 언제쯤부터 원어와 고고학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성경해석에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여겼는지? 예전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종교개혁당시나 그 이후 믿음의 선배들) 그들의 번역 성경을 최고의 성경으로 여겼는지 궁금합니다. 아니면 칼빈도 루터도 원어나 고고학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아니면 칼빈과 루터도 여기 홈페이지의 원어관과 고고학관과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답변 : 자유주의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는 자유이니 불신 주의입니다.
1. 신앙의 오류들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필요해서 주신 것입니다.
① 겉으로는 세월 따라 '죄'가 등장하는 것 같지만, 원래 초기부터 내재되어 있습니다.
물이 있으면 물고기가 있는 것처럼, 사람 사는 곳에는 온갖 죄가 함께 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기로 '목적'을 정하실 때, 삐뚤어진 것들 속에서도 한 분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정도의 수준 높은 존재로 만들겠다고 작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얼러키운 호로자식으로 기르지 않고, 온상 속에 화초로 기르지 않고, 무공해 청정지역에서만 작동되는 실험용 기기 정도로 만드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정도로만 만드려고 했다면 애당초 죄라는 것은 이 세상에 나타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백영희조직신학의 특별한 점을 또 한번 강조하지 않을 수가 없는 대목입니다. 창조론에서는 일원론을 주장하면서도 '죄'라는 문제에 대하여는 하나님 한 분으로 발생된 것이라는 '일원론'을 주장하지 못하는 것이 세계 교회사를 책임진 정통보수교회의 교리관입니다. 교회의 중심을 잡아야 할 곳조차 이런 정도의 인본적 인식에 붙들려 있다보니까 여러 가지 인본지식들이 우후죽순 돋아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 때부터 어떤 혼란과 오류 속에서도 오직 한 분 하나님께만 붙들릴 수 있는 그런 자유성을 가진 존재로 만들어 기계가 아니고 하나님을 닮은 인격자를 만들려고 작정을 했습니다. 이런 존재로 길러내기 위해서는 당연히 말씀에서 벗어난 것, 틀린 것, 애매한 것 등 온갖 종류의 죄들을 다 내어놓아야 합니다. 그런 속에서 말씀 하나만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담을 만들자 말자 천사를 타락시켜 아담을 시험했고 또 타락 이후 오늘까지 죄와 의, 멸망과 구원, 악령과 성령은 항상 음식물과 파리떼처럼 붙어있도록 했지 분리될 수 없도록 했습니다. 신학에 있어서 자유주의라는 인본주의 이단사상의 발생은 우선 이런 목적론적 입장에서 이해를 하셔야 할 것입니다.
② 이 문제를 논하기 전에 우선 '보수신앙'과 '자유주의신학'의 의미를 살폈으면 합니다.
'보수신앙'이라는 단어가 가장 정상적으로 사용된다면 그 뜻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대로만 걸어가는 단 하나의 길만 '쥐고 있을 보, 保' '지켜 낼 수, 守' 보수라고 합니다. 그 한 길을 가려는데 세상이 다 달라 들어서 못 가게 할 것이고 그런 중에서도 그 길을 쥐고 놓치 않고 지키겠다는 것이 '보수신앙'입니다.
그렇지만 현재 '보수'라는 표현은 이런 좋은 면보다는 그 반대로 세상과 교회의 지탄을 받아야 할 단어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즉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상 욕심을 채우듯 교권을 잡은 자들이 세상의 보수주의들처럼 자기 권리를 지켜가기 위해 현 체제는 옳고 그르고를 따지지 말고 그대로 유지하자는 세상식 보수도 있습니다.
'자유주의' 또는 '진보주의'라는 표현은 잘못된 억압을 풀고 발전적으로 나가자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좋은 것에 붙들렸으면 풀고 나가지 않는 것이 좋고, 좋은 발전이면 발전이 좋지만, 잘못된 자유와 방향이 잘못된 발전이 역사에서는 거의 전부였습니다. 여기서는 세상 현황을 두고 살피지 않고 교회 문제를 두고 살피기 때문에 신앙적인 면만 말씀드립니다.
신앙의 자유주의는 원래 바로 사용되려면 하나님을 '마음껏 따라가되 어느 누구에게도 억압되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보수신앙과 자유신앙은 2개의 별개 개념이 아니라 보수신앙의 성격이 자유신앙이라야 하고, 자유신앙은 반드시 보수신앙의 연장선에 있어야 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현 교계에서 사용되는 '자유주의 신앙'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 붙들리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칠 자유, 성경과 다른 소리를 낼 수 있는 인본의 자유, 그래서 세상을 닮아나가는 그 타락의 속도가 앞서야 한다는 '진보'를 말하고 있습니다.
