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방언에 대해 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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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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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51
1. 질문 : 방언에 대해 611
저는 얼마 전 외로워하는 저의 할아버지를 위해 교회 다니는 직장동료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기도드림과 동시에 직장동료분이 예언도 하고 또 저를 위로해 주시고 할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기도 하라는 등 방언을 처음 들었습니다. 기도응답내용은 대략(사랑하는 00야 니가 젊은 날에 나를 영접하고 나를 믿어주니 참 대견하구나? 니가 할아버지를 얼 만큼 사랑하는지 아비 어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다 알고 있다. 우리 00가 참 효자구나! 지금 할아버지는 심신이 병들어 있구나!..... 할아버지를 천국의 문이나마 들어 갈 수 있도록 니가 기도도 하고 찬송가도 불러드리고 설교록도 읽어 드리렴!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대략 이런 내용의 방언을 했습니다. 저도 많이 눈물이 났고요! 근데 마귀 방언도 있다고 들었는데 믿음이 적은 저로서는 진짜 하나님의 위로 같았는데 어떻게 구별하죠? 그리고 예언도 하던데 정말 헷갈리네요
답변 : 방언과 예언에 대하여
1. 방언
① 방언이란
방언은 '말'입니다. 말을 하면 방언을 하는 것이고 방언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창11: 바벨큄; 쌓다가 받은 저주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가 말이 통하지 않게 되었으니 이때부터 하나뿐이었던 말이 수도 없는 말로 나뉘었기 때문입니다. 세계 각국과 각 민족들이 수도 없는 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상식이며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일입니다.
② 문제가 되는 한국 교회의 '방언'
현재 으러러- 오러러_..... 아오~오~~ 저오오^^^..... 하는 식으로 별별 방언들이 본격적으로 한국교회를 돌아다닌 것은 70년대였고 이후 80년대까지 이어지며 아주 전성기를 가졌으나 지금은 많이 줄어 든 듯합니다. 미국 방언을 한다는 사람 소련 방언을 한다는 사람 등 별별 방언이 많고 그 어지러움이 극합니다. 이런 경우는 성경이 말하는 방언이 아닙니다. 미국 방언이야 미국 사람들이 아주 잘 하고 있으며 요즘 영어학원에서 어린 아이들까지도 다 잘 하고 있습니다. 영어가 미국 방언입니다. 중국어가 중국 방언이며 러시아어가 소련 방언입니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실컷 해놓고 나서 이것은 미국 방언이다 어느 나라 방언이다 하는 것은 그냥 자기 입에서 나오는 대로 법이고 사실이고 전부라는 식입니다. 극단적 감정주의 신앙이며 극단적 주관주의 신앙입니다. 주관과 객관을 착각하고 영감과 흥분을 혼돈 하고 있습니다.
③ 성경의 '방언'을 구별하는 가장 간단한 법은 듣는 사람이 알아들어야 하는 것
크게 성경이 말하는 방언은 사도행전 2장의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방언과 고전 14장이 말하는 방언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예루살렘 방언은, 베드로가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말로 설교를 하는데 듣는 사람들은 자기 나라 말로 알아듣게 된 것이었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알아듣게 된 것이었으니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인지 모르도록 말하는 것은 방언이 아니라고 단정을 하는 것입니다. 혹 고전 14장의 방언은 통역 없이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분들이 많지만, 통역을 세워 다른 사람들에게 알아듣도록 하라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알아듣지 못하게 하는 방언은 일단 성경의 방언이 아닙니다.
방언은 알아듣도록 전하는 '수단'입니다. 영어를 모르면 영어를 공부해서 영어로 말하면 상대방이 알아듣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믿는 사람이 외국어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 충분히 받았으니 외국어를 공부해 두는 것만큼 앞으로 내가 전하는 복음이 그 사람에게 알아지도록 '방언'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에게는 어학공부를 통해 방언을 할 수 있도록 모든 현실과 환경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자연의 방법, 이 일반의 방법이 우리에게는 자연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입으로 밥을 먹는 것은 믿는 사람이 가장 일차적으로 해야 할 기본입니다. 그러나 꼭 필요한 경우가 되면 눈으로 밥을 먹게 할 수도 있으며 이런 특별한 경우는 필요할 때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명령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입으로 밥을 먹을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받아가진 사람이 굳이 눈으로 밥을 먹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고 또 그렇게 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불건전한 신비주의이거나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라고 말합니다.
