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앙과 과학의 관계와 무속적 사고의 특징과 성격은?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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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앙과 과학의 관계와 무속적 사고의 특징과 성격은?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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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질문 : 신앙과 과학의 관계와 무속적 사고의 특징과 성격은? 20

안녕하세요? 저번에 학교 레포트 쓸 때 도움을 주셔서 정말 알찬 레포트를 썼지요 이번에두 질문이 있어서 왔답니다. 이번에는요 기말고사 공부하다가 잘 모르는게 몇 가지 있어서요. 교수님이 몇 가지 질문을 내주셨거든요 그 중 한문제가 자료도 찾아봐도 없고 저 혼자 할려니 힘들어서 도움을 좀 받을려구요 질문 그대로 말하자면,

과학의 객관성을 근거로, 과학의 종교에 대한 우월성을 주장하는 입장을 비판하고 (왜 잘못되었는지, 과학이 객관적 지식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야 함) 과학과 종교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 설명하시오. 이렇답니다. 좀 가르쳐 주세요.

그리고 시간 되시면 '무속적 (신앙적) 사고의 특징과 무속을 단순한 미신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반박하시오' 에 대한 답변도 해주세요 이 질문은 제 생각과 자료를 찾아서 대충 답안을 정리 해 놨는데 그래도 좀더 얘기해주신다면 참고해서 더 정확한 답을 할 수 있을거 같아서요 부탁드리겠습니다. .


답변(서론) : 답변에 앞서 ‘종교’라는 단어의 사용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1. 질문하신 분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최근 모든 신학계의 용어 사용 중 하나를 조심하자는 뜻입니다.

과학이 종교를 주관이라 하여 정확지 않다고 하며 과학은 객관적이며 따라서 정확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살펴보기 이전 이 문제와 직접 상관은 없지만 우리가 신앙생활 도중 흔히 사용하는 '종교'라는 단어가 무의식중에 우리 신앙을 크게 흐리게 한다고 느껴져 간단한 의견을 표시합니다.

2. 우리는 불교의 신인 석가를 우리의 불쌍한 이웃정도로 상대하는 사람입니다.

백영희목회연구회의 신앙은 오직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고 모든 종교는 우리 신앙을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소모품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며 석가는 우리의 이웃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석가를 전도하여 예수 믿게 했으면 하고 그가 지옥으로 가지 말았으면 하는 인식입니다. 석가의 제자들이라 할 수 있는 오늘 불교인들은 우리의 불쌍한 이웃인 석가를 신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니 말하자면 불교인들에게 우리는 오늘 현재 모습만 가지고도 석가와 같은 수준 즉 신으로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계산을 하게 되는데 다만 성경이 금하기 때문에 불교도들에게 석가의 이웃인 우리를 그렇게 높이 상대하거라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은 이런 차원이기 때문에 우리의 하나님을 석가와 같은 수준으로 놓고 불교계와 의논을 한다든지 또는 하나님을 제작된 신들 중에 하나로 보고 신들을 통폐합하는 종교통일 운동은 노망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3. 종교라는 단어가 우리가 사용하는 우리말에서는 우리의 신앙관을 대단히 혼동시킨다고 봅니다.

종교는 주관적이며 과학은 객관적이라는 문장이 있다면 이 우리 말을 상대하는 우리나라 사람의 인식에서는 심지어 우리 믿는 사람까지도 불교 유교 기독교 등 모든 종교들은 주관적이며 과학은 객관적이라는 뜻으로 이해가 된다고 봅니다. 다른 종교 속에 기독교를 넣은 다음 모든 종교를 포함시킨 단어로서 '종교'라는 단어는 우리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는 사용해야 할 때가 아주 희귀하다고 봅니다. 현재 정치권과 종교계의 갈등, 종교계도 환경과 통일 문제에 관심, 종교와 과학의 관계... 등으로 표현되는 것은 백영희목회연구회에서는 아주 극단적으로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어떤 차원 어떤 분류 어떤 기준에서도 함께 들어갈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질문하신 내용 중에 잠깐 언급된 '종교' 때문에 말씀을 드리게 되었으나 실은 오늘 우리 기독교계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모든 '종교'라는 단어 사용에 대하여 조심하여 그 단어를 생각해 보시라는 뜻입니다.

