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범죄 한다고 정말 손을 잘라버려야 하는지?…
서기
성경
0
24
2023.03.13 21:51
25. 질문 : 범죄 한다고 정말 손을 잘라버려야 하는지? 4058
구원론논쟁을 하다가 상대방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만 한다면 마가복음10장에 손이 죄를 지으면 손을 잘라버리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우리 모두는 손을 잘라버리고 눈을 빼버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일5:18 하나님께로 난자마다 범죄치 않는다는 말씀도 그렇게 딱딱하게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지요. 성경에 그런 구절들이 많은 것 같은데.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면 너무 심한 말씀이 손을 자르고 눈을 빼버리라는 말씀처럼..
답변 : 성경 해석법 - 마18:8로 예를 든다면
1. 성경의 문자적 해석과 교훈적 해석
① 성경 해석에 관련된 논란
성경은 그 기록된 글자 그대로 해석해야 하느냐, 아니면 성경 기록을 참고하여 그런 정신과 사상으로 살도록 노력하라는 것이지 그 말씀 그대로 다 살 수는 없고 그 말씀 그대로 실제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 깨달음입니다.
구하면 이루어 주신다는 것을 문자로 해석하면 과연 오늘 믿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구한 대로 다 받아 가지고 사느냐는 반론이 나옵니다. 범죄 한 지체를 없애라 한다고 손발을 다 찍어버린 사람이 있느냐는 반론도 많습니다. 이렇게 하나 둘 허물어지다 보니까 오늘은 성경 말씀이 하나의 선언적 규정이 되고 하나의 모범 사례 정도로 사용되고 있지, 그 말씀 그대로 다 살기 위해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는 강단은 거의 없습니다.
② 문자적 해석의 오용
여호와의 증인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비판할 때 늘 성경 어디에 '삼위일체'라는 글자가 있느냐고 합니다. 그리고 '십이만 이천명'이라는 구원받는 숫자를 주장할 때는 성경에 명문이 되어 있지 않느냐고 강변을 합니다. 순복음 교인들은 귀신을 쫓아내며 방언을 한다는 성구는 문자 그대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침례교는 '침례'에 관하여는 문자에 충실합니다. 장로교는 '장로'라는 단어에 대하여서는 그렇게 엄격합니다. 모두들 자기에게 유리하면 문자해석을 하고 불리하면 '말하자면 그런 뜻'이라고 슬쩍 넘어가고 있습니다.
③ 성경 전체를 면밀히 살펴보면, 성경은 문자적 해석이 맞습 니다.
성경의 일부만 살펴본 사람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살펴보고 잘 따져보면 성경은 일점일획도 가감 없는 진리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그 말씀 그대로 다 살 수 있는 말씀이고 또 그렇게 살아야만 할 말씀임을 확정지을 수 있습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라고 한 이상 구하면 주신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단정해야 합니다. 산이라도 뽑아다가 바다에 던지우게 한다는 것도 문자적으로 단정해야 합니다. 다만 산이 뽑혀 바다에 던지우게 되는 것은 성도들이 통성기도 시간에 고함을 질러 기도하면 그렇게 된다고 했는지 아니면 겨자씨 믿음을 가지면 그렇게 된다고 했는지 성경 전체를 통해 기도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쳤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④ 성경은 애매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 기억할 것은, 성경은 여호와의 증인의 출몰 하나를 막기 위해 기록해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 하나를 막는 데에는 애매해 보이는 곳이 많고 불편한점이 한 두 곳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좀 시간이 걸려도 잘 살펴보시면 여호와의 증인들의 잘못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성경을 근거로 배척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들의 잘못을 판단하는데 늦어지고 불편을 느끼는 것은 세월이 지나가고 보면 내가 성경을 너무 몰라서 그리 된 것입니다.
성경 성구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느냐 아니면 비유로 해석해서 그 성구가 가르치는 교훈은 듣고 그 비유는 과장이나 아니면 일회용품으로 버려야 하느냐는 문제는 성경 전체를 통해 살펴보면 그렇게 어려울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세월 속에 천천히 파악하시라고 권하는 것은 신학교 과정에서 쓸데없는 공부에 투자할 시간과 노력이 너무 크기 때문에 정작 더 중요한 말씀 연구는 할 시간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질문하신 마18:8의 죄짓는 손발을 찍어버리라는 성구로 예 를 든다면
마18:8 - 성구 소개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한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① '나으니라'는 말씀이 본문에 있습니다.
손발로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때마다 손발을 무조건 잘라 버려야 할 것인가? 이 성구를 문자대로 해석한다면 믿는 사람은 손발이 붙어 있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18:8에 '나으니라'는 말씀이 마지막에 나오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더 낫겠느냐고 이 본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 나은 방향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손발을 가지고 죄를 짓고, 그 죄 때문에 영원히 지옥 불에 던지우게 되는 면을 놓고 선택을 해야 합니다. 손발 없는 불구자로 불편하게 살겠는가, 손발로 죄를 지어 영원히 불 가운데 고통을 받아야겠는가? 선택의 문제입니다.
② 롬6:13이 손발의 사용 가치 면을 두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롬6:13에서는 우리 육체는 죄를 지을 때 죄의 병기도 될 수 있고 하나님께 드리면 의의 병기도 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에 달린 손과 발은 죄로 사용될 수도 있고 의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믿는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로 사용되는 갈림길에서 죄의 병기로 사용치 말고 의의 병기로 사용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18:8-9은 롬6:13이 명확하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만일 더 이상 의로 사용될 일이 없고 죄로만 사용될 손발이라면 찍어버리는 것이 '9절'에서 말씀한 대로 '나으니라'입니다. 이 성구를 과장이라거나 그 문구 그대로 실제 적용하면 말이 되느냐는 분들이 너무 성경을 무시했습니다.
