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안식 4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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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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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51
4. 질문 : 안식 4001
히브리서4장에 나온 안식의 신앙은 무얼 뜻하는 것 인가요?
연단의 완성? 바울은 죽는 날 까지 달음박질한다 했는데 ,
답변 : 우리가 누릴 안식, 우리가 바라 볼 안식
1. 어린 신앙을 위해 '안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죄로 인하여 평생토록 죽을 고생만 하고 사는 인생들에게는 '쉬게 해 준다'는 이 표현 하나가 의미하는 것은 참으로 많고 여간 크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장 외부에 '안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죽도록 고생하며 사는 불쌍한 인생들에게 천국에 가면 영원히 놀고 쉬기만 한다고 전도를 해야 그 사람들이 살 길을 찾아보자고 나서게 됩니다. '안식'이라는 표현은 우선 이런 어린 신앙에게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21세기 이 나라의 실직자들은 땀 흘릴 것 없고 정부에서 주는 저소득 생계비만 가지고도 마음껏 놀고먹고 쉴 수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이 땅 위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다. 은퇴한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아이를 낳지 않은 여자분들도 마음껏 쉬고 놀고먹는 일에 주력할 수 있습니다. 할 일이 없으니까 개를 데리고 외동딸 치장하듯 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이미 이 땅 위에서 안식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을 드리고 있습니다.
성경을 기록하던 고대사회에서 '안식'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그야말로 일반인들에게는 '천국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세상 물질의 풍요가 넘치는 세상은 안식도 안식 나름이지 무작정 놀고 먹는 고대사회의 안식이란 실직이나 양로원이나 은퇴와 같은 상태라고 생각하여 생지옥이라고 받아들입니다.
2. 이제 말세가 되어 이 자연계시를 가지고도 안식의 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고 싶어 해도, 하는 도중에 힘이 들면 문제입니다.
하고 싶어 했고, 하는 도중에도 재미있었지만, 만일 끝난 다음에 후회할 일이 있다면 문제입니다.
노예들의 생활은 위에 3가지가 다 해당됩니다. 장사나 예술이나 사회사업이나 정치나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들은 모두들 이제 말씀드린 3가지 중에 1-2가지 아니면 2-3가지 문제가 섞여 있습니다. 만일 세상 일 중에 이 3가지가 다 만족된 것이 있다면 그는 착각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철이 들어봐야 알 것입니다.
만일, 하고 싶어 안달이 나는 일만 하게 되고
그 일을 할 때에 재미가 있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 일을 하고 나니까 두고두고 너무 좋고 흐뭇하여 또 하고 싶어진다면
이런 일은 하지 못하게 한다면 고통일 것이고, 이런 일을 하라고 한다면 이런 일은 그만 뒀으면 하는 것이 아니고 그만 두라할까 봐서 겁이 날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을 짐작해 보고 조금 구경할 수 있는 예가 있습니다. 첫 사랑에 미쳐놓으면 그리 될 수 있고, 아이를 향한 모성애가 그러하고, 예술에 미쳐도 비슷한 현상을 보입니다. 그러나 먼저 예를 든 것처럼 자세히 살펴보면 비슷하기는 해도 참으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3. 성경이 말씀하는 '안식'의 참 의미는
구약에서는 안식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로 '안식'이라는 표현을 많이 알려 주고 계십니다. 또 출애굽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안식할 땅으로 많이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이미 범죄 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세상에서 죄 값을 받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죄의 결과 때문에 인생은 해 아래서 아무도 예외 없이 허무한 노고에 죽을 고생을 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안식'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말씀대로 살라고 가르친 것이 질문하신 내용의 '안식'입니다.
모든 나라 모든 백성들이 죽는 날 까지 뼈빠지게 일을 해야 쉬는 날이 올 줄 알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출발부터 7일을 단위로 하여 1일은 무조건 쉬게 했습니다. 그래서 믿는 백성은 첫날부터 7일에 하루를 쉽니다. 하루를 쉼으로 발생되는 손실은 하나님께서 미리 메꾸어 가시면서 그들에게 육체의 안식을 통해 신령한 안식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7일 중 1일의 안식을 통해 영원한 안식의 참 의미를 낮고 쉬운 단계부터 교육하고 계셨습니다.
