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란(마27:46) 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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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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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51
40. 질문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란(마27:46) 658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는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 나이까? 라고 백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아니고 소망을 이루는 감사 표시였는데 이에 대한내용을 부탁드립니다.
답변 : 억지 십자가는 구레네 시몬에게 원망이나, 원하고 원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달랐습니다.
1. 약5: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원망하는 것은 죄가 됩니다. 형제들이 서로 원망하는 것도 죄가 되거든 하물며 하나님을 상대로 원망했다면 큰 죄가 된다고 약5:9에서 단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을 버렸다고 '원망'을 했다면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죄를 지은 것이 됩니다. 우리를 대속하는 것은 고사하고 예수님도 죄인이 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히4:15에 말씀하셨으니,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우주적인 고난으로 죽어가는 시험을 이 땅 위에서 최후로 통과하시면서도 '원망하는 죄를 범하지 아니했다'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즉, 그 고통이 예수님의 육체를 형언할 수 없도록 또 그 중압은 우주적인 무게로 내려 눌렀지만 예수님은 그 고통에 피동 되어 원망하는 죄를 짓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2. 빌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했습니다. 주님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입니다. 그 주님이 모든 면에서 항상 기뻐했고 감사했으며 이 면에서 단 한번도 순간도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죄가 없는 분입니다. 그런 주님 안에서 우리도 항상 기뻐할 수 있으며 또 마땅히 항상 기뻐해야 하고 어떤 경우에도 기쁨과 감사가 없다면 빌4:4 말씀을 어기는 죄가 됩니다. 하물며 예수님 자신이겠습니까? 그래도 그 십자가상의 그 고통 속에서야 어떻게 기뻐하고 감사 하겠는가 라는 의문은 행7:55 이하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그 순간에도 자기 영혼을 받아 주실 것과 자기를 치는 자들에게 죄를 돌리지 말아달라고 했습니다. 신체 외부에서 신체를 향하여 주는 모든 충격과 통증 속에서도 오히려 스데반은 자기 속에 있는 자기 하나님에게 붙들려 외부의 감각을 통제했고 더 나아가 오히려 발성기관을 통해 저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며 하나님의 영광으로 그 얼굴이 충만했었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과 오늘에 이르는 모든 성도의 신앙 절정은 전부 예수님의 뒤를 아득히 멀리서 따라 가는 수준밖에 되지 않습니다.
3. 약1:2,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하신 이 '여러 가지' 시험에는 어떤 고통 어떤 모욕 어떤 통증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굳이 이 성구는 재론치 않아도 가만히 새겨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상 고통도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못 몇 개에 성인의 무게가 매달려 서서히 죽어가는 고통은 특별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지만, 교회사에는 십자가 고통에 못 지 않는 고통으로 죽어간 순교자들이 적지 않고 또 그들 중에서는 그 고통의 마지막 순간을 웃음으로 넘긴 이가 적지 않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의 인성이겠습니까? 그의 인성은 하나님의 지성 지공법에서 십자가의 사망을 완전 승리 완전 완성으로 통과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을 주셨습니다.
4. 마음으로 짓는 죄도 죄이니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마음으로 짓는 죄도 육체로 짓는 죄와 하나님 앞에서는 꼭 같이 취급됩니다. 못 견뎌 상을 찌푸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표정을 그린 그림들은 그 화가들의 자기 수준에서 본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았으니 이 참음은 마음의 원망을 입이 끝까지 발설치 않았다는 차원이 아니며 마음속에서는 환장을 하겠으나 차마 입으로 움직여 원망할 수 없었는데 죽기까지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마지막 악령의 시험 전부를 다 이기고 그 시험에 흔들리지 않고 통과했다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제단에 드리는 짐승은 흠이나 점이 있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예표 했으니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드려지는 예수님의 인성이 그 육체 뿐 아니라 그 마음에 이르기까지 그 신경 세포 하나에 이르기까지 완전 기쁨 완전 승리 완전 통과 완전 순종에 흠이 있다면 하나님의 전지 앞에 제물이 되지를 못합니다. 온전히 자신을 드려 우리를 구원했다고 했으니 그의 생명만 바쳤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애 시간 전체가 흠없고 점없이 바쳐졌다는 것입니다.
5.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왜 자신을 버렸느냐는 말씀은
우주와 영계를 없는 가운데서 만든 것이 우리를 하나님과 같이 온전한 존재로 만드시려는 목적 때문입니다. 그냥 천국에다 바로 살도록 하지 않으시고 이 우주를 만들고 타락의 순서를 만든 것은 타락의 순서를 거쳐야 더 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쏟아질 수 있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 없는 세계를 겪은 존재라야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은혜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극하신 목적 때문에 일부러 죄를 짓게 하고 죽게 하였지만 이 죄인을 되살리려면 하나님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희생되고 바쳐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일만은 하늘에서 명령만으로 할 수 없고 친히 사람이 되어 오셔서 행동으로 대신해야 합니다. 또 영원히 사람의 몸을 입어야 우리의 영원한 영광이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제일 중심은 십자가상의 죽음입니다.
