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13장: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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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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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51
27. 질문 :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눅13장:22-30) 2706
백영희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검색해 보아도 이 부분에 대한 말씀은 없는데요. 이 말씀도 건설구원의 측면에서 이해해야 합니까?
건설구원을 말씀하는 본문으로 보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답변 : 건설구원에 중점을 둔 성구입니다.
1. 구원 관련 성구의 내용을 분류해 보면
성구가 기본구원에만 국한되는 경우는 대단히 적습니다. 구원에 관계되는 성구는 대개 건설구원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기본구원에 대한 면도 일부 가르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2. 말씀하신 눅13:23-30은 대표적인 건설구원 성구입니다. 물 론 기본구원 면을 일부 포함합니다.
눅13:30 본문을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눅13:23-24
-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
사람이 들어가고 싶은데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다는 말씀에서 혹시 이 성구를 기본구원으로 보셨는가 합니다. 그러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신 말씀을 통해 이 말씀은 우리 믿는 사람에게 행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들어갈 수 있도록 해놓았으니까 너희들은 감사하고 받기나 하면 된다. 그리 알고 있거라 하는 말씀이면 기본구원에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힘쓰라'고 행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행동을 요구하는 말씀은 전부가 건설구원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말씀을 조금 양보하면 아주 쉽게 믿을 수 있는 길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려 하면 많은 어려움과 희생이 따르는 좁은 길도 있습니다. 이런 두 길을 놓고 우리는 사실 항상 선택의 순간을 맞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남모르는 갈등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습니다.
크게 말하면, 신사참배를 하느냐 마느냐는 문제부터 주일날 시험을 봐야 하느냐 마느냐는 문제까지 또 건축연보 액수를 결정하는 것부터 주일 연보 액수를 정하는 것까지, 우리에게는 항상 신앙을 조금 양보하여 쉽게 믿는 길과 양심의 가책을 따라 최선을 다해 믿는 길을 두고 망설임이 있습니다.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
이 말씀은 천국을 들어가기 위해 이 종교 저 종교를 돌아다니고 또 나무 밑에서 도를 닦고 별별 일을 다해보지만 결국 예수 믿는 이 도를 찾는 사람의 숫자는 적다는 기본구원의 이치로 참고해도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가르치는 중심은, 말씀 그대로 믿고 사는 생활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그렇게 믿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최선을 다해 그렇게 살아보려는 사람은 있으나 실제 그렇게 되는 경우는 적다는 말씀입니다.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하면 현실에서 손해보고 불편한 것이 너무 많아져서 결국 포기하고 마는 경우가 많으니라는 말씀입니다.
② 눅13:25-27
-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
이 말씀은 구원이 세상에서 한번만 주어지는 것이고 만일 세상을 떠나게 되면 두번 다시 천국문은 열리지 않는다는 점을 확정하고 있습니다. 이 면 때문에 기본구원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건설구원도 이 세상에서 해당되는 그 현실에서 단 한번만 문을 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뿐입니다. 따라서 이 천국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기본구원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좁은 소견입니다.
- 그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
예수님 당시에도 또 지금도 외형적으로는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도 많고 또 예수님 말씀을 배우는 사람도 많습니다. 예배 시간을 잘 참석하는 사람의 숫자가 이 나라에는 지금 차고 넘치고 있는데 이들이 지금 주 앞에서 먹고 마시는 분들입니다.
이렇게 잘 믿는다고 표시가 현저하게 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하실 경우가 허다할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 그럴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시골에서 주야로 기도하고 교회 할머니로 통하는 분들 중에서 그 몸은 교회를 다니지만 그 내용은 유교 공자 노선에서 신앙 생활하는 분들이 거의 전부입니다. 교회 와서 밤새도록 기도하는 것이 자기 '장남' 위한 기도입니다. 장남을 유별나게 챙기는 이유는 가문을 이어가는 공자의 유교 사상이 그 속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님 앞에 섰을 때, 밤낮 성전에서 기도하던 저를 모르겠나이까 할 때, 주님은 그때 누가 예배당에 와서 공자 사상대로 무슨 목적을 이루려고 나에게 열심히 기도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그 기도는 어디로서 왔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실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그 기도를 한 사람이 비록 유교사상에서 시작된 목적을 이루려고 기독교를 사용한 것이지만 그 사람 자체가 천국을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건설구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북한 정권이 무너지지 않도록 밤낮 기도하는 진보주의 목회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도 천국에서 주님을 만날 때 주님께서 그때 기도할 때 사용한 기능과 행위는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천국 문을 통과하지 못한다고 막을 것입니다. 누구에게서 배운 것이고 어디서 나왔는지 주님이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신 것은 그 출처를 몰라서 모른다는 말씀이 아니고 주님이 가르치지 않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나온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선입관으로 읽으면, 우리 사람 자체를 주님이 안다 모른다고 하시는 것 같지만 건설구원적으로는 우리 믿는 사람의 행동과 사상 중에서 어떤 것은 주님이 아시고 가르친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주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도 있습니다.
③ 눅13:28
-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
이 성구 역시 기본구원만 알던 시대의 선입관으로만 본다면, 사람 하나 하나를 단위로 천국에 들어가고 또 지옥으로 가게 된 갈림길로 보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 전체를 두고 하신 말씀이 어떤 경우는 한 사람 전체를 두고 하신 말씀일 때도 있고 어떤 때는 그 사람에게 속한 한 요소를 가르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기록 범위는 최소한으로 축소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는 이름이 그 한 사람 사람의 개인 이름과 개인 단위의 구원이지만 동시에 아브라함 적인 신앙행위, 이삭과 같은 신앙 요소를 말씀하기도 합니다.
④ 눅13:29-30
-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
질문의 마지막 부분인 이 구절을 유심히 살피시면, 이 땅 위의 각지 각처에서 믿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올 것인데 그들의 신앙이 제각각 다를 것을 말씀했습니다.
29절에서 말씀한 천하의 성도들은 천국에 들어온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 수준과 방향은 다 다를 것인데 어떤 사람은 앞서 믿었으나 그 마지막 결산을 할 때 뒷선 사람으로 처진 경우도 있을 것이고, 또 그 반대 경우도 있을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잘 믿을 때도 있고 잘못 믿을 때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처음 잘 믿었다고 항상 잘 믿는 사람으로 천국의 앞자리에 앉을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교만하지 말라는 말씀일 수도 있고, 신앙은 끝까지 인내로 중단 없이 나아갈 길임을 말씀하기도 합니다.
이번 질문에서 이 성구가 중요한 것은 천국 들어간 사람들끼리 비교를 할 때 비교할 부분이 한 두 부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차이는 바로 24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잘 믿으려고 노력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결과적으로 고난을 이기고 잘 믿은 사람은 많지 못할 것임을 말씀했습니다.
신앙의 고비를 제대로 넘기지 못하고 쉽게 믿느라고 신앙에 뒤쳐진 사람은 천국 문이 닫히고 지옥으로 가야하느냐는 문제를 가지고 이 본문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성구는 건설구원을 중심으로 주신 말씀인데, 다만 건설구원도 기본구원과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 둘이 합하여 '구원'이라는 큰 범위의 교리이기 때문에 그 본질은 같고 그 모습은 조금씩 특별한 것이 있다고 아셔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