애굽에서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던 이스라엘에게 그 가나안이라는 최종 목적지도 그런 의미였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고향으로 돌아가면 애굽에서 죽도록 노예생활하고 마지막에는 멸족이 되는 이런 환란과 고통을 벗고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하나님을 노래하며 즐기는 그런 세계로 모세를 세워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고대사회의 육체의 고난을 벗게 하는 형식을 통해 그 속에 인간 스스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신령한 안식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신약 우리가 이 지상에서 신령한 안식을 누릴 때가 있지만 아직까지는 맛배기지 본론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참 안식 우리가 목표로 삼을 진정한 안식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인 우리들이 기본구원을 얻어 영이 먼저 하나님 품 안에 안기고, 그다음 그 영이 자기 심신을 하나님 품 안에 안길 수 있도록 심신의 기능과 모든 요소를 하나씩 말씀으로 변화시켜 하나님의 형상대로 된 심신을 만들게 되면,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된 것만큼 이 세상에서부터 진정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물론 세상에서 우리는 믿는 순간부터 사람마다 차이는 있어도 심신을 조금씩 하나님을 닮은 인격으로 만들어가고 있는데, 죽는 날까지는 우리 심신 속에 하나님이 아니라 귀신을 닮은 인격도 같이 섞여 있어 자기 속의 옛사람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되어진 면으로 인하여 누릴 안식과 평안함이 우리 인격 전체에게는 가려지고 잘 느껴지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 죽는 순간 우리가 세상 껍데기를 완전히 벗어버리면 심신의 요소와 기능 중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된 것만 남아 천국으로 옮겨지기 때문에 죽은 후 성도는 비록 각자 차이는 있어도 천국에 들어간 자기 자체는 100% 하나님을 닮은 인격으로만 되어 있기 때문에 진정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사상이 하나님 아버지와 꼭 같고, 욕심도 같고, 취미도 같고, 사업 구상도 같고, 사업을 위해 움직이는 활동도 하나님 아버지와 꼭 같고, 사업에 대한 평가도 같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영계와 우주를 맡아 다스리는 이 일에 필요한 지혜와 능력도 하나님 아버지를 꼭 닮았고 아버지와 연결이 되어 있고 아버지가 전부 공급해 주시기 때문에 세상처럼 자본이 딸릴 리도 없고 피로누적이 있을 리도 없으며 대적의 방해는 전부 무저갱 지옥속에 가두어 두었으니,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자본을 공급받고 아버지 지도와 지원을 받아 원도 한도 없이 하게 되는 그 나라가 영원한 '안식'의 천국입니다.
천국은 양노원이 아닙니다. 무의탁 노숙자 합숙소도 아닙니다. 식물인간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중환자실도 아닙니다. 실직자 은퇴자들의 휴게실도 아닙니다. 천국은 세상과는 비교도 못할 엄청난 국책사업이 수도 없이 펼쳐지는 일하는 나라입니다. 그 건설이 영원을 향해 진행되는 나라입니다. 세상처럼 용두사미가 아니라 그 반대로 시작은 겨자씨 한 알 같이 적으나 그 뒤는 갈수록 커지되 성장 중단의 시점도 없이 영원히 자라가는 곳입니다. 그 마침은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심이므로 끝이 없습니다.
4. 그렇게 되기 위해서 오늘 우리에게 아버지 닮은 자녀를 만드는 일이 진행됩니다.
질문하신 히브리어 4장은 구약 출애굽했던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목표로 하나님의 인도대로 걸어갔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바로 순종하고 갔더라면 그들은 하나님 말씀에 의하여 하나님을 닮은 이스라엘이 되었을 것이고, 하나님을 닮은 자녀로 하나님의 목표에 잘 따라왔다면 가나안에 들어가서 천국에서 누릴 안식을 완벽하게 누리게 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가나안 고향에서 다시 살려 살게 하려고 그 준비와 그 과정을 그들에게는 광야생활로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준비한 만큼 가나안에서 평안을 누렸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10% 닮았다면 가나안에서 누리는 안식도 10%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100% 준비한 사람들은 가나안에서 에덴동 산을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전체와 함께 가나안에는 들어갔으나 고라식으로 광야를 통과했던 이들은 가나안 안식 속에 넣어 놓았지만 그들에게는 가나안이 생지옥입니다. 그들은 가나안이라는 지리적 안식처에 들어갔지만 그들 마음과 생활과 신앙에는 전혀 안식이 없었습니다.
