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방언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방언의 내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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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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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51
2. 질문 : 방언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방언의 내용을 알 고 있어야 된다는데 대해 2153
방언에 관한 목사님의 말씀 잘 읽어 보았습니다. 고전14장5절에 보면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다고 말씀하셨지 방언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은 일단 성경의 방언이 아니라’는 목사님의 말씀과 ‘알아듣는 자가 없고’라는 성경말씀, 또 ‘말이 통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뜻이 전달되지 않는 방언은 이미 성경에서 명문으로 금하고 있는 바’라는 목사님의 말씀과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는 성경말씀이 언뜻 보면 모순인 것 같은데 제 이해와 지식이 부족해서인지.. 목사님의 자세한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14:2)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14:5)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14:39)
- 목사님의 말씀
‘성경의 '방언'을 구별하는 가장 간단한 법은 듣는 사람이 알아 .들어야 하는 것
크게 성경이 말하는 방언은 사도행전 2장의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방언과 고전 14장이 말하는 방언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예루살렘 방언은, 베드로가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말로 설교를 하는데 듣는 사람들은 자기 나라 말로 알아듣게 된 것이었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알아듣게 된 것이었으니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인지 모르도록 말하는 것은 방언이 아니라고 단정을 하는 것입니다. 혹 고전 14장의 방언은 통역 없이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분들이 많지만, 통역을 세워 다른 사람들에게 알아듣도록 하라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알아듣지 못하게 하는 방언은 일단 성경의 방언이 아닙니다.‘
답변 : 사도행전이나 고린도전서의 방언이나, 방언하는 사람 .은 그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1. 방언의 의미
'방언'이라는 단어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각 나라와 민족과 지방에는 각각 자기들끼리 통하는 말이 있으니 그것을 어렵게 표현하면 '방언'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읽는 사람이 조심스럽게 대하도록 단어를 사용할 때 경박한 표현보다는 좀 무게 있는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이라고 번역해도 될 것을 '방언'이라고 무게를 준 것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에서 '방언'이라고 한번 번역해 놓았으니 누가 무어라 해도 '방언'이라는 표현을 입에 익혀 사용하는 것이 신앙의 기본자세로서 좋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쉬운 표현으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표현은 '방언'으로 사용하시고, 뜻은 '말'이라고 늘 짐작하고 계셨으면 합니다.
2. 성경에 나오는 2가지 방언
① 사도행전 2장의 방언
이 방언은, 베드로가 세계 각국에서 살다 온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설교를 했는데 그들이 각자 자기 나라 말로 설교를 듣게 된 방언입니다. 즉,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은 다른 사람에게 발표용으로 말한 것이 아니지만,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한 발표용 방언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도행전 2장의 이 방언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베드로가 말을 할 때 베드로의 입에서 다른 사람들의 귀로 전달되는 과정에 '자동 통역의 역사'가 있었던 방언이었습니다. 이 방언의 목적은 배달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전하고 듣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통역이 없으면 알아들을 수가 없는데, 성령이 자동 통역을 해주셨던 방언입니다.
②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
이 방언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설교용 방언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자기 혼자 사용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사도행전 2장의 방언과는 그 사용용도가 다르기 때문에 따로 통역을 세우지 않으면 일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또 알아들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은 상관하지 않고 자기 혼자 자기 속에 계신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도 있고 또 의논드리는 것도 있고 또 질문하는 것도 있습니다. 처음 기도할 때는 육의 의식이 또렷하기 때문에 신령하신 하나님을 바로 찾지 못하여 더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받은 말씀을 자꾸 새기고 또 고요히 자기 속에 오시는 하나님을 찾으려고 노력하다 보면 점점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또 대화가 깊숙하게 진행됩니다.
