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선한사마리아 사람을 통한 예화의 강조점 (눅:3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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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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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51
18. 질문 : 선한사마리아 사람을 통한 예화의 강조점 (눅:30-35) 2974
백영희 목사님이 예수님 재림시기를 예화 `선한 사마리아사람`을 들어 지금부터 약 200년 후가 될거라는 이야기를 이 홈페이지에서 본 것 같습니다. 왜 200년이냐 하면 그 강도를 구해준 선한 사마리아인이 이틀 후에 다시 오겠다고 하였기 때문에 200년으로 예수님 재림을 봤다고 읽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예화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강도당한자의 친구는 누구냐? 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결국 그 예화의 주제는 내가 먼저 약하고 힘없는 사람한테 다가서 그들의 친구가 되자 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예화를 드실땐 가장 큰 강조점이 있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강조점을 벗어나서 해석한다면 억지해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답변 : 1. 말세 시점에 대한 것은 대략의 짐작일 뿐이고 2. 이 예화 주제와 시점은 보충관계
1. 강도 만난 사마리아인 비유는 눅10:30-35 입니다. 위에 있는 2493번 자료는 먼저 오간 내용입니다.
이틀 후에 오겠다는 것으로 말씀드린 기억은 잘 나지 않습니다만 혹 그렇게 적은 곳이 있으면 답변자의 실수입니다. 본문은 치료비가 더 들게 되면 돌아올 때 갚으리라는 말씀입니다.
2. 성경의 예화는 그 주제와 강조점이 무엇이냐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은 동감입니다.
그러나 그 주제와 강조점은 그 예화 하나만을 가지고 단정하다 보면 좁은 시야 때문에 전체 성경의 범위를 배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은 성경은 그 어느 구절 하나도 성경의 모든 내용 전부와 다 연관이 있습니다. 이 예화는 힘없고 약한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친구가 되자는 것이 주제입니다.
그러나 그 주제 하나 외에 다른 것은 가르치지 않았다고 단정하는 것은 문제가 많습니다. 혹 조금 성급한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범위는 사실 그 범위가 어디까지냐는 것을 우리가 단정할 수 없도록 무한한 진리입니다.
신약교회에게 2천년 정도의 기간을 주셨고 혹 2천년에서 조금 기간이 더 연장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은 성경을 많이 읽고 가르쳐 그 영안이 일반인과 비교도 될 수 없었던 분의 기도 중에 잠깐 발언한 정도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특별한 분의 발언이므로 다른 주장보다는 더 존중했으면 하는 정도이지 그 이상은 아닙니다.
질문은 그런 말세 기간에 대하여 이 본문을 가지고 연결을 시킬 수 있느냐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질문자께서 이 본문의 주제는 힘없고 약한 사람을 돕자는 것으로 파악하셨는데, 그렇게 파악하셨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기간은 언제까지나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한정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 때, 더욱 더 힘없는 이웃을 위해 지체 없이 도와야 한다는 것은 중요할 것입니다. 바로 이 면을 이 본문에서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신약의 재림 시점에 대한 언급은 이 본문의 예화가 말씀하는 주제와 별개의 것이거나 주제를 벗어났다고 보시는 것보다는 오히려 주제를 보충하고 주제를 강하게 재촉한다고 보셨으면 합니다.
재질문 : 한 가지 예화는 한 가지 주제에서 그쳐야 할 것
결국 백영희 목사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세시점에 대한 비유로도 보셨다는 것을 인정 하시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질문을 한 이유는 백목사님이, 그리고 나아가 여기 홈페이지가 제가 언급했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처럼 다른 말씀들도 너무 억지해석을 하는 것 같아 질문을 올린 것입니다.
그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말세로 해석이 될 수 있는지 많은 의구심이 생깁니다. 일반교계의 목회자와 성도들의 성경해석으로는 그 예화를 말세의 시점으로까지 보완보충을 한다면 여기의 노선을 그리 탐탐케 보지는 않을 것같습니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해석지 않고 끼워 맞추기 씩으로 자꾸만 해석을 해 나간다면 결국 이단으로 갈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이 홈페이지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써 걱정이 되어 글을 올렸습니다.
답변 : 성경에 관련 된 시각은, 속단하기보다 좀더 신중히 생각해 보셨으면
사마리아인의 예화를 힘없는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단일 주제로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은 지적하신 질문자뿐 아니라 대개 교계 목회자와 신학계의 공통적인 시각입니다.
