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손이 범죄 하면 잘라버리는 것에 대하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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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51
24. 질문 : 손이 범죄 하면 잘라버리는 것에 대하여
(마18:8-9) 2708
마태복음 18장 8-9절 말씀이 이해가 안 됩니다. 손이 범죄 하면 잘라버리면 손이 온전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답변 : 회개할 가능성이 없다면 잘라 버려야겠지요? 그것이 우리의 가치관입니다.
1. 여러 면으로 살필 수 있으나 한 가지 면만 생각해보겠습니다.
해석을 다 하자면 너무 범위가 많은 말씀입니다. 특히 기능구원이라는 교리 문제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여러 면으로 살펴보아야 하지만 이번 답변에서는 신앙을 반대하는 원수를 대할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겠는가 하는 면으로만 살펴보겠습니다.
신앙을 반대하는 원수는 크게 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안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잘못된 행동이 우리 신앙의 외부적입니다. 또 하나는 나 자신 속에서 범죄케 하는 지체들이니 이는 내부의 적입니다. 우리 신앙을 반대하고 가로막는 원수를 대할 때 어떤 자세와 대처를 해야 하겠는가 하는 문제로 이번 질문을 살펴보겠습니다.
2. 신앙을 반대하는 외부의 적, 곧 안 믿는 사람을 상대할 때 조심할 것은
① 인간의 존엄성은 흔히 절대 가치라고 세상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치관은 세상 일반 사람과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으로 말하자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사람이 되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이 세상에서 가장 존엄한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이것을 절대 가치라고 생각해서 어떤 사상도 정치도 사회체제도 사람의 존엄성을 해치거나 넘어서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종교도 사람을 위해서 존재해야 되지 종교 때문에 인권이 침해되면 안 된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치관은 세상 일반 사람과 다릅니다. 믿으면 천국이고 안 믿으면 지옥입니다. 구원에 유익하면 못 할 것이 없고 구원에 손해되는 된다면 우리는 무엇이든지 나쁜 것으로 판단합니다. 세상은 생물학적으로 인간이 되었으면 그 인간이 어떤 생각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가진다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되기 전에 신앙인이 되어야 하고, 만일 진정 신앙인이 되지 않고 그냥 세상을 끝마친다면 나지 않았으면 더 좋을 뻔했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② 안 믿는 사람을 믿는 사람과 꼭 같이 상대해 주는 이유는?
유대인들은 비유대인들을 짐승으로만 상대하지 같은 수준의 사람으로 보지를 않습니다. 중세기 천주교도 이슬람이나 다른 이교도들 또는 천주교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상대할 때 그들을 죽이는데 주저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안 믿는 사람이나 신앙을 반대하는 사람도 믿는 사람과 꼭 같이 상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인간이 가지는 존엄성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안 믿는 사람을 믿는 사람과 꼭 같이 상대하는 이유는, 그들 중에서 어떤 사람이 앞으로 믿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도 소망 중에 상대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신앙을 방해하는 경우는 믿는 사람이 가진 회개라는 특권이 있기 때문에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세상 인본주의 인문주의 민주주의자들은 인간 그 자체 때문에 인간을 존엄하게 보고 유대교나 천주교도들은 자기 조직 절대주의 때문에 외부인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신앙주의입니다. 신앙을 가질 가능성 때문에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③ 만일 믿을 가능성이 전혀 없고 죄만 지을 사람이 있다면, 우리의 자세는?
믿지 않는 사람은 비록 지옥 갈 것이 확정된 사람이라고 우리가 안다 해도 이 세상 살 동안 그들을 동정해야 하고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 것을 두고 미안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동시에 그들이 우리를 신앙으로 방해하면 그 방해하는 행위에는 가로막히지 않고 투쟁을 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에라도 악령에게 붙들린 그 행위와 싸우고 그 행위를 미워해야지 그 사람 자체까지를 미워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3. 신앙을 반대하는 내부의 적, 곧 자기 지체를 상대할 때 조 심할 것은
① 마18:8-9 말씀을 요약한다면
손이나 발이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성한 몸으로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낫고, 또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범죄 하는 눈 하나 없이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는 말씀입니다.
