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율법입니까? 복음입니까(마5:20)?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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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51
4. 질문 : 율법입니까? 복음입니까(마5:20)? 1088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산상보훈에 5:20절에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는 말씀을 보면서 풀리지 않는 문제를 목사님에게 여쭙습니다. 산상보훈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구약의 율법을 재해석해서 율법의 본래적인 뜻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2. 아니면 이전의 율법과는 차별을 둔 예수님의 새로운 토라로 이해해야하는 것입니까?
다시 질문을 바꾸어서 드린다면
1. '하나님의 의'와는 다른 '우리의 의'가 따로 있어야 천국에 들 어갈 수 있는 것입니까?
2.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를 힘입고 사는 사람들이 지켜 야 하는 또 다른 율법이라면 산상보훈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해 야 하는 것입니까? 칼빈의 성화를 위한 율법의 제3의 사용의 성격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하나님 말씀을 지키지도 못 하면서 이렇게 부끄러운 모습으로 질문을 드립니다.)
이 질문을 드리면서 우리의 회심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이 아니라 점진적이고 긴 과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산 상 보훈이 이렇게 우리의 회심을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을 위해 주신 말씀이라는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율법과 복음이라는 이분법적인 생각에서는 도무지 산상보훈을 율법에 위치시켜야하는지, 복음이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한계점에 부딛 이게 됩니다.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답변 : 질문하신 5:20의 해답은 바로 그 앞에 있는 19절에 있 습니다.
1. 구원을 두 가지로 나누어 살필 줄 모르면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성구입니다.
① 둘로 표현하는 설명에 대하여 우선 이해를 구합니다.
질문하신 내용을 수없이 듣기 때문에, 설명의 원할을 위해 부득이 새로운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으니 구원은 둘이라고 표현도 했고 또 그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이렇게 둘이라고 표현하게 된 것은 구원을 두 개로 잘라서 나눌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치 오늘 땅 위에서는 사람을 둘로 쪼개어 마음과 몸을 분리된 상태로 따로 존재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데도 마음과 몸은 따로 설명을 해야 설명이 잘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흔히 구원을 둘로 설명을 시작하면 들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먼저 차단을 하는 것이 일반 신학의 태도였기 때문에 양해를 구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하나인 줄 알면서도 둘이라고 표현하고 설명하는 이유는, 예수님 대속으로 안 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이 되어 영원히 천국을 확정짓게 되는 단계가 하나 있고, 그 다음은 중생된 사람이라도 남은 여생 살아간 모습에 따라 그 천국에서 각자가 다 다를 것인데 이렇게 믿은 후에 평생을 쌓아가는 단계가 또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② 해당 성구는 분명히 예수님의 복음 중 일부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부터 산상보훈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4:17에서 비로소 '천국을 전파'했고 이어 4:23에서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예수님으로 똑똑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5장으로 이어지면 천국 복음을 하나씩 자세하게 가르치다가 이제 질문하신 5:20에서 '천국'을 또한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모든 말씀은 전부가 복음입니다. 복음이라는 말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길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는 어떻게 노력해도 천국을 갈 수 없는 것인데 이제 예수님이 그 천국 들어가는 길을 가르치고 열고 계시는 것입니다.
③ 본문 5:20 바로 앞에서 천국의 차이를 분명히 말하고 있 습니다.
천국을 들어가는 것까지만 구원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대속으로 천국을 가게 된 우리 중생된 사람은 손양원목사님이나 오늘 문답하는 우리는 꼭 같습니다. 평생 믿고 간 분들이나 사도 바울이나 죽기 전 잠깐 회개하고 간 사람이 꼭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 5:19에서 천국에서 큰 자로 나타날 자와 지극히 작은 자로 나타날 자가 각각 있을 것을 말했습니다. 그 차이는 계명을 어떻게 지켰느냐가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평생에 손목사님처럼 계명을 지켜 생명도 가정도 다 버리고 천국에 간 분들은 지극히 큰 자로 나타날 것이고 신사참배나 부지런히 하다가 2계명을 쓰레기처럼 버린 사람은 천국은 가되 분명히 지극히 작은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2.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의'와 그 의를 가지고 중생된 우 리가 힘쓰는 '의'를 구별해야 합니다.
