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모든 사람’에 대한 질문(딤전2:4) 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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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질문 : ‘모든 사람’에 대한 질문(딤전2:4) 825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위 성구에서 '모든 사람'을 어떻게 봐야할까요? 건설구원 안에 있는 '택자'로 봐야할까요? 자유의지에 의한 구원(기본구원)을 믿는 사람들이 좋아할 성구가 아닐까 싶어 질문드립니다.


답변 : ‘택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1. 하나님은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놓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입니다.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은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이면 그 누구든지 믿고 구원 받을 수 있도 록 해 주셨는가?

아니면, 믿기로 작정된 자가 따로 있어 그들만 믿게 되고 구원 받는 것인가?

이 2가지 주장은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내려온 기독교의 2가지 큰 흐름입니다. 그 숫자로 말한다면, 과거로 올라갈수록 또 보수주의 교단으로 올수록 후자가 많고 현대로 내려올수록 그리고 자유주의 교단으로 내려올수록 전자가 많습니다. 국내 교계로 말하면 아직도 후자가 많습니다만 내적으로는 전자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마치 성경이 정확무오한 절대 구원의 말씀이냐는 문제를 두고 그렇다 하는 측과 그렇지 않다는 측이 있는데 그 분포도와 거의 같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백영희신앙노선은 믿기로 작정된 자만 믿는다는 신앙노선에서도 가장 확실한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기로 작정된 자만 믿는다는 이 신앙노선은 단순히 보수 성향만을 가졌거나 또는 자신이 소속한 교단의 교리방침이 그렇다고 해서 그런 입장이 견지되는 문제가 아니라, 성경에 대한 전반적인 깨달음이 필연적으로 그리될 수밖에 없다는 체계적 깨달음이 있어야 하고 그 깨달음은 자기 속에 영감으로 확정되어져야 비로소 견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백영희신앙노선의 주해와 교리체계가 아니고는 최점{으로 이 신앙을 견지하기는 거의 어렵다고 보고 있습니다.

2. 인간은 누구든지 자기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보이 는 성구는 더 있습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라고 했고 또 질문하신 딤전2:4에서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으니 말씀하신대로 기본구원을 받는 것도 사람의 노력과 의지에 달려있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성구들입니다.

3. 그러나, 앞에 말씀드린 성구들에 더하여 이 성구들을 나란 히 놓아보셨으면 합니다.

택함의 교리는 엡1: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는 성구에서 가장 확실한 근거를 삼아 증거하고 또 택함 교리를 믿는 분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성구입니다. 그러나 이 성구에 또 더하여 다음 성구들을 보셨으면 합니다.

행13:48,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고전12:3,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미리 작정된 자들에게 성령이 역사하여 예수를 믿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사람이 믿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또 믿으려는 노력을 하여 믿게 되는 과정에는, 이런 인간의 의지와 노력 뒤에는 보이지 않는 성령의 역사가 미리 있었고 이 성령이 마음을 열어 믿어보려는 의지와 노력을 움직였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문제는 우리 인간이 알고 있는 바는 자기가 인식하기 시작한 것부터 알게 되지 그 인식이 생겨지도록 그 인식 자체를 움직인 그 인식 이전의 움직임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보시면 하나님이 시작시켜 인간이 시작하는 일인데 인간은 하나님이 하도록 하셔서 했다는 것은 모르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의지로 자기가 마음먹고 자기가 노력하여 믿게 되었다고 아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믿는 사람이 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침내 성경을 읽고 보면 위에서 말씀하신 두 종류의 성구들이 함께 있으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한 성구와 '믿기로 작정한 자만 믿도록 하신다'는 성구를 맞추어 보고 또 에베소 1장이나 다른 성경을 한 자리에 모아두면 모든 의문은 저절로 해결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믿고 싶으도 믿지 못하도록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차단을 해버리시는가? 사람도 그렇게 한다면 잔인한 일이고 불공평한 일인데....? 하는 식으로 자기의 주관, 자기의 취향, 자기가 가진 지식을 기준으로 성경을 분해 조립하여 재구성하려는 인식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르쳐, 인간에 중심을 두고 하나님을 꿰어 맞춘다고 하여 인본주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신본주의 신앙은 내 생각이나 인류의 취향은 일단 제쳐두고 하나님이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가르치는가만 살펴서 그대로 믿고 그대로 확정하는 것입니다.

4. 그렇다면 성경 전체를 한 진리로 살펴본다면 결론은 쉽게 나올 것 같습니다.