② 인간이 존엄하듯, 인체도 무조건 절대 가치성을 가졌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을 말할 때는 그 인간에게 속한 모든 인체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 사람의 손이 죄를 짓는다 해도 그 손이 사람의 인체 일부인 이상 그 손은 절대 가치성을 가졌다는 것이 세상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손이 신앙에 유익하면 천하에 제일 귀한 존재이지만, 만일 그 손이 죄를 짓는다면 비록 사람의 손이라도 돼지 족발만도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죄짓는 손은 돼지를 잡아 족발을 잘라 팔거나 먹는 것처럼 죄짓는 손은 잘라버리거나 망치로 뭉개버려도 되겠는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그 사람의 손이 언제 회개를 하여 옳은 일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현재 그 손이 죄를 지으면 그 손이 짓는 행동을 미워하고 막고 그 행동을 막기 위해서는 매로 그 손을 칠 수도 있지만 그 손 자체를 죄로 보거나 그 손 자체를 잘라 없애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회개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기 손은 자기의 소유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잘라버리는 것은 금지되지만 자기가 자기 손을 잘라버리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주신 생명과 그 생명이 가지고 있는 손 발 눈과 같은 도구들은 하나님께서 필요해서 주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 때문에 잘라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때문에 잘라버릴 수가 없습니다. 죽기 전에 회개하고 그 손이 어떤 손으로 사용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짓는 그 행동은 원수로 삼아 혹독하게 상대하고 조처를 취할 수 있으나 그 손을 잘라버림으로 그 손으로 하여금 두번 다시 바로 사용될 기회가 없어지는 것은 인간이 인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비록 자기 소유의 자기 몸이라도 그렇습니다.
요약하면, 자기 손이기 때문에 존엄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손을 사용해서 어떻게 할지 모르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손의 향후 사용을 완전히 결론 내는 심판자의 입장에서 조처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③ 만일 전혀 옳게 사용될 가능성이 없는 지체가 있다면, 우 리의 자세는?
사람은, 그 사람이 회개할 가능성이 없다 해도 동정만 할 수 있고 그래도 그 사람 자체는 사랑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이지만, 자기 지체의 경우는 다릅니다. 만일 자기 지체가 정말 옳게 사용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그 손의 임자인 자기가 잘라버려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입니다. 우리가 자기 지체에 대하여 어떤 가치관을 가질 것인지를 살펴보며 말할 수 있는 하나의 설명일 뿐입니다. 실은 자기 지체가 도저히 옳게 사용될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죄 중에 가장 무서운 4번째 죄인 절망의 죄가 되는 것이고, 그 절망의 죄 때문에 그 지체를 잘라버린다면 이는 부분적으로 자살과 같은 행위입니다. 그 사람 자체가 절망에 빠질 때 그 사람 자체를 그 사람 자신이 죽이는 것을 자살이라고 합니다. 자살은 살인입니다. 그렇다면 자해도 역시 남을 때리고 남의 팔을 잘라버린 상해와 같은 죄가 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 인체는 우리에게 관리권은 주셨지만 소유권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4. 그렇다면, 손발을 잘라버리고 눈을 빼버리라는 말씀은?
① 손발을 잘라버리는 말씀이 아니고 그 손발로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루 70번씩 7번이라도 회개할 수 있는 회개라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우리 자체도 회개할 수 있지만, 우리 자체에게 소속된 인체를 부분별로 나누어 생각해 본다면 우리 지체는 그 어떤 지체라 해도 회개할 수 있습니다. 소매치기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의 그 손버릇도 여전히 죽기 전에 회개할 수 있는 손입니다.
