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믿음의 도(유1:3) 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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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믿음의 도(유1:3) 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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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질문 : 믿음의 도(유1:3) 3127

유1:3절의 믿음의 도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영어성경을 보면 믿음의 도를 faith로 표가하고 있습니다. 다른 주석을 찾아보면 믿음의 도를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 할 때 값없이 주어지는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는 진리를 가리킴 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하나님을 믿는 믿음 자체가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믿음의 도 앞에 단번에 라는 말과 결합하여 그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혹시 이 홈페이지에서 말한 단번구원 완전구원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다른 주석의 내용입니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 ‘성도’에 대해서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음을 전달받은 사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나 교회를 설립한 사도들에게서 복음을 받아들인 교회의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행 9:13,32,41 ; 롬 12:13 ; 히 6:10). 왜냐하면 신약 성경에서 ‘주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도데이세’는 ‘받는다’라는 의미를 지닌 ‘파라람바네인’과 한상을 이루어 사도가 주고 그리스도인이 받아들이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고전 11:2,23 ; 15:3 ; 갈 1:9 ; 빌4:9 ; 골2:6 ; 살전2:13 ; 살후2:15; 3:6). 한편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에서 ‘믿음의 도’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에 의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진 복음, 즉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내용을 의미한다(행 2:42). 이러나 믿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도들에게 전해지고 사도에 의해서 교회의 전해진 기독교 구원의 중심 메시지는 단번에 전해진 것으로 결코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유다는 복음의 불변성(不變性)을 강조함으로 거짓 교사들이 변질되고 왜곡된 거짓 진리를 전하는 것에 대해 암시적으로 경고하고 있다.

참고로 질문하는 것인데 여기 백영희신앙연구 홈페이지와 지금 교계의 다른 주석과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차이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다른 주석들을 보면 그때의 시대적 환경을 그 서신이 쓰여진 배경을, 그리고 원어 중심으로 많이 하지만, 여기 이 홈페이지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또한, 이 홈페이지에서 성경을 해석 할 때 어느 한 구절만 가지고 와서 갖다 붙이는 것 같습니다. 전체맥락에서 해석하지 않고 어느 한 구절만 가지고 와서 필요한데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요일5:18절을 여기 홈페이지에서는 삼분론의 증명으로 삼았지만 다른 주석서를 보면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앞절과 관련시켜서 믿는 자들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2)혹자는 ‘범죄치 아니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크 하마르타네이'가 현재에도 계속되는 동작을 나타내는 현재시상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믿는 자는 계속 반복 되는 범죄나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우리가 아노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다멘'은 18-20절에 걸쳐 세 번 사용되고 있다. 이 ’오이다멘'은 지식으리 활동 상황을 나타내는 ‘기노스코'('알다')와 달리 주로 지식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본절에서 영적 지식의 확실성을 한층 더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 본절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호겐네데이스 에크 투 데우)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1)상반절의 '난자'(게겐네메노스)는 완료 분사형인 반면에 본문의 '나신 자'(겐네데이스)는 부정 과거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이라는 특별한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기 때문이며, (2)'나신 자'를 예수 그리스도로 보아야만 문맥상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개념은 신약성경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요17:12; 벧전1:5; 유1:24). 요한도 역시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악과 사단의 영향력에서 보전하실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요17:12,15).

이와 같이 일반 교계의 성경해석과는 판이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둘 중에 하나라 생각합니다. 일반교계가 거꾸로 가고 있거나, 여기 이 홈페이지가 거꾸로 가고 있거나 겠죠. 기분이 안 좋으셨다면 죄송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답변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방문인 언급 : 믿음의 도에 대하여

(다른 주석들을 보면 그 때의 시대적 환경을 그 서신이 쓰여진 배경을, 그리고 원어 중심으로 많이 하지만 여기 이 홈페이지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신학생이니 주석 책과 설교 집 차이 정도는 아실 겁니다. 여기 홈페이지 이름에 <목회연구소>라는 이름이 붙어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서 요일5:18절을 여기 홈페이지에서는 삼분론의 증명으로 삼았지만 다른 주석서를 보면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삼분론 색안경으로 봐야 요일5:18절을 풀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분론이 요일5:18절을 포함한 요한일서와 더 나아가 요한복음을 푸는데 더 편리할 겁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는 영육구분이 다른 어떤 책보다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신학생이니 요한복음이 왜 뒤늦게 정경으로 채택됐는지 아실 겁니다.