이 기도가 아주 깊게 들어가게 되면, 육을 가지고 입으로 중얼거리며 말은 하지만 실은 그 말을 옆에서 녹음을 해서 타이핑을 치고 해석을 해 본다면 전혀 말이 안 되는 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 신앙 차원에서 남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과 대화를 하기 때문에 빼놓은 말들이 많고 또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그 대화하는 과정과 수준이 본인의 주관에 들어가지 않고는 예측도 하지 못할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처음 소개 받고 만난 두 사람의 대화는 누가 들어도 그 내용을 알 수가 있겠지만, 어느 분야의 전문가 두 사람이 업무에 필요하여 몇 마디를 한다면 그들끼리 아는 것은 생략하며 간단한 단어 몇 개로 압축시켜 건너뛰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들으면 도무지 무슨 소리하는지를 모르게 됩니다. 기도도, 하나님과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렇게 됩니다. 따라서 그런 차원을 아는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기도를 해석해 주지 않는다면 일반 사람으로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과 그 사람의 내면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3. 질문하신 내용에 집중을 하고 결론을 드린다면
방언은, 방언하는 본인이 그 내용을 모른다고 하면 사도행전 2장의 방언도 아니고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도 아닙니다. 사도행전 2장의 방언처럼 베드로가 예수님을 전해야겠는데 유대인의 말로 이집트나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통역'의 방법이 없었던 것을 성령이 해결해 주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방언의 은혜를 주시든 아니 주시든 베드로는 자기가 전하는 말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도,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대화를 하고 있는 중이므로 본인은 그 내용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다만 이 방언은 하나님과 내면 대화용이지 외부 교인들에게 설교용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알아듣기 위해 통역이 필요한 것이지 본인이 그 내용을 몰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본인은 그 심령으로 기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외부인들이 자기 말을 알아듣는지에 대하여 상관이 없고 또 관심도 없으며, 그저 심령은 하나님을 민첩하게 따라 가며 대화를 하고, 그 사람의 일반 의식은 그 뒤를 따르고, 그 사람의 입은 제일 뒤에 쳐져서 겨우 따라가므로 그 입에서 나오는 표현이 일반인으로서는 횡설수설처럼 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재질문 : 순복음교회 등 한국교회에서 통용되는 방언은 불건 전한 것으로 부정하는지?
중복되는 질문인 것 같아 죄송한 마음입니다. 무지한 평신도로써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방언"에 대한 정관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도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질문 드리는 것이니 너그럽게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고전14:27-28
심령이 앞서고 혀가 뒤쳐져 횡설수설하게 되는 경우라면 본인은 그 뜻을 알찌라도 제삼자가 통역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런 차원을 아는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기도를 해석해 주지 않는다면 일반 사람으로서는 알 수가 없는 것’이라 하셨는데 타인이 알 수 없는 말로 중얼거리는 심령의 대화를 이해하고 통역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요?
또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찌니’라는 말씀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자기 내면의 대화는 자신이 환하게 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자유롭게 전할 수 있을 것인데.. 영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그 뜻을 본인조차도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으므로 통역하기를 기도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했었는데..
방언을 말로 짐작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방언을 한다는 것은 각자의 언어를 가지고 하나님께 말하는 것, 기도하는 것이라 보면 되겠습니까?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라는 바울 사도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흔히들 기도원이나 집회 가서 ‘방언’이라는 것을 사모하며 기도하다가 방언을 받게 되었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러한 방언에 대한 잘못된 관념이 뇌리에 박혀 있어서인지 목사님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의문이 자꾸만 생기는 것 같습니다. (가까운 주변사람들 중에 기도하면서 이상한 말로 중얼거리는 경우도 몇번 보았기 때문에..-실은 제 남편이 ‘방언기도’를 하는 것을 몇번 보았기 때문에 최근 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 심지어 예전에 다니던 장로교회 목사님도 새벽예배시간에는 흔히들 일반교계에서 말하는 방언이라는 이상한 소리로 크게 기도하시곤 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몇년전 텔레비젼에서 (외국에서 제작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자 및 천주교 신자, 불교 신자, 심지어 무당들이 말하는 신비한 방언에 대해 방영된 적이 있었습니다. 과학자들도 그것은 하늘의 언어가 아니라 둔탁한 혀가 앞서가는 마음을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께서는 순복음교회 등 한국교회에서 통용되는 방언에 대해서는 불건전한 신비주의로 보시고 아예 부정하시는 것인지요? 그분들은 '라라라'하는 희한한 방언에 대한 근거로 고전14장의 말씀을 인용하곤 하는데요. '라라라'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그냥 소리요 소음일 뿐이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방언이 아니라고 보면 되는지요?