손발을 잘라버리라는 말씀은 더 이상 회개의 가능성도 없으니 없애라는 말이고 이제는 개할 리도 없다는 말씀이 됩니다. 믿는 사람의 모든 지체가 전부 회개할 가능성이 없어 다 잘라버려야 한다면, 지체 중에 하나 둘을 잘라버리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 자살을 해야 끝날 일입니다. 따라서 이 명령은 지체를 잘라버리라는 명령이 아니라, 잘라버려서 안되는 것을 자르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을 잘라버려야 할 때 발생할 모든 댓가를 생각하고 자르지 않아야 할 손이 되도록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② 분명한 것은, 만일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손발이 있다면, 잘라버렸던 것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앞날에 대한 것은 단 1초 순간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범죄 하는 우리 지체를 달고 사는 것이지, 만일 정말 우리가 우리 미래를 다 알게 되고 그 결과 죽는 순간까지 전혀 옳은 일을 하는 손발로 돌아설 수 없는 손발이라면 그 손발을 잘라버림으로 전신이 함께 범죄자가 되는 일을 피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참고로, 손이 소매치기를 했지만 그 손만 감옥에 가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 자체가 소매치기가 되어 처벌받고 감옥에 가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눈과 입과 손만 선악과 먹은 죄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아담이라는 사람 자체가 죄인으로 지옥을 가게 되었습니다. 차라리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때 사용된 지체들을 잘라내고 병신으로 에덴동산에 사는 것이 낫다는 결론입니다.
③ 교리적으로 참고하실 것은
이 성구는 가장 대표적인 건설구원 관련 성구입니다. 믿고 천국 가게 된 우리는 우리 지체의 실력과 그 성화의 정도가 다 다릅니다. 그 다른 차이가 바로 그 사람의 각 지체가 죄를 얼마나 짓고 의를 얼마나 행했는지 차이입니다.
이 본문에서 눈이 범죄 하면 전신이 지옥 불에 던져 운다는 이 성구는 기본구원적으로는 아담의 경우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기본구원적으로 아담의 눈이 없었거나 손이 없었거나 입이 닫혀 외부 음식을 먹을 수 없어 링거액을 맞고 사는 식물인간이나 사지마비 환자였더라면 지체 중에 여러 부분이 고장이 나서 불편은 했겠으나 지옥은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구를 기본구원으로만 생각한다면, 이 성구는 이제 믿는 사람이 된 우리에게는 사실 전혀 상관이 없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중생이 되었기 때문에 어떤 부분을 없애거나 말거나에 상관없이 천국을 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성구는 믿는 우리에게 주신 성구입니다.
이 성구는 믿는 우리에게 주신 성구인데 이 성구에서 한 지체로 인하여 전신이 지옥 불에 던지우게 되는 것이 낫겠느냐 아니면 그 한 지체만 잘라내고 전신이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낫겠느냐고 결정하라는 것은 이 성구가 바로 건설구원에 한정된 성구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지체로 인하여 전신이 지옥 불에 던지운다 할 때 그 전신은 우리 심신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죄를 짓는 그 순간에 해당된 전신의 기능을 말합니다.
마치 아담이 기본구원적으로 선악과 하나 먹어 죽을 때 한 두 지체의 행동 때문에 전신이 지옥 불에 던져지게 되었던 것처럼, 건설구원도 매 현실에서 한 지체나 한 부분이 범죄를 하게 되면 그 순간 그 지체가 범죄 할 때 그 전신의 전 기능은 전부 쓰지 못할 폐품이 되어 버립니다. 이 부분은 기능구원에서 폭넓게 살펴봐야 하기 때문에 이번 질문에서는 서론만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④ 그렇다면, 현실에서 범죄의 유혹을 받게 될 때에 어떻게 하라는 말씀인가?
한 기능의 범죄로 그 순간에 관련된 전신의 기능 전체가 다 지옥 불에 던져지게 될 수도 있고, 그 한 기능을 없애버려서 전신의 기능이 영생으로 들어갈 의의 기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몸 자체는 죽는 날 까지 매 현실마다 교체되는 기능에게 사용될 공통도구이므로 한 현실에서 한번 통과할 그 기능 문제 때문에 그 손발 자체를 잘라버리는 것은 다음 기회에 다른 기능들의 가능성을 폐쇄하는 것이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 현실에서 손발과 같은 지체가 아니라 그 현실에서 한 기능 그 자체만을 포기하고 그 대신 전체 기능을 살릴 수 있다면 그때는 얼마든지 그 한 기능은 포기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마18:8-9) 2708
마태복음 18장 8-9절 말씀이 이해가 안 됩니다. 손이 범죄 하면 잘라버리면 손이 온전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답변 : 회개할 가능성이 없다면 잘라 버려야겠지요? 그것이 우리의 가치관입니다.
