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다윗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 조사(삼상24:1) 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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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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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54
5. 질문 : 다윗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 조사 (삼상24:1) 913
사무엘상
24:1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 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역대상
21:1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같은 일에 대해서 다르게 기록한 말씀입니다. 참으로 깊은 이치가 숨어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질문을 다음과 같이 드립니다.
1. 역대상 21장 전체의 내용을 좀 설명해 주세요. 어떤 이치를 가르치실려고 하시는 것인지?
2. 위 대조가 되는 성구 둘을 통해서, 하나님 하시는 일과 마귀의 하는 일을 설명해 주세요. 제 생각에 간단히 정리하면 마귀는 하나님 이용물이라는 이야긴데, 좀 더 깊은 이치를 기대합니다.
답변 : 삼상24:1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주권역사의 면을, 역상 21:1은 나타난 현상을 가르칩니다.
1. 역대상21장 전체를 요약하면
① 역대상21장에 이르게 되면, 그야말로 다윗대왕의 천하가 열렸던 때였습니다.
남다른 어려움과 역경이 많았던 다윗이었습니다. 부모도 버리다시피 했던 목동이었고, 골리앗을 죽여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였고, 사울왕의 미움을 받아 수없이 쫓겨 다녔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음 사울집안이 다스리던 세력을 통합하였고 외국 정벌을 하여 이스라엘의 가장 대표적인 통치자가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영원한 왕으로 다윗을 표시해 두고 있었습니다. 밧세바로 범죄 하자 압살롬을 통해 징벌하여 세상 조롱이 되었으나 오직 하나님밖에 없었던 그 거룩과 진실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더욱 기뻐했고 내 마음에 합한 다윗이라고 수도 없이 말씀했던 다윗이었습니다.
② 더 이상 흠이 없는 때라 할 순간에도, 선줄로 생각하면 바로 넘어지는 법입니다.
모든 과정을 다 겪으며 이제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을 최전성기에 올려놓았을 때 다윗은, 예수 믿는 사람이 그 신앙생활에서 닥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상황을 다 알고 겪었고 다 초월할 수 있었던 때였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다윗이 그렇게 큰 죄도 아니고 순간적인 생각 하나에서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 전체에 큰 죽음의 재앙이 닥치도록 했습니다.
신앙이 어릴 때는 큰 칼을 들고 수없는 사람을 죽여야 그것이 큰 죄가 되고 그로 인해 많은 고통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이 장성하여 참으로 중요한 자리에 있을 때는 남몰래 잠깐 손댄 것도 마구 밖으로 드러나고 천하가 요동치도록 난리가 났습니다. 신앙의 최전성기 가장 존귀한 자리에 있을 때에는 마음에 생각 한 번 해 본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자신의 신앙이 점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수록, 또 자신이 여러 사람의 구원을 책임 맡는 자리에 나아가게 되면 하나님의 빛이 제곱비례로 밝아지며 그 사람 속을 마구 들추어내게 됩니다. 이전에는 육안으로 검사하던 것을 이제는 X-ray검사로 속을 들여다 보고 심지어 CT 촬영이나 MRI 장비로 그 사람 속을 완전히 뒤집어 놓습니다. 이전에는 팔이 부러져야 부상인 줄 알았던 사람에게 이제는 전자현미경으로도 보일까 말까 한 지극히 세미한 것으로 죽고 사는 문제가 되게 하십니다.
나무 밑둥치에서는 넘어져도 머리나 깨지고 말지만, 높이 올라간 나무 꼭대기에서는 찰나에 뼈도 못 추리도록 낙하하게 됩니다. 500여명이 타고 있는 비행기 조종간을 붙든 사람의 손끝은 순간순간 움직임은 컴퓨터 게임하는 아이들의 손놀림과는 그 차원이 아주 다릅니다.