답변 : 현재 한국교회의 방언의 역사가 대중화 된 것은 1970 년대부터입니다. 모두 가짜입니다.
1. 첫 신앙의 열심으로 불타 오르다가 자기도 모르게 방언을 해 본 경험은, 교회마다 많습니다.
① 흉내 내는 방언, 언제든지 틀면 나오는 방언들은 가짜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언들은, 방언하는 법을 배워서 방언을 하거나 아니면 방언하는 사람들이 부러워서 방언을 하려고 노력하다가 흉내를 내는 경우입니다. 이런 것은 그만 가짜라고 판정을 해놓으면 좋을 듯 합니다. 담대하게 꼭 그렇게 말씀하도록 권합니다. 그러나 방언이라고 해서 무조건 가짜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첫 신앙에 불타오르는 사람이 배운 것도 아니고 억지로 연습을 한 것도 아닌데, 순간적으로 자연스럽게 방언이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말씀한 방언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일단 조심해서 상대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마다 그에게 역사하는 성령의 은혜와 종류가 다 다른데 나를 기준으로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자칫 성령훼방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단정하고 가짜라고 말하는 것은, 남 따라서 흉내 내고 연습한 끝에 나오는 방언 또는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 마음만 먹으면 영어 잘하는 사람이 갑자기 영어로 줄줄 말해 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나오는 방언들을 두고 말합니다.
② 첫 신앙에 불타는 분들이, 깊은 기도 중에 주님의 인도를 받고 방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꼭 첫 신앙에만 나온다는 것은 아니지만, 주로 첫 은혜는 한번씩 받아보는 때이므로 이런 신비한 방언의 역사를 가져 보는 수가 더러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고 나면 신앙생활을 몇 년 했다 하는 경력만 남지 그 뜨거움은 오히려 처음 믿을 때보다 식어진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방언을 다시 경험치 못하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방언은 자기 속의 하나님과 깊숙하게 대화할 때 그 심령이 하나님께 취한 상태에서 그 심령과 연결이 되어 있는 육체를 통해 외부로 새어나오는 소리이기 때문에 하니님께 크게 붙들리지 않고는 나오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뜨거운 신앙 상태가 보통 사람들에게 쉽게 거쳐 가는 때는 처음 믿고 첫 은혜를 감격적으로 받을 때이므로 그때에 방언역사를 체험하는 이들은 종종 있으나, 그 후 세월이 지나가게 되면 그런 첫 은혜의 뜨거움을 가지지 않고 식혀버리기 때문에 정상적인 방언을 경험하는 이들은 희귀합니다. 처음 신앙 때처럼 평생 믿어가면서도 한번씩 방언의 역사를 가져 보는 정도의 신앙이라면 한 시대를 감당할 정도의 인물이 되거나 적어도 주변 몇 십리 안에서 추앙받는 신앙인일 것입니다.
2. 한국교회 내에 방언과 신유를 크게 오해시킨 곳은 순복음 교회입니다.