1. 여러 면으로 살필 수 있으나 한 가지 면만 생각해보겠습니다.
해석을 다 하자면 너무 범위가 많은 말씀입니다. 특히 기능구원이라는 교리 문제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여러 면으로 살펴보아야 하지만 이번 답변에서는 신앙을 반대하는 원수를 대할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겠는가 하는 면으로만 살펴보겠습니다.
신앙을 반대하는 원수는 크게 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안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잘못된 행동이 우리 신앙의 외부적입니다. 또 하나는 나 자신 속에서 범죄케 하는 지체들이니 이는 내부의 적입니다. 우리 신앙을 반대하고 가로막는 원수를 대할 때 어떤 자세와 대처를 해야 하겠는가 하는 문제로 이번 질문을 살펴보겠습니다.
2. 신앙을 반대하는 외부의 적, 곧 안 믿는 사람을 상대할 때 조심할 것은
① 인간의 존엄성은 흔히 절대 가치라고 세상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치관은 세상 일반 사람과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으로 말하자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사람이 되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이 세상에서 가장 존엄한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이것을 절대 가치라고 생각해서 어떤 사상도 정치도 사회체제도 사람의 존엄성을 해치거나 넘어서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종교도 사람을 위해서 존재해야 되지 종교 때문에 인권이 침해되면 안 된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치관은 세상 일반 사람과 다릅니다. 믿으면 천국이고 안 믿으면 지옥입니다. 구원에 유익하면 못 할 것이 없고 구원에 손해되는 된다면 우리는 무엇이든지 나쁜 것으로 판단합니다. 세상은 생물학적으로 인간이 되었으면 그 인간이 어떤 생각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가진다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되기 전에 신앙인이 되어야 하고, 만일 진정 신앙인이 되지 않고 그냥 세상을 끝마친다면 나지 않았으면 더 좋을 뻔했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② 안 믿는 사람을 믿는 사람과 꼭 같이 상대해 주는 이유는?
유대인들은 비유대인들을 짐승으로만 상대하지 같은 수준의 사람으로 보지를 않습니다. 중세기 천주교도 이슬람이나 다른 이교도들 또는 천주교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상대할 때 그들을 죽이는데 주저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안 믿는 사람이나 신앙을 반대하는 사람도 믿는 사람과 꼭 같이 상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인간이 가지는 존엄성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안 믿는 사람을 믿는 사람과 꼭 같이 상대하는 이유는, 그들 중에서 어떤 사람이 앞으로 믿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도 소망 중에 상대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신앙을 방해하는 경우는 믿는 사람이 가진 회개라는 특권이 있기 때문에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세상 인본주의 인문주의 민주주의자들은 인간 그 자체 때문에 인간을 존엄하게 보고 유대교나 천주교도들은 자기 조직 절대주의 때문에 외부인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신앙주의입니다. 신앙을 가질 가능성 때문에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③ 만일 믿을 가능성이 전혀 없고 죄만 지을 사람이 있다면, 우리의 자세는?
믿지 않는 사람은 비록 지옥 갈 것이 확정된 사람이라고 우리가 안다 해도 이 세상 살 동안 그들을 동정해야 하고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 것을 두고 미안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동시에 그들이 우리를 신앙으로 방해하면 그 방해하는 행위에는 가로막히지 않고 투쟁을 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에라도 악령에게 붙들린 그 행위와 싸우고 그 행위를 미워해야지 그 사람 자체까지를 미워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3. 신앙을 반대하는 내부의 적, 곧 자기 지체를 상대할 때 조 심할 것은
① 마18:8-9 말씀을 요약한다면
손이나 발이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성한 몸으로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낫고, 또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범죄 하는 눈 하나 없이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는 말씀입니다.