④ 다시 한번 성경의 방언을 차분하게 돌아본다면
사도행전 2장의 예루살렘 전도에서 나타난 방언은 하나님께서 준비할 기회도 없이 갑작스럽게 수십개의 언어를 가진 사람들을 맞닥뜨리게 하였고 그 동시에 제자들은 복음을 전해야 할 형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환경을 만들었기 때문에 어학 공부할 기회도 때도 형편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믿음으로 외쳤을 때 각자가 자기 말로 들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이런 경우를 아주 미개국의 선교 현장에서 가끔 듣고 있습니다. 또 답변자는 직접 서부교회 안에서 예배 시간에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질문하신 분의 경우와 같이 한국 교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방언의 모습은 두 말 할 것 없이 불건전한 신비주의일 뿐입니다. 분명하게 방언 역사는 방언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을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뚜렷하게 역사하는 능력의 것입니다.
고전 14장의 방언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통역을 세워서라도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셨으니 '방언'이란 그 말 자체가 '의사소통의 수단'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뜻이 전달되지 않는 방언은 이미 성경에서 명문으로 금하고 있는 바입니다. 고전14:1-19에서 다시 한번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대개 기도 중에 나오는 방언은 마음의 기도가 앞서가고 둔탁한 혀가 뒤 따라가다 보면 발음이 뒤엉켜 얼른 알아듣기 어려운 파음으로 계속되는 경우입니다. 두 말 할 것 없이 본인은 아는 기도입니다. 또한 그 사람의 기도하는 형편과 그 기도의 내용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는 경우입니다. 이런 점에서 일반적으로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를 일부러 연습하고 그렇게 발음할 수 있도록 마음에 극히 소원하여 흉내를 내다가 나오는 소위 '방언'은 너무도 방언의 성격을 몰랐다고 하겠습니다.
고전14:19,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깨달은 생각이 앞서가면 뒤 따르는 혀의 발음이 어지럽게 나타나는 것이 또 하나의 방언이니 깨달음의 마음 하나와 방언으로 표현되는 것을 수평으로 가치를 비교한다면 19절 말씀을 이해하시게 될 것입니다.
⑤ 진정한 방언은 이렇습니다.
한 교회의 한 강단에서 한 분 목사님이 설교를 할 때 예배드리는 수십 수천명의 교인들이 각자 자기 환경 자기 처지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각자의 말씀으로 받게 됩니다. 설교는 동일한 설교로 발표가 되고 있는데 듣는 이들이 각자 자기 나라 자기 살아온 자기 환경 자기의 처한 입장에 맞도록 알아듣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말이란 입장과 처지가 다르면 언어가 같아도 뜻을 알아듣지는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같은 국어를 사용해도 항상 달리 듣고 다른 결론이 나게 됩니다. 소리는 오고가지만 뜻이 내통하지 않았으니 서로가 외국어로 말한 듯 합니다. 여당과 야당의 통화도 그러하고 남북과 한일간의 대화도 언어 문제 때문이 아니라 살아온 배경, 현재의 입장이 전혀 뜻이 통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강단의 설교가 한국어로 행해지고 듣는 이들이 다같이 한국 사람인데도 한 자리에 앉아 있는 수십 수천의 교인들이 전부가 출신 입장 환경 처지가 다르기 때문에 그 설교를 인간 생각과 인간 차원에서는 제대로 알아듣지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의사소통의 단절을 뛰어넘고 제대로 알아듣도록 하는 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모든 진리는 오직 성령만이 알아듣게 하고 성령만이 그 뜻의 정확한 것을 깨닫게 합니다.
베드로는 각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언어로 전도했고 그들은 자기 나라 언어로 알아들었습니다. 오늘도 그때와 같이 복음전파에 꼭 필요한 현실이 있다면 그리고 우리는 사도행전 2장의 말씀을 믿고 전하고 들으면 오늘도 그 기적은 일어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참 방언은 성령으로 전해야만 인간 스스로는 절대로 알아듣지 못할 복음과 진리를 듣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방언역사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역사는 반드시 그 결과가 구원의 결과로 이어져야 합니다.
