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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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51
3. 질문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2257
목사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의 배경과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으로 이 말씀이 내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고 도저히 아닌 것 같이 보여도 믿음으로 믿고 나가란 말씀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저는 항상 이해를 먼저 할 려고 해서, 하지만 이 말씀을 접하고 나서 이해보다는 믿음이 먼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제 생각 했는 것으로 해석해도 되는 겁니까?(이해되지 않고 도저히 아닌 것 같아도 믿음으로 믿고 나가라는 것으로)
답변 : 말씀대로 해 본 것만큼 말씀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1. 믿을 수 없는 것이라도 무조건 믿고 나가란 말씀으로 읽으셨다면, 바로 읽으셨습니다.
① '믿음'의 최고법은 '오로지 믿어놓고 나가는 것'입니다.
복잡한 설명을 다 생략해 버리고, 그냥 믿고 무조건 밀고 나가면 믿음이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덮어놓고 시키는 대로 하고보면, 이해도 저절로 되는 법이고, 복도 받습니다. 성경이 말씀한 사실은 아무리 아닌 것이라고 생각이 되어져도 그런 생각들을 모조리 뭉개고 그 말씀만이 옳고 그 말씀만이 생명이라는 단 하나의 믿음으로 밀고 나가시면 백점 만점입니다. 이 방법에 더 더할 것도 없고, 더 뺄 것도 없다는 것은 단정하셨으면 합니다. 즉, 질문자께서 바로 깨닫고 바로 붙들었습니다.
② 이해를 하고 나서 믿겠다고 한다면, 시간도 없고 또 일이되지 않습니다.
5세짜리 아이에게, 농약이 든 병을 부모가 가리키면서 '먹지 말라'고 한 마디 하면 무조건 안 먹는 것이 복이고 생명입니다. 설명을 한다고 해 봐야 알아들을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 말 저 말 듣다보면 그 아이의 수준이 어리기 때문에 그 병에 든 것은 먹지 말아야 한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놓쳐버리기 쉽습니다. 매를 들고 '먹지 마!' 이렇게 엄하게 말한 다음 다른 행동을 보이면 사정없이 매가 가면 그 아이가 본능적으로 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개를 훈련시킬 때 하는 방법과 꼭 같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인생사를 통달한 지혜로운 노인과 5세 아이의 차이보다 더 크게 차이가 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수준 차이는 그런 지혜로운 사람이 데리고 있는 그 집의 개에 비해도 과분할 정도입니다. 이렇게 수준 차이가 너무 크게 나는데 배울 것이 많고 해 나갈 일이 산적해 있을 때는 오로지 시키는 대로 하는 것만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10세 아이에게 '공부 해!' 라고 명령을 했을 때, 그 아이가 덮어놓고 그 명령을 따라 다른 짓 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다면 공부 잘하는 학생이 될 것이고 훗날 무엇이든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한눈팔지 않고 죽도록 열심히 공부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알게 됩니다. 그러나 부모의 그 말이 틀렸는지 맞았는지 테스트 해보기 위해 가출을 해보고 또 몇 년을 다른 짓도 해보았다면? 틀림없이 후회를 하게 됩니다. 세월은 돌아올 수 없도록 날아가는데 그 아이는 그 중요한 시기에 이해가 되어야 하겠다고 버틴다면? 애타는 부모 마음은 이루 말도 못할 것입니다. 결혼을 해보지 않은 분이라면, 어린 조카가 그런 자세를 보일 때 20세 된 대학생 정도의 청년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③ 이해가 되기까지 타이르고 설득해야 좋은 것이 아닌가요?
무조건 시키는 대로만 하면 제일 좋은데, 버티고 있어 도저히 어찌 할 수 없는 경우는 차선책으로 할 수 없이 대화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동안에 지나가는 기회들은 흐르는 강물에 띄워 보내고 다시는 건질 수 없는 것들입니다. 6.25남침이 터졌는데, 대화를 할 것이냐 대사를 보낼 것이냐 중국을 설득할 것이냐 ..... 이러다가 시간을 보내면 다시는 회복 자체가 불가능한 시점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인생 세월 전부가 실은 다 이런 성격입니다.
