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중보라는 단어 설명 좀 해주세요 3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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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중보라는 단어 설명 좀 해주세요 3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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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질문 : 중보라는 단어 설명 좀 해주세요 3108

1. 갈라디아서 [Galatians] 3장 20절
[개역]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2. 히브리서 [Hebrews] 12장 24절
[개역]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3. 디모데전서 [1 Timothy] 2장 5절
[개역]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4. 히브리서 [Hebrews] 8장 6절
[개역]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5. 이사야 [Isaiah] 38장 14절
[개역]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나의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

6. 갈라디아서 [Galatians] 3장 19절
[개역]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7. 히브리서 [Hebrews] 9장 15절
[개역]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8. 디모데전서 [1 Timothy] 2장 1절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마지막에 디모데전서 2장1절 표준새번역 성경에는 도고대신에 중보라는 단어로 바꾸어서 나오네요


답변 : 양쪽의 중간에 들어가서 양쪽을 연결시키는 역할이 중보입니다.

1. 중보는 중매쟁이, 부동산 소개업자, 사건 브로카라는 뜻입니다.

양쪽에 맞서는 사람이 있을 때, 그 가운데에서 이쪽과 저쪽의 입장을 상대방에게 전달하고 의견을 조율해서 일을 해결하는 것을 '중보'라고 합니다. 양쪽의 사이에 들어가서 다리를 놓아 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연애를 하지 않지 않고 결혼을 하려면 양쪽을 잘 아는 사람이 양쪽을 쫓아다니며 결혼을 성사시키는 중매가 중보입니다. 건물을 사야 하는 사람과 팔아야 하는 사람 중간에 공인중개사가 들어가서 가격을 흥정도 하고 기타 조건을 맞추어가며 계약을 성사시키는 것이 중보입니다. 사고를 쳐서 문제가 생기면 사건 브로카들이 나서서 얼마에 어떻게 합의를 하자고 설득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것을 중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죄 때문에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 사이에 예수님께서 들어가셨고 대신 죽음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아버지와 자녀 사이로 다시 회복시켜 놓았습니다. 이것이 원래 중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중보자가 되셔서 해결해 놓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도나 심방이나 설교를 통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중보자가 아니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중보를 전달하다 보니까 마치 우리가 중보자 노릇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이런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합니다. '중보기도'라는 말이 요즘 유행처럼 사용되는데, 이는 신앙에서 나온 좋은 표현이 아니고 시대 유행을 선도하려고 말재주를 부리는 이들의 폐습입니다.

2. 표준새번역

표준새번역성경은 성경으로 보지 마시고 대충 만든 '주석'으로 읽으셨으면 합니다. 표준새번역성경의 본문 내용을 보시다가 현재 보시는 '개역성경'과 다른 내용이나 표현이 나오면, 성경을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구나 라고 생각하시면 맞을 것입니다. 도고라는 뜻에는 양쪽 사이를 중개하는 뜻도 있고 탄원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재질문 : 중보자라는 단어를 써도 되나요?

디모데전서 [1 Timothy] 2장 5절
[개역]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설교시간 중에 사람마다 중보자가 있다. 중보자를 바꾸면 안 된다.구약의 나단 선지자와 나귀 같이 짐승도 중보자가 될 수 있다.이렇게 말씀하시던데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습니다만 참았습니다. 중보자라는 말 대신에 은혜기관이라는 단어를 써야 될 것같은데요. 디모데전서에 보면 중보도 한분이시니라는 말씀이있는데,

답변 : 기본구원만 아는 일반 교회에서 그 단어를 사용하면 바로 이단이 됩니다.

1. 남을 이단 정죄할 때는 토씨 하나를 들고 나오는데, 자신 들의 발언은 너무 부주의합니다.

어느 교단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반적인 경우로 보고 말씀드린다면, 남을 이단으로 정죄할 때는 전자현미경을 동원해서 먼지 하나를 찾아내는 정교함을 보이면서 정작 자신이 발언할 때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또 교인을 가르치는데 편리함만 좇아 너무 조심 없이 발언하는 것이 우리들 전부입니다.

‘중보자'는 예수님 한 분입니다. 중보자라는 말은 죄를 지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게 하는 ’구주'라는 뜻입니다. 구주가 또 하나 있다면 참 종교가 또 하나 있다는 뜻입니다. 대통령의 숫자만큼 국가의 숫자가 되고, 왕의 숫자만큼 왕국의 숫자가 늘어나가듯이 구주의 숫자가 하나면 유일종교이고, 구주의 숫자가 여럿이면 천국가는 참 종교도 여럿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중보자'라는 표현은 예수님 외에 다른 존재나 일반 사람에게 적용하게 되면 이단 중에 괴수 이단이 되는데 조금도 모자랄 것이 없는 중죄가 됩니다.

