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7천명의 의인이 있는데도 멸망한 이유가 궁금(왕상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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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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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54
3. 질문 : 7천명의 의인이 있는데도 멸망한 이유가 궁금 (왕상19:18) 203
'성도의 회개...'에 대한 답변 내용을 읽어보면서 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특히 다윗의 회개와 관련된 내용에서는 참으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과연 그러한 정도까지의 회개에 이르는 사람이 기독교 역사에 몇 사람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연상으로 엘리야 시대의 '나만 남았나이다' 할 때에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7천명을 남겨두었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면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겼습니다.
(창 18:32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 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소돔 고모라성의 롯을 생각하고 기도할 때에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되고 말았고, 또
(렘 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진리와 공의를 찾는 자가 한 사람만 있어도 예루살렘성을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신 것을 보면 한 사람의 의인을 심히 귀하게 여기시며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혜택을 입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왕상 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미래사?-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과거사?- 자니라) 이세벨과 아합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극도로 타락하여 하나님이 멸망시키기에 이르렀고 엘리야만이 외롭게 투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한 7천인을 남겨두었다고 했습니다. 성구의 내용을 보면 '남기리니'는 미래사이나 그 뒤에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는 과거사입니다. 따라서 의인이 7천명이나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하신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1. 명문되어진 대로 7천명이 실존해 있었다면 7천명이라는 많은 의인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셨는지?
2.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사람이 7천명이나 있었다면 이스라엘이 왜 그렇게까지 타락이 되어졌는지?
3. 그 7천명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그 당시 시대 상황을 유추해 보건대 이세벨과 아합의 서슬이 시퍼런 세력 앞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정도라면 순교의 신앙이 아니고는 불가능이라 생각됩니다. 순교적인 신앙의 사람이 7천명이나 있는데‘, 물론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에 원인이 없을 수 없겠고 이유가 없을 수 없겠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어서 문의 드립니다.
답변1 : 다윗의 회개는 참으로 희귀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갓난아이입니다.
다윗과 같이 진정한 회개란, 질문하신 대로 참으로 희귀한 경우입니다.
1. 다윗의 회개는 우리의 목표치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출발은 걸음마 연습부터입니다.
① 아무리 어려워도 다윗의 회개 수준, 그곳에 우리의 목표는 있어야 됩니다.
다윗과 같은 진정한 회개가 희귀한 것은 다윗과 같은 성자가 역사에 희귀하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같은 성자가 희귀하기 때문에 그런 진정한 회개도 희귀한 것입니다. 전부가 다윗일 수는 없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목표는 다윗과 같은 회개, 다윗과 같은 성자가 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그렇게 되라고 하지만 이런 말을 되새길 때마다 우리의 마음은 너무도 크게 눌립니다. 말은 맞고 현실 속에 내 모습은 너무도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다보면 자포자기로 결론 나기 십상입니다. 다윗은 너무 위대하고 나는 수 없는 평범한 교인 중에 하나일 뿐이라고 자위해 버릴 수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② 다행히, 주신 그 목표를 향해 출발시킨 우리에게 먼저 걸음마를 요구하시고 있습니다.
성경은 다윗의 회개 수준에 이르라고 분명한 예를 들었고 그 목표치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목표와 동시에 주신 우리의 출발점은 갓 태어난 어린 아이라고 했습니다. 첫걸음 하나를 배우기 위해 수없는 반복을 하고 있는 우리는 아직 갓 태아난아이입니다. 하루에 70번씩 7번, 즉 490번까지도 반복하면서, 그러나 목표는 다윗의 회개와 같은 수준에 두고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각자의 평생을 '생애기간'으로 주신 것은 그 시간이 다 소비되고 소모되어야 할 만큼 어려운 일이며 그러나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평생을 투자하여 '회개'라는 과목 하나를 달성한다면, 회개 보다 한 단위 높은 수준인 '의로운 행위'는 또 처음부터 배우고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까? '의' 연습이 끝나면 '하나님과 동행' 연습을 또 처음부터 시작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하나씩 배워가고 알아가려면 '회개' 한 가지 과목에 들어가는 기간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평생 '회개'라는 과목 하나에 매달릴 것이고 그것마저도 그렇게 시원하게 되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③ 신앙은, 한 가지가 자라면서 그 한 가지에 관련된 모든 면이 동시에 자라버립니다.
