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 살았던 사람은 어떻게 되는지?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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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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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51
9. 질문 :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 살았던 사람은 어떻게 되는지? 1953
안녕하십니까 목사님. 은혜와 진리로 더욱 풍성한 삶 사시길 기도합니다. 제가 성경에 있는 말씀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자꾸만 여쭙게 되는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만, 염치불문하고 여쭙게 됩니다.
1. 그리스도인이 죽은 후에 아브라함의 품(=낙원)으로 간다는데, 저의 동기에게 이것을 이야기 했더니 그가 ‘그러면 아브라함이 살기 전에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 고 물었습니다. 사소하고 쓸데없는 질문일수도, 성경에 명시되지 않은 내용이라 알 수 없는, 알려 해서도 안 되는 질문일 수 있지만 저 또한 궁금하고 명확하게 해야 할 것 같아 질문 드립니다.
2. 마태복음 27장 52~53절을 보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후에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하면 될지 설명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구약시대에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이 모두 부활한 것인지, 아니면 육신이 죽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사람들이 나사로처럼 잠시 일어났다가 다시 죽은 것인지, 그리고 그들(=자던 성도)이 부활해서 신령한 몸을 입었던 것인지 말입니다.
3. 또 어떤이는(어릴때 부모님따라 성당을 다니다가 지금 25세 올해 6월 제대하는 저의 선임병입니다-지금은 안 다닙니다.) 저희 기독교를 루터의 종교개혁이후에 생겨난 개신교라 하면서, ‘개신교가 생기기 전의 카톨릭 신자들은 다 지옥간거냐?’ ‘조선시대때 훌륭한 성인들-이순신 장군 등, 혹은 평생 착하게 살다가 예수를 모르고 죽은 사람도 지옥간거냐?’ 하며 반문하기도 합니다. 저는 ‘성경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보기에 착한 사람도 하나님 보시기엔 죄인이며,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 우리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라는 식으로 대답했습니다만, 그 사람이 그리 동의하지 않았고, 더 좋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아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르쳐 주시면 좋겠습니다.
답변 : 많은 사람들이 흔히 하시는 질문이므로, 간단한 질문이지만 좀 어렵게 답변했습니다.
1. 눅16:22에서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①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모습에서 가르치는 것은 크게 2가지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낙원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눅16:22에서는 나사로가 죽은 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고 특별히 표시했습니다. 이는 크게 2가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 : 아브라함의 지상 생활이나 나사로의 지상 생활이 동일했다는 것을 표시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대표적으로 세상에서 말씀대로 살아 복을 넘치도록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사로는 대표적으로 세상에서 말씀대로 살면서도 최악의 고통 가운데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 둘은 오늘까지 우리 믿는 모든 사람의 2가지 모습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모습은 이러하고 한 사람의 모습은 저러합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시는 형편이 제각각 다 다를찌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자기 현실에서 충성되게 살았다면 하늘나라는 함께 누린다는 면을 말씀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진실 되고 열심히 해도 평생 어렵게 사는 분들이 우리 주변에는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잘 믿고 복을 받아 모든 사람이 뚜렷하게 부러워한 성공한 교인들도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세상에서 신앙생활도 잘하고 또 세상생활도 아브라함처럼 거부가 되고 많은 면으로 복을 받고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평가하시기는 둘 다 꼭 같다는 것입니다.
둘째 : 롬4:16에서도 말씀한 대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우리의 조상이며 나사로도 그 계통이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각자가 생각하는 대로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은 성질의 믿음이라야 바른 믿음이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남으로 그 믿음의 출발을 했고 마지막 죽는 순간에는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한 가나안 땅을 받지 못했는데 오히려 보이는 가나안을 주지 않으신 것은 영원한 가나안 곧 천국이라는 영원한 안식처를 주신다는 약속으로 깨닫고 갔습니다. 또한 그는 생전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 속에서 부활을 깨달았으며 모든 종류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오늘날 어느 나라에서 어느 시대를 어떻게 산다고 해도, 아브라함과 같은 성질로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인정하고 하늘나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 주관으로는 믿는다고 생각 하지만 아브라함과 같은 모습의 믿음이 아니라면 가짜 믿음이므로 그 믿음에 관계된 모든 것은 지옥에 버리고 가야 한다는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신앙계통에서 나사로가 믿음 생활을 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② 아브라함 이전에 죽은 사람들은 누구 품에 안겼는가?