2: 두 단어를 사전에서 풀이한 것을 옮긴 후 (이와 같이 일반 교계의 성경 해석과는 판이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해석이 어떻게 무엇이 판이하게 다른지 전혀 설명하지 않고 있답니다.

3: 그리고 유1:3절의 믿음의 도를 언급하다. (혹시 이 홈페이지에서 말한 단번구원 완전구원과 관련이 있는건가요?) 혹시 단번구원=완전구원 의미에서 (단번구원 완전구원)이라고 붙여 쓰신 것은 아니겠죠. 왜냐하면 백영희 목사님은 단번구원과 완전구원을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다서를 꼼꼼히 읽어도 단번구원과 건설구원을 구별할 수 있답니다.

1+2: (난 자)라는 표현이 요한복음에서 자주 쓰인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3).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8). 여기서 무엇과 무엇으로 이분됩니까? 일반적(세상적)인 이분은 몸과 마음으로 이분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사람의 뜻(1:13)과 육(3:6)을 한 범주에 넣고 있답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세상적)인 이분으로 위 구절을 쉽게 풀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요일5:18은 요일1:7-10 및 요일3:4-10과 set로 읽어야 균형을 잡을 수 있답니다(만일 요일5:18만 달달 읽다보면 단번구원=완전구원 이단에 빠질 위험이 있답니다). 요일3:4-10에서 (난 자)는 (속한 자)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답니다. 님이 애써 옮겨놓은 글에서 알 수 있듯 (난 자) 시제가 완료 분사형 입니다.
완료 분사형인 것이 천만 다행입니다(이를 통해 단번구원=완전구원 이단을 배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그리스도 대속 사건으로부터 끊임없이 영향 받고, 끊임없이 지배 받는 사람은 범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은 잘 잊어먹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대속 사건과 전혀 상관없이 살 때가 있답니다. 그 때는 범죄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3. 유다서에서 두 가지 구원을 소개하고 있답니다. 하나는 (일반으로 얻은 구원...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1:3)이고, 또 하나는 1:19-23에서 소개하는 구원입니다.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일반으로 얻은 구원) 쉬운 표현으로 천국행 ticket을 일반으로 얻게 됩니다. 백영희 목사님 표현대로 기본구원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1:19-23에서 소개하는 구원은 성화구원이며, 백영희 목사님 표현대로 건설구원을 가리킵니다. 고로 구원을 구별할 필요가 있답니다.


답변 : 우선 /초기화면/활용자료/주해사전/에 누락된 유다서 3절을 소개합니다.

1. /초기화면/활용자료/주해사전/에 누락된 내용을 우선 소개 합니다.

질문하신 유1:3 말씀은 이 홈의 ‘주해사전'에 들어갔어야 할 내용인데 빠져 있어 우선 이곳에 간단하게 소개하고 또 다른 분에게 부탁하여 '주해사전'에 유다서 내용 중 빠진 부분들을 빨리 보충하겠습니다.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던 뜻이 간절하던 차에]

(예수님을 일반적으로 미든 일반적 신앙 상식 이것처럼 일반적으로 예수 믿는 일반적 상식 보통 상식 말이요. 신앙 상식을 말하려 했는데 차에 무엇이 하나 발견됐느냐 하면,)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제는 [단번에 주신 이 믿음의 도], 그러면 이 믿음이라는 것은 단번 효력이요 그 현실에서 믿어야 효력이 나오지, 현실 지나가면 그만 헛일입니다.