요3:16처럼 누구든지 믿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 하신 말씀의 '누구든지'는 두 말 할 것 없이 '택자'만을 사람으로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질문하신 딤전2:4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믿는 우리끼리 성경만 놓고 다시 한번 냉정하게 '사람'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면 이 정의는 지금까지 세상이 말하고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정의와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주 안에 있는 피조물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으니, 하나는 택자이고 나머지 하나는 택자를 제외한 만물인데 이 만물 안에는 모든 불택자도 다 함께 들어있다 라고 할 것입니다. 세상이 말할 때 사람은 생물학적 인간, 즉 몸과 마음이 결합된 인류는 전부 포함됩니다. 우리는 세상이 말할 때는 모든 인류가 다 사람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참사람은 택자만이 사람이고 나머지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땅 위에서는 외형이 사람이면 같은 부류로 살지만, 이 세상이 잠시잠깐 끝나게 되면 명백하게 영계의 영원은 나뉘어집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택자들이 있고 수종되는 천군천사가 있으며 우리 구원에 바로 사용된 만물도 새나라의 기쁨에 동참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쪽 지옥에는 택자 외의 인간이 악령과 함께 지옥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이 두 종류의 인간을 오늘 땅 위에서 한 종류로 보고 사는 것은 천국을 너무 모르는 것이고 우리의 참된 모습을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5. 하나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누구 택자며 누구 불택자라 고 표시를 해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부를 택자라고 생각하면서 전도하고 상대하도록 우리에게 과제를 주셨습니다. 택자와 불택자를 분별하도록 꼬리표를 달아놓지 않으신 주님의 뜻이 있습니다. 이 점 때문에 우리는 교리적으로 또 앞으로 영원세계에서는 분명히 오늘 인간이 두 종류로 완전 구별될 것이라고 알지만, 오늘 이 땅위에서는 모든 사람이 전부 구원에 이르도록 소원하고 또 그럴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안 믿는 이들을 향해 돌진해야 합니다. 접촉하는 사람마다 저 사람이 구원받기로 작정된 바로 택자일 것인데 라는 절박감으로 그를 전도하기 위해 생명까지 포함하여 우리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하게 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재질문 :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살았던 사람은 모두 불택자 .입니까?

답변 글을 읽고 보니 이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살았던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택자 아닌 불택자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 조상들이 그랬을 것이고........ 지금 북한이 진정한 복음을 받지 못하고 있을때 그들도 불택자라고 보아야 하는지요? 분명히 우리나라에 복음이 제일 먼저 들어 온 것은 분단되기 전 남한이 아니라 북한의 평양으로서 복음을 제일 먼저 받아 들였으나 이제는 북한공산정권에 의해 신앙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예정섭리는 우리 사람의 잣대로는 측량도 못하고 또 이해할 수 없군요.

어느 교역자께서 불택자와 택자에 대한 이해를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농부가 논에 나가 모를 심었는데 그곳에는 모만 있는 것이 아니고 농부가 심지 않은 가라지도 바람에 날려 섞여 있었는데 논에 나가 가라지 뽑는 것이 농부의 할일이었으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가라지 수도 많아져 더 이상 수고를 해도 계속 가라지는 없어지지 않고 모와 함께 눈에 띄지 않게 표시 없이 자라고 하여 그만 내버려 두었다가 추수때 나락을 맺은 벼는 곶간으로 들이고 가라지와 함께 나락을 맺지 못한 벼는 불태워 없앤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보면 가라지는 영원한 가라지로서 절대 모가 될수 없듯이 불택자는 영원히 택자가 될 수 없다고 하더군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이후부터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 130여년전의 사람들은 전부 불택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궁금합니다.


답변 : 너무도 놀랍고 너무도 엄청난 일이지만, 사실은 사실 입니다.