아브라함 이전에 죽은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실체적인 품에 안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품이라는 표현은 나사로에게 나타낸 말씀이니 일단 나사로의 신앙은 아브라함에게 속했고 아브라함과 그 가치가 같았다는 것 까지 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사로는 영원토록 아브라함의 품에만 안겨 있고 노아나 에녹의 품에 안기지는 못한다고 생각하면 영계를 이 세상처럼 생각한 것이 됩니다.
세상에서는 이 사람 품에 안겨 있으면 저 사람 품에는 안길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야당 품에 안겨 보호를 받으면 여당 품에 안길 수가 없고 일본의 품에 안기면 한국의 품에서는 배격이 됩니다. 그러나 영계에서는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으면서 동시에 하나님 품에 안겨 있고,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으면서 동시 에녹과 노아의 품에도 안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사로는 아브라함을 포함해서 먼저 영계에 간 모든 믿음의 선진들의 품에 다 안겨 있는데, 특별히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표현을 한 것은 아브라함 한 사람의 품에만 안겨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위에서 설명 드린 것처럼 아브라함의 생애와 나사로의 생애가 가장 극단적으로 비교가 되는데 실은 둘의 믿음은 같고 하나님의 평가도 같으며 단지 믿음의 소속으로 아브라함을 가장 표준으로 나타냈기 때문에 오늘 우리도 우리의 믿음이 아브라함적인 믿음이라야 낙원으로 들어가고 그렇지 않은 것은 지옥에 버리게 된다는 면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 이전에 낙원을 간 사람들은 비록 아브라함은 아직 낙원에 오지 않았으므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그들 이전에 낙원에 와 있는 믿음의 다른 선진들의 품에 안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겨 있다는 표현은 오늘 우리가 세상에서 사람의 품에 안기는 것과는 아주 다른 차원에서 살펴야 할 것입니다.
③ 나사로가 죽은 후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는 품은 육체의 품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어린 아이가 엄마나 할머니 품에 안겨 있는 평안한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 성경은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낙원은 '영계'입니다. 물질로 된 이 세상과 영물로만 된 영계는 그 존재와 활동과 상황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먼저 아셨으면 합니다.
즉, 이 세상 살아생전에는 엄마 품에 안기면 촉감과 시각적 효과에서 평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이런 피부 접촉에 의하여 평안함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물 샐틈 없는 은혜 세계 안에 있기 때문에 평안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나사로를 아브라함 할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다는 표현으로 표현한 것은 하늘나라가 영계이기 때문에 그 나라의 상태를 그냥 그대로 표현해서는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 물질계 식으로 바꾸어 표현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마음을 표현하면서 '시커먼 마음' '새빨간 거짓말' '넓은 마음' '좁은 생각'이라고 한 것은 그 마음을 사진기로 찍으면 색깔이 검정색 빨간색 파란색으로 나온다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 마음을 자로 재면 넓이가 몇 평이라고 계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을 가지고 볼 수 없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품이라는 표현도 낙원에 간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다고 형상화를 시킨다면 이는 영계를 물질계 오늘 세상으로 변질시킨 것이니 그렇게 생각하는 영계는 영계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아브라함과 나사로는 자기 육체를 세상에 두고 그 영과 혼만 천국으로 갔습니다. 육체를 가지지 않은 아브라함에게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나사로가 어떻게 안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앉은 다리 위에 나사로가 걸터앉았다는 식으로 그림을 그릴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위로를 받았고 아브라함의 격려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안겼다는 말은, 아브라함과 같은 성질의 믿음을 나사로가 가졌는데 믿음으로는 아브라함이 나사로의 아버지가 되고 할아버지가 되므로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④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브라함적인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는 표현은, 아브라함의 육체의 다리 위에 앉아서 아브라함의 육체의 팔이 그를 감싸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나사로가 아브라함적인 믿음과 아브라함적인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낙원에서 아브라함적인 그 믿음이 위로를 받고 아브라함적으로 살아간 그 신앙행위가 안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나사로는 아브라함 후 시대 사람이기 때문에 나사로는 아브라함을 만나 아브라함에게 직접 따뜻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 이전의 사람들은? 