2. 물론, 목회자가 강단에서 그렇게 말씀했을 때는 설마 다신교 다 종교를 만드려고 했겠습니까?

이해를 하고 들어가면 이단이 될 만한 분들은 극소수입니다. 이단으로 정죄될 발언을 했다 해도 그 발언의 앞뒤 형편을 살펴보면 어린 신앙을 기르느라고 그 신앙수준에 맞도록 이런 저런 표현을 한 것이라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유치원 선생님이 아이들을 앉혀놓고 '선생님은 너희들 마음속을 딱 뚫어보고 있어!' 이렇게 말한 것을 대학교 캠퍼스에 소개하면

이공계 교수들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교사가 진리를 저버렸다'
법학과 교수들은 ‘공갈 협박죄다. 민형사간 책임을 묻기 위해 법정에 세워야 한다.' 심리학 교수들은 ‘애들 가지고 노네!'

이렇게 각각 평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범대학 교수들은 5-6세 아이들의 발달심리학과 교육심리학 교과서가 그 교사에게 그렇게 하도록 교육을 시켰는데 현장에서 그 배운대로 잘 이행하는 훌륭한 교사라고 할 것입니다.

‘중보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목사님의 교단이나 교회를 두고 질문 내용에서 이단에 속했다는 말씀을 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 일반 교회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중보자'라는 발언의 의미가 잘못 해석되면 어떻게 오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일반 교인이라도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정도이니, 그런 면을 알면서도 그렇게 목사님이 표현했다면, 그 표현이 귀에 거슬리는 점이 있다 해도 그 설교 내용에서 어떤 면을 가르치려고 하는지를 살펴 배우는 것이 교인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3. 설교시간에 교인으로 참석했을 때는, 삼가 은혜 받는 일에만 집중하셨으면 합니다.

바울이 기록한 성경조차도 만일 일반 설교록이라고 생각한 다음 비판을 가하려면 답변자는 바울이 이단이고 배교자라고 수도없이 정죄할 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집중하는 백영희목사님의 설교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질문자는 아직 교인이신듯 한데, 교인으로서 예배시간에 참석했을 때는 설교 분석가로 참석한 것이 아니고, 설교 해설가도 아니며, 설교 감정가로 참석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질문자께는 그 시간 그 예배당에 세운 그 점; 통해 말씀하실 어떤 뜻이 있으니 그를 통해 잘 듣고 그대로 살라는 것이 예배 설교에 참석하는 교인이 가질 자세입니다. 이런 자세로 예배를 참석하여 그 시간에 받을 은혜를 아무 걸림이 없이 잘 받으시되, 혹 소도 먹는 풀 중에 독초가 있으면 그 풀만은 살짝 걷어내고 계속 먹는 것처럼 말씀 중에 바로 먹으면 안 되겠다는 부분이 있으면 살짝 옆으로 제쳐놓고 일단 말씀 은혜에 집중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논란이 될 수 있는 그런 부분은, 예배가 끝난 다음, 여러 면으로 신중하게 잘 살피고 생각하시고, 후회 없이 되새겨보았다고 판단할 기간을 가진 다음, 그래도 꼭 지적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이 될 때는 조심스럽게 목회자에게 '질문'을 드리는 것이 옳습니다.

4. 설교에 대한 지적은 ‘질문' - ’이의' - ‘지적' - ’반론'의 순서로 나가셨으면

현재 이곳 답변자가 설교를 직업으로 가진 목회자이므로 설교를 듣는 입장에 계신 분들께 '듣는 이들의 주의할 점'을 설명하기가 참 불편합니다만,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만 상대하셨으면 합니다.

설교에 대하여 교인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실 때는 '틀렸다!' 하고 나서는 것보다 ‘문제가 있다!'고 발언하시는 편이 지혜롭고 복된 자세라고 보입니다. 그보다는 ’이럴 수도 있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하는 편이 더 낫고, 그것보다는 ‘왜 그런지 설명 좀 해 주시겠느냐?'고 질문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쁘하실 것입니다.

성경에는 말 한 마디 행동 한번 잘못해서 크게 저주받은 이들이 적지 않지만 그 중에 이번 질문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참고할 성경은 창9:20-27입니다. 이곳 홈 /초기화면/활용자료/녹음본/에서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해당 본문을 찾아 관련 설교를 찾아보셨으면 합니다. 특히 81년에 관련 설교가 집중되어 있음을 참고하셨으면 합니다.