이 복음이 들어오기 전 모든 분들, 지금 얼어붙어 있는 북한의 대다수 동포들, 이들을 불택자로 분류해야 합니다. 질문하신 분의 말씀처럼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기 이전에 그런 형편의 사람들로 두실 필요가 있어 당신이 만들고 그곳에 배치했다는 점을 참고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면 전혀 다른 시각의 인식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질문자께서 예로 드신 것보다 더 심한 경우도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을 제외한 세계 모든 민족 전부가 거의 전부 불택자였습니다. 노아 때, 물속에 전 인류를 익사시킨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가장 이해할 수 없고 가장 엄청난 사실은, 이런 일들의 뿌리가 되는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 선악과를 먹도록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모든 엄청난 사실은 인간 하나 하나를 눈으로 보고 손을 맞잡으면서 생각할 때는 과연 이해할 수 없는 사실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을 다시 한번 하나님이 홀로 계시다가 당신을 닮은 사람들을 만들어 영원토록 당신으로 살게 하시되 이 일에 필요하여 여러 만물들을 그 이용물로 함께 만드셨고 그 이용물 중에 불택자들도 포함시켰다는 말씀을 여러 모로 많이 새겨보셨으면 합니다. 이 모든 사실 때문에, 이 모든 사실을 깨닫고 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들부들 떨면서 머리 숙여 경건해질 수밖에 없고 동시에 그 감사가 한이 없는 세계를 가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위해 그렇게까지 이용물로 만들어진 만물과 불택자 그들에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바로 믿는 것만이 그들의 기쁨이요 그들의 바람이요 그들의 영원한 소망이 되어집니다. 지옥에 있는 이들도 말씀대로 사느라고 고통을 견딘 우리를 향해 머리 숙여 감탄하는 세계가 지옥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130년전 한국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 모든 사람들이 전부 불택자인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는 과연 그렇다고 확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그렇고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 이전에도 어떤 경로와 어떤 형태로 얼마만한 사람들이 예외적으로 이 복음에 접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전체적으로 말한다면 질문하신 대로입니다.


재질문 : 역사적인 관점에서

역사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이념과 입지를 세우기 위해 엄청난 가공과 조작이 존재한다는 것은 상식에 가까운 사실이지요. 가깝게 조선왕조에 대한 역사조차도 그러하고,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나 막론하고 역사로 전해져 오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의 모든 역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 말하듯이 승자의 역사라고 하는 말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우리가 아는 100여년의 기독교역사는 단지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 역사이지 하나님의 역사와 또 실질적인 어떤 역사가 숨겨지고 가리워졌는지 우리는 알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역사가 진짜 역사라면 위의 목사님말씀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바벨탑사건이후부터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전의 역사는 아직 그 자체가 베일에 쌓여 있는 것 또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역사입니다. 우리조상들이 어떤 경로로 바벨큄L후 여기까지 왔는지 또 와서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 어쩌다 우리 민족이 엉뚱한 불교에 신앙을 빼았기고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연구해볼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지금 그 역사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고 알고는 있지만 아직 성과가 없는 모양입니다.


답변 : 신라 때 십자가 흔적이 있었다는 등의 자료가 기억나 .서, 한 말씀

* 이 글은 위 글에 대한 답변이나 이의라기보다는 관련 있는 발 언 정도로 보셨으면 합니다.

1. 역사를 믿지 않는 것은 이곳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은 거 .의 지식과 서적을 부인하는 편입니다.

오늘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이 우리 눈앞에서 완전히 반대로 평가되고 나타나는 것을 수도 없이 보고 삽니다. 있었던 일은 있었던 일로 지나가고 역사란 쓰는 사람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고 또 없는 기록이면 소설로 적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자연과학조차도 수많은 세월 속에서 자연계시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면 별로 믿지 않는 편입니다. 인문사회과학은 전부를 틀렸다고 단정해 놓고 있습니다.

2. 그러나 성경 자체를 통해 우리는 구원 계통에 대한 몇 가 지 상식을 확정해 둘 수 있습니다.

복음의 전파는 하나님께서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떤 택자를 어떻게 믿게 하시는지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실은 모든 하나님의 역사 전부가 다 오묘하고 광대하여 좁은 인간이 알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구원은 아브라함의 계통으로 주신다고 하셨지만 모압족속인 룻을 구원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을 볼 때 우리는 2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민족적으로는 아브라함의 계통인 이스라엘을 통해 구약 구 원역사가 진행될 것이고
둘째, 개인적으로 개별적으로 구원을 받는 역사는 따로 있을 것이 라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을 잇는 이삭, 이삭을 잇는 야곱, 야곱을 잇는 12지파로 구약의 구원계통을 주시겠다는 것도 성경이니 구약에는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는 유일하게 구원 얻는 백성일 것입니다. 비록 민족적으로 단체적으로는 아니라도 개인적으로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떤 구원이 전해질런지는 윗 글에서도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안다면 우리 지능 수준에서 짐작할 뿐인데 짐작은 역시 짐작일 뿐입니다.