자기감정에 취하여 또는 일부러 자기 정신의 혼미와 혼돈을 유도하고 숙달까지 시켜 입이 입에서 나오는 발음을 또렷하고 정확하게 뱉지 않고 일부러 흘려버림으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방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지 않고는 안 되는 경우에 역사되는 사도행전의 방언을 오늘날 너무 쉽게 사용하다 보니 우리에게 그렇게 쉽게 주신 '방언'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되었음을 다시 한번 상기했으면 합니다. 한국 교회에 큰 문제가 된 것은 '방언'을 심리적 혼동이나 흥분에서 오는 착각이나 고성(高聲)을 성령의 뜨거움이라고 해석한 분들이 문제였습니다. 열심은 있으나 성경은 없고 뜨거움은 있으나 생각은 없는 분들이 대개 단순한 분들이며 쉽게 동하는 분들입니다. 어지럽게 떠들다가 왜 소리를 쳤는지 자기 자신이 모르는 경우입니다.
2. 예언
① 예언이란
성경의 예언은 하나님의 감추인 뜻을 미리 전하게 하거나 아니면 이미 말씀하신 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에게 먼저 깨닫고 알리는 것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② 예언은 오늘도 반복
예언은 폐해졌다고 하는 것이 신학의 기본 방향이지만 우리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무시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알리시고 역사하시는 것은 성경 기록 역사 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 살아가는 모든 현실 평생에 늘 그리 하십니다. 기도하는 것이 주님이 나에게 역사하실 방향을 미리 가르쳐 달라는 것도 그 내용 중에 하나이니 예언의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그보다도 성경은 성경 내용 전부가 다 예언입니다. 다윗이 왕 될 것을 사무엘이 예언했더라 하고 지난 역사 하나를 소개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나에 대한 앞날이 다윗에 대한 사무엘의 예언처럼 어떻게든지 그 원리 그 진리대로 역사되어집니다. 그러나 그렇게 역사되어지는 것이 어느 사람이 자기 속에 성령을 모셨다고 생각하고 자기 속의 성령이 말한다는 형식을 빌려 자기가 마치 성령인 것처럼 말하는 식의 예언은 크게 위험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은밀하며 개인적으로 역사하기 때문에 남이 단정할 일은 아니지만, 그 방향이 이미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③ 예언을 다시 한번 조용히 살폈으면 합니다.
성경은 전부가 예언입니다. 성경은 전부가 우리 믿는 사람 전부를 향해서 어느 형편 어느 처지 어떤 환경에서도 다 해당되는 예언으로 기록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모든 면에서 단 하나도 필요한 것이 빠지지 않고 기록되어 있는 '충족성'을 가진 말씀입니다. 따라서 성경으로 적어주신 내용을 잘 읽어보며 그 성경을 기록하신 성령에게 마음속으로 나에게 필요한 인도와 내가 알아야 할 것을 기도하는 가운데 여쭈어보면 다 가르쳐 주십니다.
즉, 책에다 글로까지 적어서 틀림없는 예언이며 필요한 예언 전부를 다 기록해 주셨다고 하여 성경작성을 완료하신 다음 우리에게 주셨는데, 무엇이 더 필요해서 성경에 적지 않고 성경에 없는 내용으로 우리에게 또 예언을 하시겠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셔야 하겠습니다.
④ 신약은 이미 완성된 성경 자체가 예언입니다. 딴 예언을 찾으면 위험합니다.
모든 예언은 전부가 성경에 있어야 하고 성경을 근거해야 하며 성경에 맞아야 하고 성경을 벗어나면 아니 됩니다. 진리 떠난 성령은 단정하고 악령입니다. 나에게 내 가족에 대한 의무를 충성스럽게 감당하라는 내용은 질문자께서 예를 든 분이 그렇게 말씀하실 것도 없이 이미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 하셨고, 그보다 5계명은 부모를 예로 들었으나 그때 부모라는 말은 은혜를 베푼 시은의 존재 전부를 말한 것입니다. 내가 은혜를 입었고 그는 나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라면 마땅히 내가 그를 위해 할 일을 다 해야 하는 것이고, 이런 일을 당하기 전에 이런 간병을 해야 할 때가 되면 있는 충성을 다하여 복음이 되도록 하라는 것은 이미 예언되어 있습니다.