한 아이가 자유롭게 발을 움직이기까지, 서는 연습, 걷는 연습에 엉덩이를 찧었던 것이 수 천 번으로는 안 됩니다. 수 만 번은 반복을 해야 비로소 걸음마를 배운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 한 가지를 가지고 노력하다보면, 회개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신앙이 동시에 자라게 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그 사람의 전반적 신앙 수준에 따라 그 사람의 회개 '정도'가 정해지는 것입니다. 회개에 전력했는데 기도 실력이 늘었고, 성경을 열심히 읽었는데 회개의 실력이 늘고 기도의 실력이 늘어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다윗이 다른 면은 어리고 서툰 것이 많은데 회개만 그렇게 높은 차원에서 했던 것이 아닙니다. 사울이 다른 면에 신앙은 그렇게 출중했는데 '회개'라는 한 과목이 낙제가 되어 하나님께 그렇게 버림받은 것이 아닙니다. 평범한 죄를 회개할 수 있는 사람이면 평범한 의를 행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어려운 의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이면 대단히 힘든 회개를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대단히 힘든 회개를 그렇게까지 진정으로 했던 다윗은 많은 면에 있어서 이미 대단한 의인이었습니다.
④ 그렇다면, 다윗은 회개와 모든 면에 성자였고, 우리는 회개와 모든 면에 어린 신앙입니다.
우리는 어떤 한 실수를 두고 어떤 차원의 '회개'를 했는지 또는 할 수 있겠는지를 살펴보기 이전에, 신앙에 많은 면을 두고 나는 어느 수준에서 살고 있는 사람인지를 살펴야겠습니다. 사람이라 다 실수가 많다고 하셨으니 여러 종류의 죄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며, 동시에 어느 정도의 회개로 회개할 사람인지도 우리는 우리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정도 죄는 회개할 수 있겠다 싶다면, 그 사람은 '그 정도의 신앙'을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회개라는 행위는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자존심' 상해서 못하겠다고 스스로 생각되는 분이라면 자신의 신앙은 전반적으로 '지극히 어린 수준'이라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다윗을 기준으로 한다면 갓 태어난 신앙일 것입니다. 어리니까 자라 갈 앞날이 많은 사람들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진정 바로 믿기 위해 자신이 힘썼던 과거를 계산해 본다면, 우리는 대학을 목표로 공부한 정도로 믿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취직을 위해 애쓴 정도도 아닐 것 같습니다. 연애하는 상대방을 표적으로 미쳐 날뛰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집념에 비한다면 우리는 너무도 신앙에 집념이 없었다는 결산을 스스로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다윗과 같은 신앙이 되도록 모든 면으로 힘을 써야 하고, 그렇다면 대학, 직장, 결혼 등을 목표로 애를 쓰는 이상이 되어야 할 터인데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어리다고 봐야 하고 우리의 '회개수준' 역시 어릴 것이 분명합니다. 평생이라는 세월을 두고 우리를 길러 가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채워나갈 빈 공간이 많겠으며 이것을 '소망'이라고도 하며 '성장과정'이라고도 합니다.
답변2 : 그 7천명으로 이스라엘은 멸망 받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에 '7천명 의인이 있는데도 멸망?' 을 궁금하다고 질문하셨습니다.
① 이스라엘의 그 7천명이 있었고, 단체 멸망될 이스라엘이 오랜 기간 유지되었습니다.
엘리야 한 사람만으로도 렘5:1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한 사람'이 되기에 충분했고, 엘리야 한 사람만으로도 '이 성을 사하리라'는 말씀대로 이스라엘에 구원역사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하물며 '7천명의 숨은 의인'들이 있음으로 이스라엘은 아합의 범죄, 아합에 이르기까지 누적된 범죄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역사가 계속되었습니다. 엘리야 한 사람 때문에라도 이스라엘이 지켜졌던 것은 왕하2:12에서 '갑절의 영감'으로 새로운 눈이 뜨여진 엘리사가 본 엘리야 한 사람은 바로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었습니다.
엘리야를 이은 엘리사는 그 임종에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눈물을 흘리며 이스라엘이 유지되고 지켜진 것은 바로 엘리사 한 사람이었음을 말하여 왕하13:14에서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일단 질문하신 '7천명의 무릎 꿇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어도 이스라엘이 멸해졌다'는 내용은 아합 시대가 주로 기록된 열왕기상과 역대하 전체를 살펴볼 때 약간 착오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합 시대가 아합의 유례없는 타락으로 극심한 어려움과 여러 전쟁들이 있었으나 구원의 여지를 아예 없애버리는 '멸망'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② 이스라엘은 의인들이 있었고, 따라서 멸망이 아니라 복음의 청결 작업이 진행중이었습니다.