③ 조심하실 것은, 이 세상 임금인 악령이 교회를 어떻게 몰아가고 있느냐는 점입니다.
태평양 바다만큼 그물을 크게 쳐 놓으면 그 속에 물고기들은 자기들이 포로가 된 줄도 모르고 살게 됩니다. 어항 속에 물고기는 한번만 퍼득거리면 단번에 벽을 만나니까 갑갑함이라도 느낍니다. 오늘 교회를 몰아가는 악령의 수는 하나님의 7수보다는 한 수 밑이지만 인간보다는 분명히 한 수 위에 있습니다.
교회와 별로 상관이 없는 세상 문제만을 두고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소수 실력자들이 다수의 무지한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지도하게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출발은 그렇다 해도 세월이 지나가면 인간은 자기중심이므로 소수의 실력자가 다수를 무리하게 사용하게 됩니다. 그런 중세기 극단적 사례들을 많이 만들어놓고, 그다음 무지한 사람들이 개화가 되기 시작하면서 너무 지나쳤던 것이 제 자리로 돌아가는 자연 평형의 법칙이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유주의'와 '진보주의'라는 표현은 자연스럽게 탈출해야 하는 무지한 다수인이 즐겨 사용하게 되고, 소수의 실력자들은 과거 그대로가 좋다고 주장을 해야 하기 때문에 '보수'라는 표현에 해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500여년 세월이 흐르면서, 지식의 발달은 다수 무지한 사람들을 소수 실력자들과 맞서게 했고 결국은 다수결의 인간주의가 정착되면서 당하고 살던 다수의 개화자들이 세상을 점령해 나온 것이 지난날의 세상 불신 역사입니다. 이 과정에서 '자유'와 '진보'란 항상 옳은 것처럼 나타나고, '보수'라는 것은 못된 것이라고만 인식되어 왔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세상의 물고 먹는 역사가 아니라, 이 세상이 거대하게 움직이면서 현재까지 진행해 온 방향이 어디냐는 것입니다. 주변국의 100만대군의 이동이 만주쪽이냐 남한쪽이냐 동해쪽이냐를 읽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세상이 소수 실력자의 지배에 대하여 다수 무능한 인민들이 일언반구 말도 못하고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다가 어느날부터 '너나 내나!' 이런 사상이 갑자기 들어가면서 소위 민주화가 급격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성은이 망극하여이다'라고만 하는 것이 모든 인민들의 자랑이었는데 지금은 '대통령 너나 내나!' 이런 세상으로 뒤집혔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뒤집히게 되면서 '자유'라는 단어 '진보'라는 단어는 항상 옳은 절대 진리처럼 되었고 이 단어를 반대하는 사람은 무조건 매장되는 세상 환경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급변하게 되면서 그 세상의 '자유 지상주의' 사상은 세상의 눌렸던 무지자들을 소위 해방시키는 방향만으로 나가지 않고 엉뚱하게도 그 세상 안에 있는 교회 울타리를 타고 들어와서 '교회도 자유 아니냐!' '교회도 진보가 옳다!'는 기상천외한 망발이 움돋게 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교회의 자유는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하는 자유'만을 자유라고 합니다. '하나님 시키는 대로 잘하는 정도가 진보'입니다. 그런데 귀신이 세상을 '자유'와 '진보'의 동산으로 만들어놓고 교회 울타리 안에다가 이 사상을 집어넣으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 있는' 자유, '세상을 닮아 가속도로 타락해 나가는' 진보를 교회가 원래 가져야 할 자유와 진보라는 단어와 혼동을 시켜버렸습니다.
이미 세상 분위기가 다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고 또 교인이 세상 사회인 중에 하나로 살다보니까 심지어 교인들까지도, 지옥갈 세상사람들의 표현과 천국 갈 교인들이 사용할 표현은 언어가 다르고 사고체계와 그 방식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고, 악령이 쳐놓은 거대한 거물, 즉 세계사를 움직여 나가는 방향에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습니다.