그들이 아브라함보다 먼저 낙원을 갔으므로 아브라함이 올 때까지는 아브라함을 낙원에서 만나지는 않았으나 아브라함 대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신앙을 갖게 하신 하나님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고 있었으니, 그 품은 아브라함의 품은 아니지만 결국 아브라함의 품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사로가 안긴 품도, 일차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품이었으나 그 아브라함의 품이 아브라함의 품이 되는 것은 아브라함을 아브라함으로 만든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는 모든 것이 하나님 한 분의 나라요 하나님 한 분의 품입니다. 특별히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눅16:22에서 말씀하신 것은 믿음의 가장 모범적인 표준을 알기 쉽도록 우리에게 나타내기를 아브라함의 행적에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⑤ 결론적으로, 아브라함 이전의 선진들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간 천국과 나사로가 간 천국은 동일한 낙원입니다. 낙원에는 이질(異質)과 이종(異種)이 없는 나라입니다. 동질 동성의 나라입니다. 그 이름이 아브라함으로 붙어도 내나 하나님의 품입니다. 그 품이 다윗의 품이라도 내나 하나님의 품입니다. 특별히 아브라함의 품으로 표현한 것은 아브라함의 신앙과 나사로의 신앙이 동일했고 그들이 지상에서 살았던 생애의 가치가 동일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순서적으로는 아브라함이 먼저요 나사로는 그 신앙노선 상에서 살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전의 선진들은 그들의 믿음은 아브라함 이전에 살았으나 그들의 믿음을 성분 분석을 한다면 아브라함과 꼭같고 동질 동성의 믿음들을 가졌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 이전의 조상들도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고 표현을 한다면 굳이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실체적 품에 안겼다고 할 수는 없어도 아브라함적인 믿음의 품에 안겼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천국에 '아브라함의 품'이라는 장소는 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부는 하나님의 품입니다. 그런데 굳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하여 오늘 우리에게 아브라함처럼 살도록 하라고 가르치기 위해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앞세워놓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품입니다. 그 품이 바로 아브라함의 품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나사로에게만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고 했으니, 아브라함 이전 시대는 아브라함과 믿음이 동질 동성이었다는 정도로만 알아야겠고, 아브라함 이후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는 우리도 나사로와 같은 생이 아브라함의 생과 같은 가치를 가졌다는 것으로 깨닫는 것으로 그쳐야 할 것입니다.
2. 마27:52-53,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죄에 매여 죽은 인간을 해방시켰다는 것을 보인 것입니다. 죄에 매여 죽은 인간에게 죄 문제가 해결되면 그 사망에서 인간이 해방을 받고 살아나온다는 중생을 오늘 우리에게는 성경 말씀으로 가르치고 있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실제 죽었던 구약 성도들 중 몇을 부활시키므로 당시 교회에 가르쳤고 오늘 우리에게는 역사적 사실을 동원하여 '예수님의 대속은 생명'이라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그들은 잠깐 부활했다가 다시 사망하였습니다. 최후 부활은 예수님 재림 때 있으며 이때 부활은 영원한 부활입니다. 한번 죽고 한번 부활하는 것이 정한 것이지만 특별히 우리에게 부활을 가르치기 위해 일시 부활을 시켰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죽은 나사로 그리고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부활한 사람들 또 구약에 엘리야와 엘리사는 각각 여인들에게 그 아이들을 부활시켜 돌려 주었으며 사도 바울도 두기고를 살렸습니다. 이 부활은 최후 대심판의 부활이 아니고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 일시 계시의 기관으로 잠깐 사용한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죽어 낙원에 갔고 그 육체는 이 세상에 두었습니다.
3.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은 누구든지 지옥입니다.
① 질문자께서 예를 드신 분 중에 '이순신'으로 잠깐 살펴보 겠습니다.
조선시대 훌륭한 성인들도 지옥을 갔겠느냐? 한국 안에서는 그렇다고 했다가는 맞아 죽기 좋을 만 하지만 사실은 사실입니다. 이순신장군을 예로 드셨는데, 그는 수많은 아내의 남편들, 어머니의 귀한 자식들을 남해 바다에 고기밥을 만든 살인 백정이었습니다. 우리 눈에는 착해도 일본 사람들 눈에는 살인 백정이지 그 사람이 착한 사람으로 보일 리는 없을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과 반대편 나라에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풍신수길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원흉이지만 일본 사람들에게는 일본 최초로 대륙으로 진출한 영웅입니다.
일본사람들은 풍신수길 같은 영웅이 지옥을 간다고 가르쳤다가는 그 자리에서 목이 붙어 있지를 못할 것입니다. 아마 일본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이 풍신수길의 이름을 거명하며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지옥 갔을 것이라고 했다가는 그 무자비한 사무라이 칼에 현장 사살되지 않겠습니까? 그들에게는 그렇게 좋은 분입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바로 풍신수길이 같은 그런 사람들이 가는 곳이 지옥이라고 할 것입니다.