현실 현실마다 해당되는 순점L 있다 말이요. 그 순점: 단번에 순종해야 되요. 오늘 못한 것 내일하고 그렇게 안 됩니다. 이것이 중요한데 일반적으로 신앙상식을 말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앙상식보다도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단번에 주신 도리를 모르고 그만 오늘 못 믿으면 내일 믿지 자꾸 그러면 그거는 다 헛일되고 말아요. 이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일반상식으로 주는 것보다 이것이 좀 시급해서 편지한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단번에 주신 도를 위하여]

(단번에 주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단번에 제물이요 구약에 있는 모든 제사는 수백년 수천년 내려오면서 드리는 제사를 예수님은 단번에 대속하셨습니다. 단번 대속하신 예수님의 대속은 우리에게 효력도 단번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니까, 그 시간에 얻어야 될 이 대속을 힘입어 구원을 이루어야 될 그것을 현실에 그 시간에 못 이루면 영원히 두 번 안 돌아옵니다.)



[도리를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이 믿음을 몇 가지로 생각하지요?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뭡니까? 마음으로 믿는 것. 마음의 믿음은 무엇이지요? 인정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신구약 성경을 발표해 놓았습니다. 발표한 그것을 참으로 자기가 확인하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도입니다.

우리 믿음의 도라 그 말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확실히 인정하고 행해야 되는 도이고, 또 행해야 걸어지는 것이지, 인정과 행함 둘 중에 하나만 있어도 안 되고 인정과 행함은 마치 두 발과 같습니다.

오른 발 한 짝 떼고 왼 발 한 짝 떼놓고 자꾸 이렇게 그 이 둘이 하나가되어야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냥 논리나 무슨 이런 것 가지고 안 됩니다. 이 도는 실지로 행하지 안하면 걸어가지 않습니다. 마치 자기가 한 자국 떼놓지 안하면 늘 거기 섰지 전진이 되겠습니까, 후퇴가 되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인정하고 실행하는 그것이 있어야 비로소 길이 걸어지는 그런 범위고)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단번이니까 단번 지나가면 헛일이라 말이요.

이러니까 자꾸 악령이 와 가지고 내일로 미루고 모래로 미루고 명년으로 미루고 뭐 장래로 미루게 합니다. 무엇을 해 놓고 하겠다 해서 자꾸만 미루게 해서, 단번을 마구 다 도적맞도록 이렇게 만드는 이것이 어떻게 시급하던지 지금 내가 너희들에게 일반적으로 믿는 도리를 너희들에게 편지해서 일반 신앙 상식을 가져야 되겠다하는 그 마음이 간절하던 차에 또 하나가 나왔다는 말입니다.

간절하던 차에... 새것이 하나 나와 가지고 그것보다 지금 단번에 주신 이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가 더 긴급하기 때문에 이 편지한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2. 질문 중, 교계 일반 주석과 이곳 성경 해석의 차이점에 대 하여

정확히 보시고 바로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이곳은 일반 주석과 그 해석하는 접근법과 자세를 뚜렷하게 달리 하고 있습니다. 우선 ‘주석'치고 원어와 성경 기록의 고고학적 시대 환경을 빼놓는 경우는 보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이곳은 성경 해석에서 원어와 성경 기록의 고고학적 배경을 설명하는 경우는 극단적인 경우 외에는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원어나 성경의 고고학적 시대 배경을 ‘신학'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고 또한 성경 해석은 가장 일반적인 교인이 자기 생활환경에서 실행하며 연구하면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일 원어나 신학적 전문 지식이 성경 해석의 필수 요소라 한다면 이곳은 그 성경해석법은 그 출발 방향이 아주 틀렸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노력해서 바른 해석이 나온다는 것은 거의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원어나 성경 고고학적 시대배경을 인용할 때는 이미 일반 교인에게까지 상식이 된 정도 몇 가지만 가끔 참고로 제시할 뿐이고, 실제 성경 해석에 필요한 내용은 성경 자체와 그 성경 말씀으로 실행하는 현실을 가지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이곳의 이런 성경해석법이 진정한 성경해석학이라고 믿고 있으며 원어나 성경고고학적 전문 지식이 전제된 현재 모든 교계의 성경해석학은 중생으로 인하여 영안이 열린 성도들에게 원어와 신학이라는 소경용 썬그라스를 씌우는 우매무지라고 생각합니다.