④ 우리는 이 순간, 세상 분위기와 여론몰이를 웃어가며 내려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전 동네 골목에 엿장수들이 세살 먹은 아이들을 모아놓고 엿 한 개를 팔려고 별별 이야기를 하고 꼬시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빙긋 웃으며 지나 갈 뿐입니다. 그 엿장수 이야기는 그냥 엿 한 개를 팔겠다는 것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여름 밤 동네 아이들을 불러 모아 놓고 호랑이 담배 피우던 것을 직접 본 사냥꾼의 이야기에 숨을 죽이고 듣는 아이들을 보면서도, 그 참 말 재담이 있어 저 시끄러운 놈들을 조용히 시켜놓았네 하는 정도로 그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 이야기 하는 판에 들어가서 호랑이과는 입술이 언청이처럼 찢어져 있기 때문에 담배연기를 코로 내뿜을 수 없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느냐고 논쟁을 한다면 논쟁을 하는 사람의 성격이 좀 문제일 것입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그 이야기를 생생한 현장감을 느끼고 진실로 알아듣습니다.
6․25나 월남전에 참전한 군인들 중에서 정말 적을 많이 죽였던 사람들은 몸서리치고 잔인했던 그때를 기억하기 싫어서 바보처럼 입을 닫고 있는데, 후방에서 행정병으로 근무했던 사람들은 평생 전쟁에서 자기가 겪었던 영웅적인 행동을 떠벌리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냥 속으로 웃고 지나갈 일입니다.
세상이 지난 수세기 동안, 특히 지난 한 세기동안 '자유'와 '진보'라는 단어를 가지고 또 '민주'라는 정치적 용어를 가지고 그 단어들은 인류의 절대 선이라며 고래고래 악을 쓰고 세상 삶의 형태를 바꾸어 왔습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이야기 같고, 사냥꾼이나 참전 군인의 허풍인 줄 뻔히 알지만 그냥 그런 수준들이니까 두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내 자식이 그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 속에 있다면 다음날 시간 있을 때 '얘야, 아니란다! 그 사람은 총을 쏘아 본 적도 없는 행정병 출신이야.' '얘야, 호랑이가 정말로 담배를 피우겠니? 그것이 정말같니?' 이렇게 한 마디를 해 주어 그런 말을 들을 때 앞으로는 그런 일이 정말인 것처럼 알아들었다가 나중에 철없는 아이들이 큰일을 내거나 흉내 내는 일이 없도록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세상이 '자유' '진보' '민주'라는 이름에 완전히 미쳐서 정신들이 다 나가버렸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남의 집 아이들이고 옆집 아저씨들이니 내가 끼어들어 시비할 사안이 아닙니다. 만일 온 동네가 그런 전설과 신화를 실제 상황으로 알아듣는다면? 그래도 속으로 웃고 지나갈 일이지 그들에게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그렇게 듣지 말라고 운동을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향해 가는 일에만 전력해야 할 특수사명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세상이 무엇이라고 떠들든지 우리는 세상을 향해 세상이 무슨 말을 해도 초연히 냉정하게 초월하여 그들을 아래로 굽어보며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적어도 천국 가는 구원의 길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그들은 세살 먹은 아이들의 인지도와 지식밖에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이 현대 과학으로 어떤 획기적인 것을 발명했다고 큰소리를 쳐도 만유 위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 된 우리로서는 전부 내 재산 목록에 추가될 것 하나를 듣는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혹 말씀과 틀린 것을 주장하면 '가 봐야 안다. 이 무지한 인간들아!' 이렇게 내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5공청산'이라고 온 나라가 떠드니까 교회와 목사 입에서도 '5공청산'
세상이 '민주화'라고 떠드니까 교회도 '민주화'
세상이 '열린 세상'이라고 선전하니까 교회도 '열린 교회'
세상이 '보수를 타파하자'니까 교회도 '(진리와 하나님) 보수를 타파하자'
세상이 '구조조정을 통해 경영합리화'를 하자니까 교회도 '구조조정'
세상이 '젊은이로 물갈이를 하자'니까 교회도 '늙은 것은 물러나라'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말하면 웃어넘기겠는데 한 몸 된 형제들이 이렇게 세상의 유행 따라, 세상 정치 경향 따라, 세상 흘러가는 세태 따라 척척 발을 맞추고 나가니 교회가 생명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진리에 붙들리기는 커녕, 교회가 세상 속에 살다가 아예 세상이 다 되어버렸습니다.
⑤ 신앙의 '자유주의'란 교회를 세상으로 만들자는 타락주의요 하나님 진노자초주의입니다.