말씀하신 성구는 평소 그냥 읽을 때는 성경공부를 하면서 상식적으로 외워두고 또 익혀두는 기록들입니다. 그러나 어느날 그 성경에 묻어둔 이런 면 저런 면이 하나씩 눈에 띄게 된다면 그는 이미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스스로 겸손하여, 내가 무슨 그런 사람이라고... 하다가 한방에 끝장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겸손하다가도 이런 곳에 이르러서는 두려워 그 무릎이 부들부들 떨려야 할 것입니다. 목회자나 무슨 평신도 지도자급 신앙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으로 알아서는 곤란합니다. 벌 망아지처럼 돌아다니던 스물 중반의 청년이 어쩌다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면, 이제 처자식이 자기 어깨 위에 올라붙었습니다. 원하든 원치 않던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마음 하나 자세 하나에다가 그 식구 전부의 먹고 사는 문제, 입원하고 퇴원하는 문제를 크게 올려놓았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다윗 같지는 않아도 그래도 우리 나름대로는 과거와 달리 세월 속에 자꾸만 하나님께서 그 상대하는 정도와 깊이를 더하여 가시면서 점점 더 잘 믿지 않으면 안 되도록 기어코 그냥 두지 않고 지나친 사랑으로 우리를 압박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③ 시1:1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 죄인의 길을 다 넘어섰을지라도, 한 고비가 더 있습니다.
인간 사회의 수없는 자기중심의 경영과 계획에 끌려들어가지 않고 전부 넘어섰을지라도, 죄악 세상 속에 지천으로 깔려있는 삐뚤어진 죄인의 길을 전부 이기고 의인의 길로 걸어갔을지라도, 그가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그 마지막 숨쉬는 순간까지도 또 한 고비가 항상 더 남아있고 늘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오만한 자의 자리'입니다.
이만하면 이제 좀 쉬도 될 만 하겠지, 이렇게까지 했으니 숨 좀 한번 돌려보자 하게 되면 다윗과 같이 바로 사탄의 낚시에 걸려버립니다. 바울과 같이 죽고 또 죽고 주를 위해 죽는 그 고비가 끝이 없을지라도 살아있는 매 순간에는 끝까지 주를 위해 죽어드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사랑에 몸부림치는 그 식지 않는 뜨거움이 끝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비록 육체는 죽을 때가 가깝게 되면 피가 식어져 손발이 차가울지라도 '예수' 이름 앞에서는 그 마음에 끓는 피가 늘 솟구쳐 주체할 수 없어야 합니다.
70대 전후에서는 연로함으로 멀리까지 기도가는 것이 어려워 주저했는데, 오히려 80세 마지막 죽을 나이가 되던 해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왕복 2시간 차량거리의 산으로 가서 30분에서 1시간이나 걸리는 산비탈을 기어 올라가며 주님 앞에 꿇어앉아 벌벌 떨며 살았던 점;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보고 있습니다. 그 살아생전이 끝까지 순생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 마지막 죽음을 그냥 둘 수 없어 순교로 포장하고 천국 가는 수송차량에 태우려고 가슴에 칼 도장을 찍었던 이 시대 우리 중에 있었던 선지자를 기억합니다. 백영희목회연구회가 그 신앙노선을 집중으로 연구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1년 수고했다고 공로상을 받고, 10년 수고했다고 기념식수 행사가 있고, 수십년 수고하면 별별 축하 행사가 다 따르는 것이 그분이 살던 교계였는데, 그는 주님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네 발로 벌벌 기어 주님 안면을 살피고 살았습니다. 그 분이 젊어서 또 나이들면서도 늘 조심한 최종 고비를 '오만한 자의 자리' 곧 '자기 마음에 만족이 되고 성취감을 느끼는 그 위험성'을 미리 보았고 미리 조심을 했으며,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다윗의 역상21장을 기억하여 성공했던 분입니다.
④ 요압은, 신앙의 바른 노선에 소속은 두고 있으나 그 행동은 외부인의 대표적 경우입니다.
요압이 다윗의 실수를 막고 있었습니다. 이렇게만 본다면 이때의 요압은 다윗보다 나은 사람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요압은 그 소속을 평생 다윗에게 두었으니 정통이요 구원의 반열이며 교회 내부에 적(籍)을 두고 있는 사람인데 그 언행은 항상 반발이요 이견이었습니다. 참으로 복된 위치에 놓였는데,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경우입니다. 출애굽은 했으나 늘 애굽 땅에 살던 때를 노래 부르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결국 광야에서 다 죽어야 했습니다. 실은 하나님이 죽이셨습니다. 요압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이번에는 옳은 것을 옳다고 했는데, 역시 그 성향이 늘 야당이며 반란군입니다. 우리 속에 얼마나 찾아야 하고 또 얼마나 회개하여 그 뿌리를 파 버려야 할 요소인지 모릅니다.