물론, 특별한 환란에서 하나님께서 꿈으로 또 이상 중에 나타나셔서 피할 길을 알려주시는 등의 계시나 지시 등의 예언은 우리에게 시대마다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성경을 펴 들고 읽을 수 없는 급박한 때라든지, 아니면 그 사람이 어두워져 아무리 알려주시려고 해도 모르는 경우 특별한 방법으로 알려주시는 등으로 나타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방언을 하고 또 갑자기 예언을 하는 등으로 예를 드신 질문자가 겪은 경우는 대표적으로 예언도 방언도 잘못 아신 분 같습니다. 그분이 좋은 분이시라면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예언 방언하는 모습을 크게 감동 깊게 보았던 기억이 있고 따라 하고 싶은 소망이 강하게 되는 경우 그리 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원래 말이 많고 성격이 감정적이며 심리적으로 그런 요소가 있는 분이면 두 말 할 것 없이 심리적 현상일 뿐입니다. 마음이 아이를 갖고 싶어하면 여자분이 자기 뱃속에 아이가 생겨 실제 자라가는 경우까지 생깁니다. 상상임신이라는 말씀을 들어보셨는지요? 사막에서 너무 애타게 물을 찾으면 샘물이 실제 나타납니다. 그러나 상상일 뿐입니다. 신기루라는 말도 아실 것입니다. 죽은 부모를 너무 그리게 되면 자다가 부모를 만나 밤길을 헤 메고 묘지까지 가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한번이 아니고 어느 극한 상황에 한번 발생한 일이 아니라 반복이 되든지 일상적으로 일어나면, 그때는 큰 문제가 됩니다.
⑤ 혹시 방언과 예언을 듣는 분이 진정 자기 마음에 느껴짐 이 있었다면?
질문자께서 은혜가 되시더라는 정도로 느끼신 것 같습니다. 마음은 스피커를 크게 틀어놓고 저음으로 쿵쿵 울려주면 실제 마음이 울려지며 감동이 됩니다. 감동이란 마음이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웅장한 오케스트라가 장중한 연주를 하다가 최점{으로 쿵하고 음을 울리면 진한 감동이 오게 됩니다. 예배당의 파이프 오르간이 온 교인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한다면? 성령에 피동된 것을 아주 엄격하게 분리해 내지 않으면 세상에서 느끼는 수없는 감정과 신앙생활에 체험한 것이 꼭 같아져 버립니다.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고 온 몸을 부들부들 떠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답변자와 같은 이들은 통잠을 자다가 시끄러워서 깨어나게 됩니다. 심지어 부모 잃은 자식에게서도 우리는 마음에 큰 느낌을 가지게 되고, 대단히 죄송한 표현입니다만, 옆 집 개가 죽자 온 이웃들이 함께 모여 엉엉 울게 되는 것을 고급 아파트 촌에서는 가끔 보는 일입니다. 그들에게 그 개를 보신탕으로 먹게 가져가겠다고 했다가는 순간 이성을 잃은 그들에게 어떤 처리를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 부모는 살아 있지만 고려장 하듯 시골에 팽개치고 있는 이들입니다.
감정에 크게 흔들리는 마음을 자꾸 반복을 시키고 그 감동에 자꾸 취해 들어가면 한이 없습니다. 위에서 예를 든 경우들입니다. 그러나 이 면 저 면을 냉정하게 살펴보면 참으로 우습고 말도 안되는 것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참된 진리의 세계는 차갑게 정신을 날카롭게 차리고 하나 둘 자꾸 따져 보고 살펴보는 첫 순서가 있고 이렇게 계속 살펴보다면 자기도 모르게 그 따져보는 마음 가운데에서 무엇인가 느껴지는 감동을 가지게 됩니다. 진리를 살필 때 움직여지는 그 마음이 바로 가장 정확하고 착각이 적은 성령의 감동입니다.
전혀 다른 면에서 예언과 방언을 다시 한번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수많은 분들의 경우를 생각하며 답변을 했으며 질문자의 경우만으로 예를 든 것이 아님을 이해하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