'과학과 종교'라고 한다면 과학과 모든 종교라는 의미가 강하다고 보며
'과학과 기독교'라고 한다면 우리가 가진 신앙은 과학을 어찌 보냐는 뜻으로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과학과 신앙'이라고 한다면 우리끼리는 우리가 너무 편하게 사용하는 '우리 신앙'이라는 뜻이 될 것 같고 동시에 외부에서 본다면 '과학과 종교'라는 표현과 동일하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백영희목회연구회에서는 기독교를 '종교'라는 단어로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있다고 한다면 분명히 위에 있는 뜻이 명확하게 되는 경우 그리고 꼭 그 단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을 때만 선별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단어 역시 여러 종교 중에 하나라는 인상이 남아 있어 타종교와 특별히 구별시켜야 할 때가 아니면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백영희목회연구회에서는 '종교'나 '기독교'라는 단어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대개 '신앙'이나 '교회'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신앙이나 교회라는 단어가 문장 중에서 우리 기독교인들만의 신앙이나 교회라는 뜻으로 누구든지 읽겠다고 생각될 때 백영희목회연구회에서는 주로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말한다면 'the'를 붙여 버리면 아주 간단하겠지만 우리말은 문맥 중에서 'the'를 대신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답변1 : 시간의 흐름을 두고 살펴보지 않으면 과학을 객관으로 오해합니다.

1. 과학은 정확하고 우리 신앙은 틀렸다는 말을 주관과 객관이라는 기준에서 말한 것이 잘못입니다.

1) '주관'과 '객관'이라는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면

가장 좁게 말한다면 주관적이란 자기가 본 것이라는 말이며 객관적이란 밖에서 본 것, 즉 남들이 보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과학이 신앙을 향해 '주관적'이라고 멸시하는 표현으로 나올 때의 '주관과 객관'이라는 단어는 좀더 넓은 의미입니다. 즉, 주관이란 어느 한 사람이 하나만 생각하여 잘못 알고 있는 것이며 객관이란 많은 사람이 많은 면으로 보게 되어 전체를 파악했고 그래서 사실이며 정확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생각한다면 학문이나 합리적 사고를 하는 사람으로 볼 수 없습니다. 객관이라는 것은 전체를 파악한 사실이며 공정하다는 뜻을 가지게 되지만 어디까지나 시간적으로는 현재시점에서만 본 것이기 때문입니다. 객관을 전체를 바로 파악한 사실이라는 의미로 보려고 한다면 시간이라는 개념을 추가시켜 어제도 또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할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여러 면에서 본 것을 종합하되 세월이 흘러도 역시 옳고 바른 것이라면 진정한 객관이 될 것입니다.

2) 과학이 주장하는 자기들의 기준만을 가지고 말해도 이미 말이 되지 않습니다.

과학은 객관적인가? 그럴 것같이 보입니다만 뉴턴으로 인해 모든 과학이 새로 쓰여지다시피 했다는 것은 과학자 자신들이 먼저 한 말입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 때문에 뉴턴 이후의 과학적 사실이 다시 재구성 재편성되었다는 것 역시 과학자들이 한 말입니다. 과학자들이 늘 주장하는 대로 과학이란 너무 오묘하고 그 세계가 끝없이 깊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니면 무슨 말인지 설명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어려운 학문입니다. 그러나 아주 무식한 우리가 알기에도 뉴턴의 출현으로 뉴턴 이전의 과학적 사실들이 뒤바뀐 것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과학사의 혁명으로까지 표현되고 이후 아인슈타인의 출현에서도 그런 표현이 있었던 바 이는 과학자들 스스로 내린 판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바뀌지 않을 사실들만 가지고 있는 것이 과학인가? 즉 과학이란 진정 객관적인가? 라고 반문을 한다면 그들이 기본 독해력을 가지고 있는 한 과학은 객관적이라는 표현을 취소해야 할 것입니다. 현재 이 시간에도 과학은 오늘의 결과로 가지고 어제 자신들이 주장했던 것이 틀렸다고 발표하고 나오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따라서 이전보다 많은 것을 알아가고 이전보다 많은 것을 발견해 간다고 한다면 몰라도 과학은 현재로서 객관적인 것이며 과학은 정확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너무도 비과학적인 주장이라 할 것입니다.