② 인간이 존엄하듯, 인체도 무조건 절대 가치성을 가졌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을 말할 때는 그 인간에게 속한 모든 인체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 사람의 손이 죄를 짓는다 해도 그 손이 사람의 인체 일부인 이상 그 손은 절대 가치성을 가졌다는 것이 세상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손이 신앙에 유익하면 천하에 제일 귀한 존재이지만, 만일 그 손이 죄를 짓는다면 비록 사람의 손이라도 돼지 족발만도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죄짓는 손은 돼지를 잡아 족발을 잘라 팔거나 먹는 것처럼 죄짓는 손은 잘라버리거나 망치로 뭉개버려도 되겠는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그 사람의 손이 언제 회개를 하여 옳은 일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현재 그 손이 죄를 지으면 그 손이 짓는 행동을 미워하고 막고 그 행동을 막기 위해서는 매로 그 손을 칠 수도 있지만 그 손 자체를 죄로 보거나 그 손 자체를 잘라 없애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회개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기 손은 자기의 소유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잘라버리는 것은 금지되지만 자기가 자기 손을 잘라버리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주신 생명과 그 생명이 가지고 있는 손 발 눈과 같은 도구들은 하나님께서 필요해서 주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 때문에 잘라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때문에 잘라버릴 수가 없습니다. 죽기 전에 회개하고 그 손이 어떤 손으로 사용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짓는 그 행동은 원수로 삼아 혹독하게 상대하고 조처를 취할 수 있으나 그 손을 잘라버림으로 그 손으로 하여금 두번 다시 바로 사용될 기회가 없어지는 것은 인간이 인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비록 자기 소유의 자기 몸이라도 그렇습니다.
요약하면, 자기 손이기 때문에 존엄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손을 사용해서 어떻게 할지 모르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손의 향후 사용을 완전히 결론 내는 심판자의 입장에서 조처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③ 만일 전혀 옳게 사용될 가능성이 없는 지체가 있다면, 우 리의 자세는?
사람은, 그 사람이 회개할 가능성이 없다 해도 동정만 할 수 있고 그래도 그 사람 자체는 사랑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이지만, 자기 지체의 경우는 다릅니다. 만일 자기 지체가 정말 옳게 사용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그 손의 임자인 자기가 잘라버려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입니다. 우리가 자기 지체에 대하여 어떤 가치관을 가질 것인지를 살펴보며 말할 수 있는 하나의 설명일 뿐입니다. 실은 자기 지체가 도저히 옳게 사용될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죄 중에 가장 무서운 4번째 죄인 절망의 죄가 되는 것이고, 그 절망의 죄 때문에 그 지체를 잘라버린다면 이는 부분적으로 자살과 같은 행위입니다. 그 사람 자체가 절망에 빠질 때 그 사람 자체를 그 사람 자신이 죽이는 것을 자살이라고 합니다. 자살은 살인입니다. 그렇다면 자해도 역시 남을 때리고 남의 팔을 잘라버린 상해와 같은 죄가 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 인체는 우리에게 관리권은 주셨지만 소유권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4. 그렇다면, 손발을 잘라버리고 눈을 빼버리라는 말씀은?
① 손발을 잘라버리는 말씀이 아니고 그 손발로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루 70번씩 7번이라도 회개할 수 있는 회개라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우리 자체도 회개할 수 있지만, 우리 자체에게 소속된 인체를 부분별로 나누어 생각해 본다면 우리 지체는 그 어떤 지체라 해도 회개할 수 있습니다. 소매치기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의 그 손버릇도 여전히 죽기 전에 회개할 수 있는 손입니다.