3. 이곳 성경 해석이 어느 한 구절만 가지고 갖다 붙이는 것 같다는 말씀에 대하여

누가 오셔서 그렇게 말씀하셔도 그렇게 평가할 정도로 이곳 성경 해석은 성구 여기저기를 마구 끌어다가 임시 땜방 하는 것으로 보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혹 성경을 많이 읽으시고 또 성경해석에 있어 많이 고민해 본 분들이 이곳에서 제공하는 설교 자료를 보신다면 한 눈에 이곳에서 제공하는 설교 자료는 교회사를 통틀어 첫손에 꼽아야 할 자료라고 평가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 외에 존재하는 기독교 관련 모든 서적 중에서 한 종류만 남겨야 할 선택의 순간이 주어진다면 이곳에서 제공하는 설교록을 서슴없이 택할 차원의 자료라고 이곳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너무 엉성하게 갖다 붙인 성경해석이라는 평가도 이곳은 인정하고, 또 기독교계 최고의 자료라고 평가해도 이곳은 인정합니다. 이유는, 이곳 자료의 실제 가치가 두번째 말씀드린 경우처럼 칼빈 주석을 훨씬 능가하고 있지만, 이 자료를 누가 읽어도 그렇게 인정할 만큼 잘 요약을 해놓아야 하는데 이 자료가 너무 방대하여 몇 사람이 평생을 바쳐 정리해야 할 분량이어서 원석 그대로 이곳에서 공개하기 때문에 아는 분은 천하에 처음 만난 보배로 접할 것이고, 보석의 성질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볼 때는 잡석으로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곳에 진열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곳 홈에서 제공하는 자료나 또는 이곳 홈의 운영상황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분 같지는 않습니다. 동시에 이곳 자료나 홈의 운영상황을 자세히 파악하시는 분도 아닌 것 같습니다. 우선, 이곳에서 제공하는 자료를 우연히 몇 번 뒤지다가 너무 엉성한 부분이 많은 것으로 보셨다면, 이곳 답변자이며 운영자로서 질문자께, 이곳 자료를 충분히 살펴볼 시간을 가지시도록 요청합니다.

물론 바쁜 세상에 기독교서점에 진열된 수많은 주석들로부터 깔끔하고 조리 있게 잘 설명된 해석을 접할 수 있는데 굳이 난지도 쓰레기장 같은 이곳에서 고물 몇 개 주워보시라고 들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보수교계 깊은 곳에서 알만한 분들은 ‘백영희'라는 이름 석자 앞에 성경을 두고는 감히 말을 제대로 붙이는 이들이 없다는 점을 참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최근 한해 수천명씩 배출되는 신학도들의 수준과 현재 수만명에 이르는 젊은 목회자들의 평균 수준으로 본다면 이곳 설교 자료는 분명히 난지도 쓰레기장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국교회사 교과서에서 접할 정도의 인물들은 성경과 설교에 관하여는 백영희의 이름을 인정하는데 별로 주저한 적이 없습니다.

한국보수교계에서 성경해석에 관한 한 아직까지 박윤선의 이름 앞에 다른 이름을 두는 경우는 본 적이 없습니다. 해방 전부터 세계 신학계를 두루 다니며 정통 성경신학을 습득한 박윤선이라는 한국 최고 성경학자와 덕유산 골짝에서 초등학교 5학년만 공부한 백영희라는 인물은 지금부터 약 50여년전에 부산에서 대단히 가깝게 접촉하며 성경으로 토론한 것이 많습니다. 오종덕목사님이라는 분도 성경에 관하여는 박윤선목사님이 존경하던 분이며 백영희목사님과 그렇게 가까웠던 분입니다. 이 외에도 오늘 한국교계의 판도를 결정짓는 일에 중심에 섰던 해방 후 출옥성도 거의 전부가 백영희목사님과는 지근거리에서 교류했던 이들입니다.