① 1970년대, 순복음교회가 성령을 받으면 방언을 하게 된다 며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순복음교회가 1960년대 성장기를 거칠 때까지는 그렇게 크게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를 거치면서부터 그 교세와 그 교인들의 활동이 서울 장안을 완전히 주도하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순복음교인들로 인하여 일반 교회들은 전부 일방적으로 몰리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확신이 있었고 자신이 있었으며 생기가 있었습니다. 일반 교회들은 그들과 어떤 대화에서도 밀리고 있었고 우선 자신들의 가라앉은 심령이 자신들을 움츠려 들게 하고 있었습니다. 순복음교회가 초기에는 불신자전도를 많이 했으나 이때부터는 다른 교회를 다니면서 별 재미를 보지 못하던 분들이 서울 전역을 통해 순복음으로 쏠리는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교계의 중심에 있는 장로교는 특히 순복음교회와 체질이 원래 정반대였기 때문에 교인도 지킬 겸 또 장로교와 체질이 맞지 않는 순복음을 칠 겸 해서 총공세를 시작하게 됩니다. 고신 합동 통합 할 것 없이 일제히 순복음교회를 이단으로 매도하고 나서게 됩니다. 그 주요 죄목이 신유와 방언이었습니다. 순복음교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목청 높혀 기도를 하고 찬송은 박수를 치며 펄쩍 펄쩍 뛰고 손을 들고 흔드는 분들입니다. 그리고 아픈 사람이 있으면 누구에게나 예수님 이름으로 나으라고 안수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일반교인들에게 되묻는 말은 '성령을 받았느냐'입니다. 받았다고 하면 '그러면 방언을 할 줄 아느냐? 막16:17에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또 행2:4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되물어서 꼼짝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깊은 산 속 기도원에서 요즘 사이비종파처럼 한번씩 들려오는 소식으로 방언이라는 말이 있었지 생활속에 이웃교회를 다니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직접 듣는 것은 순복음교인들이 처음으로 써먹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나는 미국방언을 할 줄 안다, 나는 미국 소련 일본 방언 3개를 할 줄 안다 하는 식으로 자랑하며 또 분위기가 허락되면 그 자리에서 한번 시범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그분들에게 활력이 넘쳤고 기쁨이 넘쳤고 전도하는 힘이 넘쳤기 때문에 긴가민가하고 교회를 다니던 분들이 호기심에 또 의구심에 또 부러움에 하나 둘 씩 따라가면서 마침내 수많은 일반 교회 교인들을 흡수하게 되었고, 한번 덩치가 엄청나게 크진 다음에는 조직이 조직을 흡수하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습니다.
② 다른 곳이 모두 순복음교회를 이단이라 할 때, 이곳은 그 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신학서의 기본은 사도행전 성령역사는 초대교회에만 있었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정통 교리와 신학이었는데, 순복음교회에서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역사를 체험했다고 선언하고 또 그 체험으로 성령을 받아야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나서게 되자, 일반 교단들은 일제히 순복음교회를 성령론의 이단이라 하여 정죄하고 나섭니다. 통합교단측은 1990년대까지도 공식적으로 순복음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했었습니다. 다른 곳들은 중간에 조용기목사님과 교계 연합 운동을 벌이면서 유야무야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순복음교회의 기도관, 성령관, 방언역사 등에 대하여 그때나 지금이나 꼭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순복음교회의 전도와 열심과 충성과 기도는 온 교계가 본받아야 하고 온 교계가 그 발밑에도 가지 못할 만큼 그들은 복 받을 신앙이라는 것이 총공회 입장입니다. 그러나 방언과 신유와 성령에 대한 깨달음은 그들의 신앙이 어려서 오해한 것이라고 단정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일반교계는 찬송시간에 손뼉을 치기 때문에 이단이고, 설교 때 '예-쑤님'이라고 해서 이단이고, '할렐루야'라고 해서 이단이고, 안수해서 이단이고 방언을 말한다고 해서 이단이라고 온갖 정죄를 다했으나, 그렇게 하는 순복음교회는 가속도로 부흥을 하고, 자기들은 착 가라앉아 기어가고 있게 되자 각 교단들의 말단에 있는 지교회들이 하나씩 둘씩 순복음교회의 흉내를 내게 됩니다. 순복음교회 흉내를 내는 교회들이 각 교단의 각 지역에서 고속 성장을 주도하게 되자 봇물이 터져버렸습니다.
