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노아의 방주(1.방주크기 2.방주의 동물 인도) 1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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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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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54
9. 질문 : 노아의 방주(1.방주크기 2.방주의 동물 인도) 1174
세상에는 수많은 동물들이 있습니다. 그 많은 동물들이 노아의 방주로 다 들어 갈수가 있어나요, 방주에 크기는 어느 정도 인지 과학적으로 가능한 것인지 궁금 하구요 그리고 그 모든 동물들을 방주에 실을 때에 동물들이 스스로 온 것인지 아니면 노아가 일일이 다 인도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방주로 인도하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 1. 방주크기는 중학교 큰 건물 정도
2..동물을 모은 것은 하나님이며, 노아는 시늉만 한 정도
'신앙과 과학'이라는 시각에서 여러 면을 살펴보겠습니다. 질문에만 집중치 못해서 죄송하나, 한번쯤 몇 가지 살펴볼 내용을 적어볼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질문자의 이해를 구합니다.
1. 우선, 성경은 자연과학이 아닙니다. 자연과학을 없는 가운데서 만든 능력입니다.
①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되는 것을 자연과학이라고 하여, 오늘 진리처럼 되어 있습니다.
1리터 통에는 1리터 내용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1리터 통에 2리터를 넣을 수 없는 것이 과학입니다. 이런 것은 수 천 년 동안 과학의 진리라고 모두들 알았고 이런 것은 절대로 손을 댈 수 없는 줄 알았습니다. 이런 자연 과학의 이치에 본격적으로 눈을 뜬 것이 세계사에서는 '르네상스'시대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미개하여 미신과 과학을 혼동하였기 때문에 종교가 사람들을 협박하여 세상이 암흑이 되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중세는 사람들이 어둡게 살았다 하여 '암흑기'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자연과학을 가지고 세상 만물을 다 이해하도록 만들고 그래서 자연과학으로 세상을 밝게 좋게 만든다고 하여 '계몽주의'라고도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허황된 종교와 신으로부터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만들었다고 하여 '인문주의'라고도 합니다. 중학교에서 세계사를 공부할 때, 서양역사를 고대와 현대로 나누고 그 중간에 있었던 중세 암흑기와 그 암흑기를 깨트려서 오늘 현대에 이르도록 전환점을 마련했던 그들의 이야기를 아주 흥미롭게 들었을 것입니다.
당시 천주교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오늘 기독교도 잘못되었다고 해괴망측한 논리로 교회 욕을 하는 교사들도 있었을 것이고,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한 과학자가 종교를 이겼기 때문에 오늘도 종교는 미신이고 과학은 진리라고 말하는 교사들은 지금 자기들이 하는 말이 문장으로 성립이 되는지 확인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인데, 어쨌든 수없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혼동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② 과학의 깊은 것은 몰라도, 그 헛점을 짚어내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1리터 물통에 1리터 내용물만 들어갈 수 있다는 설명은 자연과학, 인문주의, 계몽철학에 심취한 사람들이 즐겨 쓰던 논리였습니다. 최근까지도 이런 주장은 아주 절대불변의 진리라고 그들이 항상 써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수고하여 발달시킨 그들의 현대 과학은 1리터 통에다 2리터 3리터의 내용물도 주입하고 있습니다. 액체를 그 구성 상태와 결합 조건에 변형을 주면 수 백 배의 용량으로 줄이기도 하고 늘이기도 합니다.
알고 보니까, 과학조차도 현재 그 사람이 그 사람 수준에서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과학에 대한 의미와 본질과 그 범위가 시대마다 달랐고 사람마다 달라져 왔었던 것입니다. 지금 과학자들이 본다면 계몽주의 시대 과학은 미신이었습니다. 뉴튼의 과학이 달랐고 아인슈타인의 과학은 또 달랐습니다. 이렇게까지 그 자체가 달라지고 근본 개념이 변하게 되는 것을 알게 된 눈치 빠른 과학자들은, 과학이 과학 위의 범위에 의하여 통째로 달라질 수 있는 하위 개념의 존재라는 것을 서서히 실감하고 있음도 우리가 한번쯤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즉, 자연과학의 초보만 아는 사람은 과학만이 전부인 줄 압니다. 그러나 자연과학만을 아는 사람이라 해도 그 과학의 깊은 면을 조금 본 사람은 과학을 과학으로 만드는 과학의 원인을 느끼게 됩니다. 과학을 알아 갈수록 초보 과학에서는 부정했던 하나님의 존재를 희미하게라도 인지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건방진 소리나 철없는 소리를 하지 않게 됩니다.
