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마25장에 나타난 양과 염소의 비유에 관한 의문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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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질문 : 마25장에 나타난 양과 염소의 비유에 관한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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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를 하면서 단순한 의문이 생겨 질문을 드립니다. 본 텍스트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최후의 심판을 경고하셨는데 이것은 결국 택자와 불택자를 가르는 심판으로 볼 수가 있는데,

그런데 문제는 왼편에 있는 자들의 항변에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변명에 대한 답변으로 지극히 작은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내게 하지 않은 것이라 하여 이들을 영벌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영벌에 들어가는 이유가 지극히 작은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되며 따라서 지극히 작은자에게 행한 선행이 우리의 영벌과 영생을 가늠하는 요소가 된다는 해석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결국 행위에 의한 건설구원론적인 요소와 택, 불택자를 가르는 기본구원론적 요소가 동시에 다 포함되는 말씀으로 보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와 비슷한 비유가 열 처녀 비유도 마찬가지 의문을 가져옵니다. 백목사님의 구원론에 있어 이러한 이원론적 구조로 배워온 저희들로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아니면 성경이 이 두 가지를 다 설명하기 위해 비유를 들었는지 조심스레 질문을 드립니다.


답변 : 택자인 우리 안에도 양의 요소 염소의 요소는 분명히 있습니다.

(전체 요약)

1. 양과 염소 비유는 천국갈 택자와 지옥갈 불택자를 나눈 것으로 알기 쉬우나, 본문에서 6가지 선행을 기준으로 천국과 지옥을 나누었고 따라서 전적 은혜로 택함 받고 천국가게 되는 기본구원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2. 본문은 천국가게 된 택자가 자기 속에 주님의 양으로 산 행위 순점8로 산 그 생애, 순점G 기능, 습관, 요소는 천국으로 가져가고, 자기 속에 주님 말씀을 거부하고 제 고집대로 살아왔던 염소 같은 성질, 염소 같은 행위, 염소 같이 살아왔던 생애는 영원히 지옥에 버려야 할 건설구원, 성화과정의 구원면을 말씀하신 성구입니다.

3. 질문자께는 1번과 2번으로 간략히 요약할 수 있으나, 구원론을 두고 성도 한 사람 속에 있는 두 가지 다른 요소, 즉 양같이 행동할 때가 있고 염소 같이 행동할 때가 있는 것이 우리들인데 이 평생 믿어가며 부딪히는 내면의 성화 문제를 깊이 생각지 않던 분들을 위해서 질문하신 내용과 관련된 여러 면을 설명하게 됨을 이해 바랍니다.






(전체설명)

마25장은 택자의 평생 생애를 주님 앞에 세울 때, 자기 산 생애를 두 가지로 나누어 처리됨을 말씀한 것이니, 택자에게만 해당되는 건설구원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1. 우선 열 처녀 비유를 먼저 요약합니다.

① 열 처녀는 전부가 성도들입니다.

우선 열 처녀 비유는 백목사님이 1957년 설교에서도 이미 천국 갈 성도들의 문제로 이미 단정을 짓고 있으며, 두 종류의 처녀는 믿는 사람 중에서 주님 오실 때를 생각하고 슬기롭게 말씀대로 사는 성도와 믿는 사람일찌라도 주님 오실 때를 망각하고 자기 마음과 몸을 세상에 허송하는 경우가 있음을 가르친 성구로 밝히고 있습니다.

② 불택자는 미련한 처녀가 될 수조차 없습니다.

분명히 열 처녀 비유에서 둘로 나뉜 처녀들은 기름의 유무가 아니고 기름의 과소에 따라 주님 영접의 유무가 결정되었습니다. 불택자는 기름이라는 것이 아예 존재할 수도 없는 완전 타락, 완전 죽은 자들입니다. 주님 영접에 필요한 준비가 많았느냐 적었느냐는 문제가 해당될 가치조차도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전적 은혜로 거저 받고 가는 천국이냐 버림받아 지옥을 가느냐는 것은 택함과 불택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며 믿는 사람은 전부가 택함 받아 천국 가는 것이지 인간노력 준비는 전혀 해당이 없습니다. 여기까지는 모든 교회가 입장을 같이 합니다. 따라서 일반 교리만으로도 미련한 처녀는 불택자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잔치 문밖에 던져진 것이 문제였고 미련한 처녀들은 그 결과 때문에 지옥 갈 불택자로 취급이 된 것입니다.

③ 생전의 천국은 현실마다 주님 모신 때가 천국입니다.

죽었을 때, 그때에 천국을 가느냐 지옥을 가느냐는 문제로만 본문을 보았기 때문에 열 처녀의 마지막 장면, 문 안에 들어가지 못한 면을 지옥에 간 불택자라고 단순 분류를 해버린 것입니다.