안 믿는 사람이 중생되어 천국가게 되는 의는 오로지 예수님의 대속으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의입니다. 인간에게는 있을 수도 없고 만들 수도 없는 것인데 전적 은혜로 주셨습니다. 이 의 때문에 우리는 무조건 천국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의를 받아서 천국가게 된 우리는 믿게 된 이후 남은 여생을 어떻게 살 것이냐는 문제를 두고 이 산상보훈은 하나씩 차근차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이 마태복음 5장 이후의 산상보훈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예 해당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입고 중생된 우리 믿는 사람에게, 이제부터는 가난한 심령으로 살면 더 많은 천국이 자기의 것이 될 것이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는 더 많은 것으로 주님이 배불리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가난한 심령으로 살기를 노력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살기를 노력하되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 알고 이 말씀을 지켜 이 말씀대로 산 사람은 천국에서 큰 자로 나타날 것이고 이런 주님 말씀을 듣고도 믿는 사람이 이 명령을 버리고 살면 천국은 가게 되지만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로 나타날 것입니다.
마7:24 말씀같이 이 모든 산상보훈의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않는 자는 그의 신앙건설이 허무하게 다 무너져 천국은 가되 지극히 작은 자로 나타날 것이고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삼가 조심하고 실행한 자는, 자기의 행한 그 의로 천국을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가게 된 것은 이미 자기가 예수를 믿을 때 예수님의 대속, 즉 하나님의 의로 가게 되었고 이제 천국의 실력 차이, 자기 신앙의 건설의 차이는 바로 자기가 행한 이 의의 양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3. 이제 마5:17-20을 다시 보겠습니다.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 주신 예언은 구약 교회에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들이 신약에는 소용이 없다는 말인가요? 그렇다면 오늘 신약교회는 신약성경만 가지면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약을 오늘 신약에도 그대로 지키라는 말인가요? 구약 말씀이 오실 메시야 예수님을 기대하고 그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받을 것을 말씀했는데 구약교회가 이를 몰랐을 뿐입니다. 구약의 율법이 제사와 여러 행동을 요구했는데 그 말씀은 그 속에 오실 예수님의 구원을 가르치고 있었고 선지자의 예언도 그러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오셨으니 일단 외형적으로 지켜야 할 것은 오신 예수님 때문에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폐하라고 했습니다. 유월절 양 대신에 진짜로 죽어주실 예수님 어린 양이 왔으니 구약이 요구한 대로 양을 잡아 제사 드리는 그 외형 그 형식은 이제 끝이 났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구약 말씀 자체가 필요 없게 되었는가? 구약 말씀 중에서 예수님이 오심으로 소용이 없게 된 양 잡는 일과 같은 것은 폐하였으나 구약 자체가 기다리던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실은 구약이 이제 정말로 완전해졌고 성취가 되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하여 율법과 선지자가 말하던 그림자 대신 실체가 그림자를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일점일획도 가감 없이 그대로 다 이루어지리라 하신 것은 그 구약이 하나님의 불변의 진리 말씀인데 변한다면 하나님도 변해야 합니다. 구약 중에서 예수님이 올 때까지 예수님의 실체 대신 그림자로 임시 시행토록 하고 이것저것을 말씀한 것은 실체인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그 사명을 다하고 끝을 낸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중생하게 되었으니 중생된 사람에게 구약 말씀은 어떤 위치를 가지겠습니까? 구약이 제사를 드리라고 한 대로 양을 잡아 제사 드리는 것은 이미 끝이 났지만 그 양을 잡아 제사 드리도록 성경에 기록하시고 또 오늘 신약교회에도 그 말씀을 그대로 주신 것은 우리가 그 말씀을 읽으며 또한 그 말씀 외에 구약 모든 말씀과 신약의 모든 말씀을 하나님 앞에 지켜야 할 '계명'으로 읽고 지킬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고 천국을 가게 된 우리가, 만일 남은 평생에 이 말씀대로 지켜 살았으면 산 것만큼 자기 천국의 자기 영원한 모습에 차이가 있게 됩니다.
하나, 마지막으로 기억할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천국을 가게 되었지만 천국가게 된 우리가 천국에서 자기의 영원한 모습을 보며 오늘 말씀을 하나 둘 지켜 나갈 때,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자기의 진실 충성,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노력은 구약 교회가 구약 말씀을 지키는 것보다 못해서는 천국 건설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즉, 계2:10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신 말씀과 같이 우리 힘 다하고 정성 다하고 뜻 다하고 생명까지 다하여 무엇이든 우리에게 명령한 말씀은 지켜 행하기를 구약 성도들이 구약말씀을 자기들의 행위로 지켜 천국을 가려고 했던 것처럼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율법과 복음의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율법과 복음의 정의를 수없는 신학자들이 말하고 있지만,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을 구별하지 못하면 결국 바로 정의를 내리기 어렵습니다.