③ 혹시, 죄로 사용될 양이 의로 사용될 경우보다 훨씬 많다면?
노름에 습관을 들여 그 사람의 손은 앞으로도 늘 노름에 사용하는 죄의 병기가 될 것이고, 그의 손이 의롭게 사용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찍어 내버리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마18:8의 말씀에서 '나으니라'라고 말씀한 성구에 해당되어 찍어버릴 손이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는 미래를 두고 짐작은 할 수 있으나 단정을 하는 것은 엄금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이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으므로 죄짓는 사람에게 멸망이 닥칠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런 죄인은 회개할 리가 없다고 말한다면? 예측이나 짐작은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단정은 오직 하나님만 할 수 있습니다. 성경 기록을 통해서 가르쳐 주시든 자연계시 이치를 통해 알려 주시든 아니면 직접 말씀해 주시든, 하나님께서 확정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 미래는 어찌 될지 모릅니다.
바울이 스데반을 죽이던 자리에 있을 때, 그가 회개하여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이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억할 성구가 있습니다. 앞선 자가 뒤 서고, 뒷 선 자가 앞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인생의 걸어가는 길을 회개와 범죄로 뒤섞어 놓으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그 사람의 손발이 아무리 범죄를 많이 행하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으로 예상 된다 해도, 오늘 그의 손발을 찍어버리면 다시는 그 손발에게 의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버린 것인데, 그의 손발은 지옥 불에 들어가게 하는 죄의 병기로만 사용될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조심할 문제입니다. 만일, 자기 손발이 꼭 죄의 병기로만 사용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알려 주신다면 잘라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확정적으로 알려 주지 않았다면 의의 병기로 사용하도록 노력하고 투쟁을 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이 문제는 비단 손발 문제뿐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두고 다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 무엇이든지 옳고 바르게 사용할 가능성이 있고 소망이 있으며 그런 생활을 만들려고 평생 자기로 더불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전혀 주를 위해서 전혀 사용될 리가 없고 오히려 자타의 구원에 방해만 된다고 단정하는 것이 있으면 우리는 버리는 데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확정적으로 부르실 때 부모와 형제와 처자와 전토를 아낌없이 내던지고 주님을 따라 나서는 것이 신앙 출발의 기본입니다. 목회자가 버릴 수 있는 것과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제자가 버릴 수 있는 것과 오늘 세상 한가운데서 살고 있는 교인이 단정하고 버릴 것은 조금씩 다릅니다. 심지어 자기 수족이라 해도 주님이 꼭 원하시고, 다른 길이 없고, 그것이 죄로만 사용된다면 우리는 사정없이 버릴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며 기본입니다.
우리는 전도할 때도 상대방이 아무리 복음을 거부해도 저 사람이 택자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전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렇게 강퍅한 사람은 불택자일 것이라는 생각은 생각조차 해서 안 되는 우리들입니다.
④ 마18:22에서 바로 뒤이어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18:8에서 범죄 하는 손발을 찍어버리는 것이 낫다 하신 다음에 잃은 양 한 마리를 비유로 주시면서 우리 안에 있는 99마리보다 회개하고 돌이키는 1마리를 더 기뻐하신다고 했고, 형제가 하루에 70번씩 7번을 범죄 해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하루에 490번이라도 잘라 버려야 할 손발이지만, 491번째 또 다시 그 손발을 바로 사용하려고 노력하고 자기와 내부투쟁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투쟁이 죽는 날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한 마리 잃은 양은 교회를 다녀야 하는데 다니지 않는 사람도 해당되고 또 우리 속에 단점도 해당 됩니다. 타락한 부분에 대하여는 '제거'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고 '고쳐' 사용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죄로만 사용되고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 단정된다면 우리는 무엇이든지 버리고 제거하고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심지어 손발과 눈이라도 없앨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는 그 부분을 없애버리고 불편하게 사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이고, 그보다 더욱 어려운 일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손발을 죄짓지 않고 옳은 일에 쓰이도록 바로 잡는 것은 훨씬 어렵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고난도의 훈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골치 아픈 자식을 쫓아내버리고 두번 다시 그 얼굴을 보지 않는 것은 보다 쉬운 일입니다. 그런 자식을 집안에서 매일 얼굴을 보면서 바로 고쳐 사람을 만들려고 노력한다면 그 수고는 비교 할 수 없이 많습니다. 마18:8 말씀이 골치 아픈 자식은 쫓아내고, 악처 노릇하는 아내와는 말하자면 이혼을 해버리고, 죄짓는 손발은 잘라버리고, 강퍅한 교인은 출교시키고, 말썽 부리는 목회자는 단번에 축출을 해버리는 '단칼'의 성구로 알았다면 오해입니다.
3. 따라서, 마18:8 말씀은
비유로 말하자면 그렇다고 적어 주신 것이 아니고 문자로 해석하여 죄짓는 부분은 제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읽어야 합니다. 만일 다음에 의를 행할 가능성이 있어도 지금 당장 제거라라면 우리는 제거해야 합니다. 찍어버린 사람은 의인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죄입니다.
본문은, 손발 없는 불편이 손발로 지은 죄보다 낫다는 것을 말씀하며 우리에게 죄의 중량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만 있고 우리에게 현재만 있고 우리에게 그 손발로 죄짓는 딱 한 길만 있다면 이 성구에 의하여 바로 잘라내야 하는데, 다른 말씀에서 돌이켜 490번이라도 또 그것을 살려 내려고 있는 힘을 다하라 하신 말씀이 있어 잘라 내지를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