손발을 잘라버리라는 말씀은 더 이상 회개의 가능성도 없으니 없애라는 말이고 이제는 개할 리도 없다는 말씀이 됩니다. 믿는 사람의 모든 지체가 전부 회개할 가능성이 없어 다 잘라버려야 한다면, 지체 중에 하나 둘을 잘라버리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 자살을 해야 끝날 일입니다. 따라서 이 명령은 지체를 잘라버리라는 명령이 아니라, 잘라버려서 안되는 것을 자르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을 잘라버려야 할 때 발생할 모든 댓가를 생각하고 자르지 않아야 할 손이 되도록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② 분명한 것은, 만일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손발이 있다면, 잘라버렸던 것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앞날에 대한 것은 단 1초 순간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범죄 하는 우리 지체를 달고 사는 것이지, 만일 정말 우리가 우리 미래를 다 알게 되고 그 결과 죽는 순간까지 전혀 옳은 일을 하는 손발로 돌아설 수 없는 손발이라면 그 손발을 잘라버림으로 전신이 함께 범죄자가 되는 일을 피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참고로, 손이 소매치기를 했지만 그 손만 감옥에 가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 자체가 소매치기가 되어 처벌받고 감옥에 가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눈과 입과 손만 선악과 먹은 죄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아담이라는 사람 자체가 죄인으로 지옥을 가게 되었습니다. 차라리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때 사용된 지체들을 잘라내고 병신으로 에덴동산에 사는 것이 낫다는 결론입니다.
③ 교리적으로 참고하실 것은
이 성구는 가장 대표적인 건설구원 관련 성구입니다. 믿고 천국 가게 된 우리는 우리 지체의 실력과 그 성화의 정도가 다 다릅니다. 그 다른 차이가 바로 그 사람의 각 지체가 죄를 얼마나 짓고 의를 얼마나 행했는지 차이입니다.
이 본문에서 눈이 범죄 하면 전신이 지옥 불에 던져 운다는 이 성구는 기본구원적으로는 아담의 경우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기본구원적으로 아담의 눈이 없었거나 손이 없었거나 입이 닫혀 외부 음식을 먹을 수 없어 링거액을 맞고 사는 식물인간이나 사지마비 환자였더라면 지체 중에 여러 부분이 고장이 나서 불편은 했겠으나 지옥은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구를 기본구원으로만 생각한다면, 이 성구는 이제 믿는 사람이 된 우리에게는 사실 전혀 상관이 없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중생이 되었기 때문에 어떤 부분을 없애거나 말거나에 상관없이 천국을 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성구는 믿는 우리에게 주신 성구입니다.
이 성구는 믿는 우리에게 주신 성구인데 이 성구에서 한 지체로 인하여 전신이 지옥 불에 던지우게 되는 것이 낫겠느냐 아니면 그 한 지체만 잘라내고 전신이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낫겠느냐고 결정하라는 것은 이 성구가 바로 건설구원에 한정된 성구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지체로 인하여 전신이 지옥 불에 던지운다 할 때 그 전신은 우리 심신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죄를 짓는 그 순간에 해당된 전신의 기능을 말합니다.
마치 아담이 기본구원적으로 선악과 하나 먹어 죽을 때 한 두 지체의 행동 때문에 전신이 지옥 불에 던져지게 되었던 것처럼, 건설구원도 매 현실에서 한 지체나 한 부분이 범죄를 하게 되면 그 순간 그 지체가 범죄 할 때 그 전신의 전 기능은 전부 쓰지 못할 폐품이 되어 버립니다. 이 부분은 기능구원에서 폭넓게 살펴봐야 하기 때문에 이번 질문에서는 서론만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④ 그렇다면, 현실에서 범죄의 유혹을 받게 될 때에 어떻게 하라는 말씀인가?
한 기능의 범죄로 그 순간에 관련된 전신의 기능 전체가 다 지옥 불에 던져지게 될 수도 있고, 그 한 기능을 없애버려서 전신의 기능이 영생으로 들어갈 의의 기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몸 자체는 죽는 날 까지 매 현실마다 교체되는 기능에게 사용될 공통도구이므로 한 현실에서 한번 통과할 그 기능 문제 때문에 그 손발 자체를 잘라버리는 것은 다음 기회에 다른 기능들의 가능성을 폐쇄하는 것이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 현실에서 손발과 같은 지체가 아니라 그 현실에서 한 기능 그 자체만을 포기하고 그 대신 전체 기능을 살릴 수 있다면 그때는 얼마든지 그 한 기능은 포기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