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주기도문에 관하여, 이것은 필이 바꿔야 할 것 같은 데요 3307

주제별 정리      

                                           4. 주기도문에 관하여, 이것은 필이 바꿔야 할 …

서기 0 22

4. 질문 : 주기도문에 관하여, 이것은 필이 바꿔야 할 것 같은
데요 3307

저희가 주기도문 끝에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는 부분 있잖아요. 그런데 성경에는 대개라는 말이 없습니다. 괄호는 쳐저 있지만요. 그리고 대개라는 말은 대부분이라는 말인데, 그것은 어떤 나라는 속하고 어떤 나라는 속한다는 뜻이잖아요. 그것은 성경과 맞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를 타 교회 다니는 아이한테 들은 건데요. 올바르다고 봅니다.

성경은 획 하나도 가감 없이 해야 한다는 백영희 목사님의 말씀이것도 하나의 실현이라고 보는데요. 조금 힘들더라도요. 그냥‘........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으로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성경이 답이니까 성경보시고 대답해주세요


답변 : 주기도문 내용은 1차 번역된 구역성경과 2차 번역된 개역성경의 차이를 아셨으면

1. 주기도문은 성경 마6:9-13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

① 우선, 한글성경의 ‘개역본’과 ‘구역본’을 아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인정하는 정식 한글성경의 번역은 2번입니다. 해방 전 사용하던 1차 번역성경은 편리상 ‘구역’성경이라 하고, 현재 사용하는 2차 번역본은 ‘개역’성경이라고 합니다. 1차 번역은 1910년에 완성되었고, 2차 번역은 1937년에 완성했습니다. 백영희목사님이 암기하고 신앙 초기에 사용하던 성경은 1차 번역본인 ‘구역성경’입니다.

1차 번역본과 2차 번역본은 해방 이전 일제시대에 완성된 번역본이어서 그 맞춤법이 조선말 고어체로 되어 있었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한국정부는 맞춤법을 새로 고쳐서 고어체를 없애게 되고, 성서공회도 2차 번역본의 번역 자체는 손을 대지 않고 다만 그 표현법은 현대 맞춤법을 따라 고치게 되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경은 현대 맞춤법으로 고쳐 적은 ‘2차 번역본, 개역성경’입니다.

참고로, 이곳은 한글 성경번역본에 관한한 이 2차례에 걸친 성경번역으로 우리 한국교회가 가져야 할 성경번역은 필요충분조건으로 완결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해방 후 천주교와 기독교가 함께 번역했던 ‘공동번역’이나 현재 완료되어 급속히 사용되고 있는 ‘표준새번역’ 등은 주석 정도로 상대하지 성경으로 상대하지 않고 있습니다.

② 마6:9-13의 주기도문의 ‘대개’라는 단어는 구역과 개역의 차이입니다.

구역성경의 주기도문과 개역성경의 주기도문을 참고로 비교해 드리겠습니다. 비교를 쉽게 하기 위해서, 다른 부분만 표시했습니다. 그리고 개역성경은 현대 한글맞춤법으로 바뀐 것입니다.

(구역한글성경) (개역한글성경)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③ 2가지 한글번역본에 대하여 총평을 간단하게 드린다면

1차 번역 성경과 2차 번역 성경은 내용에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부분은 1차 번역본이 낫고 어떤 부분은 2차 번역본이 낫습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1차 번역본이 더 은혜스럽고 정확하다는 것이 이곳 신앙노선의 입장입니다. 어문 기술적으로만 본다면 2차 번역본은 분명히 1차 번역본보다 여러 면에서 낫다고 보이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번역이라는 것은 어문 기술로만 판단하는 것이 아니며, 이 부분에 대하여는 이곳 다른 자료에서 많이 살폈기 때문에 따로 살피지 않겠습니다.