즉, 과학은 객관적이기를 원하고 노력하고 있지만 객관적일 수 없었고 또한 객관적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해야 옳습니다. 완전이라야 불완전을 완전으로 만들지 불완전이란 완전을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 자체가 불완전한데 그런 존재가 완전을 만든다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 자체가 주관적이지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즉 그런 주장은 미신적이며 자기 최면이지 결코 과학적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꼭 이 주장을 반박하려 한다면 자기들이 목표하는 어느 날, 과학이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사실들을 다 찾아낸 후에 비로소 과학은 진정한 객관적 분야라고 해야 합니다. 과학은 이치입니다. 하나가 틀리면 전체는 다 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지나간 과거보다 더 많은 것이 발견 발명되었다고 과학이 객관적임을 선포한다는 것은 불신 세상사람 중에서도 역사가들이나 철학가만 되어도 웃을 일입니다.

3) 꼭 객관적이라는 표현을 하겠다면 오히려 더 객관적인 것은 기독교입니다.

과학이 주로 신앙에 대하여 시비를 거는 것은 물리 현상에 대한 것입니다. 물리 현상에 대하여만 국한한다고 하더라도 성경은 초기 과학자들이 미신 덩어리이며 전설이라고만 상대를 했습니다만 지금은 초기 과학자들로서는 상상도 못할 만큼 과학적으로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어 온 역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창조론은 불과 100여년 전에는 대표적인 미신으로 지적해 온 것이 과학계였으나 지금은 과학이 과학의 기준으로만 보더라도 창조론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거의 근접하고 있습니다. 인체공학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유전자문제도 하나님의 절대 계획 절대 창조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며 이것이 진화론에 근거라는 증거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떨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알지 못하고 성경을 사랑하는 심정만으로 성경이 말하지 않았던 것을 말했던 천주교의 천동설이나 오늘 교계의 이분설 때문에 유전공학이 마치 성경의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오늘의 과학은 성경을 잘못 깨달은 것을 보여주며 동시에 성경이 원래 말한 바를 바로 뒷받침하고 있을 뿐입니다.

4) 신앙이 객관적임은 이런 주장으로 결론을 맺겠습니다.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진정한 진리, 그것이 과학이면 과학이 객관적일 것이고 그것이 성경이라면 우리의 신앙은 세상사람 기준으로 보더라도 객관적일 것입니다. 오늘의 과학과 어제의 과학은 분명히 수정이 있었고 개정이 있었으며 심지어 완전히 뒤집어져 왔던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과학이나 다른 종교와는 달리 어제도 오늘도 변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담 때의 진리와 예수님 때의 진리, 그리고 오늘의 진리가 동일했으며 앞날에도 동일합니다. 어떻게 단정할 수 있겠는가? 성경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 어느 사람 어느 사건에서도 한 진리 한 기준이었고 변한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 신학은 성경을 정확무오하며 절대불변의 진리라고 고백하고 있으며 이런 신앙은 교회가 진정한 교회로 유지되어 온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경우에서든지 일관되게 내려 왔습니다. 혹 이전은 과학을 모르는 상태여서 그렇게 주장했을 것이라고 하겠으나 오늘 21세기 과학을 그들의 교육대로 다 받고 나온 교인들로서도 동일하게 이전처럼 믿고 있습니다. 앞으로 상상 못할 어떤 과학적 결과가 나온다 하더라도 신앙을 참으로 바르게 가진 사람이라면 현재의 과학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는 것이 성도이며 그들은 앞날에 과학이 어디까지 나갈 것인지도 미리 예측해 놓고 있으며 그 예측 선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과학입니다. 이유는 과학이란 물질의 이치이며 물질의 이치는 물질로 만들어진 이 우주 범위 안에 있는 것이며 우리가 가진 성경은 이 물질로 된 우주를 만들 때 이 우주계와는 다른 차원 다른 재료로 만든 영계까지를 없는 가운데서 단번에 창조한 성경이기 때문에 물질계인 이 우주 안에 물질들의 이치만을 추적하는 과학에 대하여는 근본적으로 손바닥에 놓고 헤아릴 수 있는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과학이 좋아하며 즐기는 결과적인 주장이며 일관적인 주장이며 동시에 반복적으로 입증가능한 주장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것입니다. 현재 과학이 가장 첨단으로 내세운 모든 인간공학 관련 결과는 한 마디로 인간에게 있는 물질로 된 몸과 마음에 관련된 결과이며 이 물질로 된 몸과 마음은 물질의 이치를 연구하는 과학에게 이미 하나님이 허락하신 분야입니다. 문제는 물질로 되어 있는 않은 것, 즉 마음이 아닌 영, 천국을 두고 과학은 단 한번도 손을 댄 적도 또 연구한 결과를 보인 적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주장입니다.