3. 선교시대 이전, 특히 삼국시대 등 고대사에 대하여 우리가 확정할 수 있는 것은

우선, 삼국시대 초기와 같이 예수님 탄생 이전의 우리 조상들은 세계 모든 민족들과 함께 성경이 '이방인'으로 분류하였고 이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이 없음을 명백히 했습니다. 따라서 적어도 민족적으로 또 사회 전체적으로는 구원이 없었다고 단정해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드린 말씀처럼 어느 한 개인을 특수하게 하나님이 필요하셔서 구원한 역사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숫자는 어느 민족 전체를 두고 그 구원여부를 표현할 때는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 삼국시대 초기 이후 조선시대까지 이어오는 신약시대는 경우가 다릅니다. 신약시대는 그 복음을 이스라엘이 아닌 구약의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허락하셨고 오히려 신약시대 복음의 주무대는 이방이 되도록 하셨으니 이제 지역적으로 어떤 복음의 경로가 있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약시대인 2천년 이래로는 어느 민족에게는 구원이 없다 할 때는 성경으로 확정할 수는 없고, 그 사회에 내려오는 여러 형편을 부족한 인간이 부족한 자기 지식 범위에서 말하는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족한 인간지식으로도 선교시대 이전의 선교역사에 대하여는 비교적 좀더 확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땅 끝까지 이 복음이 전파되어야 마지막 재림 때가 되리라고 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정확한 시기를 단정하지는 못하지만 천문과 자연에 징조가 있듯이 재림의 시기도 그 가까움을 알 수 있도록 미리 몇 가지 말씀하신 선행 표시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계를 향해 전해지는 복음 역사는 신약 초기에 급격하게 전해졌다고 보는 것보다는 점진적인 전파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입니다.

실제 일반 세계사나 우리 국사와는 전혀 별개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교회의 자체 복음전파 역사입니다. 대단히 많은 부분에 문제가 있고 별별 조작이 있지만 로마의 기독교가 유럽으로 영국으로 마침내 미국으로 들어가게 되는 그 과정은 크게 보면 거의 확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의 외형과 별개로 교회의 순교사라는 것은 신학교에서 확인되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되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는 참된 정통 교회의 살아있는 신앙가들에 의하여는 전부 포착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신약교회 복음 전달 역사가 관심인데 2천년전 복음이 세계를 향할 때의 당시 형편은 말세의 한 징조로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질 때 말세가 될 것이라는 말씀에서 볼 때 한국에까지는 민족적으로나 또는 단체적으로 복음이 전달 된 정도는 아니겠다는 생각이 있고 그 이후 세월이 흐르게 되면 오류가 많은 것이 역사라 하지만 역시 과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점을 확인할 수가 있으니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 전해진 기독교는 적어도 민족적으로 또는 이 사회적으로 단체적 구원으로 역사했던 적은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4. 위 글을 읽으면서 10여년전, 신라 유적 중에서 십자가를 발견했다는 보도를 기억합니다.

당나라에도 기독교 문화가 접촉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 개인의 십자가가 땅 끝에 해당될 이곳까지 올 수 있다는 것도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확인될 수 있고 해석될 수 있는 형태의 유물은 십자가가 존재하기 이전인 3,4천년 전 유물에서도 수없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고고학자들의 해석을 무시하고라도, 인간은 자기가 필요해서 만드는 생활 속의 기하학적 흔적이 많은데 그 중에 원, 직각, 삼각, 사각, 선분, 선분이 마주치는 십자가 형태는 인간이 움직이고 존재했던 사회와 생활공간에서는 빼놓을 수가 없다고 봅니다. 그 중에 두 선이 직각으로 마주친 모든 흔적을 그렇게 보려고 한다면 그 연구의 분량과 그 추론의 끝은 한정이 없을 것입니다.

위 글을 적으신 분이 그런 흔적을 근거로 글을 적었다는 뜻이 아니며 또한 그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다만 위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 신라 때 불교문화 내부에서 발견되는 몇 가지 이상한 흔적을 가지고 당시 기독교 전래로 추론하는 주장들이 교계에는 이미 어느 정도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곳을 방문하고 위 글을 읽는 분들 중에 그것을 염두에 두고 계실 분들을 위해 미리 드리는 설명입니다.

남들이 다 가는 길을 거의 다 틀렸다고 확정하며 가는 걸음이 이곳의 백영희신앙노선이라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실 혁명보다 더 급하고 강하게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이는 세상 전체가 너무도 정상과 멀어져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것을 향한 이곳의 발걸음이 외부와 너무 다른 모습이어서 그렇게 보일 것입니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드는 노력보다는 정상을 정상으로 찾아가는 노력이 외부와 비교가 되면서 그렇게 보일 것입니다.