1차 번역본을 더 선호하지만, 이곳이 2차 번역본인 개역성경을 전면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2차 번역본이 추진되고 사용되던 1937년 당시 한국교회는 오늘과 달리 전체 신앙노선 흐름이 보수적이고 건전하였습니다. 세부적인 면까지 다 만족할 수는 없지만 한국교계 전체가 그래도 건전하게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교회 전체와 맞서거나 등을 대고 다른 길을 걸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번역에 아쉬운 부분이 많지만 2차 번역본을 함께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것도 아니라 성경번역을 두고 이곳처럼 엄격한 신앙노선에서 아쉬운 부분이 많은 번역본을 사용할 때는 교계와 마찰을 피하는 화평주의에만 치중한 것은 아닙니다. 2차 번역 성경을 사용하게 된 첫째 이유로는 이미 1차 번역인 구역성경을 완전하게 익히고 있었기 때문에 2차 번역의 부족분을 보충할 수 있었고, 또 두 번째 이유로는 1차 번역본이 더 정확하다 해도 그렇다고 해서 번역 성경에게 완전을 요구할 수는 없으며, 세 번째로 가장 중요한 점은 1차 때나 2차 번역 때 번역을 담당했던 분들이나 당시 교회의 분위기가 그만하면 성경번역을 인정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동시에 성경번역에 집중하는 노력이 인간으로서는 모두들 최상의 노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정도의 분위기에서 이미 2가지의 번역본이 나왔다면 원어에 무식한 한국교회 일반 교인으로서는 그 2가지 번역본을 통해 오히려 원어 무식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면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번역은 어느 정도 수준의 실력으로 번역이 되는 경우, 2가지 번역본을 통해 비교하게 되면 원어를 알지 못해도 원어를 달통한 사람의 원어지식을 능가할 수 있는 눈치를 열게 되는 면이 있었습니다.

④ 개역번역에 ‘대개’를 뺐지만, 이미 한국교회의 입에 익어 져 있었습니다.

마6:9-13 본문을 놓고 1차 번역과 2차 번역의 차이를 위에서 비교해 드렸습니다. 1차 번역 때는 ‘대개’가 들어갔고 2차 번역 때는 빠졌습니다. 그래서 1차 번역본으로 주기도문을 외울 때는 ‘대개’가 들어갔는데, 그 후 40여년이 지나면서 2차 번역이 나오게 되고 그 내용이 부분적으로 다르게 되자, 주기도문 본문을 바꾸어야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지만 한국교회는 성경 본문의 번역이 변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주기도문의 내용만큼은 과거 구역 번역본에서 번역한 내용을 그대로 따르기로 합니다. 번역이라는 것은 그 성질상 완전이나 절대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2차 번역을 전면적으로 시도했다는 것은 조금 더 정확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로 번역된 내용이 앞에 번역된 주기도문 내용보다 더 낫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이미 한국교회 교인들의 입에 익어져 있는 내용은 될 수 있는 한 바꾸지 않으려 한 당시 한국교회의 분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 2차 번역 본문이 좀더 낫다고 할지라도 1차 번역 본문 자체가 틀렸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미 교회가 외우고 있던 주기도문 본문은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보다 은혜롭다는 것을 당시 교회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 질문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내용이지만, 번역과 관련하여 말이 나왔기 때문에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이곳이 성경번역 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오늘 한국교회는 번역할 실력도 턱도 없이 부족하지만 그 이전에 번역할 인재와 교회의 자질도 분위기도 기본자세도 돼먹지 않았다고 혹평부터 하고 나서는데, 주기도문 문제를 두고 1차 번역에서 외우던 본문을 2차 번역 때에 내용을 바꾸었는데도 과거 번역본 내용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에서 당시 분위기와 오늘 교회의 분위기는 대볼 것도 없이 그 내면 신앙차원이 크게 다릅니다. 당시는 교계적으로 다 건전했고 보수적이었으며 믿을 만한 신앙의 분위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반면에 지금은 교회가 바꾸어야 할 것이 무엇이며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이며, 그 판단은 어떤 경우에 어떻게 하는지 등을 두고 근본적으로 자질도 자격도 없는 시대입니다. 찬송가 가사나 새로운 성경번역 등 현 교계의 제반 문제 전체를 두고 이곳이 현 교계를 가차 없이 비판하고 그들의 행태와 상관없이 이곳 원래의 길을 걷고 있는 데는 이런 구체적이고 과거 자료로 증명이 가능한 사례가 수도 없으며, 이 주기도문 본문이 그 중에 하나입니다.

⑤ 주기도문 내용에서 ‘대개’라는 단어 외에 다른 내용들의 변경

일단 주기도문 본문은 1차 번역인 구역성경의 본문과 2차 번역인 개역성경의 본문이 약간 다르기 때문에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하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위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은 오늘 주기도문 본문이 구역 본문 전체를 다 바꾸면서 ‘대개’라는 표현 하나만 남겨놓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은 1980년대 초반 한국교회의 통일찬송가 출간 문제가 있었습니다.