이 죽음을 원하고 원하여 기다렸기 때문에 유월절 만찬에서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구원 목적의 전 과정 전체를 두고 간단히 표현한 것이므로 그 표현 속에는 무한한 것이 있다고 깨달아지실 것입니다. 4천년 인류역사를 인도해왔고 당신이 친히 이 땅위에 오셨으며 모든 어려움 시험 다 이기고 33년을 지내며 드디어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었고 이 순간까지도 흠 없이 점 없이 성공해왔으니 예수님 속에 아버지께 붙들려 심신이 완전 동행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린 장시간 끝에 드디어 이제 숨이 막 넘어가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서조차 예수님은 외부에서 밀려오는 고통의 환경에 피동 되지 않고 자기 속에 계신 아버지께 온전히 붙들려 여러 가지 시험 속에서 항상 기뻐하며 흠 없고 점 없이 자신의 육체를 하나님 아버지 구원 목적 완성에 최종 순간으로 바쳤습니다.
예수님의 인성도 우리와 같은 피조물입니다. 예수님의 인성만이 우리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가장 기뻐하고 하나님 아버지 지상 지고의 목적에 자신의 육체가 사용된 이 영광 이 기쁨 이 황송에 취하였고 어찌하여 천하에 많은 인성 많은 피조물 많은 가능성 중에 이 인성을 택했고 이 인성을 제단에 제물로 바칠 수 있게 해 주셨나이까! 감사의 탄성입니다. 이 십자가 제물로 바쳐지려면 한 육체가 버려져야 합니다. 나의 이 인성이 여기에 버려졌나이까, 나의 이 육체가 하나님 기뻐하고 천군천사 찬송하며 모든 택자 소망 중에 기다리고 모든 만물이 영원히 머리 숙여 영광을 돌릴 이 자리에 사용되도록 죄 값에 버려지게 하였나이까! 하는 감사입니다.
6. 오늘도 일반인이 상상치 못할 고통 어려움을 겪는 이들 중에 감사에 취하여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에 비할 수는 없고 예수님 인성의 영광에 비할 수는 없지만, 오늘도 이 땅 위에는 어찌 이 육체를 이 귀한 복음 사역에 뽑아주시고 사용해주시고 그것도 감사한데 이 복음의 영광을 위해 이 육체를 공산주의 칼에 던져지게 해주시고 공산주의 총에 버려지게 해 주시나이까, 하며 순교를 감사하고 순교를 앙망하며 순교를 하지 못하면 도저히 만족치 못하여 안절부절하는 차원에서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1950년 겨울 손양원 목사님, 변판원 선생님이 그런 분들이었고 그후 40년 백영희목사님이 또한 그러했습니다. 앞에 두 분은 백목사님을 통해 평생 전해 들었습니다. 순교했던 이는 죽어버렸으니 그 죽음의 당시 심정을 백목사님이 어찌 알았겠습니까만 그렇게 기쁘고 감사하여 순교 없이 못살겠다고 주님 위해 죽어드리는 그 세계에서 그들이 살았다고 그 심정을 전하는 백목사님에게서 우리는 백목사님의 순교에 대한 심리를 파악할 수 있었으며 그를 통해 우리가 보지 못한 앞선 두 성도들의 세계도 알겠습니다. 또한 백목사님은 마지막 순간을 그렇게 맞았고 그는 그 순간을 위해 수십년 그런 세계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살고 간 성도들이 초대교회로 올라갈수록 그 수가 적지 않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이겠습니까!
오늘 우리 목회자들이 100명 교회 만들고 나면 자기의 공로를 새겨 표창장을 만들어 받고 그 대가를 은행 입금으로 받아내며 만일 그런 공로를 알아주지 않으면 화병이 나서 죽을 지경이 되고 온갖 교회내의 불편한 소리로 우리 귀에 들려옵니다. 개척의 공로와 연보의 액수를 따라 집사나 장로를 요구하는 심리가 오늘 우리들입니다. 이런 심리에서 십자가상의 예수님 고난을 생각한다면,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라는 말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실망 낙망 원망으로 들리며 동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경우를 구레네 시몬의 십자가로 적었습니다. 원하고 원하여 기쁨으로 지고 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은 대신 구레뇨 시몬의 억지 십자가를 잠깐 기록하여 그 모든 세계를 다 알려면 알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게 되면 그 복음 때문에 세상에 좋은 일들이 많이 생겨야 하는데 그 반대로 자기가 손해 보는 일이 생기면 이를 재수 없이 당한 일로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생활 중에서 은연중 만연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