이때부터 한국교회에는 대형화에 성공하면 그 과정은 어떤 이단이나 어떤 사이비나 어떤 비성경적인 행동이 있어도 정통이 되고 타 교회의 모범이 된다는 공식이 나오게 됩니다. 일단 순복음교회는 훌륭하게 한국교계 내에서 정통교회의 한 모습으로 이름을 등재하는데 성공을 합니다만, 그들로부터 번져 나온 안수기도나 방언 등의 역사는 한국교회로부터 교리보다 현장에 먹히는 기술이 우선이라는 인식을 확실하게 심었고, 동시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마지막 역사인 성령 역사는 초토화가 되다시피하게 됩니다.
③ 일단 질문 내용에 집중하기 전, 방언에 관련된 교계 상식 과 역사를 잠깐 소개했습니다.
이제 질문자께서 순복음교회와 한국교회에 통용되는 방언에 대하여 질문을 하셨는데, 그 방언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비록 이곳과 접근 시각은 전혀 다르지만 이곳 뿐 아니라 순복음교회 계열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정통교단들이 이를 정죄하고 있다는 것은 일단 상식적으로 아셨으면 합니다. 다만 그 교단들의 신학교와 신학교 교과서에서는 정죄를 하고 있는데, 신학교를 졸업하고 현장에 목회를 나가게 되면 일단 교인들에게 교리는 멀고 어렵지만 방언과 통성기도와 손뼉치며 박수하는 것은 즉흥적으로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각 교단 교리교수들과 성경신학교수들이 단속을 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남한의 반공법에 의하면 북한과 오가고 통화하고 접촉한 사람은 전부 감옥에 집어넣어야 하는데 숫자가 많고 현실적으로 나라가 나아가는 방향을 고려해서 일부러 안본 척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3. 이제 보충질문하신 내용에 집중하겠습니다.
① 지금 일반교회에서 통용되는 방언은 고린도전서 14장 방 언입니다.
질문자께서는 방언을 하는 분들이 고린도전서 14장 방언을 말하더라고 하는데 이는 방언하는 분들이 수십년 역사가 흘러오면서 상황을 봐가며 그 방언하는 방식이나 형태나 논리가 진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아셔야 할 것입니다. 초기에는 미국 방언으로 한다 소련 방언으로 한다 하며 별별 나라 말을 다 갖다대고 있었으며 또 그 방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통역이 필요하여 아무나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사도행전 2장 방언과 고린도전서 14장 방언을 오고 가며 횡설수설한 것입니다. 순복음교인들은 성경을 창세기로부터 계시록까지 차분하게 읽지를 못하는 편입니다. 주로 자신들이 애용하는 성구들만 이곳 저곳 들추어가며 집중하기 때문에 편식이 심한 경우인데 방언에 대해서도 '방언'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성구들만 찾아 임기응변식으로 인용하다가 나온 경우입니다.
일단 방언하는 분들이 미국 방언이니 일본 방언이니 하며 국가의 이름을 말하고 있는 것은 고린도전서 14장을 아무리 읽어도 그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국가 이름을 붙이는 방언을 말하려면 사도행전 2장 방언을 집중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방언은 1개국 방언 한다 2개국 방언한다는 것부터가 성경을 한번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게 방언하는 분들이 참으로 사도행전 방언을 한다면 미국 방언하는 사람에게는 미국인을 데려다 놓고 해보라고 하면 됩니다. 그러면 영어를 배우지 않은 분이 미국방언으로 말할 때 미국사람이 알아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그 모인 사람들이 어느 나라에서 왔든지 다 그 나라말로 들렸었습니다. 베드로가 출신 국가를 봐가며 자기 속에서 그 국가에 해당되는 방언을 각각 따로 발음한 것이 아닙니다. 한 자리에서 한번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듣는 사람은 자기 나라 말로 들린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각국 방언을 말한다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몇 가지 표현을 집어낸 다음 그다음부터는 자기들의 추측과 짐작을 섞어 완전히 별개의 존재를 만들어냈습니다.
