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부끄러운 구원에 대한 문의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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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부끄러운 구원에 대한 문의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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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질문 : 부끄러운 구원에 대한 문의 1059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빕니다. 저는 백목사님의 설교록을 읽으면서 많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한 가지 설교록에 부끄러운 구원과 영광의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데 영광스런 구원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서 부끄러운 구원을 상대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천국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는지 의문이며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이미 천국이 아니라고 생각되는데요. 답변 부탁합니다. 그리고 평안하십시요.


답변 : 성경의 모든 표현을 두고 일반적으로 말씀을 드렸으 .면 합니다.

1. 성경은 '세상 언어'로 하늘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세상 언어로 기록했습니다. 영계와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오직 물질로 된 세상 안의 것만을 표현하는 것이 언어의 근본 한계입니다. 몸과 마음이 알 수 있는 것, 시간과 공간에 제한받는 것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런 것들이라도 마음대로 표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언어 표현의 대부분은, 물질 중에서도 눈에 보이는 물질이 중심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대부분 보이는 물질을 가지고 유추하여 표현하는 정도입니다.

예를 들면, 육체처럼 볼 수 있는 것은 별로 불편 없을 만큼 언어로 표현을 하고 있으나 물질 중에서도 조금 신비한 물질인 마음에 대한 표현만 해도 이미 언어는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음이 넓은 사람' '앞날이 밝은 사람' 이라는 표현은 수학의 측정 단위나 빛의 밝기로 가지고 보이지 않는 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런 표현을 접할 때, '마음의 폭이 몇 미터 몇 센티일까?' '그 사람이 걸어가는 도로에 가로등이 몇 룩스 정도로 밝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까'라는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한다면 전혀 이해를 할 수도 없게 됩니다.

예를 들면, 11평짜리 국민아파트에서 사는 사람이 10명의 사람을 그 아파트에서 수용하는 데에는 불편이 많게 됩니다. 서로 어깨를 부딪히게 되고 앉고 일어서면서 상대방 가방을 옮겨야 합니다. 심지어 자기 시선을 두는 데에도 불편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게 됩니다. 그러나 200평 대지에 60평 전원주택에 사는 사람이라면 10명 손님이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어도 신체 접촉면에서나 활동 공간면에서나 심지어 시선의 편안함을 느끼는 데에까지도 불편함이 없을 것입니다.

'마음이 넓다'는 표현은, 육체가 사용할 수 있는 공간에 따라 차이 나는 점을 가지고 볼 수도 없고 육체와는 전혀 다른 상태로 존재하고 움직이는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2. 성경에서는, 하물며 이 세상 언어를 사용하여 하늘나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육체에 해당되는 표현으로 마음을 표현하려고 해도 아주 그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고 단지 육체의 경우를 먼저 놓고 이해한 다음 그것을 가지고 마음의 세계로 옮겨 유추하는 단계를 밟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가장 차이가 많이 나는 것 중에 하나가 우리의 몸과 마음의 차이인데 그 차이는 아무리 차이가 난다고 해도 물질계 안에서 물질들 간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사용하는 '인간 언어'와 그 인간 언어로 표현하려고 하는 '영계'의 차이는 아예 물질 자체와 영물의 차이입니다.

인간의 물질계 언어로 영계의 상태를 표현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차라리 표현을 하지 않고 그냥 두면 모르는 상태에 머물 뿐이지만, 표현을 하게 된다면 그 표현 때문에 오히려 실제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알도록 오도를 하게 됩니다. 지금 어린이들에게 쉽게 이해를 시킨다며 만화로 본 성경이 기독교서점에는 많이 나와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하나님 모습을 그리되 구름을 타고 흰 한복을 입고 수염을 축 늘여트린 산신령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완전히 귀신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3. 세상언어로는 표현을 할 수 없는데도, 하나님은 세상언어 를 사용했습니다.

이제 여러모로 살펴본 대로 세상언어는 물질계 안에서 물질에만 해당되는 표현법인데 그것을 가지고 영계를 표현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는 면을 말씀드렸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세상언어를 가지고 영계를 표현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 증인들은 바로 이 면을 오해하여 성경의 세상표현을 표현 그대로만 받아들여서 성경을 세상 건설의 이치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의 지옥불이 히브리어 원어 표현 상 예루살렘 성밖 쓰레기 소각에 해당된다고 생각하여 지옥 자체를 부인해 버리고 있습니다. 성경에 사용된 세상언어의 표현에 매여서 물질계 범위를 떠난 개념은 전부 부인해 버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 '지상낙원'을 향하고 있으며 천국이나 부활이나 영의 존재와 같이 물질계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전면 부인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언어로 성경을 기록하여 주신 것은 영계가 물질계와 꼭 같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영계가 없고 물질계만 전부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을 인간의 세상언어로 기록해 주신 것은, 인간이 가장 쉽게 알 수 있도록 영계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물질계 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물질계 내에서 통하는 언어로 기록해 주셨기 때문에 성경은 누구든지 가장 쉽고 간단하게 알 수 있게 적었습니다.

4.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알아 두실 것은, 세상언어만으로 는 알 수 없습니다.