우리에게 천국은 마지막 죽고 부활 후에 가는 천국은 두 말할 것 없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매 현실에서 주님 모신 천국으로 살 수도 있고 주님은 잊어버리고 지옥으로 살 수도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마지막 한번에 결정되는 천국은 택함과 불택에서 결정되고 인간이 개재될 여지가 전혀 없지만, 인간의 노력에 따라 주님을 모시고 신사참배를 통과한 이들은 그때의 신앙 그때 순종한 자기의 마음과 몸에 모든 움직임, 생애, 의의 활동은 전부가 주님 모신 천국이며, 준비 못한 성도들이 신사참배가 닥치자 바로 실패한 사람, 조금 견디다 실패한 사람, 많이 버티다 마지막에 실패한 사람 등 그 종류가 많은데 이들은 결국 미리 준비할 수 있었던 기름준비의 양에 따라 실패한 것입니다.

따라서 신사참배라는 한 시기, 한 사건을 두고만 말한다면 주님 모시고 그 밤중을 통과한 성도들이 한 종류 있었으니 그 사건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그들은 슬기로운 신앙의 인물이며, 주님을 결국 버리고 밤중에 사로잡혀 주님과 동행하는 그 생활을 하지 못한 사람들도 한 종류 있었으니 그 사건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그들은 미련한 신앙의 인물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④ 미련한 처녀를 오해한 분들의 잘못된 정죄

이 성구를 죽은 뒤 마지막 가는 천국과 지옥으로만 해석했던 한국교회는 위에 예를 든 신사참배 사건에서, 주님 모시고 고난을 통과한 출옥성도들은 천국 갈 성도이며, 신사참배를 찬성하고 앞장섰던 사람들은 불택자들이었다는 말이 한동안 출옥성도들을 따르는 교회에서는 상식처럼 된 때가 있었습니다. 신학적 상식이 있는 사람들은 준비하는 노력 때문에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는 것은 아닌 줄 알기 때문에 신사참배 실패자들은 당시까지 중생이 되지 않아서 실패했다고 해설을 붙였으니 이 모든 것이 중생으로 천국 갈 성도를 확정한 다음, 평생의 신앙에 따라 성화는 차이가 있고 이 면을 몰랐던 연고일 것입니다.

2.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1) 우선 마25장, 본문 자체를 다시 보겠습니다.

① 열 처녀 비유와 양과 염소 비유 사이에 우선 달란트 비유 가 있습니다.

주님께 받은 것으로 다섯을 남기고 둘을 남기고 하나를 남겼습니다. 바깥 어두운 데 내어 쫓겨난 이와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한 이와 다른 점은 노력이며 같은 점은 자본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자본을 적게 받은 것이 문제라면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 사이에도 문제가 됩니다. 불택자 지옥 갈 사람은 자본조차 받지를 못합니다. 노력해서 되고 말고 할 가능성도 주지 않은 것이 불택자입니다. 어두움에 쫓겨난 이와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한 이의 차이는 '악하고 게으른 행위'이며 '착하고 충성된 행위'입니다. 이 차이는 택자와 불택자의 차이가 아니고 믿는 사람끼리의 차이입니다.

신사참배를 예로 들어도 해당이 될 것이고, 오늘 우리 스스로 어제의 자기와 오늘의 자기를 비교해도 '착하고 충성된 때'가 한번씩 있어 보았을 것이고, 스스로 생각해도 '악하고 게으른 때'가 교차되는 것이 성도입니다. 불택자는 교차 자체가 없습니다. 따라서 느부갓네살왕의 우상숭배 명령에 불 속에서 기뻐 뛰놀며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한 영광의 성도들도 있었고, 그 순간 뻔히 죄가 되는 줄 알면서 죽기가 두려워 몸을 숙인 사람들도 있었으니 그들은 십자가 앞에서 배반했던 베드로처럼 '어두움'의 세상에 속했던 뼈아픈 실패의 사람들이라고 해야 됩니다.

마지막 대 심판에서 최후의 두 길은 택자가 가는 천국이며, 불택자가 가는 지옥입니다. 그러나 살아생전에도 주님 모신 천국생활의 기쁨을 가질 때가 있고 반대로 어두운 세상 속에 들어가서 살아버린 순간도 있는 것이 우리들이니 성경을 최후 최종 심판 하나만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매 현실마다 닥쳐지는 순간순간의 천국과 지옥이 교차되는 면이 있고 이런 지극히 작은 것에서부터 바로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 성경에는 휠。 많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②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두 종류로 나뉜 원인이었습니다.