② 따라서 사도행전 방언은 혼동할 필요가 원래 없다고 보고, 고린도전서 방언만 살폈으면 합니다.
중들이 돌부처 앞에서 자기 소원을 죽는 날까지 되풀이 하는 것은 고장난 레코드 돌아가는 것처럼 평생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염불이라고 하는데 이는 자기 최면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염불을 점잖게 하고 있으면 학문적 깊이는 더해가도 신묘한 효험을 보지는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점잖은 대형종교들은 이런 기도가 체계적 이론에 의하여 진행되므로 세월 속에 장구하게 간다는 것은 장점이지만 일반 사람들이 별로 효험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불교 중에서도 남묘호랑게교와 같은 곳 또 무당이나 점쟁이 비슷한 행동을 하는 이들은 이성에 의존하지 않고 감성에 붙들려 마구 흔들어대기 때문에 진짜 귀신에 들리기도 쉽고 아니더라도 최소한 자기 착각에 의한 심리적 영향으로 무엇인가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무당들이 신들려 중얼거리는 소리는 인격이나 지성이나 이성 비판과 같은 것을 전부 배제하고, 마음속에서 가장 천박한 감정과 직감 같은 것이 혼미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람들에게서 볼 수 없는 여러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언이라는 것은, 말씀과 성령이 그 사람을 감동시켜 앞서 데려나가고 기도하는 사람은 그 감동에 붙들려 뒤를 따라가기 때문에 옆에서 보면 혼미해진 사람 같으나 그 사람의 내면 의식은 기도가 깊어질수록 점점 더 또렷해지고 명료해집니다. 다만 그 심령이 앞서 가는 것을 그 마음과 그 육체가 뒤를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이상스럽게 보이는 것입니다.
③ 질문하신 내용 중에서, 외국 과학자들이 비슷한 현상을 밝 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늘의 음성을 듣고 말한다는 사람들을 과학자들이 조사해 본 내용이 있다는 말씀은 이곳이 듣지 못했지만, 과학자들의 전문 지식과 추적조사가 없어도 실은 상식 수준에서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과학은 그 원인을 밝히는 것이지 그 나타난 현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를 자세히 관찰해 보면 콩 심어 콩이 나더라는 것과 비료가 많이 간 곳에 식물 잎이 검푸른 빛이 나더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중간 과정을 설명하는 것은 아주 쉬워집니다.
믿는 사람이 말씀대로 순종하여 만드는 행동은 성령의 역사가 있지만, 안 믿는 사람에게는 인간의 역사만 있지 하나님의 역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없는 사람들의 현상은 과학이 분석하고 들어가면 얼마든지 분석할 수가 있으나, 하나님 믿는 사람들의 현상은 과학이 따라가지 못하고 분석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현재 교계에서 통용되는 방언은 과학자들의 분석에 맡기면 전부 그 방언이 나오게 된 과정이 과학적으로 밝혀질 수 있는 인간 심리수준의 것들입니다.