③ 노아방주는 2만톤 정도이며 그 배의 규모는 이전 초등학교 콘크리이트 3층 건물정도입니다.
성경기록 중에서 노아방주만큼 과학에게 웃음거리가 된 것도 많지는 않습니다. 에덴동산 기록과 함께 노아방주는 아주 대표적인 신화라고까지 조롱을 받는 것입니다만 조롱은 인간의 자유지만 그 인간을 조롱하고 비웃으시는 하늘에 계신 분을 보는 사람도 있으니 곧 이곳 신앙노선에서 예수 믿는 우리들일 것입니다. 일단 기록에 관련된 것으로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노아방주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는 점을 우선 단정해 놓으시면 좋을 것입니다. 별별 학설이 있고 주장들이 있으나 그냥 학자들이 교수요 박사기 때문에 무엇인가 한 마디를 해야 할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횡설수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무엇인가 하나를 남보다 더 안다는 표시를 내야하는 그런 심리까지를 헤아리지 못한다면 불필요한 시비를 막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대충 기억에 편하게 수치를 생각해 보시려면, 길이가 120미터 폭이 20미터 높이가 12미터로 된 3층짜리 1만톤 정도의 선박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고고학자들은 성경 기록과 고대 중동지방 등의 여러 측정 단위를 가지고 여러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는 알 필요가 없기 때문에 성경은 정확하게 수치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확실한 기록이 없는 것은 '대충'의 짐작 정도에서 일단 그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창6:15에서는 성경은 길이 300규빗, 폭이 50규빗, 높이가 30규빗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규빗은 40센티에서 55센티까지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측정단위라는 것은 고대사회에서 확고하게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에 시대마다 지방마다 또 그 용도에 따라 각각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혹 3천년전 여리고에서 한 되짜리 도량기구가 나왔다는 등으로 뉴스를 보실 때는, 그것은 그 지방 그 시대 그런 형편에서 그렇게 쓰일 수 있고 다른 곳에서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바로 짐작해 두셔야 합니다. 단, 대충 참고는 할 수 있겠지요.
작은 중소도시의 초등학교나 중학교 중에서 건축한 지 20여년 안팎 되는 비교적 큰 본관 건물들을 생각해 보시면 비슷할 것입니다. 그런 건물들이 대개 3층 정도에 길이가 50-70미터 폭이 10여미터 정도 될 것입니다. 높이는 비슷할 것입니다. 운동장 길이가 보통 120-150미터가 되니까, 위에서 설명 드린 규모를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규빗을 55센티로 잡는다면, 노아 방주는 길이 165미터 넓이 27미터 높이 16미터로 약 4만톤 배가 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이렇게 규모를 최대한 넓게 잡는 신학자들은 그 배에 모든 동물의 종류가 다 타고 또 배의 안전성이나 여러 기술적인 면을 고려해서 과학적으로 이치에 맞으려면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④ 그러나 노아방주를 두고는 근본적으로 시각을 달리해야 합니다.