② 군인 출신들은 그렇다치고, 공자나 석가 같은 군자 도덕가 들은?
혹 공자는 정말 착하게 살다 갔으니까 지옥을 가서 되겠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공자 한 사람 때문에 질문자의 모친, 답변자의 모친, 우리 조선 수백년 역사에 이 나라에 살다간 여자들이 당한 인권유린은 세계사에 거의 유례가 없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공자를 하늘 같이 떠받들며 그가 성인이며 성자라고 짖어대는 사람들은 한자 문화권의 공자 추점Z들입니다. 그들이 고대 사회의 지식계를 먼저 거머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와 후손들에게 고정관념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공자 자기는 무슨 의인처럼 점잖게 웃고만 살고 좋은 말만 하고 살았으나 공자가 웃으며 조용하게 한 자 적어놓은 '부창부수(夫唱婦隨: 남편이 짖으면 아내는 따라 짖으라)' 문자 하나 때문에 이 나라 여자들은 주인집에 개처럼 살았습니다. 조선 5백년 여자가 사람이었습니까? 그렇게 만든 세뇌교육의 장본인이 바로 공자였습니다. 우리나라 여성부장관이나 법무장관인 여자분에게 공자를 평가해 달라고 한다면 당장에 반인권 인륜범죄자로 집어넣을 듯 합니다.
공자가 평생 즐겨 입에 담았던 '충(忠)'이라는 글자도 하나 있습니다. 이 한 글자 때문에 우리 조상들이 억울하게도 전주 이씨 한 사람을 위해 5백여년 고생하고 죽도록 착취당하고 그 전주 이씨 왕 한 사람 기분 내키는 대로 전쟁하자 이라자 저라자 하는 말 한마디에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습니다. 동양의 거의 모든 나라의 수많은 인민들이 무고하게 학살을 당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학살을 시키면서 오직 공자의 '충'이라는 말 한 마디에 그렇게 되었으니 그 책임이 적다고 하겠습니까? 지금 김정일이 웃으면서 '동무, 탈북자 문제없도록 조처해!' 한 마디 하고 나면 수없는 사람이 코를 꿰어 끌려가고 강제노동소에서 죽어나가야 합니다.
공자는 머리 좋고 글 잘 쓰고 말 잘하니까, 웃어가며 제 생각에서 나오는 대로 이 말 저 말 주절거리고 갔지만 그 사람 말 한 마디에 죽어나간 사람의 수가 아마 공산주의로 죽어간 사람보다 많을 것입니다. 석가도 석가 말 한 마디 때문에 수천년간 동양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이 산속으로 들어가서 돌 앞에 앉아 돌을 닮겠다고 평생 세월을 다 보냈으며, 그 사람들을 산속으로 떠나보낸 그 가족들에게 생이별을 시킨 것을 인권위원회로 보내 재판을 받게 되면 아마 반인륜범죄로 히틀러 김일성 모택동 나폴레옹 이런 사람들보다 더 큰 중죄인으로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야당이 말하는 착한 사람과 여당이 말하는 착한 사람은 극과 극입니다. 시어머니 평가하는 며느리와 며느리가 평가하는 시어머니는 정반대입니다. 국가마다 민족마다 지방마다 서로의 기준이 천차만별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각각 자기 주관으로 말하는 착한 사람들을 몽땅 천국에 보내 놓으면 그 천국은 천국이겠습니까? 천국은 죽음이 없는 곳인데 죽지도 않는 곳에서 세상 별별 사람이 서로 다른 곳에서 착하다고 추천을 받아 천국에 다 앉아놓으면 그 천국은 바로 지옥일 것입니다.
③ 사람마다 자기 좋아하는 대로 천국을 그려보는 것은 자유 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자유입니다.
하나님은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안 된다고 발언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입니다. 오늘은 그렇게 발언할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인간이 그렇게 발언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붙들려 좌지우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자유하십니다. 공자는 착하니까 천국을 보내야 한다 그런 사람이 지옥을 간다면 말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조선 유학자들과 그 후손들이 그렇게 발언을 하는 것은 자유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발언을 따라 그렇게 하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인간은 우리 생각대로 발언하고 하나님은 하나님 생각대로 발언합니다. 세상에 착한 사람들이 많았으니 그들이 지옥 간다고 말하는 것은 가혹하다는 것은 인간의 주관 생각이요 희망사항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적어놓은 곳이 성경입니다. 천하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만한 이름을 준 적이 없고 오직 예수님 이름에만 구원을 주셨다고 하나님은 발언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 결정대로 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