한편으로, 다윗에게는 이 노년의 방심은 요압까지 나서서 반대할 정도였다는 점도 살펴두어야 할 일입니다. 귀신에게 씌이면 순간 암흑이 되어 보고도 보지 못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너무도 환하게 보면서도 그렇게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경우를 주변에서도 허다히 볼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도리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놓으시면 그 순간 우리는 뱀 같은 인간이 되고, 그러다가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구원에 지팡이가 되는 것입니다.
⑤ 이렇게 살펴 나가려다 보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 주의하실 것은
성경 관련 질문은, 사실 어느 한 사안을 두고 구체적으로 질문하지 않으신다면 그 답변은 끝이 없게 됩니다. 역상21장에 대한 전반적 소개를 질문하셨기 때문에 일단 몇 가지만 간단하게 예를 들어보았습니다. 전반적으로 다 소개하고 안내드리기에는 그 양이 너무 많다는 점을 양해하셨으면 합니다.
2. 삼하24:1과 역상21:1을 비교한다면
① 두 성구를 먼저 인용합니다.
삼하24:1에서는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역상21:1에서는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②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를 시험 유혹 범죄케 하고 있습니다. 역상21:1입니다.
사단은 우리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피조물 중에서는 영물인 천사와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입니다. 사단은 타락한 천사이기 때문에 자기중심으로 모든 것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 중심으로 모아진 것은 그와 함게 영원한 불구렁텅이로 가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사단은 자기 실력껏 자기 재주껏 부지런히 자기중심으로 모든 사람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 가장 주력하는 대상은 성도입니다.
다윗 같은 성자 성군에게까지, 그런 성자의 절정기 신앙에까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또 끊임없이 빈 곳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다윗은 일반 성도와는 너무도 차원이 다른 사람이었으므로 수십년을 기다려서 기회가 한번 올까 말까 하는 정도인데,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서 한 건밖에 못할 것 같으면 우리 일반인의 집념으로는 포기할 만 할 것인데, 그가 누굽니까? 천하를 끌어다 지옥으로 쓸고 갈 사단입니다. 귀신 중에서도 제일 대장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드디어 다윗의 빈곳을 찾았고 즉시 다윗을 충격시켜 하나님 나라를 대파하게 되었으니 요 재미 때문에 사단은 비록 평생을 죄 없이 사는 성결한 사람이 있다 해도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그 사람 턱밑에 같이 턱을 괴고 눈을 깜짝깜짝 거리며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 얼마나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살아야 할 것인지!
고속도로에 경찰차 하나만 보여도 수백대 차량이 슬슬 기고 다니는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난 마을에는 수년간을 전부들 꼼짝 못하고 기고 사는데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사단이 이렇게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말에는 우리가 다 담대하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으니, 과연 우리가 다윗만큼 되기는 어렵다는 말이겠습니다.
역상21:1은, 악령의 활동을 중심으로 기록한 성구입니다.
③ 하나님은 사단의 그런 노력까지도 우리를 기르는 방편으로 삼습니다. 삼하24:1입니다.
현장 감독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해서 성수대교가 무너졌지만 그 당시 대통령은 자기가 그 무너진 다리에 대하여 모든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경찰관 한 사람이 일을 잘해서 어느 동네가 평안한 것도 그 당시 대통령의 훌륭한 치적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은 무지 무능하기 때문에 그 현장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는 실제 연관성은 없으나 법적 주격책임의 선을 그렇게 계산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경우는 차원이 다릅니다. 실질적인 연결로 말하면 우주 만물의 모든 움직임을 직접 주권 섭리하십니다. 또한 우리 구원을 두고 그 법적 지위로는 사단과 우리 성도가 투쟁할 때는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양면이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모습으로는 하나님께서 주권 절반, 방관 절반을 섞어가며 우리를 상대하시는 듯 합니다.