우선 질문하신 내용 중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또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행위들을 '과거사'로 보시고 7천인을 '남기리니' 하신 것을 '미래사'로 보신 것 같습니다. 동사의 '시간을 기준'으로 의인들이 7천이나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하신 것으로 보신 질문 역시 약간 착오가 있는 것 같습니다.
7천인은 아합이 우상을 섬기도록 몰아가던 시대가 쭉 내려왔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무릎을 꿇어오지 아니해왔으며 또 입을 맞추어오지를 않았던 이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때까지 계속해서 지켜 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왕상19:16절에 말씀하신대로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장차 하사엘의 칼과 예후의 칼과 엘리사의 칼로 아합과 아합을 따랐던 타락한 이스라엘을 소탕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7천은 하나님이 아합시대를 쭉 통과해온 과거에도 지키셔서 남아있도록 하였고, 장차 일어날 이스라엘 청결역사에서도 그들은 아합에 속하지 않았던 이들이기 때문에 그 청결역사에서 멸해질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해 하사엘, 예후, 엘리사 세 사람을 세워 이스라엘을 깨끗이 해 나가시는 역사가 그다음 성경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이는 '의인이 하나도 없음으로 인하여 멸망 받는 상태'가 아니고, 의인들이 있고 그 의인들로 인하여 아직까지 이스라엘 나라에 남아 있는 구원역사가 있었으며 이 구원 역사를 방해한 '아합'과 그 아합을 따르는 거짓선지 등을 들 솎아냄으로 그들로 인하여 고난 받던 전체 이스라엘을 구하는 역사였습니다.
③ '남겨두신 7천명'의 의미는 나타나게 쓰시는 종만 있다는 것이 아님을 보이십니다.
따라서 이들 7천명은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실존했던 종들이며, 그들의 의미는 하나님께서는 대표적으로 들고 쓰시는 점L 있는 반면에 표시 나지 않으나 또한 붙들고 쓰시는 종들이 있음을 우리에게 '기록'을 통해 특별히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성경을 읽을 때도 이사야 한 사람으로 대표되던 시대는 반복적으로 기록해 주지 않으셔도 숨겨둔 몇 명의 종들이 있는지, 우리는 성경이 없다는 명문을 주시기 전에는 늘 드러나게 쓰이는 종들 배후에 숨어있는 또 다른 차원의 복음사역이 있음을 알아야 할 대목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백목사님이 늘 은혜로운 집회로 그렇게 뜨거움이 많고 나면 이 집회의 이런 은혜가 '개명골짝에서 기도하는 정갑용집사님의 기도' 덕분이라고 하시곤 했습니다. 나타나 역사하는 종들은 사람이 보기에 '나타난 자기뿐'이지, 보이지 않는 어떤 역사가 어떤 숨은 성도로 인하여 진행되는지, 우리가 늘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출애굽의 역사는 모세의 한 사람의 역사라고 보일 정도였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구원역사의 대업을 이룬 모든 운동에는 모세가 모세 되도록 모세를 키웠던 어머니 '요게벳'이 늘 빠질 수 없을 것입니다. 사무엘을 사무엘로 하나님 앞에 바친 '한나'가 있었으며 심지어 이새는 성경에 그의 의인됨을 별로 기록한 곳이 없습니다만 늘 다윗의 이름 앞에는 불필요해 보이는 '이새의 아들 다윗'으로 이새가 표시되어 따라 다니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의로움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거나 또는 오늘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의 역사는 여러 차원에서 이루어짐을 깨달을 때, 삼가 두려워 할 것이며 특히 드러나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의 종들은 드러나지 않게 그러나 동일한 복음운동의 사역자들이 있을 수 있음을 늘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2. '남겨두신 7천명'을 혹 착각하셨더라도, 의인과 그 시대멸망의 관계는 살필 일입니다.
① 의인 한 사람으로 예루살렘을 사하시겠다는 렘5:1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4대 선지로 여기는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유다나라의 마지막 멸망 순간까지 생존해 있었으나 유다나라의 멸망을 막지 못했습니다. 막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 두 선지자에게는 유다를 멸망시킬 확정을 두시고 그 멸망을 통과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 멸망 중에서 할 일을 가르쳤던 종들입니다. 즉 멸망에서 구원할 의인 한 사람도 있고,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그 멸망을 받지 않고 새 소망으로 자라갈 사람들을 길러 가시는데 심부름시키는 의인도 성경에는 있음을 우리가 확정지워야겠습니다.