④ 이제 원래 고린도전서 14장이 가르치는 방언을 질문을 중 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은 우선 22절에서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비하여 예언은 이미 믿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언은 그 내용이 또렷하고 분명하게 외부로 전달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방언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불교인과 같이 자기 주관의 반복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또 미신 믿는 사람들이 귀신에 붙들려 나오는 소리도 아니라 하나님과 심령으로 대화하는 모습을 외부에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심령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와 하나님과의 대화에만 몰두되어 있지 외부에서 자기를 보는 다른 사람의 시선과 귀는 알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외부에서 그 사람이 심령으로 기도하는 것을 보고 있는 사람은 믿는 사람이 아니고 안 믿는 사람들이니 이 방언 기도는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믿는 이들은 각자가 하나님 앞에 기도에 몰두하고 있을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이들에게 이들의 기도를 보여 줄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믿는 이들에게 보여 줄 '표적'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들이 어떤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한다고 해도 과학자들이나 정신심리학자들이 자세하게 추적 조사를 해보면 자기 주관의 최면이거나 의식이 흐린 상태에서 나타나는 망상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이 자기 심령으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이것은 하나님과 실제 대화입니다. 바로 이 모습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고 예수님의 대속으로 구원받은 우리에게만 성령으로 교통하시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바로 이 모습이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볼 때 세상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으므로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⑤ 그렇다면 그 표적의 내용은?
우리가 선입관이 있어 '알아듣지 못하게 연속적으로 내는 소리'를 방언이라고 단정을 해버리기 때문에 설명이 자꾸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 방언은 잘못된 방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소리가 나올 수도 있지만 또록또록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가 나오는 방언이 더 많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도록 흘려버리는 소리는 통역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또렷하게 나오는 기도 소리는?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알아듣지 못하게 되어 있고 믿는 우리는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주님 앞에 기도하며 '죄인.... 괴수 죄인..... 이 죄인..... 이 괴수 죄인.....' 이 소리만 계속해서 반복한다면? 안 믿는 사람들이 유대인 중에 최고의 스승이며 성자인 사도바울 입에서 나오는 이 방언이 이스라엘 언어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으로서는 그 단어의 발음을 알아듣겠지만 그 뜻을 알아듣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이니 바울이 다른 죄인 때문에 기도하든가 아니면 과거 스데반을 죽였을 때를 기억하여 회개하는 줄로 알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함께 있다면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 바울의 방언이 무슨 뜻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 아는 정도는 답변자가 아는 차원이 다를 것이고 백목사님이 아는 차원은 바울만큼 헤아려 그 속을 들어갔다 나온 사람만큼 알 것이고, 상당히 많은 집사님들은 답변자보다 훨씬 적게 알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외부로 나온 방언이 다른 사람에 의하여 그 뜻이 전달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최초의 방언은 성령과 그 사람의 영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입니다. 이는 마음도 알아듣지 못하는 깊은 세계의 신령한 기도인데, 이 기도가 그 상태에서 그냥 중단되고 그 마음이 그 영의 기도를 알아듣지 못하면 마음의 성화에는 상관이 없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영이 하나님과 기도하는 이 신령한 기도를 우리의 마음이 먼저 잘 깨닫고 따라갈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것이 바로 13절의 통역하기를 기도하라 하신 말씀입니다. 마음이 이해하지 못하는 깊은 차원에서 영이 하나님과 만나 교제하는 것을 만일 마음이 뒤따라 이를 알지 못하면 14절로 17절에 있는 말씀대로 마음에는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영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제일 깊은 속의 방언이 있고, 이 방언을 자기 마음이 깨닫고 알 수 있어야 그 마음도 영에게 붙들려 영을 따라 성화되어가는 것이니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 자기 내면의 통역이고, 이제 마음이 영의 기도를 알아듣고 아멘하게 된 상태에서 밖으로 나오는 기도는 그런 세계를 알고 깨닫는 다른 사람에 의하여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과 신령하게 대화하는 것이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으니 이것이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남들이 무슨 소리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도록 발음 자체가 허물어져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통역할 수 없을 것이고, 그러나 그런 기도까지 통역할 수 있는 심령을 통찰하는 신앙의 사람들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다른 사람에 의하여 전달될 수 없는 방언을 안 믿는 사람에게 전해지도록 기도하는 일은 잠잠하라 했으니 다른 사람들 있는 데에서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하평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신 뜻을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또한 자기의 기도를 통해서 믿는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과 만나 대화하고 부탁하고 그 뜻을 전달받아 산을 뽑고 바다에 던지는 그런 초자연의 세계에 사는 모습의 일말을 안 믿는 사람에게 보여 표적이 되게 하려는 사람은 옆에 그 기도를 해설해주고 해석해주며 안내해 줄 사람을 세우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물론 초대교회를 비롯하여 오늘의 교회라 해도 일반 자연적 은혜와 순서로는 전도에 한계가 있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이 초자연으로 나타나고 그 표적이 있어야 복음에 유익할 때 그 복음 전도인에 의하여 안 믿는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모습 중의 하나입니다.