이 성구가 분명히 6가지 선행을 예로 들었고 그런 선행은 지극히 작은 어린 소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라고 하여, 행위가 있고 없음에 따라 나눈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이 성구는 모든 사람이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큰 선을 행하고 반대로 소홀할 수 있는 작은 선을 버린 사람들에게 주시는 경고라고 해석하는 데에는 반대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다시 본다면, 행위로 인하여 구원이 결정되었다는 성구가 됩니다. 따라서 은혜로만 구원 얻는다는 우리 정통의 교회들은 '난해절'로 취급하고 그 해결은 '택한 사람, 중생된 성도가 진정 참 믿음으로 참 중생된 것이 사실이라면, 어린 소자를 무시하지 않는다.'고 풀고 있습니다. 이는 정통의 교리, 즉 은혜로만 구원 얻는 것이고 선행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는 교리는 바로 잡은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의 평생 신앙생활이 천차만별이며 그 차이는 천국에서 분명히 다르게 나타날 우리 모습이라는 이 성화 부분에 대한 교리 정립이 없기 때문에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린 소자를 무시하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이런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오늘 한국교회에는 참 믿음이 없고 중생되지 않은 사람들이 총회장으로부터 시골교회 장로님까지 몇 명이 해당되어야 할는지 모를 정도일 것입니다.

③ 그러나 양과 염소 비유에서는 '영영한 불'이라는 대목이 .있어 혼돈이 될 수 있습니다.

앞에 있는 열 처녀와 달란트 비유에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평소의 생활에서 자기라는 한 사람 안에 두 가지 종류의 신앙요소가 있으며 이 면을 교훈한 것으로 알고 열 처녀 비유에서는 준비하는 신앙을 마련하고 달란트 비유에서는 충성하는 신앙을 마련하라는 것으로 결론 지는 것이 어렵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양과 염소의 비유는 '영영한 불', '영벌에 . . . . 영생에 들어가리라'는 말씀이 있으니 이는 최후 대심판의 최종 판결이며 따라서 지옥 갈 사람은 결국 불택자일 것이고 천국 갈 사람이 택자라고 쉽게 단정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소자 하나를 영접하고 아니한 행위의 차이가 이곳에서도 문제가 됩니다.

2) 본문의 양과 염소는 천국 갈 택자에게 지옥에 버리고 가 야 될 부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① 죽은 후 우리는 천국의 깨끗한 존재, 성화된 우리입니다.

현재 구원론에서 다루는 '성화' 교리는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즉, 성도가 평생 거룩하게 되려고 노력하나 일부분에 그치게 되면 마지막 죽는 순간, 또는 죽은 즉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 성화로 깨끗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맞고 하나는 빠졌다고 해야겠습니다. 죽은 후 우리의 모습은 흠도 점도 없는 깨끗한 우리라는 점에서는 성화 교리의 설명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깨끗하게 된 것이 우리 속에 깨끗한 것만 남겨두고 더러운 것은 지옥에 버리기 때문에 우리 전체가 깨끗한 존재가 된 것인지? 아니면 우리 속에 평생에 묻혀놓고 만들어 놓았던 더러운 부분 죄로 만들어진 기능들까지를 깨끗하게 만들어서 우리가 깨끗한 존재가 된 것인지?

현재까지 성화 교리의 설명은 후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구별하고 이런 기준에서 생각해 본 후에 결정한 교리라고는 보여지지 않습니다. 더러운 것을 버려서 깨끗한 요소만 남게 되고 그런 우리로 부활을 시킨다고 믿는다면 교리서의 다른 부분에 필연적으로 설명할 부분들이 많아지게 되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을 보아 후자쪽으로 성화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② 구원은, 죄인을 구원했지 죄를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은 죄인을 구원한 것은 죄를 씻어 버리고 죄 없는 사람을 만든 것입니다. 죄 자체를 의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노름을 끊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런데 그가 주일학교 반사라면 같은 손 안에는 노름하는 죄짓는 버릇, 화투 잡는 죄짓는 기능이 들어있고 동시에 주일학생을 인도하고 불편한 사람을 돌봐 주는 의로운 행위, 의로운 기능도 들어 있습니다. 그가 죽고 다음 부활하게 된다면, 그 사람 속에 있는 의로운 기능은 그 사람의 육체가 부활할 때 그 육체 속에 평생 바로 산 기능이 함께 살아 영원히 천국에서 사용될 귀한 실력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 속에 있었던 화투장 잡는 기능은 지옥에 버리고 갈 죄의 요소입니다. 손 자체는 택함 받은 자기의 본체이기 때문에 부활의 몸으로 부활 될 것이지만 그 손으로 행했던 죄짓던 기능, 행위, 습관 등은 전부 세탁해서 완전히 지옥으로 보내지고 거기서 불타야 할 것들입니다.