우리를 항상 지키시고 눈동자같이 아끼시지만 그렇다고 우리에게 주신 자유성 자율성이 무시될 정도로 설치지는 않으십니다. 또한 우리가 스스로 하도록 지켜보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관자가 되어 아주 사단이 다 해먹도록 놔두지도 아니합니다. 이 면을 잘못 이해한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역사는 '절대 예정, 절대 주권'이 아니라 '상대 예정, 상대 주권'이라고 할 만큼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따라서 삼하24:1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사단을 통해 한번 혼을 내야 할 이유가 있고 그럴 만한 필요가 있어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 조사할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셨고 또 이 일에 사단을 적절하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④ 따라서 삼하24:1은 내부 원인을, 역상21:1은 외부 나타난 현상을 각각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이 땅 위의 역사는 눈으로 볼 때, 외부로는 사단이 움직여 우리를 시험하는 것으로 움직여지지만, 궁극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의 순서일 뿐임을 양쪽 성구가 모처럼 양면을 다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시험 모든 타락 모든 범죄에 있어 이 원리가 꼭같이 적용이 됩니다만 다윗의 인구조사 하나를 두고 삼하24:1과 역하21:1에서 대표적으로 양면을 한번 기록했으니 다른 곳에는 일일이 이렇게 기록하지 않아도 모든 성경 모든 우리 사건 전부에 다 해당되는 진리로 새길 일입니다.
재질문 :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사무엘상
24:1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역대상
21:1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답변을 읽어보고 재 질문을 한다는 것은 저로서는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미 들은 답변만 해도 새겨보기가 쉽지 않네요. 질문드립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징계하시는 도구로 다윗을 사용하셨 다고 볼 수 있는 것인지요?
2. ‘여호와께서 다시’ '다시'라는 말씀을 기록하셨습니다. 짧은 소견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 죄를 반복했습니다. 한 두번 죄를 질 때는 다윗을 이용하지 않으셨지만 아래 사람이 죄를 반복해서 짓자 하나님께서 윗사람(다윗)을 죄짓게 하시고, 백성들을 징계하셨습니다. 즉, 아래 사람을 인도하지 못한 죄가 적용될 수 있냐는 질문입니다.
3. 그런데 아래 성구를 보면, 회개는 다윗이 합니다. 물론 대표의 원리일 수도 있겠지요. 백성의 죄 때문에 다윗이 이용당한 것 같은데, 회개치 못하고 수십만이 죽었는데, 다윗은 회개하여 하늘에서부터 불이 내려오는 것을 봅니다. 이 어찌 큰 복인지. 수십만을 죽인 죄를 사해주시는 것을 눈으로 보다니요!!! 역으로, 죽은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 값대로 죽으면서 다윗의 신앙을 위해 이용물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지요?
대상
21:8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 하옵나니 점G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대상
21:26 다윗이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여호와께 아뢰었더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21:27 사자를 명하시매 저가 칼을 집에 꽂았더라
4. 도대체 누구를 위한 현실인가요? 간단히 생각하면 '다윗'을 위한 현실인데, 이스라엘이라는 구원 계통을 인도하는 것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5. 질문이 복잡합니다. 저의 관점은 구원 역사에 이용당하냐, 축복이냐 하는 것입니다. 앞서 답변하신 것에서 어린 신앙 때는 수많은 사람 죽인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죽이고도 나중에 회개하여 평생 그것 마음에 품고 성자로 사는 사람도 있지만, 그 때 죽임당해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아닌가요? 많은 사람 죽이고도 나중에 회개하여 일어선다는 것은 확실 한 것 같은데, 다른 사람에게 죽임 당했다가 그대로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눈으로 잘 못 봤습니다.
6. 결국 하나님의 예정이며, 한없는 간구로 하나님께 축복의 길을 빌어보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답변 : 믿은 사람이라면, 그 어떤 경우라 해도 실은 전혀 손해 볼 일은 없습니다.
1. 불신자는 이용만 당하는 것이고, 믿는 사람은 이용도 당하고 또 이용하기도 합니다.
불신자는 오로지 우리를 위해 이용만 당할 뿐입니다. 우리를 고치기 위해 그들을 치고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우리에게 경계가 되게 하시고 그로 인하여 우리를 고치게 하십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이 매를 맞을 때는 매 맞는 그 사람에게 그 매가 필요해서 매를 친 것이고 동시에 그 매 맞는 모습을 다른 믿는 사람에게 보여 그들에게도 경계가 되고 구원에 도움 되도록 하십니다. 즉 불신자는 이용만 당할 뿐이지만 우리가 매 맞는 것은 자기와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동시에 사용됩니다.