2차 번역 때문에 주기도문의 본문이 바뀌었는데도 주기도문처럼 교인들의 입에 오랫동안 익어 있는 내용은 이전 것을 그대로 사용하자는 것이 1930년대까지의 한국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 성경의 정확무오성을 인정도 하지 않는 넓은 교단들부터 주기도문 내용이 2차 번역된 성경본문에 일치시키자며 그 내용의 변경을 주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의 정확무오성을 더 강하게 주장하는 교회일수록 변경된 번역 내용에도 불구하고 과거 내용을 그대로 사용하자는 주장이 맞서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84년부터 일반 교인들에게 교계의 찬송가가 통일되어 출간되며 지난날 입에 익었던 찬송가 가사들을 모조리 바꾸되, 바꿀 필요도 없는 것이나 심지어 바꾸어서 안 되는 내용까지 다 바꾸는 사태가 발생하는데, 이때에 찬송가 겉표지 안에 인쇄되던 주기도문이 2차 번역인 개역성경 본문에 맞추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조차 ‘대개’라는 본문은 과거 1차 번역 때 사용된 ‘구역성경’ 본문의 내용이 유지됩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대개’라는 내용만 1차 번역인 ‘구역성경’ 본문이 반영되고 그 나머지 내용은 시대를 따라 계속 왜 바뀌며 어떻게 바뀌며 이 바뀌는 일에 기준과 원칙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오직 교계의 정치판세와 대중적 선호도만을 따라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먼 여행을 떠나고 있다는 것이 이곳의 탄식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의 가는 길은 늘 세상을 향해 좀 더 가까이 좀 더 깊숙이 닮아가고 변해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변질’이라고도 하고 또는 ‘속화’라고도 합니다. 쉽게 말하면 타락이고 탈선입니다.



2. 사실, '주기도문'암송은 성구암송인 동시에 교리암송면도 강하다는 점을 기억하셨으면

① 신앙생활과 신앙고백

예배로 모일 때나 중요한 모임이 있을 때마다, 주님 앞으로 나아갈 우리의 걸음이 어떤 방향이어야 하는지를 교리로 요약하여 함께 암송하는 것은 교회가 오랫동안 가지고 내려 온 전통입니다. 이렇게 함께 모여 반복하여 새김으로, 어린 신앙에게는 믿어 갈 방향을 주입식으로 가르치고, 잘 믿는 이들에게는 다시 한번 새롭게 인식시켜 새 은혜를 받게 합니다. 또 닥치는 대로 곁길로 데려가고 싶은 악령의 유혹이 누구에게 언제 접근할지 모르기 때문에 사전에 이를 막기 위해 우리의 결심을 새롭게 하는 것이 신앙고백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어린 신앙들에게나 어린 교회에게는 신앙고백이 비록 유치하게 보이겠지만 그 효력은 적지 않습니다. 특히 혼란스러울 때일수록 더욱 간명하게 요약한 몇 줄의 암송이 수없는 논리와 혼동을 잠재워버리고 때 묻지 않는 순수 신앙을 지키게 하는 큰 힘이 되므로, 비록 장성한 교인이나 교회일지라도 한번씩 교리암송이 어떤 형태로든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기도문으로서 사도신경처럼 신앙고백이라고 하기는 성격상 좀 다른 면이 있지만 좀더 넓은 면으로 본다면 교회는 사도신경과 함께 교회가 은혜 생활을 위해 늘 반복적으로 외우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이렇게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것은 공통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② 중언부언의 위험성

불신자들은 이방종교나 미신을 만들어 놓고 주문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그 효과 때문에 평소 마음과 다른 심리 상태가 되면 그것이 귀신 덕에 무슨 효험을 보는 것으로 취급합니다. 불신자들은 생명 없는 돌이나 나무를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들과 대화가 되지 않으니까 자문자답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도를 덜 닦거나 신을 덜 쓴 사람들은 그렇게 계속할 수 없으니까 그 대안으로 만들어 낸 것이 주문입니다. 중얼 중얼 주문을 계속 외우다 보면 착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부 마음의 작용이지 중생된 영의 작용은 전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불신자 때 하던 일을, 믿고 난 뒤에도 신앙이 약해지면 하던 도둑질을 한다는 말처럼 그때 하던 일을 하게 됩니다. 심지어 신앙생활에 요긴하게 사용되는 이런 교리암송까지도 그 원래 필요성과 목적은 잊어버리고 불신자들 주문 외우듯이 그렇게 사용하며 그 암송하는 행위 자체만 가지고 효험을 기대하게 되는데, 이런 일은 대화를 할 수 있고 실제 활동을 하시는 하나님께는 모독행위입니다.