5백여 년 지난 세월 세상 역사를 통해 귀신이 자유와 진보를 앞세워 '보수'라는 낡은 가치관을 제압했다며 열을 올리고 있는데 그들의 세계에서는 어느 것이 좋은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개념과 물결이 교회 울타리 안에까지 세탁도 하지 않고 목욕도 하지 않고 위생처리도 하지 않고 그대로 들어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잘못된 '보수'를 고치자는 경우도 있지만 현재 교계에서 사용되는 '자유주의'라는 신앙흐름은 신앙이 아니고 불신입니다. 그 시작은 바로 아담 하와의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이 자유로와야 한다며 뱀이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음으로 이제는 하나님중심 대신 자기중심의 사람이 되라고 안내를 했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에덴동산 안에서, 창조 직후에, 바로 그 짓을 했습니다.
인간들이 볼 때는 인간이 하나님 수준으로 올라갔으니까 '진보'였습니다. 하나님중심에 매였다가 풀려나왔으니 '자유'였습니다. 이후 가인이 제사를 두고 하나님식이 아니고 자기중심의 자기식으로 자유주의를 부르짖었고 진보주의 사상에 선구자가 됩니다. 물론 가인과 아벨 당시에 존재했던 구호 중에 '자유주의'라는 간판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2. 질문 내용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① '자유주의'는 에덴동산에서부터입니다.
자유주의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 하나님의 품 안에서 벗어날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보다 한 발 앞서 천사였던 사탄이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나서 제 존재를 알리려 우주에 나타났으니 무척 발전을 한 것입니다. 천사는 아무리 잘 나도 '종'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스스로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도록 독립을 선포한 자주자입니다.
인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온갖 죄와 더러움과 혼동이 있어도 그 속에서 한 분 하나님을 따라 있는 힘 다하여 따라 오는 우리를 만드시려고, 그런 우리를 만드는데 필요한 현실 환경 여건 역사적 전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자유자의와 세상 속화로 나가는 속도가 빠른 진보라는 개념은 인간을 만드는 순간부터 즉시 함께 출발시킨 체제입니다.
물론 이름은 시대마다 달랐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선악과'로 표현되었고, 가인 때는 '자기중심의 제사'였고, 노아 때는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출애굽 때는 모세의 통제와 지도를 벗어나는 '고라'라는 인물로 나타났고, 사울 때는 '아각을 살려두는 배려'로 나타났습니다.
초기 교회역사에서도 어거스틴과 맞서 자유주의를 신학적으로 확립했던 사람이 펠라기우스였습니다. 그후 1000년이 더 지나면서 아리우스가 나왔습니다. 역사를 통해 그 이름은 늘 바꾸고 있습니다. 환경과 현실도 다 다릅니다. 그러나 그 밑에 흐르는 본질은 항상 그 마귀가 그 마귀입니다. 그 귀신이 바로 오늘 그 귀신입니다. 백목사님 설교록에서 '박첨지놀음'이라는 탈춤 이야기가 나옵니다. 탈춤을 추는 사람들은 머슴탈 주인탈 .... 탈을 쓰고 나올 때마다 등장인물이 달라지지만 그 탈바가지를 확 벗겨버리면 내나 그 놈이 그 놈입니다.
천하를 어지럽히는 귀신의 본질과 그 귀신이 '자유주의'라는 탈을 뒤집어쓰고 오늘 2000년대를 통째로 삼키되 세상을 자유주의로 삼키는 것은 세상이 발전이라고 하기 때문에 변론하지 않겠지만 교회를 그 이름으로 삼키는 것은 참으로 탄식이며 대유혹입니다. 알고 보면 유혹이 될 것도 없는 유치원 수준의 장난인데.
그 놈, 마귀가 로마 수백년의 대량 학살로도 막지 못했던 복음운동을 오늘날에는 말 한 마디로 가지고 교회를 안으로부터 다 삼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에 가장 앞서 첨병이 되어 앞잡이 노릇을 하는 곳이 신학교 내부에 있습니다. 신학교 안에 신학교수들이 세상학교의 학자들과 이름이 같다고 해서 그들을 흉내내어 '학문자유' '학설발표의 자유' ..... 라는 자유를 내세워 예수님을 믿고 천국가는 길도 있지만 다른 제3의 길도 제시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느냐.... 고 말꼬리를 뱅뱅 잡아돌리니까, 신학생들이 교수라는 간판에 눌리고 홀려서 멋모르고 졸졸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지금 삶겨나가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마치 가마솥 안에 들어가 삶기고 있는 팥이 가마솥을 배워 팥의 생명력을 키우겠다고 하는 꼴입니다.