6․25전쟁이 1950년이며, 이 전쟁은 해방 후 신사참배 문제를 두고 벌어진 한국교회를 징계한 것이라고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충분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쟁은 동시에 손양원목사님의 순교와 백목사님의 전쟁 속 순생을 위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현실일 수도 있습니다. 6.25전쟁을 한국교회를 징계하는 대재앙이었다고 한다면 그 당시 그 전쟁이 막아질 수 있는 그 시대의 의인들이 없어서는 아니었습니다. 전쟁 중 위에 예를 든 분들과 변판원 등 3명의 순교자들을 보니까 그러합니다.
② 따라서 성경해석은 이 성구를 다른 성구에서 그 범위와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한 사람의 의인으로 예루살렘 전체가 막아지는 경우도 있고, 요나 한 죄인으로 그와 함께 했던 모든 이들이 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에스겔14장에는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의 의인이 있을찌라도 자기의 의로 자기 생명만 건지리라는 경우가 있을 것을 말씀했습니다. 정확하게 또 최점{으로 말한다면, 죄는 자기 죄로 자기가 죽지 남이 지은 죄로 자기가 죽지 않습니다. 의는 자기 의로 자기가 의롭게 되지 남의 의로 내가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갚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노아는 노아의 의로 가족 7명이 혜택을 보고 그래서 노아 한 사람이 아니라 노아 8식구가 다 구원을 받게 된 것은 모순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들 이삭, 손주 야곱, 증손주 요셉에 이르기까지 4대씩 내려간 것, 또 롯이 아브라함 때문에 거부가 되었던 등의 예를 볼 때, 한 사람의 의와 죄는 분명히 다른 사람에게 관련이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출20장 2계명에서, 아비의 죄를 아들에게 주어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심은 유전죄를 말함이 아니고 아비의 그 죄를 아들이 보고 그 아들이 그 죄를 본받을 것이고, 그러면 아비는 아비 죄로 죽고 아들은 아들이 지은 아들 죄로 죽게 됩니다. 내부를 들여다보면 죄인의 자손이 3대 4대 이어가며 멸망한 것은 각자가 자기 죄로 자기들이 죽는데, 이를 외부적으로 보고 또 좀 멀리서 보면, 3대 4대가 계속 망하니까 유전으로 무조건 흘러간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이 3대와 4대를 말씀하신 것은 부모의 죄는 자식에게 본이 되어 자식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데 결정적일 것임을 주의시킨 것입니다.
룻은 이스라엘 총회에 영영히 들어오지 못할 신23:3, '모압'족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조건과 믿음 조건 두 사이에서 믿음을 택했고, 이렇게 믿음을 택한 행위는 모압 사람으로서 바로 예수님의 육의 조상 반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모압 족속에 대하여 영영히 들어오지 못할 금지도 성경이며 룻의 행위는 모압 족속 안에서 구원받을 행위임을 우리에게 덧붙여 주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두 성구를 비교하며 성경을 근거로 전체적이고 결론적인 단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구원을 방해한 모압 족속의 행위는 영영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회개하고 룻과 같이 하나님 유일 주의, 택한 백성 유일주의로 회개하면 구원의 반열에 서는 것이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재질문 : 7천명의 의인이 있는데도 멸망? 약간의 변명과 재질문 209
자세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여러 가지 질문들에 대한 답변들을 볼 때마다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며 느끼게 됩니다.
설명해 주신 내용에 약간의 이견(혹은 변명)을 말씀드린다면, 착오나 착각이라기보다는 '멸망이라는 단어'와 '멸망의 시점'에 대한 표현의 차이 내지는 시각의 차이라 사료됩니다.
1. 앞서 드린 질문에서 '멸망'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구원의 여지를 아예 없애 버리는 '진멸'을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극에 달했던 이스라엘의 타락과 그로 인한 나라 전체의 형편, 3년 6개월 비가 오지 않아서 기근이 극심했고, 시기가 조금 지나서이지만 엘리사 시대에는 두 여인이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일로 다투는 일까지 있었으니 그 정도면 멸망이라 생각했던 것이며, 또 멸망의 시점을 말한다면 그 당시에 바로 멸망된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범죄로 인한 이스라엘의 결국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결국 앗수르 나라에 멸망되어 남은 자가 없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멸망'의 내용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왕하7:13- 이 말들이 성중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온 무리 곧 '멸망한 이스라엘' 온 무리와 같으니이다 하고)
(왕하17:1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심히 노하사 그 앞에서 제하시니 유다 지파 외에는 남은 자가 없으니라')
(렘4:30- '멸망을 당한 자여' 네가 어떻게 하려느냐)
(렘9:12- 이 땅이 어찌하여 '멸망하여' 광야같이 타서 지나는 자가 없게 되었느뇨)
(애4:10- 처녀 '내 백성이 멸망할' 때에 자비한 부녀가 손으로 자기 자녀를 삶아 식물을 삼았도다)
2. '그 7천명으로 이스라엘은 멸망하지 않았다'라고 역설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를 통하여 하사엘과 예후와 엘리사를 세워 아합과 아합을 따랐던 이스라엘을 소탕했고 7천인은 그 멸하는 속에 들지 않았다는 말씀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아니더라도 이스라엘이 마지막에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 7천명으로 이스라엘이 멸망하지 않았다는 역설적인 확답은 저로서는 좀더 연구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롬11:3-4)말씀이 해당이 될는지 혹 모르겠습니다만.