한번 행한 것은 우리 눈에서는 없어졌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행동까지 기록되고 그 행동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아예 믿지 않았던 행동은 지옥 갈 심판으로 판정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기는 믿었으나 믿은 이후에 지은 죄는 어떻게 처리가 되겠습니까? 믿는 사람의 행동이니까 그 행동이 없어지겠습니까, 죄 지은 그 행동까지도 천국으로 가겠습니까? 아니면 예수 믿은 이후에도 죄를 지었다면 죄 지은 그 행동은 지옥으로 보내야겠습니까?

우리 사람은 사람 자체가 있으며 그 사람 자체가 움직인 행위가 있습니다. 그 행위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 안에는 정력이 있으며 그 정력이 움직인 뒤에는 기능으로 남아 있으며 그 기능의 다소를 가지고 우리는 실력이라고 합니다.

중생된 순간 영은 새 생명을 가집니다. 그러나 심신은 그대로입니다. 이 심신이 평생 영에게 붙들려 의롭게 움직이며 의의 기능 실력 요소를 갖춰나갈 수도 있고 이 심신이 평생 영을 부인하며 죄로 움직이며 죄의 기능 죄의 요소를 더 많이 갖춰나갈 수도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우리 자체에 붙은 실력, 요소, 기능, 이미 지나갔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존재했던 행위까지를 전부 지옥에 영원히 버리게 됩니다.

③ 이제 천국의 차이를 확연히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한번 구원, 단번 중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라면 아무리 못나고 못된 자녀라도 자녀는 자녀니 아버지 나라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자녀는 자녀라도 그 자녀의 실력에 따라 기능과 준비에 따라 천국에서 아버지가 맡기고 시킬 일은 각각 다릅니다. 그 차이는 두 가지 형태로 크게 나타납니다.

얼마나 옳은 일을 얼마나 많은 일을 바로 했느냐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가지는 옳은 일을 해야 될 한번 밖에 없는 현실, 순간으로 지나가는 매 현실 매 순간에 옳은 일 대신 죄를 지었다면 하나님의 뜻을 어겼다면 그 순간에 행한 행동, 그 행동의 반복으로 생긴 기능 실력들은 죽을 때 하나님께서 다 제거하여 부활할 때는 그 사람의 잘못된 요소들을 빼버리고 바로 된 요소들만 가지고 부활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천국의 차이입니다.

3) 따라서, 양과 염소는 성도가 지옥에 버리고 갈 것과 천국 에 가져가야 될 요소를 말합니다.

택자는 천국으로 불택자는 지옥으로 나누는 심판이 아닙니다. 택자는 양이고 불택자는 염소와 같아서 주님을 6가지로 박대했다고 한다면 많은 모순이 생깁니다. 물론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는 것은 첫째는 택자와 불택자입니다. 그다음 택자도 택자 안에 지옥으로 제거당해야 할 요소들 기능들 행위들이 있으며 택자가 천국으로 갈 때 가지고 가야 될 자기 안에 행위, 기능, 그런 요소들이 있습니다. 이 두 단계의 구분에서 본문은 대속을 입었는가, 벗었는가로 판결되지 않았고, 택함을 받았는가 택함을 받지 않았는가로 판결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택자 자체와 불택자 자체가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는 심판이 아니라 믿는 사람, 택자 한 사람 속에 양들과 그 사람 속에 염소들이 있어 한 인격 한 사람 속에 있는 두 종류의 생애, 두 종류의 기능들을 분리하고 심판하는 면을 말합니다.

택자는 도매금으로 택자이기 때문에 천국으로 그대로 가는 것이고 천국은 좋은 곳이라 차별이 없다고 생각해 온 것이 일반적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택자는 무조건 천국 가는 것은 대속이 있기 때문에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택자가 천국 갈 때 버리고 갈 소지품, 지옥에 떼놓고 갈 부패성, 특히 염소 같은 성깔 염소 같은 성질 염소 같은 침해성 염소 같은 난폭성은 분명히 있음을 알고 오늘에 우리 속에 양과 염소의 두 요소가 있어 나라는 주체 나라는 자기 자신이 어느 쪽을 길러 가며 어느 쪽을 선호하며 어느 쪽으로 행한 것이 많으냐는 것을 생각게 하고 양으로 살고 염소로 살지 말라는 말씀이며, 염소로 살지 않는 것은 큰 사건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전시성에 있지 않고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에 대한 작은 행위가 바로 되고 이것이 바로 되면 지극히 큰 의와 상도 마련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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