천주교는 생명을 삶아먹어 목석으로 만든 우상을 상대하는 이단입니다. 그들이 그래도 오늘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힘은 바로 주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좋게 말한다면 교리암송인데, 그 실제 내용은 불교의 주문과 같은 수준이기 때문에 비록 성경을 요약한 교리암송이고 때로는 성구를 그대로 암송하는데도 그 내용과 결과는 불교가 ‘나무아미타불’을 암송하는 것과 같아져서 서양불교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들도 천주교를 고쳐서 나온 세월이 오래 지나면서 천주교의 뒤를 따르는 모습이 너무도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들이 주문식 암송이나 그런 식 예배의식이 많아서 대단히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장례식 절차, 목사 안수 의식, 입당 예배, 틀에 박힌 주일예배의 수십 가지 순서, 교독문 낭독 등을 그 원래 의미도 모르고 그냥 했던 것이므로 무조건 반복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상대로 기도하는 것까지도 중언부언이 되면 성경은 이방인과 같다고 금하고 있습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것만 반복할 것이 아니고 귀를 열고 먼저 하나님 아버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그 시간에는 어떤 다른 말씀이 계시는지 들어보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③ 사도신경과 주기도문

어떤 교회든지 가장 대표적으로 반복해서 암송하는 것은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일 것입니다. 대개 사도신경은 교리문답이고 주기도문은 성구암송으로 단순하게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성경 전체를 요약했기 때문에 교리 요약이라고 생각하는데, 주기도문은 성경 한 곳에서 그대로 옮겨놓았기 때문에 단순한 성구암송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성경 성구는 어떤 성구든지 꼭 같은 중요성을 가졌기 때문에 어느 한 성구만 외울 성구로 생각한다면 오해입니다.

그런데도 주기도문을 초대교회에서부터 교회가 집중적으로 암송하는 것은, 이 주기도문이라는 성구는 분명히 성구암송이면서도 동시에 주기도문 암송이 사용되는 그 성격은 성경 전체에서 기도와 관련하여서는 가장 중요한 요약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서 교회가 마치 교리적으로 사도신경을 반복하듯이 기도에서는 그렇게 반복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신앙생활 전반을 교리적 체계로 요약을 한 것이므로 어느 특별한 성구를 주 대상으로 삼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외견상 교리요약이라고 선명하게 보일 뿐입니다. 주기도문의 경우는 기도라는 특별한 주제 하나를 가지고 시작하여 그 기도 내용에서 신앙전반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용상으로도 교리암송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전체 요약이 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성구들을 성경 여러 곳에서 요약하고 옮길 필요가 없고 마6:9-13에서만 뽑아낼 수 있기 때문에 성경암송처럼 보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사용 성격을 기준으로 엄밀하게 말한다면, 주기도문은 성경암송이면서 동시에 교리암송과 같은 면이 있기 때문에 만일 교회가 필요하면 이 번역본이나 혹 저 번역본에서 참고하여 하나로 만들어도 문제가 될 필요가 없고 또 만일 필요하다면 성경 다른 부분에서 마6:9-13의 내용에 더하여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경우는 반드시 그렇게 하기 전에 성경암송이 아니고 교리암송이라는 면을 먼저 확실히 해 두어야 오해나 혼동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주기도문 내용이 현재 사용하는 성구와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고 같은 상태로 외워야 한다는 주장은 이제까지 설명 드린 이런 면들을 고려하며 조금 신중했으면 합니다.

3. 백영희신앙노선의 주기도문 사용

① 일반 교회와 주기도문 내용 변경이 거의 같았지만 그 내 면 본질은 다릅니다.