3. 그리고 7천명이라는 순교적인 신앙의 사람들이 있는데 이스라엘이 그렇게까지 타락이 되어졌다는 것도 저로서는 연구가 좀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의 죄와 의는 다른 사람에게 분명히 관련이 있는 것이 성경'이라고 하셨는데, 그러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순교적인 신앙의 사람 7천명이 복음 역사를 했다면(만약) 그렇게까지 이스라엘이 타락이 되었을지? 그렇게 타락하기까지 7천명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하나님께서 대표적으로 쓰시는 종들이 있는 반면에 보이지 않게 붙들고 쓰시는 종들이 있다는 말씀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만 .지금의 한국이 세계에서 제일 잘 믿는 나라라고 하지만 한국 기독교 100년 역사를 통틀어 순교했거나 할 만한 신앙의 사람이 7천명이 될는지? 재 질문을 드리면서도 너무 주관적이지 않나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만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답변 : 소돔과 고모라를 두고 아브라함이.....
1. 질문하신 세미한 부분을 모르고 다른 면으로 답변을 드렸습니다.
소돔 고모라를 두고 아브라함이 기도한 '의인의 숫자'는 먼저 답변 드린 내용처럼, 또 재 질문에서 지적한 대로 '최점{ 멸망'에 주로 해당되는 경우였습니다. 아합 시대를 '최점{ 멸망'으로 본다면 1차 답변이 해당될 수 있으나, 아합 시대를 여러 단계로 나누어 좀 더 세밀하게 관찰한다면 분명히 멸망 받은 여러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엘리야와 함께 그 시대를 지켰던 7천명의 의인들이 실존의 인물이며 또 그 숫자가 그렇게 많았다면 충분히 그 시대에 있었던 여러 멸망들이 막아졌어야 했었다는 질문이라면 앞에 드린 답변에 다시 보충 답변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2. 한 의인의 의는 그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어야 하는데 왜 전체에 해당되는 면을 가지는가?
자기 의로 자기가 구원되고 자기 죄로 자기가 멸망 받는 것이지 남의 죄로 내가 죽고 내 의로 남이 구원되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한 사람의 죄와 의가 주변 뿐 아니라 시대 전체의 멸망과 구원에 분명히 관련되어 있는 경우를 명시한 곳이 적지 않습니다. 일견 모순 같아 보입니다.
예를 들어 본다면, '하나님은 무형'이심이 가장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 얼굴이 있고 손이 있고 또 눈이 있다고 명시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본래 본 자가 없다고 한 성구가 있으나,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본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본체가 무형이신데 유형인 우리에게 유형의 예를 들어 무형의 세계를 알려주는 표현이며 방편입니다.
사람의 복과 멸망은 그 사람 자신의 죄와 그 사람 자신의 의에 따라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그 나라 혹은 그 지방 전체의 흥망이 한 두 사람의 죄나 의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있고 이런 사건이 있을 때에는 일단 그 당시에 어느 죄인과 어느 의인 때문에 이스라엘에 구원 역사가 있었으며 또는 멸망 받는 역사가 있게 되었는지를 명시한 곳이 많습니다. 그런 죄인과 의인이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일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그 당시 그 죄인과 의인이 누구며 그 숫자가 몇 명이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있었는지를 계산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계산을 할 때 항상 기억해야 될 가장 중요한 기준이 있다고 봅니다.