이스라엘 전체의 구원을 위해 다윗을 칠 수도 있고 또 다윗을 위해서 이스라엘 전체를 칠 수도 있습니다. 다윗을 위해 이스라엘 전체를 치는 경우 다윗이 그 중심이 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 전체가 다윗 때문에 이유 없이 당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 전체는 그들대로 매 맞을 일이 있었고 또 매를 맞아서 고치게 되는데 그 매 맞는 것이 다윗에게도 동시에 도움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2. 믿는 사람의 징계는 본인과 주변을 동시에 유익되게 하지만, 중심 문제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을 특별한 관계로 보지 않고 일반적으로 말할 때는 징계 받는 본인과 주변을 동시에 두고 하나님은 역사하신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나 그 믿는 사람들이 특별한 관계에 있는 경우는 좀 달라집니다. 부모 자녀 관계라든지 목회자와 교인 관계와 같이 하나님께서 구원의 계통으로 내려가도록 관계를 주신 경우는, 윗사람을 고치기 위해 그 사람의 애착이 전부 다 기우려져 있는 자녀를 쳐서 경계를 삼습니다. 물론 육적으로는 자녀지만 신앙으로는 그 자녀가 앞서 있는 경우는, 도리어 부모를 쳐서 그 자녀에게 경계로 삼게 됩니다.
요는 신앙의 '계통'으로 맺어진 관계에 있어서는 위를 먼저 잡아야 아래가 바로 되기 때문에 위를 바로 잡기 위해 아래를 친다고 보시면 됩니다. 다윗의 경우는 구약의 왕인데 그 자리는 이스라엘 전체를 감당하는 머리되는 자리입니다. 다윗이 곧 이스라엘이며 이스라엘이 곧 다윗이라고 표현할 사람입니다. 다윗 하나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면 결국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시대로 살게 되고 다윗 하나에게 있는 허물은 결국 온 이스라엘의 허물이 되어 그 영향을 전체가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직책이며 오늘 교회로 말하면 교역자의 위치이며, 실은 오늘 우리 성도 전부가 가지고 있는 직책입니다. 어느 누구 한 사람이라도 자기는 어떤 다른 사람들에게 비록 범위는 적지만 그런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3. '징계'와 '신앙의 계통'을 이렇게 이해한 다음, 이제 질문 내용을 하나씩 살펴 본 다면
1.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징계하시는 도구로 다윗을 사용하셨다고 볼 수 있는 것인지요?
① 신앙의 지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기 위치를 바로 지키고 있을 때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2. ‘여호와께서 다시’라는 말씀을 기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 죄를 반복했습니다. 한 두번 죄를 지을 때는 다윗을 이용하지 않으셨지만 아래 사람이 죄를 반복해서 짓자 하나님께서 윗사람(다윗)을 죄짓게 하시고, 백성들을 징계하셨습니다. 즉, 아래 사람을 인도하지 못한 죄가 적용될 수 있냐는 질문입니다.
② 아랫사람이 반복해서 죄를 지었다면, 책임자가 자기 위치를 바로 지키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했다고 하신 다음 '다윗을 격동'시켜 매 맞을 일을 하게 했다는 말은 다윗은 이스라엘 신앙의 총책임자로서 하나님께 매 맞을 일이 있었다는 말이고 이스라엘 전체는 자기 머리가 잘못되었으므로 당연히 몸 전체에 화를 입게 된 경우입니다. 다윗이 다윗의 자리를 바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다윗과 다윗이 맡은 이스라엘 전체를 쳤다는 것이니 이런 긴 설명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스라엘을 향해 진노'한 것이 되고, 그 책임이 구체적으로 그 지도자에게 있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 '다윗'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머리가 되어 있는 이스라엘 전체를 두고, 그 이스라엘 전체가 매 맞을 일이 있었으며, 이스라엘의 이번 화는 다윗에게 그 문제가 있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본문의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라고 한 내용이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하나님께 범죄 한 것으로만 질문자께서는 이해하신듯 합니다만 이 본문은 다윗을 향해 하나님께서 다시 진노하신 것으로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윗과 관련된 성경본문 중에서도 이 부분은 특히 이스라엘 전체의 범죄나 부족에 대한 중심으로 기록되지 않고, 다윗을 중심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다윗이 바로 이스라엘이 되어 있던 때입니다.
3. 그런데 아래 성구를 보면, 회개는 다윗이 합니다. 물론 대표의 원리일 수도 있겠지요. 백성의 죄 때문에 다윗이 이용 당한 것 같은데, 회개치 못하고 수십만이 죽었는데, 다윗은 회개하여 하늘에서부터 불이 내려오는 것을 봅니다. 이 어찌 큰 복인지. 수십만을 죽인 죄를 사해주시는 것을 눈으로 보다니요.!!! 역으로, 죽은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값대로 죽으면서 다윗의 신앙을 위해 이용물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지요?