노아방주 문제를 두고는 혼자 조용히 성경을 읽어도 이런 저런 과학적 모순들이 느껴지실 것입니다. 더구나 안 믿는 사람 또는 한신대학처럼 자유주의로 믿는 사람들은 성경에 오류만 찾기 위해 전공을 하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이는 거짓말이 아닐 수 없다고 꾸준히 말들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의문점이든 밖에서 들려지는 의문점이든, 이런 문제를 두고 생각할 때는 신앙 근본적인 시각을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믿는 사람입니다. 없는 가운데에서 천지를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방주 안에 동물들을 집어넣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 차원에서 볼 때 그것이 어렵고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규빗'이라는 단위를 최대한 큰 것으로 적용시키려고 애를 쓰는데 그렇다고 해서 과학에 맞추어 성경을 재구성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한다면 성경 내용에 대하여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고, 만일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렇다면 그다음부터는 과학의 어떤 이론도 하나님이 원해서 하신 일에는 맞다 안 맞다고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창조를 믿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고 그 세상이 돌아가는 법칙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이 세상에 두신 것도 상식으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과학'이라는 것은 그것 자체가 하나님이 있냐 없냐를 결정하고 성경이 옳다 틀리다를 결정하는 최종 잣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여러가지 피조물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 중에 하나라 말은, 하나님이 세상을 만든 다음, 그 세상이 돌아가는 일반 법칙으로 '과학'이라는 것을 세상 속에 잠깐 넣어 두신 것이니, 넣어 두신 분이 다시 빼낼 수도 있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차량 제작업자가 엔진을 넣었다가 빼냈다가 수리했다가 정지시켰다가 또 필요하면 몇 시간 몇일이라도 계속 돌아가게 했다가, 빠르게 돌아가게 했다가 느리게 돌아가게 했다가, 심지어 후진으로 가게도 하는 것입니다. 과학자는 과학 위에서 과학을 통째로 이렇게 조절하는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그 엔진이 돌아가는 횟수만 헤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모르는 사람이 잘 속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평소에는 꼭 같은 방향으로 꼭 같은 횟수로 엔진이 돌아가도록 해 두십니다. 눈여겨보면 그 돌아가는 것에서 공식을 뽑아낼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모세가 가나안 갈 때 필요하면 또 다니엘에게 한번 사자 굴을 경험시킬 필요가 있으면 또 노아 때 세상을 한번 엎어야 할 필요가 있으면 평소에 그냥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게 한 과학을 한번 뒤틀어버립니다. 세상은 이것을 기적이라 우연의 일치라 하여 난리들이지만, 묘하게도 하나님은 정확하게 계산하고 그 움직인 결과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계산될 것까지 미리 아시고 손을 댑니다.
신앙 있는 사람은, 그런 면을 보고 과연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라고 감탄을 하게 되고, 멸망 받을 사람들은 그런 면을 보고도 자연의 신비니 우연의 일치니 하고 끝까지 빠져나갑니다. 복 없는 사람들이어서 그렇습니다.
지금 과학과 신앙에 관련된 근본 문제를 제일 깊은 면에서 잠깐 살펴보고 있습니다. 과학이란, 하나님이 세상에 넣어 두신 하나의 부속품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자유자재하십니다. 인간은 그 과학에 의하여 지배를 받도록 했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과학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없는 가운데서 만드신 하나님은 그기에 매이지를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과학의 초보적 안목으로 살펴보려면 창세기로 계시록까지 틀리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과학이 어려서 그렇지 과학이 알만큼 알게 되는 어느날이 되면, 과학에서 볼 때도 성경의 모든 역사는 다 이해가 되고 맞아 떨어진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사람이 과학의 극히 일부만 붙들고 있기 때문에 성경과 과학은 일치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도덕도 사실 마찬가지입니다. 정말로 도덕다운 도덕이 되고 나면 신앙은 최상의 도덕이요 도덕의 절대 목표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공자의 초보적 도덕을 전부인 줄 알기 때문에 기독교는 도덕과는 맞지 않는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이치는 도덕과 과학의 물리에까지 다 맞아지도록 해 놓았는데, 어리석은 인간이 하나 둘 알아가는 그 도중에 선무당 사람 잡듯 섣불리 신앙이치란 과학과 도덕에 모순이 많다고 하는 것뿐입니다.
⑤ 하나님이 원하신면, 세상 자체도 해체했다가 재조립을 하시고, 과학이치도 교체할 수 있습니다.
