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온전함‘이란? 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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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51
7. 질문 :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온전함‘이란? 644
1985년 8월 8일 오후집회(목) 설교록 p.430에서
사데 교회에 관한 말씀 중에 -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내가 찾 지 못했다
(‘온전한 행위라야 구원이 이루어지는 거고 성화가 되는 것이고, 온전한 행위라야 무엇이 살아납니까? ... 기능이 살아나지 ... 그렇기 때문에 우리 기능 부활이 되는 우리 구원이 되는 것은 온전한 행위라야 구원이 되는 것이지 아무나따나 비슷한 거 가지고 되면 안 되기 때문에...’)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 기능 구원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온전함'이 란?
1. '온전하다'의 뜻은 확실히 무엇입니까?
각자의 현실 수준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적정 수준을 넘어서는 것을 의미합니까? 각 현실에서 성령에 붙들려서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 다해 하나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2. 불신적 태도라 할 수도 있겠지만, 말 그대로 사전적 의미의 '온전함'이라면 인간으로서 온전함을 목표로 삼고 그에 이르는 노력은 할 수 있을지라도 '온전함에 이르게 되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답변 : 기능구원에서의 ‘온전’이란 그 기준이 하나님 보실 때 완전이라야 합니다.
1. 질문은 '건설구원도 신적요소만으로 이루어진다'는 큰 범 위에 관련된 것입니다.
① 구원의 성격은 신적요소만으로 될 수 있다는 점을 우선 .확정해야 합니다.
이번 질문은 비록 어느 한 설교 내용을 가지고 문의하셨으나 1981년 이후 수년 간 백목사님이 가장 중점적으로 또 집중적으로 밝혀나갔던 '구원의 성격' 또는 '구원의 요소'에서 이해할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차원에서 하시는 부분이 있으니 이를 신적요소라고 하고, 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인간이 동참하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할 일을 할 때 그 부분을 구원의 인적요소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은 어느 요소로 또 어떤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느냐는 문제가 제기 됩니다.
② 우선 기본구원은 신적요소만으로 단정할 수 있고, 문제는 건설구원입니다.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의 구분을 전혀 혼동하고 있는 교계로서는 가장 혼란스러운 교리 분야 중 하나입니다. 인적요소를 배제하자니 예수 믿은 이후 성도가 열심히 신앙생활해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는 논리로 나가야 하고, 믿는 성도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자니 구원에 인적요소도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나가게 되어 천주교와 큰 차이가 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백목사님은 이런 교리세계를 명확하고 자세하게 밝혔으니 기본구원은 죽은 영을 살리는 것이어서 인적요소는 개입될 소지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완전 신적요소의 작용이라는 것을 단정하게 됩니다. 영이 죽은 인간은 신앙으로 죽어 있는 상태이고 죽은 자가 자기를 살리는 일에 협조한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너무 확실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첫 외침이 교리적으로 바로 이 면에 그 중심을 두었는데 그 확고한 해석과 뒷받침은 백목사님의 기본구원 설명으로 완성되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남은 문제는, 예수를 믿는 우리가 중생 받고 천국으로 가게 되는 것까지는 인간은 주시는 대로 받아만 가지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구별이 되었는데 그 대신 심신의 성화에 해당되는 믿는 사람의 건설구원, 믿는 사람의 심신의 요소의 성화에 대한 문제는 이전보다 더 인적요소가 중요한 문제로 다가오게 된 듯 합니다.
③ 문제는 건설구원입니다. 우리 심신의 기능이 성화되는 과 정에서의 신적, 인적 요소의 역할문제
죽은 영이 살아나는 것은 전적 신적요소였습니다. 그러나 심신의 기능이 성화되는 것은 외견으로 볼 때 거의 인간 노력에 의한 것이고 하나님은 후방 지원 정도에서 그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기본구원은 신적요소, 건설구원은 인적요소로 된다고 그 외적 모습을 분류하기까지 합니다만 건설구원은 심신의 요소가 하나님을 닮는 만큼이라 할 수 있고 이 것을 성화라고 하는데 하나님을 닮는 이 일은 신적요소로만 되고 인적요소는 완전히 배제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결론적으로 생각해보면 보다 이해가 쉬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과정을 다시 한번 설명 드린다면, 기본구원은 죽은 것이 살아나는 과정이니 자기 자신이 움직여야 할 부분 즉 인적요소는 완전히 배제되어야 하고 그 대신 건설구원은 중생된 우리가 열심히 노력을 하여 성화를 이루어가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신적요소와 인적요소의 합작품으로 보여지기가 쉽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심신의 기능이 성화되는 것도 전적 하나님의 신적요소로만 되어집니다. 신적요소가 움직인 것만 신적요소를 닮은 성화에 이르게 되어 하늘나라로 옮겨가기에 합당한 합격품이 되고, 만일 인적요소만으로 되었거나 인적요소가 개입된 부분이 있다면 그 인적요소가 개입된 만큼은 도려내야 할 부분입니다.