답변2 : 신앙과 과학의 바람직한 관계는? 신앙이 과학을 대할 때는?

1. 신앙인이 가질 과학관

신앙과 과학, 또는 과학과 신앙의 관계 등이라는 표현은 죄송하지만 표현 자체에 대하여 극히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신앙인이 과학에 대하여 가질 자세라는 표현이 좋을 듯 합니다.

1) 과학은 하나님이 주신 자연은총, 즉 물질계인 이 우주 안에 담아 주신 하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우선 크게 나누어 신령한 것과 물질의 것이 있다면 천국에 속한 것은 신령한 것이며 오늘 물질계에 속한 것은 물질의 것입니다. 가족 사회 국가 문학 예술 동 식물 등 자연의 것들 등이 다 물질의 것입니다. 가족을 물질에 속했다고 하면 대개가 이견을 가질 것이지만 불신자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면 얼른 이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교회 성경 기도 또는 천국 하나님의 아들됨 등은 신령한 것입니다. 물질의 선물은 신령한 선물에 비하여 그 종류나 가치가 비교할 수 없이 천한 것입니다. 그 물질에 속한 선물 중 가장 가치가 적은 것 중에 하나가 과학입니다. 과학은 물질의 이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으신 것이 없다면 과학도 하나님이 만드셨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비록 신령한 복, 영원한 영계의 복은 아닐찌라도 이 땅위의 자연은총, 불신자들에게까지 주신 하나님의 선물 중의 하나라고 단정할 수 있고, 이렇게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만 확인하게 된다면 우리는 과학에 대하여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지 또는 신앙과 과학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는 아주 쉬운 문제가 될 것입니다.

2) 과학도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신앙인이 가질 과학과의 바람직한 관계, 절대적으로 가질 관계입니다.

① 신앙은 주격 과학은 소유격

머슴이 비록 주인보다 힘이 세고 또 농사를 잘 짓는다고 해도 머슴은 머슴이고 주인은 주인입니다. 과학이 어떤 놀라운 일 어떤 경이로운 결과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머슴이며 우리의 소유물입니다. 과학을 상대할 때, 나는 저 과학과 과학의 모든 결과에 대하여 주인의 위치를 가졌고 저 과학은 내 소유물이며 내 머슴으로 대해야 합니다. 주인은 힘이 있다고 주인되는 것 아닙니다. 아버지가 물려주면 비록 3살먹은 어린아이일지라도 천하장사를 소유물로 지니게 됩니다. 비싼 보석도 그러합니다. 김정일의 아들이 30세 밖에 되지 않는데도 아버지 배경으로 세계를 쳐다보며 얼마나 건방지게 못되게 깔아보고 있습니까? 제 아버지를 알고 그 아들이라는 자신감의 표시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누구며 우리는 누구입니까? 오늘 과학에 주눅이 들어 과학에 종질을 하고 과학에게 주인자리를 양보하고 신학과 교회는 과학의 눈치를 살피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과학과 신앙의 바람직한 관계는 우선 신앙을 가진 우리는 과학의 주인으로 주격임을 알아야겠고 과학은 종 됨을 확실히 해야겠습니다.

② 우리는 사용, 과학은 이용물

하나님을 따라간다는 단어가 신앙입니다. 순점: 행동에 강조를 두었고 신앙은 행동을 하게 된 원인 즉 마음의 자세를 강조한 단어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같은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따라 갑니다. 하나님 시키는 대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생활인데 이렇게 하나님 시키는 대로 살아가고 따라가는데 과학은 이용하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사용하는 위치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우리는 그 명령에 순종하는 신앙으로 살고, 그런데 이렇게 신앙으로 사는 일에 과학이라는 것은 이용되어지고 사용되어지도록 하나님이 과학을 세상에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렇게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배를 기뻐하시고 예배드릴 집을 마련하라 하면 우리는 그분이 미리 예비하고 준비해 놓은 과학이라는 방편을 통해 예배드리기에 적절한 집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외국으로 복음을 전하라 하시면서 사도바울에게는 배라는 과학의 산물을 그 시대에 하나님이 주셨으니 배를 이용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 웅장한 배를 타고 가면서 그 배를 만든 과학에 비굴해지거나 놀라거나 주눅들거나 그 배를 운용하는 항해술에 피동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복음 전파에 필요하여 미리 이런 과학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고 그러나 이 과학물도 하나님이 파선시키면 점L 한 장처럼 날아감을 알았기 때문에 그 배 위에서 하나님이 준비한 과학물을 황소 보듯 감사히 보면서 동시에 한 장의 점L처럼 우습게보았습니다. 그리고 파선될 지경에 이르자 바울은 그 바다와 그 범선과 그 범선을 움직이는 과학자들을 향해 주격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대로 한 마디 던졌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바울의 한 마디 신앙행위에 지중해와 광풍 그 시대 최고의 과학은 무릎을 꿇었습니다. 바울은 복음 전파의 길에 그들에게 주인노릇만 한 것이 아니라 복음전파에 그것들을 크게 이용하였습니다.