노아 방주의 규모와 모든 동물들이 그 속으로 다 들어갔다는 성경을 두고 지금 과학적으로 문제가 있겠다는 입장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질문자는 이것을 믿을지라도 또 주변에 이 문제로 고민하는 어린 신앙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고 언제가 그런 분들을 접하면서 지도를 해야 하는 문제도 상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면을 생각해서 이런 문제에 대하여 여러 면을 살피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가 과연 가능했겠느냐고 한다면,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믿는 사람이면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믿는 사람입니다. 없는 세상을 만들 때 과학으로 만들었습니까? 과학도 없던 때에 세상과 세상을 움직이는 과학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세상 물질을 움직이는 원리를 현재는 과학으로 넣어두셨지만 당신이 필요하면 다른 이치로 교체도 할 수 있습니다. 또 원하신다면, 세상 자체를 회수하여 없애고 새 세상을 새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과연 하나님은 전능이겠는가를 연구하는 것이 성경의 과학적 모순을 연구할 때는 필수요건입니다. 그렇지 않고 지금 '창조과학회'라 하여 예수 믿는 과학자들이 성경사실들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애쓰는 것은 비록 그 동기는 순수하다 해도 미련하기 그지없고 그들의 노력은 이미 악령의 고급 수단에 말려들었다고 보시면 맞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전능자를 찾아 해결할 일을, 그들이 과학밖에 모르기 때문에 과학으로 하나님을 증명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가진 수단과 방법은 이미 악령을 이길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⑥ 방주를 없애고 아예 방주 없이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배 안에 들어가야 동물들이 살아 날 수 있다는 것도 실은 인간의 과학적 인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당시 우리를 가르칠 필요가 있어 일부러 방주를 통해 구원하는 역사를 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만으로 말한다면 방주가 없이도 필요한 동물들과 노아를 구원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 자체를 믿지 못하거나, 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수 있는 전능자로 믿는 것 자체를 부인하는 분이라면 불신자일 것이고, 불신자라고 한다면 기본적으로 성경에 있는 사실을 사실로 연구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최소한 하나님은 믿는 사람이라면 또 하나님은 없는 가운데 세상을 만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당신이 필요하면 노아 방주 속에 지상 모든 동물 전부를 몰아다가 넣을 수도 있고, 또 스스로 오게끔 할 수도 있고, 또 노아에게 모든 동물을 끌어다가 올 수 있도록 해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쉽게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원하시면, 하나님은 방주를 만들게 하지 않고 그냥 물 위에 모든 동물들을 떠다니며 살게도 할 수 있고 세상이 물로 다 덮였는데 그 수중에서 생존하도록 만들 수도 있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계시록 22장까지, 성경은 과학에 지배를 받거나 과학에 의하여 움직여졌거나 과학에 맞추려고 노력했거나 아니면 과학에 이해가 되어져야 할 역사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만물은 과학에 의하여 움직이도록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과학을 초월할 수 없고 과학 이치에 따라서만 움직이지만, 하나님은 우리 구원 위해 성경을 기록하고 구원역사로 섭리한 모든 역사를 하실 때, 과학 자체를 초월하여 역사해 왔습니다.
⑦ 성경에 기록된 방주의 크기와 관련하여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과학 자체를 초월하고 역사하였기 때문에 과학이란 필요하면 참고하고 필요 없으면 무시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다만, 특별히 필요 있는 일이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과학을 참고하도록 하시기 때문에 과학을 자연계시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 과학을 초월한 모든 역사를 성경은 이적이라 표적이라 기적이라는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방주를 두고, 지금 고고학자들이 복원을 위해 노력하는 등 여러 뉴스들을 접하게 되지만 전혀 무시하는 것이 성경을 아는 사람입니다. 규빗에 대하여도, 고고학적으로 발굴해 봤자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그것이 그 성경에 기록된 그 도량형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면 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짐작하도록 했습니다.
삼17:4에 골리앗을 그 키가 여섯 규빗 한 뼘이라고 했습니다. 한 규빗을 50센티로 잡으면 골리앗의 키는 3미터가 넘어야 합니다. 한 규빗을 30센티로 잡으면 골리앗의 키는 180센티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규빗은 그 중간 어디쯤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대상11:23에서는 몸집이 아주 좋은 사람에 대한 기록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 키가 다섯 규빗이라고 했습니다. 한 규빗이 30센티라면 1미터 50센티가 되고 한 규빗이 40센티면 2미터가 됩니다. 모두가 사울과 다윗 때에 기록들입니다. 삼상10:23에서 사울이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나 더 컸었는데 이런 면을 통해 짐작해 보신다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1미터 50센티의 난장이 마을에 어깨 위나 더 큰 사람이 1미터 80센티라고 할 때, 그의 키 1미터 80센티는 오늘 중고등학생 중에서 아주 흔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로 재어 나오는 수치 자체의 의미가 큰 것이 아니라 그 성경을 기록하던 때 그의 키가 비록 1미터였다 해도 다른 사람에게 비하여 장대했다면 그 장대한 키가 구원이치를 깨닫는 데에는 필요한 것이고, 또 그 당시 사람들의 평균 신장이 바로 그 당시로만 말한다면 2미터가 평균이었다면 장대한 사람의 키가 2미터 50센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수치를 오늘 우리 계산으로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하지 않고 성경을 기록해 주셨으므로 우리는 성경으로 알 수 있는 데까지마나 알고 나머지는 왜 이 말씀을 기록해 주셨는지를 살피는 것이 옳습니다.