인간이 볼 때 '되었다'고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 수준에서는 온전한 행위를 만들어 온전한 기능으로 인정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하나님 기준에서 하나님이 보실 때 신적요소를 닮은 여부로 천국 갈 기능과 지옥 갈 기능을 구별하기 때문에 인적요소가 개입된 것은 전부 낙제입니다.
2. 질문에 직접 관련된 부분입니다.
① 구원은 하나님이 보실 때 '온전'이라야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는 수준이라야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는 존재를 인간이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인적요소가 섞여서도 안 됩니다. 인간의 요소는 전부 다 빼버리고 배제시켜 순도 100% 순금을 만드는 일입니다. 인적요소라는 불순물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제조되는 하나님을 닮은 '온전한 인적요소'는 신적요소로만 될 수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는 인간, 인간의 요소라야 합니다.
하나님이라는 신성과 하나 될 인성은 신성 하나님만이 만들 수 있고 하나님으로만 되어져야 하니 바로 이 수준을 '온전'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질문에서 표현한 대로 '각자가 자기 현실 수준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적정 수준을 넘어서는 것'까지는 인적요소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점이며 인간이 더 이상 넘어갈 수 없는 최후선이 바로 '각자에게 하나님이 요구하는 선'입니다.
그렇다면 거기까지 간 사람은 인적요소로 거기까지 갔고 그리고 충성으로 의의 기능이 만들어졌으니 성화된 그 기능은 인적요소로 된 것이 아니냐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하나님이 요구하신 자기 최점G 선까지 가면 인적요소로서는 다 한 것인데, 이 인적요소가 자기 할 수 있는 끝까지를 한 것이 충성이고 이 충성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보시고 이 충성을 인간이 할 수 있는 인간 수준의 의로 보시고, 이 인간 수준에서 온전하게 된 의를 보신 다음 이제 하나님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물론 이때 하나님이 움직이기 시작하시는 것은 인간 수준에서 온전에 도달할 때까지 움직이신 하나님의 역사와는 그 성격이 좀 다릅니다.
인간이 인간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도록 한 것도 그 사람 속에서 하나님이 하셨지만 이때 하나님의 역사는 그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있는 힘대로 끝까지 하도록 하는 그 면에 감동과 도우심을 주시는 내용으로 역사 한 것이고,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온전한 의를 다 만들어 이제 그 사람으로서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최종단계가 이르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충성을 보시고 하나님이 직접 그 해당된 심신의 기능을 의롭게 성화를 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직접 성화시키는 역사에 의하여 그 순간 단번에 그 사람의 해당된 심신의 기능은 성화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종까지 가는 단계에는 인적요소 중에서도 신앙양심이 외부적으로 전적 주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자신의 양심이 더 이상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도록 모든 일을 끝내고 나면 그 양심 배후에서 보이지 않게 감동으로 돕고 지도하던 하나님께서 이제 양심 눈앞에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시듯 환하게 나타나십니다. 우리가 우리 현실에서 우리 양심의 수준에서 온전하게 행하고 나면 그다음 성령이 오셔서 인적요소로 끝내놓은 '인간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 역사로 신적요소의 것을 만드십니다.
② 각 현실에서 성령에 붙들려서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 다 해 하나님 뜻대로 행한다는 의미는?
인간이 인적요소로 신앙 생활한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양심으로 자기 힘대로 다 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지도 못한 하늘나라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그분의 말씀이 시킨다고 해서 자기 있는 힘을 다 한다는 것은 성령의 감동이 아니고는 시작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성령에 붙들렸기 때문에 자기를 다해서 말씀대로 살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 과정의 성령의 역사는 우리에게 우리 있는 힘까지는 우리 스스로 다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고 안내하고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다했다면? 그렇게 인간이 자기 양심껏 다 한 것은 불교계에도 있고 공산주의 운동사에도 다 수없이 많습니다. 그들은 아무 도움 없이 인간 스스로 인내와 의지로 인간이 갈 데까지 다 가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인간 수준에서만 본다면 아주 그들만 못한 형편없는 사람들이어서 그런 절제와 인내는 흉내도 제대로 못 내고 있습니다. 인간 중에서도 이렇게 별 것 없는 쓰레기들을 하나님께서는 주로 불러 모아놓고 이들을 인간이 스스로 갈 수 있는 데까지는 스스로 가보도록 하시려니까 얼마나 힘이 많이 드시는지? 죄송할 따름입니다.
③ 사전적 의미의 '온전함'은 목표치는 될찌라도 실제 그렇 .게 되겠는냐는 가능성 문제에 대하여
인간의 언어 표현상 '온전함'이라는 것은 존재하고 있습니다만 과연 흠 없고 점 없는 완전한 상태라는 '온전'이 실재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입니다. 말할 것 없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요구하는 수준이 문제입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수준은 1달란트 주신 이에게는 1달란트까지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5달란트 주신 이에게는 인간 수준의 '온전함'도 5달란트 수준에서의 온전함을 요구하십니다.