현재 한국교회의 보수계열 교계에서는 교파를 초월하여 각 교단에서 이름 있는 신학자나 지도자들이 이제 설명한 인물들의 제자들이거나 아니면 그들의 노선 상에서 신학과 신앙을 쌓아 나온 분들이 대부분인데 이런 분들의 경우는 ‘백영희'라는 이름을 성경에 관한 한 최고의 권위가 아니면 대단히 특별한 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일반 여론에 대하여는 참고만 할 뿐이지 그렇게 권위 있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번 질문자께서는 이곳과 달리 교계의 권위 있는 분들에 대하여 신임하시는 성향 같습니다. 하여, 질문자께 백영희 설교 자료에 대한 평가를 재고해 주시라는 뜻으로 몇 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었으면 좋겠으나, 교계에서 그분들이 가지는 명예와 권위를 고려해서 이곳은 사석이 아닌 자리에서는 최대한 이름 공개를 삼가하고 있습니다.

이곳 답변자는 백영희 설교자료 출간에 현재 만 22년을 넘기고 있습니다. 이 설교 자료에 매료되어 백영희 설교 자료라 하면 휴지통에 버릴 자료라도 확보하고 싶다는 분들, 이곳에서 제공하는 자료 일체를 원하는 분들, 심지어 현재 한국 교계 최고의 지도자 중에 한 분은 총공회와 서부교회 그리고 이곳 연구실보다 몇 년 앞서 백목사님 자료를 대거 확보하고 나선 정도입니다.

이곳 설교 자료를 누가 와서 봐도 첫눈에 귀한 상품으로 알아 볼 수 있도록 포장과 안내문을 잘 적어두지 못한 것은 전적 이곳 운영자의 잘못입니다. 이곳 운영자의 능력이 부족하여 귀한 자료를 천하게 보이게 했다는 자책감은 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 운영자 능력 범위로는 설교 자료의 맛깔스런 전시작업에 앞서 교리 작업 등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고, 또 설교 자료는 그 포장 과정에서 그 내용이 일부 맛을 잃을 수 있어 차라리 그런 핑계를 대고 그 설교 그대로 두고 있는 편입니다.

이 설교의 진미를 보신 이들은 이 설교 자료에 맞춤법 교정을 보는 것도 입맛 떨어지게 한다고 질책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참고해 주시고 재고하시기를 요청합니다.


4. 예로 드신, 요일5:18 해석과 관련하여

이 성구에 대한 해석은 이미 지금부터 50여년전, 박윤선목사님이라 하는 한국보수교계 최고의 주석가와 백목사님이 오랫동안 대치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해석은 어떤 성경학자의 어떤 주석으로도 바로 해석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은 백영희삼분론과 중생된 영의 범죄문제 그리고 건설구원과 기능구원론을 두루 파악하지 못한다면 겉돌고 말아버리는 성구입니다. 현재 이 교리들을 전부 밝혀 성경 해석에 적용하고 있는 이는 백영희 한분 뿐입니다. 질문자께서 인용하신 문법적 해석은 보수 교계에서 전통적으로 가장 흔하게 제시되는 해석법입니다.

일반 교계 입장을 요약한다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중생된 성도'들이고, 중생된 성도들은 ’습관적으로나 반복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해석이 박윤선목사님의 입장이고 그분의 그런 입장은 보수 정통 주석들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답변자는 박윤선목사님의 주석에서 이 해석을 접하기 전에, 현재 한국의 보수교계를 대표하는 고신대학원과 총신대학원에서 '성경신학'에 관하여는 가장 인정하는 미국의 카브난트 신학교의 성경학자들과 직접 대화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 역시 박윤선목사님과 같은 입장입니다. 참고로 주석의 박윤선, 조직신학의 박형룡은 자신들의 독창적 주장이 거의 없고 오로지 해외 보수 정통 학자들의 입장을 총집합 시켰다고 보시면 됩니다.

간단하게 이 주장을 반론하겠습니다.