목사님의 설교 내용 중 틀린 곳이 있다 해도, ‘틀렸습니다' ’혹, 이런 것이 아닌가요?' ‘이 부분은 좀 이상한데요' ... 어떻게 표현을 해도 내용은 꼭 같습니다. 만일 그 목회자를 지도할 위치에 있다면 강하게 말할수록 좋고, 그 목회자에게 지도를 받는 위치라면 약할수록 좋습니다. 물론 목회자 본인은 본인의 잘못을 지적하는 상대방에게 가장 빠르게 강하게 단호하게 반론을 받는 것이 복입니다.

5. 질문하신 표현, ‘중보자'는 건설구원 교리 범위에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기본구원 밖에 알지 못하는 일반 교리체제의 교회에서 만일 예수님 외에 ‘중보자'라는 표현을 하신 분이 있다면 누구에게 이단이라 지적을 받아도 거의 할 말이 없어야 합니다. 그 단어가 가지는 교리적 범위는 달리 해석할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곳 신앙노선처럼 건설구원론을 가르치는 목사님이 중보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 지옥 갈 우리를 천국 가도록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죄인 사이에 중보자가 되셨고, 이제 예수님과 같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예수님 믿도록 평생을 노력해야 하는데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는 중보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중보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므로 마치 우리 때문에 그 사람이 죄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되는 그런 역할을 하라는 뜻이면 바로 가르친 것입니다.

이것이 기본구원적으로 우리도 중보자라고 표현되는 경우인데 이런 표현은 그 사용 범위가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 대신 건설구원적으로는 마치 우리보다 신앙 어린 사람을 신앙으로 인도할 때 우리는 마치 예수님이 중보자로 사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할 내용이 거의 전부입니다. 건설구원에서도 다른 사람을 신앙의 사람이 되게 하는 힘은 오직 예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지만, 건설구원에서는 우리의 노력과 수고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 면을 두고 눅14:27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중보입니다. 십자가를 진 분은 예수님이고 예수님의 이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구원 받았으며 예수님은 유일하신 중보자입니다. 그 중보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닮고 따르는 제자가 되어 예수님과 같이 다른 사람 구원 위해 자신을 희생하라고 합니다. 이때 말하는 우리의 희생은 예수님이 해결하지 못한 면을 보충한다거나 아니면 예수님과 같은 위치에서 죄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구원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는 일에도 마치 예수님과 같은 십자가 희생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6. ‘은혜의 기관'이라는 표현이 더 낫다 하시는 말씀은 이해 합니다만.

이곳은 일반적으로 은혜의 기관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기관이라는 표현과 중보자라는 표현은 그 단어 자체가 듣는 사람에게 주는 교훈에 있어 차이가 확실하게 있습니다. 중보자라는 단어는 워낙 신학적으로 큰 문제가 되곤 하는 민감한 단어이므로 그 단어를 사용할 때는 대단히 조심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 단어 자체를 사용하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그 설교 시간에 그 단어를 사용할 때 앞뒤 내용이 오해 없도록 잘 보충되었느냐는 것은 그 설교 전체를 들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으나, 실은 그 설교를 들어본다 해도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평소 그 교회 교인들에게 그런 면에 대한 교훈이 있었다면 그 시간에 또 다시 부가 설명을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 그 시간 외에 부가 설명을 한 적이 없다 해도, 그 설교를 듣는 이들이 그 정도는 알아들어야 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설명 없이 핵심만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해도, 설교자는 조직신학을 강의하는 것이 아니고 예배 시간에 어린 신앙을 기르는 가정의 어머니 같은 분이므로 사실 못할 말이 거의 없는 위치입니다.

7. 질문과 별개로, 질문자께 한 말씀드렸으면 합니다.

① 가볍게 한 마디씩 적는 표현에도 생각을 하셨으면

질문하신 내용 외에 질문자의 표현 자체를 두고 말씀드리게 되어 죄송하지만 이곳 여러번 문답을 통해 안면이 있다 생각하시고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글을 적으실 때 ‘에효..'를 좋아하시는 듯 합니다. 몇 차례 계속 사용하고 계시는데 답변자에게는 '한숨'처럼 들립니다. 고갯길을 한참 올라가다 이제 저 모퉁이만 돌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다시 다른 고개가 나오면 저절로 입에서 한숨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한숨이란 한번의 호흡을 의미하는데 긴장 끝에 내쉬는 한 숨은 그 사람의 긴장된 심신에게 모처럼의 휴식을 제공하게 되어 참으로 심기일전할 수 있는 좋은 생체 기능입니다.

그러나 이 ‘한숨'이 한번의 숨으로 그치지 않고 반복이 된다면 심기일전으로 다시 뛰어오를 힘을 보태주는 것이 아니고, 꾸준하게 힘을 사용해야 하는 고비마다 습관적으로 김을 빼버리는 작용을 하게 됩니다. 압력밥솥의 김을 어느 한 순간에는 적당히 빼버려야 기막힌 밥맛을 내는데, 오히려 압력을 높여나가야 하는 초기부터 습관적으로 김을 계속 빼버리면 죽도 밥도 아닌 설익은 이상한 밥이 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습니다.