② 원어와 고고학을 중요시하게 된 것은
초대교회 복음 전파는 당시 국제적으로 본다면 로마 그리스 문화권 안이었습니다. 로마 그리스 문화권은 대단히 학구적이며 철학적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는 오로지 성령으로 말씀 전하는 딱 한가지에만 주력을 했는데, 당시 세계를 장악하던 분위기는 학술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무식하다면 무식한 취급을 받던 때였습니다. 그들에게 무식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교회의 가르침도 이렇게 학술적이며 문학적이며 논리적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노력하다가 복음은 분실하고 학문만 남아버렸습니다.
복음이 원래 바로 전하여진다면, 베드로처럼 주어진 언어환경에서 성령에 붙들려 움직이니까 언어적 장벽은 성령이 초월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2장의 방언 역사요 신약교회의 복음 전파가 세계를 향할 때 언어장벽과 문화장벽 등 모든 종류의 인간적 장벽을 어떻게 넘어서는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나 배운 것을 쉬이 잊어버리는 강퍅 때문에 오순절 역사로 보여준 '복음 전파의 방법론'은 버리고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서 인간적 방법을 발달 시킨 것이 고고학과 원어를 강조하는 신학의 발달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혹 교회사에서 구체적으로 어느 시점부터 그런 문제들이 집중적으로 부각되었느냐는 문제로 따진다면 이곳은 학문적 연구 자체를 피하는 곳이므로 알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교회사에서 객관적으로 전해지는 증거에 의한 판단은 몰라도 그 교회사를 움직이는 근본 원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으므로 교회사를 논하는데 별로 주저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령에만 붙들려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생명 걸고 따라가던 성도가 조금 타락하게 되면 성경을 더 잘 알기 위해 고고학과 원어 중심의 신학을 잘해야 한다고 나가게 되고, 고고학과 원어를 중심으로 열심히 하다보면 신앙조차도 합리적인 인간 기준의 판단에 의하여 재구성이 되어지고, 그리되면 인간 자기 기준에 이해가 되는 것은 받아들이고 인간 차원에서 이해가 되지 않으면 성경을 우화나 신화로 돌려버립니다. 그리고 나면 귀신이 본 모습을 나타내고 여기까지 오느라고 동무들 고생했다고 인삿말을 합니다. 들리는 세상 이야기로 남한 내 반발세력들을 북한에서 포섭했던 과정이 비슷할 것입니다. 자고로 서툰 도둑은 담을 넘지만 조금 수준이 높은 도둑들은 '나 도둑'이라는 간판이나 행동을 그렇게 쉽게 드러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니 무지하면 마지막에 죽어야 죽은 줄 아는 법입니다. 우리에게는 죽기 전에 죽음을 알고, 죽기 전에 천국과 지옥까지를 미리 볼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중생시켰습니다.
③ 종교개혁 뿐 아니라, 교회사에서 건전했던 때는 신학으로 멀어질 때였습니다.
루터와 칼빈이 천주교 신학체계 속에서 자란 사람들입니다. 그 속에 있을 때는 천주교의 잘못을 알지 못했고 그 속에 갇혀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을 천주교로 인도하던 적기독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경을 직접 알고 접하게 되면서 모든 것은 돌변했습니다.
그런데, 후세대는 또 다시 그들의 의미를 평가하면서 루터와 칼빈이 가졌던 신학적 소양이 개혁을 했다고 착각을 합니다. 특히 칼빈은 유명한 원어학자입니다. 소시적부터 당대 최고의 원어학자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천주교를 배웠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 어학 때문에 개혁을 한 것이 아니고 만일 그 어학 때문이었다면 오히려 루터와 칼빈은 더욱 천주교적인 인물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 칼빈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능가하는 천주교 신봉자였을 것입니다.
천주교 신학과 어학에 충실한 학자로 걸어가던 칼빈이 천주교가 완전히 틀렸다고 알게 된 것은 성경 자체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칼빈은 평생 성경이 가라는 데까지만 가고 성경이 서라는 곳에는 서라는 명언으로 후학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도 후학들은 칼빈의 명성이 부러운 나머지 칼빈을 닮기를 노력하면서 칼빈의 성경제일주의를 닮는 것이 아니고 칼빈이 보유했던 천주교 시절의 여러 기술들, 즉 원어 등의 신학과 법학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원어와 법학이라는 기술을 칼빈이 탁월하게 가졌지만 그 면만으로 말하면 당대에도 또 지난 세대에도 칼빈 못지않은 인물들이 항상 있었습니다. 특히 유대인 중에서는 그런 인물들이 꽉 찼었습니다. 성경 원어에 대하여 태생적으로 모국어 사용이 가능했던 이들이 자기들의 탁월한 원어실력으로 했던 일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었습니다.