③ 믿는 사람의 재앙은 본인과 다른 사람에게 함께 필요한 결과로 진행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원칙에 의하면 결론은 간단합니다. 죽은 사람은 그 당시 죽어야 할 때가 되었고 그렇게 될 필요가 있어 그리 되었으며 또한 그 당시 다윗과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화를 당한 그들의 모습이 구원에 유익이 되었습니다. 죽은 사람을 기준으로 본다면 일단 죽게 된 이상 본인에게는 구원에 아무 유익될 것이 없지 않느냐고 생각하기 쉽겠으나, 사실 죽음도 그 죽는 시점과 그 죽는 모습까지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꼭 적당하고 필요하게 닥쳐오게 되어 있습니다. 죽는 그 순간이 비록 찰나와 같다 해도 그 순간에 평생에 이루지 못한 구원과 회개를 이루는 사람이 오늘도 적지 않습니다.
물론,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다윗 한 사람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고 또 그런 큰 재앙을 목도하게 된 다윗은 크게 회개하여 더 큰 신앙의 사람이 된 것은 많은 분들에 의하여 모순으로 지적되고 있는 바입니다. 현재 일반인들이 흔히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바와 같이 모든 사람은 꼭 같은 절대가치를 가졌다고 생각한다면, 어느 한 사람을 위해 다른 여러 사람이 희생된다면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일반인이 생각하는 시각의 인류 평등론, 인간 동등가치론은 성경 오해입니다. 택자 하나를 위해 불택자들은 전적으로 동원되고 이용만 되는 인간들입니다.
따라서 택자와 불택자는 같은 인간일 수 없고 같은 존재일 수가 없습니다. 택자가 있고 택자 외에 모든 피조물을 하나로 분류한 다음 그 피조물 안에는 다시 택자와 비슷하게 생긴 불택자라는 그룹이 있고 그 불택자라는 그룹보다 못한 동물이 있고 그보다 못한 식물이 있다는 등으로 분류해야 정확할 것입니다. 택자들끼리 분류할 때는 그런 차원으로 분류할 수는 없지만 그 실력이나 그 중요성을 두고 말한다면, 한 의인의 한번 행한 의가 수많은 사람의 수많은 행복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한 사람에 대하여는 그를 상대하는 비중을 인류 전체보다 크게 보실 때가 있고 어떤 한 사람의 행위에 대하여는 여러 세대의 모든 복음 운동 전체보다 크게 관리할 때가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 하나를 위해 다른 사람들은 단순히 희생되고 실험 실증 대상이었을 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선 그들도 그들대로 그들에게 필요한 구원과정에 꼭 있어야 할 순서였고, 그런 순간이 자기들에게 그렇게 필요한 동시에 또 다윗에게는 크게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그 다윗이 그 사건에서 깨달은 것은 이후 하나님의 나라 건설 전체를 두고 그 희생으로 비교될 수 없는 정도의 큰 복음역사로 더 온전하게 되어져 전체 교회와 하나님 역사에 100배의 결실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어느 한 성자가 뱀의 꼬리가 움직이는 것을 어릴 때 보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가 이후 예수를 믿게 되자 안 믿을 그때 보았던 그 하나의 자연현상으로 성경 깨달음에 도움을 가지게 되어 그의 지도하에 있는 수많은 사람의 깨달음의 세계에 쉽게 그리고 명쾌하게 이해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희생시켜 깨닫게 되고 더 온전하게 되어진 신앙의 지도자가 있다면, 그 지도자의 보다 성숙하게 되어진 신앙역량은 자기 혼자 챙겨 수입 볼 수입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이치는 자칫 옆으로 한발 잘못 가져다가 사용하게 되면, 목회자가 교회와 교단을 다 둘러 마시는데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게 하는 무서운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만, 사실은 사실이며 분명히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④ 불쌍해 보이는 다른 사람을 밟고 강퍅한 사람이 두고두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 있습니다.