심신의 긴장을 꼭 필요한 순간에 풀어주며 재충전의 기회로 삼는 한숨을, 자주 사용해도 좋다고 생각하여 의도적으로 몇 번 반복하게 되면 피로를 풀고 재기를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피로가 잘 쌓이는 피로형 인격이 되어버립니다. 속으로는 그렇지 않은데 그냥 가볍게 말 한 번 해봤을 정도로 이런 표현들을 하는 분들을 이곳에서 종종 뵙습니다만 속으로 늘 염려입니다. 말씀을 하는 분은 뜻없이 하시지만 자기 입에서 나가는 표현이 반복되면 그 표현대로의 실제 인간이 되어버립니다. 적어도 그런 방향으로 자신도 모르게 고정되어 갑니다. 재고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② 요즘 문자 대신에 그림으로 재미있게 표현하는 분들을 많이 뵙고 있습니다.

질문자께서 사용하시는 그림들입니다.

-ㅁ-;;

중학생>ㅁ<

한 권의 책을 한 컷의 그림이 대신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선 한 두 가닥으로 그려놓은 삽화 속에 함축미와 편리함, 그리고 재미까지 더해지면 책 한권보다 훨씬 상대방에게 전해지는 감동이 강하겠다고 생각하는 그림을 신문에서도 종종 보고 있습니다.

이런 그림들이 책 한 권보다 더 강하게 사람들을 끌게 되는 것은, 그 그림이 나오게 된 그 사람의 생각이 그렇게 깊기 때문입니다. 책 한 권을 적는 수고보다 더 큰 수고와 더 많은 지식과 더 깊은 생각을 가졌을 때 그렇게 한 컷의 그림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제일 외부로는 그림 한 컷이지만 그 그림 한 컷 속에는 아주 깊은 생각의 저수지가 버티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최근 글 대신 그림을 사용하는 것이 젊은 분들과 어린 학생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완전히 일상 대화에 포함되고 있는 정도입니다. 이들의 재미있는 그림 표시는 표현의 재미와 편리함은 있지만 그 대신 함축미의 깊이는 너무 얕은 것 같습니다. 할 말이 너무 많은데 시간이 없어 그림 한 컷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깊은 생각이나 지성이 없고 오로지 감각적인 수준에서만 사는 얕은 시대이므로 그림이 일상화 되어 간다는 느낌이 많습니다.

이 문제를 두고 이곳 신앙연구 홈에서 집중적으로 말씀드리는 이유는, 요즘 젊은 분들처럼 그림을 자주 사용하는 경우가 되면 그 사람의 생각 깊이를 얕게 만들고, 그 생각의 깊이가 엷어지면 마음 깊은 곳, 골방에서 겨우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을 상대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이것이 이곳의 탄식입니다.

이제는 함축성, 재미, 편리함 때문에 간간히 사용하여 효과가 있는 그림이 아니고 그림의 남발로 인하여 그림이 문자를 대신하는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표현 과정을 말씀드린다면, 사람이 우선 생각을 많이 하고, 그 많은 생각 끝에 정리된 몇 마디가 말이나 문자로 표현이 되어야 하며, 또한 많은 말로 해야 할 일을 한 컷의 그림으로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지금 젊은 분들과 학생들의 그림 표현은 글을 적을 수 없고 적지 못하고 또 글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조차 하지 못하게 되어 미개인의 표현 방법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지금 여러 과학과 편리한 기술의 발달로 생각을 깊게 할 여유가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기계와 다른 것이 효율성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판단과 선택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표현이 되어야 사람이 깊어지고 인격이 온전해지며 깊은 생각에 중점을 두어야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을 자꾸 만나게 될 터인데, 인간이 내면으로 들어가는 대신 자꾸 외부로 나가고 있습니다.

보고 듣는 외부 존재만을 상대로 자꾸 나가다 보니까 깊은 생각보다는 얕은 감각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체질로 바뀌고, 이런 생활 방식의 변화 때문에 세상생활에서 인격적으로 얕아지는 손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상대하는 일이 멀어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귀에 들리는 것만 듣게 되는 방향으로 나가는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은 결론적으로 하나님과 멀어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말세지 말인데,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바로 말세 현상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한 말세 정황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문제들입니다. 비록 작아 보이지만 이런 사소한 것에서 복음의 중심 밑받침이 허물어지게 됩니다. 신앙의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이므로 답변자의 개인 느낌까지 답변에 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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