비록 가장 쉽게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세상언어로 성경을 기록해 주셨지만, 그렇다고 성경 기록만으로 우리가 영계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앞에서 예를 든 여호와 증인처럼 성경 기록대로 믿었는데 성경 가르침과 정반대 방향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 외부는 세상언어로 기록되었으나 그 기록을 통해서 그 기록 안에 넣어두신 하늘언어를 읽어야 합니다. 즉, 성경을 그 기록된 글로만 읽으면 전혀 그 성경을 알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내 마음 속에 성령이 오셔서 그 뜻을 알려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고, 겉으로는 성경의 세상언어를 읽고 우리 속에는 성령이 그 세상언어로 표현된 내용을 알려 주실 때 비로소 성경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탄'하셨다는 창세기 6:6의 표현이나 하나님이 그 뜻을 '돌이켰다'는 신30:3의 말씀, 또는 잠5:21의 여호와의 '눈' 등이 다 그런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주권 예정 성취의 하나님이시고 전지 전능 완전자이시므로 '한탄'이 있을 수 없고 '돌이킴'이나 '눈과 귀'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언어로 그렇게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표현했는데도 하나님의 '눈과 귀'가 있음을 부인하면 성경 부인이 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눈과 귀'를 우리 머리 부분 앞과 옆에 있는 감각기관과 같이 생각하여 하나님 본체에 머리 몸 팔 다리를 나누고 머리에 두뇌와 그 두뇌 외부의 안테나로 귀가 있고 스피커로 입을 달고 계신다고 그린다면 이는 성경을 그대로 읽는 사람이 아니고 거꾸러 읽는 사람일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눈과 귀'를 표현했으니 그렇게 인체의 '눈과 귀'를 가지고 하나님을 표현한 뜻을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읽는 것은 세상언어로 읽고 그 뜻은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께 이런 표현이 하나님의 어떤 면을 가르치는지를 알려 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5. '천국의 부끄러움'은, 위에서 말씀드린 모든 면을 우선 생 .각하셨으면 합니다.

성경이 부활 후 우리의 모습을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로 각각 다를 것을 말씀했습니다. 불 가운데 얻을 부끄러운 구원도 말씀했습니다. 행한 대로 영원히 갚으시는 면도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천국은 영광과 감사와 찬송만 있는 나라라는 것도 말씀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오늘 우리가 세상에서 느끼는 부끄러움 같은 부끄러움을 느끼는 천국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도 비교가 있고 차이가 있어 영광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씀한 이상, 우리가 세상에서 세상언어로 표현하는 '부끄러움'을 가지고 천국의 영원을 생각해야만 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성경에 이렇게 표현을 하시고 우리에게 읽도록 하신 것입니다.

천국의 실체를 실체 그대로 느끼고 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한번 지난날의 잘못으로 오랜 세월 고통을 느끼고 후회하는 부끄러운 과거가 있어 두고두고 아쉽듯이, 천국에 간 우리들이 세상생활 중에서 우리가 자유롭게 더 잘 믿을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주셨는데도 우리가 그 기회를 허송했다면 그 지난날에 대하여 너무 후회가 되기 때문에 만일 다시 그런 기회를 준다면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생기도록 미리 살아 생전 우리에게 세상에서 세상언어로 성경을 그렇게 기록하여 주셨습니다.


6. 설명은 여러모로 드리지만 단번에 와 닿지는 않을 것입니다.

영계에 대한 문제, 하나님 본체에 대한 문제, 우리 영에 대한 문제 등은 성경 기록을 가지고 우리 인간 차원에서 교리로 몇 가지 요약할 수 있는 면이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실감을 가지고 자기 속에 그 실체를 확정하는 데에는 시간도 필요하고 또 자기 자신의 신앙이력과 체험이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1세 아이, 5세 아이, 10세 아이, 20세 청년에게 어릴 때 죽은 자기 엄마에 대하여 설명을 해 준다면, 꼭 같은 말로 꼭 같이 표현을 해 주어도 받는 사람으로서는 자기 나이에 따라 그 설명이 설명으로서 무슨 말인지도 모를 때가 있고, 같은 말인데도 알 듯 모를 듯 할 수도 있고, 꼭 같은 그 설명을 듣고 단숨에 죽은 엄마를 그려낼 수 있는 20세의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3-4살 된 아이에게 네 엄마는 죽었다고 말을 해 준다면 당장 돌아오는 대답이 죽는 것이 무어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자라면서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한번 두번 본 후라고 한다면 자기 엄마가 죽었다고 설명하는 그 말을 당장에 알아들을 것입니다.

질문하신 내용 뿐 아니라 신앙 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면의 의문을 두고 종합적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제 몇 가지로 설명 드린 참고 내용을 가지고 당분간 여러 면으로 깊이 명상을 해 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어떤 면으로도 모순이 없는 세계를 가질 때, 비로소 영계를 어느 정도 보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어느 말에든지 반론이나 이의나 의문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이의 반론 의문이 사라질 무렵 아침에 돋는 햇빛으로 앞이 보이지 않았던 안개는 걷어지고 해가 직접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이는 그 시간에 비로소 해가 뜬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해는 아주 높이 떠 있었는데 나 자신의 선입감이 안개와 같이 그 해를 가렸던 것일 뿐입니다.

우리 신앙이 자라는 순서가 다 그러하다는 것을 참고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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