1달란트 받은 사람이 1달란트를 다하고 하나님 앞에 할 데로 다 했습니다 라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인간의 의, 곧 충성이라고 표현하시고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지극히 큰 것에도 의롭게 된다고 하여 '충성=의'라는 심판 기준을 눅16:10에서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5달란트 받은 사람이 4달란트만큼 움직였을 때, 이 상태를 두고는 하나님께서 전혀 움직이지 않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상태에서는 나머지 남겨둔 여력인 1달란트의 노력을 더 하라는 채찍과 감동 등의 역사로만 역사하시지 하나님 앞에 세울 '성화의 기능'을 만드시는 하나님으로서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고만 계십니다.
3. 이 교리가 우리 신앙생활에서 붙들고 나가는 방향은
① 어떤 인간의 신앙행위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는 실제 인식을 가르칩니다.
교회에서 전도나 설교 봉사 등 여러 면에서 특출하게 실적과 실력을 가진 이들이 '보잘 것 없습니다.'고 할 때, 과연 그가 자기 속으로 진정 그렇게 보느냐는 문제가 있습니다. 백목사님이 '제가 목회해서 된 것도 없고 거저 하나님이 다 하셨지요?'라고 할 때 표현과 다른 위대한 교계 지도자들이 '제가 별로 한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다 하셨지요?" 할 때의 의미는 천지차이입니다.
이 교리를 모르는 교계의 지도자들 표현은 말 그대로 '인간 표현상' 겸손일 뿐입니다. 무능한 인간은 아무리 그 자리에 세워주어도 그런 대형 교회를 이룰 수도 없고 그런 대 역사를 해 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교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대형 교회를 만든 것이나 소형 교회에 머문 것이나 이것이나 저것이나 세상에서 인간들이 이리 저리 해 본 쓰레기 될 행위밖에 하지 않은 것입니다. 천국에 가져가지 못할 것이라는 점에서는 꼭 같습니다. 그러나 주신 것을 다 했다면 다 했다는 인정 바로 뒤에는 하나님께서 기능구원으로 성화를 시키시니 된 것은 100% 은혜로 된 것 뿐이고, 또 그 인간 노력 다하도록 하는 과정도 은혜로만 된 것임을 알게 되니 겸손이 진정 겸손이 됩니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은 대형 교회를 이룬 그 양에서 소형 교회를 이룬 실적을 빼면 나머지는 자기가 한 자기의 실력이 되든지 아니면 하나님과 자기가 힘을 합해서 해놓은 것이니 자기의 지분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 아는 겸손 아는 감사 아는 감경의 영원을 가질 수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말로만 표현하지 실제로는 자기를 배제하되 더 이상 배제할 수 없는 한계가 있으며 그렇게 밑바닥에 남몰래 심지어는 자기 몰래 깔려있는 인간요소를 두고는 땅 위에서 행한 모든 의가 하늘나라 갈 때 그리스도의 사심판에서는 전부 지옥으로 보낼 불순물의 것이라고 될 수 있습니다.
② 이 교리 때문에 우리 같이 참 못난 것들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아볼 힘이 납니다.
같은 말이지만, 우리 같이 못난이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우리 할 수 있는 현실의 그 요소만 다 하게 되면, 나머지는 신적요소로 인해 성화가 된다고 하며 그 요소는 인간 평생을 두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현실의 개별적 분리 판정을 하신다고 하니까 장기간 충성하고 큰 역사적 일을 하는 데에는 실패하는 일이 많아도 매일 매일 작은 사안들에는 더러 '온전한 충성'도 해보고 그로 인해 몇 가지 성화도 자기 속에 생긴다는 확신 소망이 있기 때문에 하루 70번씩 7번 넘어져도 또 한번 더 해 볼 기회가 바로 있고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수없이 부족한 일이 많고 또 넘어지면서도 몇 가지씩이라도 바로 된 요소가 있을 때, 이 성화 요소들이 쌓여가며 그 다음에는 좀더 많고 큰일을 할 수 있는 성화된 총힘, 즉 저력이 됩니다.
③ 신앙생활 전반의 큰 방향을 잡아 믿을 바와 힘쓸 바를 바 로 잡아줍니다.
전체적으로 요약치는 않았으나 이런 교리들은 교리서에만 남지 않고 우리 신앙생활 전반에서 인간으로는 넘어갈 수 없는 많은 주관적 오해 착각 실수들을 다 제거해 주면서 꼭 나 스스로 해야만 하는 필수적인 부분 외의 것들을 정리해 주기 때문에 그 교리의 효력이라는 것은 이루 말할 수도 없습니다.
④ 성경 전체의 수많은 난제 해석을 풀어주고 있습니다.
이 교리의 해석과 이해가 아니고는 해석이 될 수 없는 성구가 적지 않습니다. 이 교리는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의 중심에 있는 몇몇 중요한 내용 중 하나이며 동시에 성경 성구의 전반적인 해석의 열쇠가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다른 많은 기회에서도 이 면의 교리로 성경해석과 교리부분들을 보시면 거의 모든 면에서 이 교리와 연관이 없는 곳이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