이곳이 성경에 대하여 가지는 자세처럼, 성경 성구는 한 성구가 한 가지 주제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역사에 살다간 모든 인간의 모든 상황을 전부 다 안내할 수 있는 무한수의 주제를 가지고 있다는 시각을 비판받아 본 것은 답변자 기억으로는 처음 같습니다.
대개 질문자처럼 성경을 이해하고 가르치던 분들이 이곳이 가진 성경 시각을 접하고 나면 성경을 '무한한' 진리라고 말하던 조직신학의 표현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고 감탄하던 말씀만 주로 들어보았습니다. 물론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주로 이곳에 쓴 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보다는 단 소리를 하실 분들이 많아 그런지 모르겠으나, 답변자의 경험은 이곳이 아니라 외부 신학을 접할 때 일이었습니다.
주로 해당 신학교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학생들이나 교수진을 만났을 때, 성경 해석에 관한 한, 백영희신앙노선의 해석은 역사에 유래가 없을 만큼 너무 깊다고 감탄하던 예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만, 이번 질문자께 그런 통계를 가지고 설득할 상황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이번 발언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반론하기보다 질문자 스스로 이 문제는 이곳 답변자의 요청을 받아 주셔서 좀 시간을 가지시고 그 비판의 기준과 범위를 넓혀주시기를 원합니다. 질문자는 ‘사마리아인의 예화' 하나를 가지고 말씀하셨으나, 이곳에서 제공하는 백영희설교자료집은 성경의 모든 내용 하나 하나를 하나의 주제로만 가르치지 않고 수도 없는 주제가 될 수 있음을 일관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해석은 현재 한국교계 교회 지도자와 신학 지도자들에게 아마 설교 방법론과 시각에 관하여는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습니다. 현재 이번 질문을 하신 분도, 혹 자신이 아주 존경하는 좋은 목회자나 설교가가 있다면 그분들 역시 어린 교인들에게 자존심 때문에 표시는 내지 않아도 뒤로는 이곳에서 제공하는 설교를 소중하게 참고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답변자는 1982년 이후로 이곳에서 제공하는 백영희설교자료를 설교집으로 제작 제공하는 일에 실무 책임자를 맡아왔기 때문에 한국교단에 이 설교록이 심대하게 영향을 미친 분들을 비교적 소상하게 파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세상이 말하는 명예 관련 법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신앙본래의 자세를 존중하여 그런 면을 연구하거나 드러내거나 홍보하여 이곳을 알리는 등의 일은 거의 하지 않고 있습니다. 위에 올린 의견에 대한 재고를 정중하게 요청드립니다.
재질문 : 뜻은 알겠으나
이 목사님의 뜻은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선한 사마리아예화를 말세의 시점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너무도 잘못된 해석이라 확신합니다. 분명 율법사가 질문한 내용의 중심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내 이웃이 누구오이까?) 라고 질문을 예수님께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강도당한자의 고통을 말하시고 제사장 레위인 그리고 선한사마리안 일을 예를 들어서 (이 세명 중에 강도당한 자의 친구가 누가냐?)고 재질문 하셨습니다. 이 예화의 주제는 보태고 덜고 할 것도 없이, 우리가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자의 친구가 되어주자 입니다. 이 예화를 말세의 시점으로 곡해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성경해석의 큰 오류를 범할 뿐만 아니라, 이런 방법으로 다른 성경도 해석을 해간다면 이단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수많은 이단들이 성경을 곡해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성경의 중심을 보지 않고 억지해석, 끼워 맞추기 씩으로 간다면 그 끝은 너무나 위태롭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특별히 선한 사마리아 예화를 든 이유는 재림시점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이단들이 자기들만의 해석되로 재림시점을 이야기 하고 엄청난 혼란과 고통을 남겼습니다. 그들의 주장을 보면 말도 안되는 것을 가지고 주장하는 경우가 대부분 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예화도 그런 방법으로 해석을 한다면 종국엔 끝이 그리 좋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성경을 유기적으로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중심을 보는 것이 더욱 더 중요하고 그것이 성경을 올바르게 읽는 자세라 생각을 합니다. 이단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미안합니다. 염려하고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글을 올렸습니다. 결론적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을 재림시점으로 이야기 하고 말세시점으로 본 것은 성경을 곡해하고 중심말씀에서 크게 빗나갔다고 봅니다. 저는 신학대에 다니고 있습니다.