앞에서 교계의 주기도문 사용과 그 변경 과정을 잠깐 살폈습니다. 백영희신앙노선은 1980년대 초반까지 과거 1차 번역 본문인 구역성경으로 주기도문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공회노선의 초기에는 사도신경과 주기도문 순서를 예배 때 많이 사용하였지만 교회가 성장하고 신앙의 내면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예배 순서에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을 외우는 순서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 것은 사도신경의 신앙노선을 반대하고 거부한다는 뜻이 아니고 사도신경의 내용을 오랜 세월 설교를 통해 그 어떤 교회보다 확실하게 가르쳐 사도신경에서 떠날 수 없는 교회와 교인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제 예배의 형식으로 굳어지는 위험과 예배의 단순성을 고려하여 필요하면 사용하되, 예배 때 등 정해놓고 의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한 주기도문 내용도 교계가 무엇이든 바꾸고 변하기를 좋아하여 바꾼 것과 달리, 성경 본문 충실 때문에 바꾸게 됩니다. 1940년대에는 비록 2차 번역이 이루어졌지만 이미 30여년을 1차 번역 본문으로 주기도문을 수없이 외워 입에 익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 교계와 함께 백영희신앙노선에서도 구역 성경 본문으로 주기도문을 외웠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르게 되자 서부교회를 비롯 백영희신앙노선에서는 주일학생의 출석이 수만명에 이르며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그들에게 바른 교훈을 넣어주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이미 이때에 이르게 되자 일반 교인들까지도 주기도문이 1차 번역과 2차 번역의 차이 때문에 현재 사용하는 성경 본문과 다른 내용으로 외우고 있는 줄을 알지 못하는 분들이 거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왜 마6:9-13은 성경과 다른 내용으로 외우는지 주일학생들과 그들을 지도하는 반사 선생님들을 중심으로 의문이 자주 제기되었고, 특히 주일학생들에게는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과 다른 내용으로 주기도문을 외우게 하면서 그 배경 설명을 1차 번역과 2차 번역으로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런 면 때문에 주일학교 반 사선생님이 백목사님께 구역과 개역성경의 본문을 설명하는 것보다 이제 개역성경을 사용한 지 50여년에 이르는 시점이므로 주기도문의 내용을 ‘변경한다’는 시각에서 바꾸는 것이 아니고, 일반 교인 전체가 구역성경은 알지 못하고 단 한 권으로만 알고 있는 자기들의 성경 본문이 있으니 ‘성경본문과 다른 것을 성경본문에 맞춘다’는 시각에서 바꾸어 달라고 건의를 하게 됩니다.


② 주기도문보다 십계명이 먼저 성경 본문대로 사용되었습니다.

찬송가에는 겉표지 안쪽에 이전부터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이 차례로 인쇄되어 있습니다. 이는 모든 교인들이 암송해야 할 내용이라는 뜻이고 찬송가 안에는 ‘교독문’이 있어 예배 때 사회자와 교인들이 한 절씩 번갈아 가며 시편 등 성구를 읽고 예배 순서를 진행하게 됩니다.

교회를 처음 다니게 되는 수많은 주일학생들을 상대로 믿는 도의 초보를 가르치기 위해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 등을 가르치면서 현장의 반사로서 느끼는 또 하나의 불편은 십계명이었습니다. 십계명 내용은 출20:1-17에 있는데 그 내용이 길고 어렵다 하여 간단하게 요약해서 외우는 것이 보통이었고 또 전체 본문을 제공하는 경우에도 암송할 수 있도록 정리된 내용이었습니다. 이왕 주일학생들에게 암송을 시킬 것 같으면 성경 본문 그대로 암송케 할 수 있고 또 암송한 후 본문과 같은 내용이라야 혼동이 없겠다는 점을 건의하게 됩니다.

그래서 1983년 6월에 당시 사용하던 새 찬송가에서 주일학생 휴대용으로 101곡을 뽑아서 출간할 때 우선 십계명을 현재 사용하는 개역성경 본문을 그대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계가 무엇이든 바꾸는 것이 좋아서 찬송가를 전면 개편하게 될 때, 그들은 유행과 새것을 좋아하여 주기도문을 2차 번역인 개역성경 본문으로 바꾸었고, 백영희신앙노선은 50여년 동안 성경을 읽으며 마6:9-13을 수없이 익혀 성경본문과 찬송가 표지의 주기도문 내용이 다르다는 차이를 두고 성경본문 우선 원칙을 세워 주기도문 내용을 바꾸게 됩니다. 이 주기도문이 바뀌기까지는 수년 전에 건의가 올라간 뒤에 백목사님은 장기간 기도하고 살펴본 다음 그렇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③ 찬송가 표지의 3가지 암송용 내용의 순서 변경