목회자들 중에는 강퍅하여 믿지 않다가 그를 위해 기도하는 아내가 결국 불쌍하게 죽고 나서야 회개하고 목회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남편을 그렇게 돌아서게 한 아내는 평생 빛 한번도 보지 못했는데, 회개한 남편이 이후 신앙으로 세상으로 행복하게 사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재혼한 사모님과 함께 너무도 복 받고 좋은 가정과 목회를 하여 훌륭한 교계 지도자가 되자 그 죽은 첫 부인의 친정에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은 우리 딸만 불쌍하게 되었다고 그렇게 원통해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친정식구들 입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렇게 할 수 있느냐고 난리들입니다.
이때 그분들이 기억할 것은, 요나가 회개를 외치고 니느웨 성이 회개하자 하나님께서 그 성에 복을 주셨는데 정작 요나는 니느웨 언덕 위로 올라가서 니느웨 망하는 모습을 기어코 보겠다고 했던 심보입니다. 나 하나라면 그렇게 당할 일이 아니었는데, 교회 전체를 위해서 또는 그 교회 지도자 한 사람을 바로 세우기 위해 내가 화를 당했다면 한편으로는 화를 당하게 될 사람으로 내가 지목된 것을 두고 하나님께 이 땅 위에서 죄 값을 미리 치르게 해 주심을 감사해야 할 것이고, 또 그로 인해 여러 사람이나 신앙의 지도자가 깨우치게 되면 나를 밟고 올라서게 한 그 하나님께서 그 밑에 밟힘으로 이용당한 나를 잊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밟히게 되는 자기의 처지까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나의 중심이 있다면 그 중심을 하나님이 어찌 상대하시겠습니까?
역사는 모세를 당대의 구원자로 기록하고 있지만, 신앙의 보이지 않는 이면의 세계, 하늘의 회의를 보고 아는 사람은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의 보이지 않은 신앙과 노고가 밖으로 표시된 것이 모세의 사역이라고 계산 할 것입니다. 사무엘의 위대함만 알고 지나는 것이 보통이고 그 어머니는 출산 과정에 일부 기여를 한 적이 있다고 지나치기 쉬우나 사무엘의 평생은 항상 그 어머니의 보이지 않는 신앙모습이 그 이면에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을 두고, 아벨의 피는 그때만 역사했던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와 오늘 신약까지 이어오며 계속하여 모든 순교자의 피 뒤에서 새로운 순교자들을 만들어내는 공장으로 여겨지고 성경에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히11:4에 기록을 하고 있으나 그렇게 읽는 분은 백목사님 정도로만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구약에 그렇게 수도 없이 반복되는 따분한 기록 하나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이라, '눈의 아들' 여호수아라는 등으로 그 조상들의 이름을 그렇게 많이 붙여놓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아버지는 성경에 어떤 기록도 없으며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다윗을 몰라보고 산골짝에 양이나 먹이도록 쳐 박은 사람이며 사무엘이 아들을 부르라고 할 때 아들들 중에서 아예 빼버렸습니다. 그런 이새가 무슨 다윗왕의 이름 앞에 항상 붙어 다닐 정도의 신앙이 겠습니까마는 성경이 그렇게 이름을 붙였을 때는 일일이 기록은 되어 있지 않으나 그 다윗이나 여호수아나 성경의 많은 인물들의 경우 그들의 활동이 전면에 나타난 것으로 적고 있으니 그것도 사실이지만 그 배후의 신앙 뿌리는 결코 지나치고 넘어갈 이름이 아님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4. 결론적으로, 어느 한 사람 때문에 너무 지나치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경우를 두고
우리는 이용만 당했다거나 이용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당하도록 했으니 어쩌겠는가? 라고 하거나 이용을 당하는 쪽보다는 차라리 건너편 복된 사람의 입장에 섰으면 빌어나 볼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불택자와 달라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단순히 이용당하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그런데 뒤로 계산을 차분하게 해 보면 보통 남는 장사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일 뿐이지 실은 내 실속도 엄청나게 동시에 챙기고 있습니다. 화려하게 드러나 보이는 스타들은 천국에서 하나님께서 측량못 할 만큼 그 이름값과 외부로 드러났던 값을 기초공제로 처리해 버립니다. 자기의 자세와 중심만 바로 되었다면 이 세상에서 그렇게 억울하게 당했던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계산할 수 없는 수고비를 챙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재벌은 네가 될런지 내가 될런지 가서 계산을 해봐야 압니다. 물론 세상에서도 그 계산법을 질문하신 내용처럼 한 면으로만 계산하면 알기 어렵겠으나 여러 면으로 생각해 보면 충분히 짐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