신라 때를 예로 들면 몇 가지 그런 흔적을 두고 우리 신앙인이 가질 인식은, 오늘 우리 현실에서 구원을 이루는 장소적 중심인 현대 교회와 그 당시 기독교 전래는 만일 사실이라 하더라도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혹 우리 한민족 중심의 자긍심이나 한반도의 반도적 의미를 찾는다면 모르지만 우리는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천국만을 본향으로 가는 이 땅의 나그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구원에 어떤 형태로든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또 알아봐야 아무 의미가 없을 일을 두고, 그것도 가능성이 없다고 너무 쉽게 단정할 수 있는 문제를 가지고 그 문제에 눈을 돌리는 것은 오늘 할 일을 뺏어가는 위험성이 있겠다고까지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신대 등 극단적 기독교 자유주의 쪽에서 특별히 집중적으로 이런 면을 부각하고 있음도 미리 알아두어야 할 듯합니다.


재질문 : ‘모든 사람’에 대한 질문(히12:14)

히브리서 12장 14절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여기서 사용된 모든 사람도 택자만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답변 : 히12:14의 ‘모든 사람’은 택 불택자, 신 불신자 전부를 포함합니다.

1. 화평함과 거룩함을 가지도록 노력할 사람은 택자 중에서 도 이미 믿기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12장은 택자 중에서도 예수 믿기 시작한 우리에게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앞 뒤 말씀이 다 그러하지만, 특히 질문하신 14절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택자와 예수 믿기 이전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화평함과 거룩함을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가 없지만, 우리 믿는 사람만이 화평함과 거룩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화평이란 우선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 되는 화목을 말하고 그다음 하나님과 하나된 사람이 다른 사람과 하나 되는 화목을 말합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거룩도 더러운 것 중에 깨끗한 것을 구별하여 찾는 것인데 이 깨끗과 더러운 것의 기준은 세상 기준이 아니고 말씀이 기준입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만이 거룩을 찾을 수 있습니다.

2. 화평과 거룩을 가질 사람은 우리 믿는 사람인데, 그렇다면 누구를 대상으로 할 것인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살핀대로 화평함과 거룩함을 가지도록 노력할 사람은 우리 믿는 사람이지만, 누구를 상대로 할 것인가? 말씀하신 본문은 '모든 사람으로'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사람은, 택자와 불택자를 다 포함하며 택자 중에서도 믿기 시작한 사람과 시작하지 않은 사람을 함께 포함합니다. 교회의 어떤 직책에 있는 사람, 어느 타 교단에 있는 사람, 어떤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도 다 포함합니다. 심지어 교회 문제를 두고 갈등 중에 사람들끼리도, 심지어 세상 국가간에 벌어지는 전투에서도 그 상대방을 향해 우리 믿는 사람이 할 일은 항상 '화평과 거룩'을 동시에 가지는 일입니다.

3. 불택자를 포함한 안 믿는 세상 사람과도 우리가 화평과 거 룩함을 가져야 하는 이유

안 믿는 사람은 사실, 택자인지 아니면 불택자인지 구별이 전혀 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안 믿는 사람 중에는 분명히 불택자들이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믿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누가 불택자이므로 끝까지 믿지 않고 죽을런지를 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안 믿는 이들을 만날 때는 이 사람이 앞으로 믿게 될 택자일 것이라는 마음과 태도로만 그들을 상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택자와 불택자의 구별보다는 이미 믿기 시작한 사람과 안 믿는 사람으로 나누는 것이 더 분명합니다. 불택자를 포함하여 안 믿는 사람에게도 우리가 화평과 거룩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본문 히12:14이 말하는 화평의 뜻은 '하나님을 모신 내가 되어서 다른 사람을 하나로 만들려는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을 모신 다음, 이 하나님을 모신 내가 그 다음 다른 사람을 붙들어 나와 가깝게 만드는 것이 화평이니 이 화평은 안 믿는 불신자를 향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전도는 안 믿는 사람을 향한 화평함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또 말로 하는 전도가 아니라도 믿는 내가 하나님을 모시고 바로 살게 되면 이 행위와 생활이 옆에 있는 안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모신 사람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행위와 생활이 그들에게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화평함을 보여주는 것이며 화평함으로 살라는 권고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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