③ 자연계시인 과학은 하나님을 알아가는데도 대단히 중요한 실물교재입니다.

풀 한 포기도 쳐다보고 있으면 하나님의 솜씨 하나님의 경영 하나님의 심정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쉽게 공부하고 알아가도록 만들 때부터 그리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자연의 이치이며 물질의 원리입니다. 없는 가운데 이것을 만든 분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만드신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알아가고 닮아 가는데 필요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과학도 그 속에 하나님의 솜씨 하나님의 뜻 하시는 바 또는 하나님을 따르는 우리가 알아야 할 많은 학습이 있습니다. 왕궁에 모든 것은 왕이 될 왕자에게 왕이 되는데 필요한 학습물이며 실습장이라고 한다면 과한 것이겠습니까? 천한 맹자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서도 학습 환경에 필요하면 못한 일이 없는데 이 우주와 그 속에 있는 과학까지 아버지께서 우리 위해 만들어 놓으신 실습장 실물교재로 취급하신다면 과장이겠습니까? 그리 만들었으며 따라서 우리는 과학을 상대할 때 우리 신앙에 도움 되는 실물교재들로 상대해야겠습니다.

④ 과학은 신앙이 사용하고 버릴 일회용 폐기품입니다.

타락한 세상 오늘 이 땅위에서만 사용되고 참고하라고 주신 것이 과학입니다. 하늘나라에서까지 이용될 물품이 아닙니다. 죽은 뒤에까지 적용될 이치가 아닙니다. 오늘 물질계는 천국을 준비할 곳으로 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있지 땅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늘 현실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이 땅 위에서 가질 것이 있고 영원히 투자할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 땅에서만 하늘나라를 준비할 수 있고 이 땅위에서 산 그대로 하늘나라가 영원히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기 때문에 이 땅 위의 모든 삶과 현실을 하늘나라를 상대하듯 조심하는 것입니다. 과학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죽는 순간, 그리고 이 땅이 마쳐지는 날, 그 날부터 우리는 이 땅 위에서 생전에 사용하고 이용하던 과학은 우주를 불 태울 때 함께 태워버리고 영원히 소각해 버리고 그 대신 오늘 과학의 진짜 주인인 진리로만 살게 됩니다. 오늘은 우리가 어두워졌기 때문에 어두운 우리에게 영원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일시 진리 비슷하게 보이는 이 땅 위에 진리라고 알려진 과학을 접촉시켰습니다. 말하자면 과학은 세상사는 동안만 참고 되고 사용할 일회용품일 뿐입니다.



답변3 : 무속적 사고의 특징과 성격은 ?

1. 용어에 대한 양해 말씀을 앞에서도 잠깐 드렸습니다.

1) 무속에 대한 기본 인식

일단 질문내용은 '무속을 단순한 미신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반박'하라고 했는데 이는 무속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보아 종교차원으로는 볼 수 없으나 그렇다고 미신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대단히 불쾌하게 본 듯한 신학자의 어투인 것 같습니다.

인간이 인간 이상의 존재를 대하는 자세에 대하여 종교, 무속, 미신이라는 3단계 분류법이 있습니다. 무속은 기독교 천주교 불교와 같은 종교 차원으로는 대접을 받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미신으로 취급되는 것은 섭섭하다는 분류법입니다. 물론 무엇이 종교이며 무속이며 미신인가라는 기준을 말하라면 애매하게 답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미리 하나 양해 구할 것은 백영희목회연구회에서는 무속이나 미신이나 다른 종교나 꼭 같은 죄수취급을 하는 곳입니다.