한 사람의 의는 전체의 죄악 속에 던져져도 그 의로 그 사람은 멸망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의가 다른 사람을 살려가고 의를 확장해 가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멸망 받을 다른 죄인들의 회개를 기다리게 됩니다. 열 명의 의가 그 곳에 있을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의를 전달하고 의를 넓혀가지 못하고 오히려 그 의가 그 범위를 축소해 간다면 하나님께서는 더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됩니다. 의가 자라가면 그 의가 자라가는 동안에는 아직 죄 가운데 있는 죄인들에게 매가 갈 수 있는 기간이 연기됩니다. 그러나 의는 축소되어가고 죄가 자라가게 된다면 하나님의 매는 올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자기 의를 바로 지키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속한 곳에 멸망이 언제 임하여도 그 의인은 그 멸망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따로 취급하십니다. 그러나 의인의 의가 다른 사람을 살려가는 구원 운동으로 나간다면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고 이것이 의인된 사람을 의인으로 만든 '대속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의가 힘이 있어 의를 키워 가면 죄인들에게 소망이 있겠고, 의가 힘이 없어 죄가 늘어 가면 죄인들에게는 소망이 없겠습니다.
3. 예루살렘에 의를 행하는 한 사람을 찾는다는 '1명의 의'는'의의 뿌리'를 말합니다.
만일 이 렘5:1에서 한 사람의 의로 예루살렘을 구한다는 말씀이 모든 단체 멸망에 해당된다고 하면, 성경에 모순 되는 곳이 한 두 곳이 아닙니다. 또한 이 '한 사람'의 법칙이 그 당시 그 예루살렘에는 해당되고 다른 곳에는 다른 숫자와 다른 기준이 제시된다면, 오늘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을 성구들이 한 두 곳이 아닙니다.
우선 예레미야 시대에 요구한 '1명'이든, 소돔과 고모라에 요구한 '10명'이든 성경이 요구한 그 곳에는 그 숫자가 더하고 빼지 못할 성경의 명시된 숫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 우리에게는 이 숫자들이 요구하는 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같습니다. 예루살렘 멸망을 목전에 두고 이미 예루살렘에는 '의의 뿌리' '의가 재생할 가능성'이 없어졌습니다. 유다 나라가 바벨론나라에 의하여 완전히 망할 때에, 유다 나라에는 의인인 예레미야 자신이 있었습니다. 혹시 예레미야 자신 말고 또 한 사람의 의인을 더 요구했다면, 에스겔 선지가 바로 그 시대 사람이었습니다. 두 의인이 최소한 이스라엘에는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가 말한 '한명의 의인'은 2명의 의인 외에 제 3의 의인을 말씀하는 것인가? 모르드개와 같은 의인도, 비록 어리지만 포로 잡혀 간 다니엘도 그 친구 3명도 전부가 유다가 멸망하던 그 시대의 의인들입니다. 유다가 완전히 절단 나던 때에 유다에 의인의 숫자가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성전까지 완전히 훼파하며 성전 안에 거룩한 물건들을 전부 이방에 넘겼습니다.
유다 나라 전체를 두고 계산할 때에는 역사에 어느 시대에 비겨도 비겨볼 수 있는 이런 많은 의인들이 있었고 또 그들의 호소가 눈물의 선지라는 이름으로까지 전해졌지만, 유다 나라 전체를 볼 때는 더 이상 극심해 가던 죄를 보시고 그들에게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는 백성들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충분히 경고했고 때가 되어 정리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시대 모든 선지와 의인들은 자기들이 부족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절단 났다고 스스로 겸손했을 것이고 또 그런 자세가 있었기 때문에 바벨론으로 옮겨진 후 유다 나라의 다음 소망을 위해 하나님 앞에 긍휼을 받을 수 있는 많은 의를 행했고, 그 의가 다시 유다 나라를 소생할 수 있는 뿌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일단은 완전히 멸망을 받게 된 것은, 그 당시에도 있었던 의인들의 의로운 행위보다 그 당시 그 시대 전체가 멸망 받을 죄의 행위가 더 극심했습니다. 더 극심해지는 죄로 인하여 그 시대는 시대 전체적으로 더 이상 기다려 주시는 은혜를 받지 못했고 그래서 그 시대 전체는 멸망을 당했습니다.
누적되어 온 유다의 범죄와 유다를 회개 시킬 의, 둘을 놓고 하나님께서 비교하고 그 시대를 하나님께서 없애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 시대 선지와 의인들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그 시대 하나님의 일반 백성과 왕들의 강퍅이 더 이상 구원의 소망으로 기다릴 필요가 없었고 전부 멸망시켰던 것입니다.
4. 그렇다면, 엘리야 시대의 '7천명'과 그 시대의 완악함을 함께 놓고 계산할 수 있습니다.