참고로,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정탐한 사람들의 보고에 의하면 그들과 이스라엘 정탐꾼과 덩치를 비교할 때 정탐꾼들은 메뚜기 같다고 했습니다. 또한 포도송이 하나를 장정 둘이 메고 왔다는 것도 참고해야 합니다. 성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성경기록을 위해 오늘 상식으로 생각할 수 없는 어떤 상황을 만들어 운용했는지를 알 수 없으나 예사롭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오늘 기준의 시각과 기술로 과거를 전부 측정하고 평가하려는 시도는 반신앙적이라고 단정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2. 동물들이 방주에 들어가게 된 것은
① 성경 기록을 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창6:19에서 '방주로 이끌어 들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6:22에서는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노아가 모든 동물들을 이끌어 들여 넣었다는 말씀입니다. 다음, 창7:2-3에서 '취하여' 라고 했고 7:5에서는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창7:9에서 '암수 둘 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라고 했습니다. 창7:15에서도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앞에 두번에서는 노아가 동물들을 취하여 이끌어 들인 것이 되고, 뒤에 두번에서는 동물들이 자기 발로 모여들어 그리로 들어갔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동물들이 스스로 방주를 구원처로 알고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니 하나님께서 그쪽으로 가게 했고 노아는 오는 동물들을 방주 안으로 넣었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② 질문하신 내용은, 성경의 행동 하나를 두고 누가 했느냐는 표현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땅에게 풀과 채소와 과목을 내라 할 때 땅이 그렇게 내었습니다. 그렇다면 땅이 식물을 만들었다고 해도 맞는 말이고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해도 맞는 말입니다. 땅은 식물을 낼 때 시공업자가 되었고 하나님은 시공업자를 통해 그 집을 건축한 건축주였다는 것이 창1:11입니다.
왜 직접 하나님의 손으로 만들지 않고 이렇게 간접적으로 만드시는가? 이것은 앞서 만든 것을 통해 뒤에 것을 만들어가는 '구원의 유기적 단일성' 때문입니다.
서부교회 예배당을 두고 누가 건축했느냐 할 때, 모래를 지고 날랐던 인부들이 저 예배당은 내가 지었어, 해도 맞습니다. 그때 도목수로 일했던 이기철집사님이 저 예배당은 내가 지은 것이야 라고 해도 맞는 말입니다. 백목사님이 서부교회 예배당은 제가 목회할 때 제가 건축했습니다 해도 맞습니다. 하나님이 서부교회 예배당은 사실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해도 맞는 말입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운 사람은 사무엘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웠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참고하시면 될 것입니다. 간단하게 하나님이 직접 해 버리든지, 또 사람에게 맡겼으면 일임하고 하나님은 손을 떼버리면 좋겠는데,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시켜 놓고 뒤로는 표시나지 않게 하나님이 하시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를 기계로 기르지 않고 인격존재로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아들이 스스로 들 수 없는 무거운 돌을 아버지께서 들어라고 해놓고 아들이 들려고 할 때 그 아들이 자기 힘을 다 하면 아버지가 보이지 않게 힘을 보태어 그 돌을 들어버립니다. 아들은 아버지 말씀 순점L면 다 된다고 경험을 얻어 힘을 얻고 그다음부터는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사람으로 점점 자라게 됩니다. 아버지는 아들 힘으로는 꿈쩍도 하지 못할 돌을 들어라고 해놓고 그것을 들려고 순종하는 아들에게 뒤에서 도와준 다음 그 돌을 들 때 아버지가 보탠 힘을 그냥 가져가지 않고 그 아들 속에 넣어주어 그 아들의 힘으로 삼게 합니다.