그 이전에 그런 깊은 기도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속에서 자기 마음이 자기 마음 안에서 기도를 인도하는 성령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영의 역사를 볼 수 있고 또 그 기도를 아멘으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할 것인데, 이 내부적인 통역, 즉 이 마음이 자기 영의 세계를 이해하는 이 이해에 미치지 못하면, 심안이 어두운 것을 탄식하며 하나님께 마음을 더욱 밝게 열어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4. 방언은, 그 외부 모습은 이렇게 초대교회나 특수 환경에서 나 있을 듯 하게 보입니다.
방언의 역사는 그 내부를 연구해갈수록 복음의 특수한 경우에는 한번씩 사용되는 현상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외부적 모습은 아주 특이하게 예외적으로 사용되는 것 같아도 실은 우리 생활 속에서 늘 이 방언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어야 하고, 이 방언의 역사가 순간이라도 끊어진다면 그의 신앙은 현재 껍데기로 오가는 외형교인에 그치고 있지 실제 그 속에 살아 역사하는 산 신앙은 아닙니다.
이것까지 설명하다 보면 한도 없이 내용이 길어질 듯 하여, 이 이상의 부분은 또 다음에 설명할 기회를 찾았으면 합니다. 일단 가장 시급한 문제, 즉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를 흉내 내거나 연습을 해서 숙달한 뒤 그것이 방언이라고 하는 현 순복음계열의 방언은 성경적 방언이 아니라는 것을 확정지우셨으면 합니다.
초기 신앙의 뜨거움에서 한 두 번 그런 방언을 접촉해 본 분들이 성경은 살펴보지 않고 신기한 체험을 했다고 하여 자기 주관으로 생각하고 남들에게 소개하고 또 써먹다가 오늘 방언처럼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방언이 소개되고 전파되어 교회가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가져야 할 내면의 신령한 부분을 전부 잊어버릴 정도가 되었습니다.
라라라라..... 하는 식의 방언은 그냥 소음으로 보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열심히 믿으려고 노력하고 백방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귀한 일이며 동시에 안스러운 일입니다. 기독교 정통 교파가 말씀으로 그 시대 그 시대에 주어진 앞길을 밝히지 못하고 제자리에 주저앉게 되면 그 뒤를 따르는 이들 중에 힘은 있어 활동은 해야겠고 더 이상 달려갈 길은 열어주지 않은 상태에서 이리 저리 흩어지고 곁길을 가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순복음교회의 오순절 운동은 바로 이런 현상입니다. 장로교가 이 시대 교인들에게 죽도록 달려갈 건설구원의 앞길을 열어주지 않고 기본구원까지만 가르치니까 중단된 도로 앞에서 열심 있는 교인들이 순복음식으로 일단 뛰고 구르고 해보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열심히 힘을 쏟고 해야 할 일을 주지 않으면 그 아이들의 넘치는 힘은 무엇을 부수든지 위험한 차 길로 나가든지 일을 내게 됩니다. 하다못해 공부에 전력하지 않으면 운동이라도 시켜서 건전한 쪽으로 그 속에 힘을 싹 빼놓아야 하는데, 이것이 오늘 교계 100여년의 탄식이라고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