7천명의 의인이 자신들은 죄를 짓지 않고 자기 의를 지킬 사람들이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의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스라엘의 시대적 멸망을 막을 수 있도록 이스라엘을 회개시켜 나갈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이스라엘 전체에는 멸망의 재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10명의 의인이라면 소돔을 구원할 수 있었으니, 7천명이나 되는 의인들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겠다는 것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7천명이 있었지만 아합 시대에 멸망은 여러 형태로 계속되었으니 우리는 성경에 기록해 주신 그 결과를 가지고 확실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7천명 의인들의 의로 이스라엘이 조금씩이라도 회개가 많아지고 있었다면 하나님은 기다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합과 이세벨이 주도한 이스라엘 전체의 유례없는 죄는 하나님의 큰 징계까지가 가해져야 될 죄였습니다. 그러나 전멸재앙으로 그 구원의 여지를 없애는 정도에 이르지 않았던 것은 엘리야와 엘리사를 잇는 그 시대의 의인과 이 7천의 의인들이 있어 이스라엘 전체를 볼 때는 아직까지 회개의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엘리야는 그 활동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을 회개시켜 나가는 의인이었으나, 7천의 의인들은 아합에게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의를 더럽히지 않았던 의인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같은 의인이라도 그 의인을 여러 모양으로 사용하신다고 봐야 할 것 같고, 이스라엘을 회개시켜 나가던 이스라엘의 소망은 실은 엘리야 한 사람일 것인데 그 엘리야까지도 자기 하나를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였던 것이 아합시대의 강퍅이었습니다. 이 정도였다면 전멸재앙으로 구원의 여지가 없도록 재앙이 닥쳐질 만 했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심은 엘리야를 잇는 엘리사로 이스라엘에는 다음 시대로 이어지는 구원의 소망이 준비되어 있었고, 동시에 7천의 의인들 중에서 장차 이스라엘을 위해 엘리야처럼 힘있게 의로 활동할 소망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1970년대 당시에는 복잡하게 얽힌 국내 정치 현실 때문에 실존하던 남침 위협을 실제 위협으로 느끼는 사람들이 적었습니다. 월남 패전 직후였던 1975년, 백영희목사님은 6.25전쟁이 재발된 정도의 다급한 심정으로 한국교회의 회개를 외친 적이 있었습니다. 저 자신도 너무 민감한 반응이라고 보았으나 존경하는 점L었기 때문에 그 인식을 소극적으로 받아 들였던 정도였습니다. 당시 그분의 기도는 오직 한 가지에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국교회 전체를 봐서는 청소를 위해서라도 얼마든지 전쟁이 있어야겠으나 깨끗하게 자라나는 어린 주일학생 수천명이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이렇게 커나가고 있으니 이들에게 전쟁 없는 고요한 때를 허락하시고, 이들의 신앙이 전쟁을 감당할 때가 된다면 그때는 이들을 귀하게 순교로 받든지 아니면 이들의 깨끗한 신앙으로 한국교회가 회개하여 전쟁이라는 청소도 필요 없는 그런 때를 소망하도록 전쟁을 막아주시라'는 기도였습니다.
5. 다른 예를 참고한다면,
더 강한 의가 더 강한 악한 시대를 만나 그 시대 전체를 구원하지 못했던 때는 종종 많았습니다. 노아의 의도 결코 작은 힘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2천년 내려오는 초기 하나님의 백성들의 전체적인 강퍅은 물로 완전히 쓸어버려야 했고, 노아는 역사에 없는 큰 승리자가 되고 나머지는 역사에 비할 바 없는 큰 멸망을 받게 되었습니다. 전체 계산은 하나님의 주권 섭리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섭리 역사는 그 시대 개개인의 의와 죄를 계산하며, 동시에 그 시대 전체가 의로 나아가는지 죄로 완강해져 가는지를 계산하게 되며, 동시에 그 시대 전체를 두고 하나님께서 어떤 역사로 움직이는지 우리는 과거를 보고 그 시대를 평가하기는 쉽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시대가 어떤 의와 죄로 어떤 전체 멸망과 전체 구원을 계산하시는지, 그리고 마지막 결론은 어떻게 이 시대에 보여질런지가 문제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의 의라도 바로 지키고 있으면 천인이 네 옆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결코 너에게는 미치지 않으리라는 약속은 꼭 지켜질 것이며, 내가 힘쓴 의가 점점 전해지는 양이 많아진다면 하나님의 진노는 연기되며 혹 멈추어지며, 더 나아가 복 주시는 시대로 바뀔 수까지도 있겠습니다. 내가 힘이 없어 주저앉던 내가 어떤 시대보다 강한 의로 전하는 데도 그 의의 결실이 자꾸 축소가 되어진다면,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버리시는가 라는 문제로 두려워할 일이고, 요나처럼 니느웨의 멸망을 기어코 봐야겠다는 심보를 혹시 가지게 되면 나는 내 의를 가졌으니 안심해도 되고, 이왕이면 다른 사람들 당하는 구경이나 하자고 될까 심히 두려워할 일입니다.