한국교회 보수계통으로 예를 든다면, 박형룡과 박윤선이라는 이름이 각각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에서 두 기둥처럼 되어 있고 한국교회 보수신학의 선조급으로 숭상을 받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초기 미국의 신학 유학을 거치고, 원어와 영어 등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교회 보수계통은 미국에 유학을 갔다 오고 영어를 잘하는 것이 곧 바로 신학자가 되는 무조건적 지름길인 줄 아는 착각에까지 들어서고 있습니다.
지금도 비자가 나오지 않아서 유럽 등으로 유학을 가는 이들이 대다수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학문적 깊이나 청교도 신앙의 발생지라는 등의 이름을 붙이지만 내심 미국 유학에 필요한 비자 발급의 길이 없어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하는 분들이 거의 전부일 것입니다. 박윤선목사님과 같은 분이 원어와 신학과 어학을 버리고 오로지 성경만 보고 앉아 있었더라면 한국교회는 또 한분의 위대한 점; 모실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박윤선 박형룡이라는 거목들을 한국교회가 아깝게도 신학이라는 오물통에 내버려두게 된 손실이 너무 크다는 자책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④ 고고학은 세상 고고학 발전사와 정확하게 그 발전의 정도가 일치합니다.
세상 역사가들이 고고학을 통해서 역사적 학문을 발전시키던 것을 뒤따라가며 신학도 고고학적 접근에 눈을 뜨게 됩니다. 세상 고고학을 앞서 본 적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고고학의 한계이며 그 고고학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이는 자증입니다.
물론 이 문제도 좀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고고학적 증거로 확인하려 했고, 예수님은 역사 속에 묻혀버려 다시는 재현할 수 없는 당시 상황을 남아 있는 흔적을 보여 믿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믿고자 하는 도마에게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되다'고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못 자국이야 고고학적 인체해부학적 접근으로 사실 확인이 가능하지만 예수님의 몸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이냐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 본질적이고 더 중요한 문제인데, 예수님은 그 평생에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고고학적으로 보여주었거나 인체해부학 등으로 제시한 적은 없습니다. 마리아 뱃속에 인간으로 임하기 전의 '하나님이었던 상태'를 어떻게 증명을 하는가?
천사 미가엘이 말을 하기 때문에? 그것을 증거라고 한다면 그리스의 신화는 성경보다 수십 수백배 더 강한 증거를 수도 없이 가지고 있습니다. 제 배속으로 나은 제 아이를 유전자 검사를 해서 제 자식으로 인정하고 싶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니, 성경도 고고학으로 풀어보자는 학자들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런 주장이 횡행하게 된 오늘 교회의 타락의 정도를 탄식하는 것입니다.
⑤ 자유주의 신학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그들은 이미 하나님을 믿지 않기로 작정을 한 다음,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있거나 성경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있는지를 찾아보려고 환장을 하고 그렇게 작정을 하고 출발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순수하게 동기를 가진 분들도 있고 또 어떤 분들은 더욱 잘 믿기 위해 여러 면을 연구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자유우의 신앙의 방편이나 표현을 사용하는 분들도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들이 이 나라를 완전히 깔아뭉개기 위해 몰려들어올 때는 적들의 군사들이 어린 나이에 끌려왔는지, 자진해서 왔는지, 직업 군인인지, 죽이기 싫은데 뒤통수에 총 맞기 싫어서 이쪽을 향해 총을 쏘는지 일일이 구별할 틈이 있겠습니까? 그런 연구는 훗날 전쟁의 참상을 알지 못하고 밀려오는 적들 앞에 자기와 가족의 생사를 두고 느낀 절박감을 모르는 학자들이 논문거리로나 연구하도록 내버려 둘 일이고, 일단 몰려오는 적들이 사정없이 이곳을 향해 쏘아대면 방어하는 쪽에서 할 일은 무엇이겠는지요? 일단 적을 제압해 놓고 볼 일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것은, 술 담배처럼 끊어놓고 볼 일입니다. 마약과 같은 것이니까 일단 감옥에 집어넣고 볼 일입니다. 불신자를 전도해서 믿게 하는 것이 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