물론 타이르고 대화하는 것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해를 하고 따라 하면 더 좋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이 필요한 이유는 그 속에 부모 말을 전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저런 설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한 눈 팔지 않고 순종만 할 수 있다면, 복잡한 설명을 먼저 하고 나서 시키는 것보다 해야 할 것이 수도 없이 많고, 또 그 나이에서는 설명을 해 줘봐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최상의 방법은 무조건 순종'일 것입니다.
2.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하신 말씀의 해석을 굳이 한다면
① 자기가 번 돈 10분의 1을 내놓으라면 누가 내놓을 마음이 있겠습니까?
믿음은 순점L라는 뜻입니다. 믿는다 말은 시킬 때에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수입의 10분의 1을 교회에 내놓으라고 합니다. 처음 믿는 사람치고 그 말이 이해가 되고 좋아서 순종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이라는 것은, 10분의 1을 내놓아라 하면 내놓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른 말로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말3:8-12에서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생각으로는 100을 벌었으면 그 100으로 생활도 하고 적금도 하고 또 재생산을 위해서 투자도 하는 것이, 90만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나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제관은 100을 벌어 100을 다 투자하는 것이 90만을 투자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100을 벌어 100을 투자하는 것보다 90만을 가지고 투자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10을 뗄 것이고, 믿지 못하면 10을 떼지 못할 것입니다.
② 100을 투자하는 것과 90을 투자하는 것,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 오겠는가?
이 문제를 가지고 말로 설명을 하려면 해결 방법이 없습니다. 이론으로 설명을 하려면 끝없이 설명해 봐야 '말은 그럴 듯 하지만...' 이런 반응이 나오든지, 아니면 '말도 아닌 소리...' 이런 반응이 나올 뿐입니다. 믿어 본 적이 없는 세상사람으로서는 믿을 수가 없는 말입니다. 인정할 수도 없는 말입니다. 시키는 대로 좋아서 따라 할 사람은 없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무조건 믿고 덮어놓고 시키는 대로 해 본 사람은, 말도 안 되는 말 같은데도 결과적으로 복을 받게 되었으니까 하나님의 명령이란 인간의 이해를 가지고 따질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미심쩍어 시키는 대로 해 보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이 늘 의심쩍은 상태로 마음에 남아 있지 그 명령에 대하여 확신이 서지 않을 것입니다.
③ '믿음으로 믿음에' 라고 하신 말씀은, 순종해 보면 더 크게 순종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처음 믿는 사람이 처음부터 생사를 걸거나 평생을 좌우할 그런 큰 문제를 가지고 순종하려고 시도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나왔지만 과연 하나님이 계신지, 또 그 말씀이 과연 사실인지 속으로 살펴보며 눈치를 보겠지요? 많은 말씀을 읽고 듣지만 그 중에 자기 목숨이 왔다 갔다 하거나 자기 가정이 통째로 날라 가거나 아니면 자기 평생이 걸린 그런 명령은 듣기만 듣지 그 명령대로 해보려고 선뜻 나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대신 손해를 본다고 해도 크게 손해를 보지 않을 사소한 것을 가지고 하나씩 시험 삼아 해보게 됩니다. 어쨌든 그 작은 것에라도 순점; 했다면 믿음은 믿음입니다. 믿어본 것입니다. 그렇게 믿어보면, 하나님 말씀이 이해는 되지 않지만 과연 사실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시키는 대로 전혀 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믿음이 전혀 자랄 수 없습니다. 아주 작은 것을 순종해본 사람은 아주 작은 믿음이 움돋게 됩니다. 그러나 좀 큰 것을 처음부터 해본 사람은 처음부터 믿음이 크게 자랄 것입니다.
'믿음'은, 시키는 대로 순종해보면 해 본 것만큼 자라게 되고, 처음에는 작은 것으로 순종해서 작은 믿음이 생겨지지만, 그 작은 믿음이 자꾸 모여지게 되면 좀더 큰 것을 순종하게 되고, 좀더 큰 것을 순종해보면 더 큰 것을 순종하는 사람으로 믿음이 점점 자라게 됩니다. 질문하신 내용은, 말씀에 순종해본 그 순점8로 더 큰 것에 순종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순종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믿음이 자랄 수 없다는 뜻입니다.