원래 새 찬송가에는 앞표지 안면 왼쪽에 ‘주기도문’, 오른쪽에 ‘사도신경’ 그리고 찬송가 뒷표지 안쪽에 ‘십계명’이 순서대로 있었습니다. 백목사님은 1983년 6월 주일학교 찬송가를 출간하면서 그 순서를 ‘십계명’ ‘주기도문’ ‘사도신경’으로 변경하게 됩니다. 십계명은 성경 전체의 강령이므로 그 순서가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보다 앞서야 옳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이 세계교회사에서 초대교회로부터 교회가 예배 모임 등에서 하나의 의식으로까지 고정되도록 외우게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파격적인 조처이며 이 3가지를 평가하는 그 시각도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이 공식 예배에서 계속해서 반복되고 암송되어야 했던 시절은 교회가 어렸을 때이고 또 그때 상황에서는 그 암송을 통해 교회가 살아남아야 할 투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위험과 다른 차원에서 악령이 교회를 삼키려고 접근하고 있는데도 과거 했던 것이므로 무조건 반복하는 하나의 의식이 되어 버려, 겉으로는 수천 년 교회전통을 엄격하게 지키는 정통 교회로 보여 지는데, 실은 내적으로는 현재 전투가 어디서 어떻게 발생되는지도 모르고 있다고 할 만큼 교회가 어두워있습니다.

따라서 백영희신앙노선에서는 십계명과 주기도문 그리고 사도신경으로 그 교훈의 중요성과 오늘 교회의 필요성을 평가하는 것이 새롭다고 하겠고, 이런 면까지를 세심하게 살필 때 오늘 우리가 걸어갈 앞날에 또 다시 잡고 나가야 할 주 투쟁의 방향과 주 노력의 차원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가 숙제일 것입니다.




④ 마지막으로 질문 내용 중에 답변 못한 것을 마무리 하겠 습니다.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라는 본문은 질문자께서 지적하신 대로 성경 본문에는 괄호 안에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성경 원본은 없어졌으나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던 사본들이 오늘까지 남아 있는데 그 사본들끼리 미세하게 내용이 다른 부분들이 있습니다. 사본끼리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해도 전체 사본을 놓고 전체 성경 내용을 볼 때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는 그런 내용들은 배제를 시킬 수 있는데, 사본끼리 어떤 내용이 더 정확한지 애매한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성경을 번역할 때 괄호를 표시하거나 또는 성경본문 밑 부분에 따로 표시를 하여 다른 사본에는 이런 단어가 이렇게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점일획도 가감이 없는 것이 성경이라고 질문자께서 말씀하신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그 일점일획도 가감 없이 정확한 성경은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글성경이 아니고 또 사본성경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성경을 처음 기록하게 했던 그 원본성경에만 해당됩니다. 원본성경은 현재 남아있지 않습니다. 또 혹 남아 있다 하더라도 어느 것이 원본성경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렇게 원본성경을 오늘 교회에게 감추시고 그 대신 약간씩 차이가 나는 사본성경을 우리에게 넘겨주신 분이 또한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약간씩 내용이 다른 것 때문에 성경을 믿지 못할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큰 위안이 되어 마음 놓고 성경을 부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바로 믿고자 하는 복된 사람들에게는 사본의 차이는 그 사본의 원본인 성경 자체를 처음 기록할 때 그 기록의 원저자인 성령이 사본과 그 사본에서 번역된 성경을 읽는 우리 마음속에 계셔서 직접 지도해 주고 계시기 때문에 성경 본문의 일부 애매하거나 차이가 나는 부분은 각자 자기 속의 성령에게 붙들려 해결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 문제는 현재 이곳 문답방에서 ‘성경’이나 ‘사본’ 또는 ‘원본’ 등의 단어로 검색하시거나 아니면 검색창 중에서 ‘주제별 검색’에서 내용별로 찾아보시면 이미 많은 말씀으로 안내한 적이 있습니다.

참고로, '대개'라는 뜻은 대충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는데, 주기도문에서 사용되는 '대개'라는 뜻은 '크게 말하면' '가장 중요한 것을 총괄적으로 말하면'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