소돔을 두고 아브라함에 10명까지 의인을 계산한 것은, 롯의 의라면 아내와 딸 둘, 사위 둘, 최소한 거느린 종 몇 명이라도 의인을 만들었어야 하고, 비록 어려도 이렇게 자라가는 의가 있다면 하늘에까지 사무친 소돔의 죄라도 더 기다리며 구원받을 백성들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아들, 며느리가 아브라함의 의가 전해져 의인들이 되었고, 심지어 심부름 보낸 노복도 비록 점G 신분이나 하나님과 동행하며 맡은 일을 은혜스럽게 완수하는 의인이었습니다. 따라서 소돔을 두고 아브라함이 찾아보겠다고 하나님께 구한 '10명'의 의미는 어느 곳이던 구할 수 있는 '기준으로서의 10명'이 아니라 롯의 의와 소돔의 죄악을 두고 하나님께 더 기다려야 할 '의가 자라가고 있는 최소한의 증거'였고, 그러나 아무리 계산해도 롯이 그런 최소한의 의를 만들어 놓지도 못했을 것이라 하나님께 더 이상 소원을 하지 못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죄악이 대단했고 그 범위가 온 백성에게 미치고 있었으나 비느하스가 들고 꿰뚫은 한 '의분'은 하나님 앞에 비록 '1명의 의인'이었으나 그 '의의 기세'가 강퍅한 이스라엘 중에서 의를 살려갈 증거로 보셨고 그 의 때문에 전체 멸망을 멈추었던 것입니다.
6. 문제는 오늘 우리 시대 우리 형편을 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믿는 어느 가정을 볼 때, 술에 노름에 엉망진창이 되었을찌라도 그 가정에 어린 아이 하나가 주일학교를 다니고 그 아이 때문에 그 형 하나가 교회를 또 나가게 되고, 그 집 아버지가 말술을 마시다가 잔술로 낮아지고 이렇게 나아가면 하나님은 기다리며 그 의의 장성을 지켜봅니다. 목사 가정에 자녀가 예수를 안 믿고 그 목사가 돈만 알게 된다면, 그래도 아직까지 자기 교회 다니는 그 주일학생에 비하면 가정 전체가 의가 많은데 앞에 가정은 지켜보시고 뒷 가정은 멸망재앙으로 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는 이스라엘의 사사였습니다. 그 자녀로 내려가며 심해졌습니다. 더 이상 기회를 줘도 죄가 커지지 의가 자랄 여지가 없게 될 때 그 가정의 멸망이 결정되어졌습니다. 반대로 사무엘의 가정은 그 자녀들 역시 엘리 집과 같이 둘 다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의 신앙은 그 두 자녀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 자녀의 범죄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수고를 다 했고,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셔서 자녀의 죄가 막아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죄가 그 가정에서 세력을 키워나가지는 못했고 사무엘의 의의 범위가 그 가정 전체에 더 크게 힘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자녀의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결과로 볼 때 그 과정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엘리는 엘리 자신부터 시작해서 자녀로 내려가며 악화가 되고 있었고 성화로 돌아설 여지가 없었고 그래서 그 가정을 기다리던 기간을 없애버렸습니다. 사무엘은 반대였음이 그 결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하나님 앞에 붙들고 마지막까지 이 시대를 불쌍히 여겨 주시라고 눈물로 간구한 종, 천하가 단체 속화로 달려갈 때 단 한번도 그 교계에 얼굴을 나타내지 않고 오직 참된 의인들이 자라도록 주일학교에 모든 소망을 걸고 전부를 다했던 분, 이 시대를 오늘까지 하나님 앞에 그 진노의 날을 연기시켜 왔던 분은 제가 아는 범위에서는 '백영희목사님' 한 분이었습니다. 제 눈에 발견되지 않았던 더 위대한 분이 계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백영희목회연구회는 이 시대를 큰 범위에서 보며 심히 두려운 마음을 가집니다. '넓혀 가는 의', '힘을 더해 가는 의'라는 기준에서는 이 시대 의인이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 한 사람의 의를 겨우 붙들고 있는 분들은 주위에서도 더러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는 시대적으로 본다면 소망이 없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