이 히브리서 4장은 출애굽 과정을 이런 안식에 대한 준비와 실제 안식을 누린 결과를 잠깐 보이면서 오늘 우리에게 육체의 이스라엘이 실패한 안식 준비를 본받지 않도록 새로운 날 주일로 신약의 안식을 다시 한번 우리 목표로 세워 주시고, 이 목표를 위해서는 예수님 대속이 있어 기본적으로 구원이 주어졌고 그 위에 우리가 광야 이스라엘처럼 건설한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도 역시 구약 이스라엘과 같이 자기의 신앙건설만큼 자기의 안식 확보가 있음을 알리고 우리가 할 일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5. 우리에게 주어진 안식을 얻는 과정과 그 내용을 잠깐 살펴본다면
안식이란,
평안히 쉰다는 뜻입니다. 가장 알기 쉽고 가장 외부적인 면만을 표현했습니다.
죄가 해결되어야 안식이 됩니다. 죄로 죽은 인간의 죄문제를 해결한다는 뜻입니다.
죄 문제를 해결한다는 말은 사죄 칭의 화친 소망의 4가지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죄 문제만 해결한다고 최점{인 안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대속을 힘입어 천국에서 영원히 안식을 누려야 진정한 안식입니다.
중생된 성도가 자기 심신을 말씀에 순종하여 의의 인격과 행위를 만든 것은 이 세상에서도 안식을 그 부분만큼은 미리 가지게 되고, 최후 죽는 날에는 평생의 그 준비한 총량이 바로 그가 가질 안식의 총량이 됩니다.
6. 질문 내용에 집중을 한다면
'히브리서 4장의 안식'은 구약에게 눈에 보이는 가나안 입성으로 인하여 받을 평안과 복이 이 본문이 말씀하는 1차 안식이고, 그들이 실제 얻었던 지리적 안식의 가나안은 광야 40년간 준비한 양에 따라 각자 다릅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 얻을 그 안식은 당시 주변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땅 위의 안식이었으나 그들이 누린 그 지상의 안식은 곧 구약 그들에게 그들이 갈 천국의 보이지 않는 안식의 지표였습니다.
오늘 신약 우리들에게는 가깝게는 매 순간 심신이 말씀대로 사는 만큼 의의기능과 인격이 만들어지고, 그 만들어진 것은 그 부분적으로는 참된 안식을 누립니다. 그리고 평생 만든 의의 기능의 총합은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 하나님 닮은 존재가 되고 그렇게 닮은 양과 종류가 바로 우리의 안식입니다.
바울이 죽는 날까지 달음박질한 것은 살아생전 성도들에게 쉼 없이 닥쳐오는 현실들은 항상 자기 심신을 말씀에 순종하느냐 거역하느냐의 투쟁의 현실로 지나가게 되고 그 투쟁 중에서 순종한 것은 의의 요소와 기능이 되어 완전한 안식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죽기 전까지는 이 투쟁이 잠시도 쉬는 일이 없기 때문에 바울은 '죽는 날까지' 노력했고 '달음박질'한 것은 중간에 조금도 쉴 틈이 없는 현실로 지나가고 있었고 이 준비에는 앞선 자도 방심하면 금방 뒤쳐지고 뒤 선자도 닥치는 현실마다 꾸준히 순종하면 바로 앞서는 이런 편차가 심하기 때문에 쉴 틈이 없었습니다.
바울이 죽고 나서야 안식을 얻었는가?
천국의 최종 안식은 숨이 멈추어야만 그칩니다. 그러나 믿은 이후에 기본적으로 받은 영의 평안이 우리에게는 늘 마 속에까지 와 있고, 또 그동안 믿은 과거에 만들어 놓은 의의 실적이 현재 시점에 내가 누리는 안식에 자본이 됩니다. 과거 순종하고 의의 기능이 된 만큼은 담대했고 평안했고 안식을 누렸으며, 또 지금도 닥쳐오고 있는 현실 속에서 다시 새로 확보해야 할 안식의 분량을 자기 안식으로 확정짓기 위해서는 조금도 한 눈 팔 시간이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