율법이란, 물론 구약 모세의 율법을 율법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성경신학적 용어로 사용될 때일 뿐이고, 구원론에서 말할 때 '율법'이란,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구원에 이르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은, 천국을 들어가는 것은 무조건 은혜로 예수님 대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어떤 인간의 노력으로도 절대 안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복음을 받아 천국을 가게 된 믿는 사람이 천국을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천국을 들어가는 것은 확정이 되었으나, 이제 천국의 영원한 차이를 생각하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은 율법이 아닙니다.
5. 질문에 구체적으로 답변을 한다면
1. ('하나님의 의'와는 다른 '우리의 의'가 따로 있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까?)
천국을 들어가는 것만으로 말한다면, 오직 예수님의 대속으로 만들어진 하나님의 의로만 들어갑니다. 우리의 의가 따로 있어야 할 필요도 없고 있어 봐야 천국을 들어가는 데에는 하나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가지지 못한 인간의 의는 동네 사람들에게 칭찬이나 들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마5:20에서 우리 의가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한 말씀이 문제가 되겠습니다. 믿는 우리 자체는 천국에 확정되었으니 두번 거론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가게 된 우리가 우리 생애 이력 영광 기능 등을 가지고 들어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천국의 지극히 작은 자와 큰 자의 차이인데 이렇게 가지고 가야 할 것이 우리가 죽도록 충성하고 힘쓰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만일 이렇게 깨닫지 않고 달리 깨달으면 결국 질문하신 대로 우리는 우리 의로 천국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이 성구를 덮어놓고 그냥 지나가야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은 사람이 믿은 이후에는 왜 죽도록 충성하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 갖은 고난을 당해야 하느냐는 문제를 두고 생각해 본다면, 그리고 천국의 차이가 적지 않을 것을 말씀한 많은 성구를 생각한다면 여기서 소개한 교리 깨달음이 옳을 것입니다.
2.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를 힘입고 사는 사람들이 지 켜야 하는 또 다른 율법이라면 산상보훈의 성격을 어떻게 이 해해야하는 것입니까?)
산상보훈은 이미 예수 믿고 천국가게 된 우리에게 믿은 이후 힘 쓰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믿는 우리가 노력할 이 말씀 순종에 따라 산상보훈에 약속된 차이가 심은 대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칼빈의 성화를 위한 율법의 제3의 사용의 성격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도 못하면서 이렇게 부끄러운 모습으로 질문을 드립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20여전 전 잠깐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찾아봐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여 확인치 않았습니다.
(이 질문을 드리면서 우리의 회심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이고 긴 과정이라는 생각을 하게되는데)
우리가 예수를 믿고 중생이 되는 것은 즉각적입니다. 이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니 생사 문제는 단 순간입니다. 이제 예수를 믿고 살아난 자가 자기의 심신을 고쳐가고 길러가는 것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끊임없이 계속될 문제입니다. 앞에 것을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꼭 같이 주어지는 것이므로 기본구원으로 설명하고, 평생을 노력할 문제는 각자가 다르기 때문에 건설구원이라고 합니다.
(산상보훈이 이렇게 우리의 회심을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을 위해 주신 말씀이라는 생각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신학에서 '회심'이라는 단어를 쓸 때는 안 믿는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없던 사람이 하나님을 모신 사람으로 중생되는 것을 기본회개라고 하고, 이제 믿는 사람이 된 우리가 평생을 계속 고쳐가는 것은 평생회개라고 합니다. 산상보훈은 평생 하나님을 닮아가는 길이며 그 노력할 진리입니다.
(그런데 율법과 복음이라는 이분법적인 생각에서는 도무지 산상보훈을 율법에 위치시켜야하는지, 복음이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한계점에 부딛히게 됩니다.)
율법과 복음의 정의를 앞에서 말씀드린 기준으로 본다면 어떤 모순도 없을 것입니다. 산상보훈은 복음이지 구약 성도들이 행함으로 구원 얻으려고 했던 그 율법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천국 가게 된 우리가 이 복음으로 자기 천국의 영광을 마련할 때, 그 자세나 노력은 구약성도가 율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으로 마5:20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