답변 : 단정은 조금 미루시고, 다시 한번 재고하실 기회를 가지셨으면
1. 한번씩 방문하실 분이면, 다시 한번 재고하시도록 요청드 립니다.
한 두 번 방문하고 마실 분이면 '발언/주제연구'방으로 옮겨 본격적으로 토론을 하고 싶은 주제입니다. 그러나 이곳을 앞으로도 한번씩 방문하실 분이면 이곳에 올린 지나간 자료들을 읽으실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좀더 시간을 두고 살펴보시기를 다시 청하겠습니다.
2. 성경은 너무 꿰어 맞추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니고, 너무 꿰어 맞추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을 창세기 따로, 마태복음 따로 분리를 시키면 대단히 쉽고 명료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해석이 성경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어느 곳으로 가는지 알 도리가 없게 됩니다. 이단이 나오는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성경 한 구절만 놓고 논쟁을 벌인다면 어떤 교리도 제대로 설 수가 없습니다. 또 이단 교리를 파헤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부를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갖다 대 보면 그제서야 성경의 다른 부분이 그 해석을 판명해 줍니다. 옳은지 그른지.
따라서 성경은 시간을 내서라도 한 성구를 성경 전부로 다 꿰어 맞추어 다 맞아지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이것이 신학을 배우지 않고도 신학을 능가하는 법이고 이것이 어떤 종류의 이단이 새로 나와도 그 이단을 따로 연구해 보지 않고도 그 이단의 잘못을 다 능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지적하신 대로, 성경을 너무 꿰어 맞추려고 한다는 표현은 백영희 설교 세계에서는 과거부터 많이 들어왔으므로 귀에 무척 익은 표현입니다. 오랜 만에 다시 들어보니까 새삼스럽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글이 아니고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어떤 말쟁이나 기술자가 묘하게 갖다 붙여도 성경에 틀린 이론은 다른 성경에 의하여 바로 정죄되어 버립니다.
성경은 얼른 보면 전체 통일성이 없는 것 같고 너무 엉성하여 필요 없는 대목이 많은 것 같고 또 어느 한 부분만 지나치게 많이 기록되어 있는 듯해도, 하나님의 작품인데 어련하겠습니까?
3. 말세에 대한 주제라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불쌍한 이웃을 도우라는 주제만도 아닙니다.
이 성구는 조직신학으로 말하면 신론 인론 기독론 속죄론 구원론 말세론 내세론이 다 들어있습니다. 이곳 답변자가 이렇게 일을 크게 벌려놓고 그것도 말이 아니고 문장으로 적었으므로 뒷수습이 혹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예화는 어느 한 좁은 범위도 말씀했지만 그 옆에 있는 다른 면도 함께 가르치고 있습니다. 연결시키다 보면 신론부터 내세론까지 다 들어 있습니다.
이곳 신앙노선을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바로 이런 면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처음에는 무슨 인간의 말 장난 같고 체질적으로 말이 많은 사람의 공상 같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공상이라면 아주 짧은 시간에 그렇다고 판명 나게 되어 있으나 그것이 정밀하게 맞추어진 진리라고 깨닫게 된다면 성경을 이전과 다른 차원에서 새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4. 이곳 답변자는 질문자의 신앙 환경을 많이 겪었습니다. 질문자는 이곳 환경이 낯선 것 같습니다.
질문자께서 지적하시는 그런 면을 그렇게 강조하던 분들에게서 피할 수 없는 세월 10년 이상의 설교를 들어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질문자 생각처럼 그런 시각에 충분히 동의가 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곳 신앙노선의 성경해석에 대하여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을 그렇게 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극단적인 양쪽을 다 거치면서 비교를 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경험적 안내를 드리고 있습니다. 양쪽을 경험하면 다 옳은 말이 나온다는 뜻은 아닙니다. 적지 않은 세월과 경험으로 비교와 생각을 충분히 해 봤던 답변자로서 답변자의 설득에 넘어와 주시라는 부탁보다는 일단 시간을 좀더 가지시고 살펴보시기를 구합니다. 냉정하게 범위를 좀더 넓혀서 생각해보시면, 스스로 답변을 찾으실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드리는 요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