이래서 아들이 스스로 원하여 순종하고, 순점; 통해서 자기가 한 것처럼 인식을 하게 되고 또 힘을 얻어 가는데, 실은 자기 스스로가 할 수 없다는 것을 동시에 인식시키고 결과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바로 아버지의 도움이었고 지도였고 실은 100% 아버지가 한 것이라는 것까지 실감하는 사람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믿는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아주 손쉽게 복을 내려 받지 못하고 우리 있는 힘을 다해야만 살 수 있도록 하시는 이유입니다. 말씀대로 우리가 그 현실 한번 한번을 통과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지 무조건 항상 공짜로 통과하도록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려운 중에 말씀대로 살고, 살아보고 나면 그다음 신앙이 자라게 되면서 하나님을 새로 한번 체험하게 하는 방편으로 우리를 인도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 전체의 방향이요 성질입니다.
유기적 단일체로 만들어, 기계가 아니고 자라가고 자원하여 쌓아간 육체의 기능처럼 하나님의 지체로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 부분과 그 정도는 하나님과 떨어져 존재하는 실력 있는 사람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몸의 일부가 되어 하나님의 지체로 화해지는 것입니다.
③ 노아가 동물들을 어떻게 모았느냐는 문제는, 바로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성경에 동물들이 전부 제 발로 와서 들어갔다는 표현만으로 기록되어 있다 해도 우리는 노아가 120년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동행하고 순종하였던 점을 볼 때, 노아는 유일하게 하나님께 붙들려 살았던 당대의 의인이며 선지자였습니다. 그렇다면 노아가 손이나 입으로 한번도 수고를 하지 않아도 노아의 그 순종 그 의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이니, 그 동물들이 모여들게 된 데에는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순종한 힘으로 보게 되는 것이고 그 상급이 있게 됩니다. 물론 동물들이 그렇게 움직인 데에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고 그렇게 되는 수도 없습니다.
만일 성경에 노아가 일일이 천하를 다니면서 모든 동물을 하나씩 끌어다가 넣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면 몰라도, 여기 노아가 모든 짐승들을 취하였다고 했고 또 끌어 들여더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 모든 동물들이 움직이도록 하셨고, 그 동물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므로 따로 움직여 방주를 향했고, 노아는 분명히 '이끌어 들여'라고 했으니 그 수고한 거리가 방주 바로 앞에서 문 안내만 했더라도 노아의 수고는 그 수고에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노아 앞으로 천하 모든 동물이 다 모일 수 있도록 역사할 수 있는 노아가 되었다는 면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노아가 발로 움직인 거리는 몇 km냐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노아가 대문에서 입구 정리만 했더라도 또 천하를 다 돌아다니면서 멱살을 잡고 왔더라도, 노아가 자기 수고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는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실은 환란에서 승리하는 모든 종들의 수고요 그 수고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도우심이요 결과적으로 세상이 놀랄만한 역사가 나타나는 이면에 있는 모습니다. 홍해를 갈라지게 할 때 모세가 손을 들어 머리털 하나라도 날릴 수 있는 장풍으로 힘을 보탰다면 하나님과 모세가 협력하여 홍해를 갈라지게 했다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100% 했고, 모세는 홍해 바다 앞에서는 손만 들었고, 바위에서는 막대기로 쳤고, 여호수아는 칼을 들고 흔들고 다니는 수고도 했습니다. 그 당시 모세는 멀리서 손 만들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칼날로 이긴 것이고, 모세가 손만 들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이긴 것이고, 하나님이 능력으로 이기게 한 것입니다. 인간의 활동, 인간이 움직여 수고한 범위는 외부로 나타날 수도 있고 숨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노아 방주에 천하 모든 동물들이 다 들어오게 된 것은, 전적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노아의 수고는 위에서 말한 수고 중 어느 정도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입구에서 활동한 수준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할 때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순종함으로 던질 때 하나님은 물 밑에 있는 고기들을 그 그물 속으로 다 밀고 들어가도록 만들고 계셨습니다.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를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사람들이 멀리서 봤을 때는 베드로의 그물 솜씨였고, 재수가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볼 때는 예수님 말씀 순종한 행위로만 그물을 던졌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를 보니까 인간에게 손 한번 흔들라고 해놓고 하나님께서 몽땅 밀어 넣어 버렸습니다.
오늘 이런 모습으로 사는 것이 성도의 생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