3. 믿음이란 그 속성이 근본적으로 이런 것이어서, 이 신앙노선은 신학 이론을 배제하는 것입니다.
① 질문에서 좀 비약된 내용이지만, 질문을 받고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를 하나 지적합니다.
고등학교까지 책을 들고 세상공부만 하던 학생이 신학을 전공하려고 대학교와 대학원 7년을 다니면서 책과 노트로 받아 적고 외우고 그것을 가지고 시험을 치고 있습니다. 그 학생들 중에서 가장 잘 외우고 가장 답안지를 잘 정리해 내는 학생들은 해외 박사과정을 밟아서 신학교 교수가 됩니다. 그들이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교회 일도 거들고 또 세상 노동도 했을지 모르지만, 어디까지는 전념하고 공부를 했던 이들입니다.
그들이 그런 학위를 따기 위해서는 세상일을 혹 할 기회가 있다 해도 동물원 구경하는 정도로 넘어갔지, 자기들의 생사가 걸리고 가족이 걸린 직업전선으로 뛰어보지를 못했습니다. 또 그런 세상일을 하면서 말씀 하나를 순종하는 문제로 직장에서 쫓겨나고 그 때문에 가정이 파탄될 우려가 있는 실감은 해볼 기회가 없습니다.
신학교 모든 과정을 책에서 이론으로 '하나님 말씀은 위대하다' 이런 식이었지 그 위대한 말씀을 가지고 세상 속에서 세상과 죽기로 싸워서 이겨본 일은 없이 신학교 교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교수가 앞으로 교인들을 지도할 목사후보생들에게 또 자기들이 책에서 본 이야기만 해주고, 그 이야기를 7년간 들었던 사람들이 입만 살아가지고, 책에서 본 예화만 가지고 교회 강단에서서 '세상에 어려운 일이 있어도 말씀대로 사십시오!' 이렇게 강단을 뚜드리고 있습니다.
② 현실에서 실제 싸워보지 않고 책만 상대한 신학교 교수와 목회자들의 문제점은 적지 않습니다.
설교를 듣는 교인들이 설교하는 목회자가 외치는 대로 4계명을 지켜 주일을 성수하려면 거의 대부분은 직장을 내놓거나 아니면 직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설교를 하는 목사나 신학교 교수는 주일을 지켜도 직장에서 쫓겨날 리가 없는 직업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주일을 어기면 직장에서 쫓겨날 수도 있는 직업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정말로 주일을 주일답게 철저하게 지키면 어느 정도 절박한 문제가 생기는지 체감을 해보지 않고 그런 문제로 투쟁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대개 신학교 교수들이고 또 그들에게 교육받은 신학대학교 출신 정규 목회자들입니다. 강단에서 말씀만 믿고 살아 라고 외치지만, 그 말씀을 듣고 앉아있는 이들에게는 그 말씀 하나 하나가 가정이 파괴되고 직장이 해체되고 생사가 오고가는 발언들입니다. 그 교인들이 속으로 '목사 당신이 내 입장 되면 과연 목사 네 말대로 너부터 그렇게 할 수 있어!'하는 반발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처음 믿는 교인들은, 신학교수나 목회자들은 말씀을 따라 생사를 초월하고 경제와 가정을 초월한 줄로 착각을 하지만 교회의 중책을 맡아 목회자들의 사생활과 개인 성향을 대한 사람들은 목회자의 내면을 파악하기 때문에 그 설교를 진심으로 인정하는 사람이 희귀합니다. 월급 더 받으려고 별짓을 다하는 목사가 만일 말씀 지키다가 직장이 날라 간다고 하면 자기는 우리보다 더 할 걸! 이런 식입니다.