절도나 강도나 살인자나 교도소 내부에 있어야 할 사람들로 본다는 뜻인데 교도소 안에서는 거물급 죄수들이 흔히 항의하는 것이 '내가 이런 잡범들 하고 같은 줄 아냐?'는 것입니다. 교도소 안에서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만 교도소 밖에 있는 양민들에게는 그 놈이 그 놈입니다. 죽이려고 갔다가 사람이 없어 물건만 훔쳤는데 잡혔으면 절도고, 훔치려고 들어갔는데 생각지 못한 저항이 있어 실수로 죽여 초범에 살인범이 된 것입니다.

2) 무속과 미신의 차이란

종교와 무속과 미신이란 장사가 얼마나 잘 되었느냐는 것일 뿐입니다. 사회 기여도, 인류 문화사 등을 들먹이는 것은 신학자들의 사치스런 말장난이고, 실제로는 크게 번창했으면 종교가 되고 동네 구멍가게에서 그치면 미신이고 중소기업이면 무속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 속에 있는 공포심 외경심과 같은 본성을 깊이 통찰한 사람이 시작한 미신이 환경을 잘 만나면 종교가 되는 것이고 큰 종교로 번창할 기본요건을 다 가졌으나 운이 없으면 미신으로 분루를 삼키는 것입니다. 정주영씨가 초기에 사업이 몇번 막혔다면 쌀가게 주인 노릇했을 것이고 요즘 큰일을 내는 벤처창업 대학생들이 운 좋게 기류를 타면 세계기업가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공한 미신은 무속이 되고 성공한 무속은 종교에까지 이릅니다. 그 반대가 되면 한 단계씩 내려갑니다. 이렇게까지 단정하는 것은 큰 귀신을 팔아 사업을 하면 종교이고 작은 귀신을 팔아 사업을 하면 무속과 미신으로 내려가는데 실은 큰 귀신 작은 귀신을 그들이 알아서 선별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 귀신을 기획하고 선발한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정한 것일 뿐입니다.

인도산 불교로 예를 든다면 석가가 귀신이거나 신인 것도 아니며 국산품 대종교가 신으로 정했다고 한다 해도 단군이 신으로 승격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이버 인간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출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이버 인간끼리 백인 흑인 인종차별을 한다고 그런 반인권적 태도를 반박하라는 식으로 질문을 준다면 질문한 사람에게 너무 자비하고 너무 인정스럽지만 학문의 자세로는 기본이 되어있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3) 학생이 이 질문에 대하여 가질 기본자세를 별개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질문하신 분은 신학교의 과제를 두고 답변을 요청했습니다. 답변자의 자세는 이러합니다. 그러나 질문하신 분에게 당장 급한 것은 답변에서 받아야 할 교수의 평가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한 내용 자체를 두고 평한다는 것은 학생으로서는 과목을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본다면, 적어도 학문의 세계라면 자기주장이란 당당해야 하고 동시에 논리와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며 이런 조건들이 충족된다면 이것을 개성 있고 확신 있는 유망한 학생으로 보아 비록 교수의 제시한 신학입장과 정반대의 것이 제시되어도 그 과정과 그 논리전개가 좋다면 학점으로서는 최고의 평가를 주어야 합니다.

일반 과목이면 점수 위주로 공부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세상 학문 지상주의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나 전공이든 선택과목이든 과목이 '신학'이라면, 그리고 그 신학관련 과목을 신앙인으로 듣고 있다면, 적어도 그 신앙적 최소한의 양식을 가지고 좀더 확신 있게 주장을 하셨으면 합니다. 무속을 미신으로 취급하는 태도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백영희목회연구회에서 답변한 내용을 이기고 비판한다면 좋은 글이 될 것입니다. 무속이나 미신에 별 상관이 없고 학점만 관심이 있다면 백영희목회연구회의 답변은 질문자 외 다른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본 답변의 취지에 동의를 한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시고 비록 하나님이 구해주지 않으면 풀무불 속에서 기쁘게 순교하겠다는 다니엘의 친구들과 같은 자세로 떳떳이 비판적으로 글을 전개했으면 합니다. 말투는 겸손하고 예의 있게 조심하여 학생이란 신분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내용은 신앙양심 문제이니 어떤 경우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이가 있다면 그는 오늘 단 돈 몇 푼에 비유할 학점에 손해를 보고 그 대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순생의 한 걸음을 내딛어 보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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