③ 이 노선에서는, 목회자 양성에 가장 주안점을 두는 것이, 말씀대로 실제 살아보라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되려면 신학 과정을 무엇 무엇해야 하느냐고 정보 파악에 전부 열심들입니다. 그러나 이 노선은, 목회를 하려면, 교인들이 일상생활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 겪는 과정을 가장 힘들게 철저하게 그리고 인내하고 겪으면서 동시에 목회에 필요한 준비를 해 보라고 안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예 신학교 과정을 일반 교계와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일반 교계는 신학교 과정이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인을 교육시키듯 꼭 그런 학사과정을 요구하지만, 공회 신앙노선은 노동이나 행상 수준의 가장 밑바닥 직업을 가지도록 권합니다. 그런 직업을 가질 때는 구경삼아 경험삼아 잠깐 해보라는 식이 아니고, 그 방면으로 평생을 살아도 그 방면에서 전문 노동자가 되고 장사꾼이 되어 보라는 것입니다.
목회를 할 사람이라면 말씀을 양보하지는 않을 것이니, 그런 사람이 일반 교인들이 가장 힘들게 살아가는 그런 생활을 완전히 자기 직업으로 가지고 통과해 볼 때, 목회자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교육은 저절로 다 된다는 것입니다. 혹 세상 그런 직업을 원래 가졌던 분들이 그런 직업에서 성공하고 또 그런 직업에서 믿음생활을 잘 했다면 이미 세상 속에서 말씀대로 살아온 이력 그 자체가 목회의 최고 훈련과정을 겪은 것으로 대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회 교역자 과정을 백목사님 생전에 정식으로 통과한 사람들은 목회자이지만 공부만 하고 그대로 올라온 사람은 백목사님 생전에 100명 중에 2-3명 정도입니다. 공회 목회자들의 이런 과거를 두고 말하기를, 정규 신학과정을 밟지 않고 세상 별별 일을 하던 사람을 목회자로 급조하였으니 무자격 목회자라고 하지만, 공회는 이런 목회자를 진정한 목회자라고 생각합니다. 공회의 목회자관은, 일반 신학과정을 밟고 목회자가 된 사람들을 사실상 목회자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교계와 신학교들이 무자격 목사를 양산하는 체제로 운영된다고 공회는 오히려 비판하는 입장입니다.
4. 질문를 두고 일일이 말씀드리지 않았으나, 사실 모든 답변은 신앙노선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질문하신 내용은 성경 본문 해석이었지만, 그 해석이 해석에서만 그친다면 지식주의 신앙에 그칠 수가 있습니다. 지식주의 신앙이란 신앙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백영희목회연구회에서 답변 드리는 내용은 사실 일일이 신앙현실과 연결해서 설명해야 하지만 답변 양이 너무 많아서 대부분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백영희목회연구회 답변을 전반적으로 살피는 분들이면 비록 답변 중에서 현실 문제와 연결시키지 않은 것이라도 읽는 분들이 연결하고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문답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생활 속에 우리가 실제 그렇게 걸어가야 하는 길이 되는데, 그 길을 좀더 넓은 면으로 확대 적용시켜 보면, 교회는 어떻게 되어야 교회인가? 또 교단이라는 것은 어느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가? 이런 문제로까지 전부 연결이 됩니다. 이런 것을 신앙노선이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길에 대한 해석은 대체로 비슷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해석 때문에 실제 생활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고, 또 모든 믿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걸어가야 하는 신앙노선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를 결정해서 그것으로 교회와 교단의 운영 방향까지 하나하나 검토하고 바로 잡는 곳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생각난 김에 몇 말씀 덧붙였습니다.
재질문 : 살다의 의미?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다 에서 이 살다의 의미가 뭔지 궁금합니다. 영어성경엔 live로 나오던데 제가 보기엔 죽음에서 생명을 얻다 인 것 같은데 맞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 믿는 사람의 매일 생활, 평생의 삶은 항상
17절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작은 믿음으로 큰 믿음에 이르는 '성장 과정' 또는 '훈련 과정'의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이 '과정'이라는 의미는, 우리가 이룰 구원이 단 한 순간에 되는 것이 아니고, 세월 속에 차츰 이루어가는 오랜 기간이 필요함을 말합니다.
그 살아가는 세월 전체가 늘 '믿음'이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되는 그 모든 세월의 순간 순간 전부가 늘 '믿음으로' 가득차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세월이 흐르고, 속에는 순종만 가득찬 상태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