이 주석에 의하면, 해방 전 5-6년 기간 동안 한국교계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한국교회 총회 지도자들과 신학자들로부터 시골 교회 이제 막 중생되고 예배를 출석한 어린 교인에 이르기까지 신사참배를 습관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했습니다. 그들은 교계의 이 정통 주석에 의하여 전부 지옥 갈 자들이고 그들은 교회는 출석했으나 가만히 들어온 불신자들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신사참배는 가끔 한번씩 불쑥 하라고 들이민 것이 아니라, 총독부에서 조선 기독교 교인들의 의식화를 계획해서 치밀하고 악착스럽게 탄압하며 계속해서 범죄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한국교계 그 유명한 목사님들이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일본 태양신 이름으로 세례를 새로 받는 장면은 사진으로도 남아 있습니다.

오늘 교계 지도자들이 100%는 아니라 하지만 총회장 노회장 등 각종 교권직 선출에 금품살포와 각종비리가 난무하여 제비뽑기로 대표를 뽑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한국교계 최고 보수교단으로 알려진 고신이 교육부로부터 관리권을 회수당하고 그 동안 숨겨진 장기간의 비리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런 죄들은 평생에 한번 깜빡 실수하여 범한 죄가 아니라, 아예 펴놓고 마음껏 저질렀던 죄이고 또 조직적으로 지속적으로 지능적으로 범한 죄들이었습니다. 총회장 당선을 위해 돈을 주고 표를 샀고, 또 돈을 주고 표를 넘겼던 양 당사자들은 고의로 죄를 지은 이들입니다.

한 교단에서 양대 파벌이 수십년 지속적으로 교권 암투를 벌인 것은 '지속적이고 습관적이며 반복적인 죄'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종류의 죄를 짓는 이들은 전부 중생조차도 되지 않은 불신자요 그 지속되는 범죄 상태에서 죽는다면 전부 지옥행이라는 말로 이어집니다.

그들을 천국으로 보내기 위해 백영희 구원론이 제시된 것이 아닙니다. 백영희 신앙노선은 처음 믿던 초기부터 신사참배를 반대했고 해방 후 그의 평생 걸음이 교계 교권과 가장 많이 투쟁했고 가장 혹독한 대가를 치렀던 인물입니다. 그들의 행동은 잘못이었으나 그들의 그 행동이 비록 지속적이고 반복적이며 습관적이었다 해도 지옥 갈 죄가 아니라는 것이 성경이므로 성경해석에 의하여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한 이는 바로 백영희 구원론이고, 그들 자신들의 구원론에 의하면 그들은 전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교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주기철목사님이 신사참배 거부를 했다 하여 한국장로교 총회로부터 제명당한 후, 그 조처가 잘못 되었다 해서 총회로부터 다시 철회가 되고 주목사님의 장로교 내 위치가 원상복구 된 것이 불과 1990년대 입니다. 해방 후 장장 40년이 넘도록 한국교회 어느 장로교 교단에서도 주기철목사님은 신사참배를 반대했기 때문에 목사직에서 제명한 것이 옳다고 밀어붙이고 오늘까지 나온 것입니다. 이 죄는 한국교회 전체가 지은 죄입니다. 이런 죄 하나를 가지고 질문하신 요일5:18을 질문자께서 소개하신 주석으로 해석한다면 한국교회는 고신교단과 이곳 백영희 신앙노선 관련 교단 등 극 소수 교단 외에는 전부 천주교와 같은 가짜 교회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교계적인 거창한 죄로 예를 들 것 없이, 우리는 자기 가족 중에서 또는 자기가 신앙으로 지도하는 어린 사람들 중에서, 또는 자기 교회 신앙 식구들이나 심지어 목회자들을 상대하면서, 면밀하게 그들의 잘 드러나지 않은 단점들을 두고 잠깐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나도 그렇고 남도 그렇고, 우리는 깜빡 실수로 짓는 죄도 많지만, 대개 우리가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하여 늘 싸워야 할 죄들은 대개 습관적 반복적 죄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목회자 때문에 그 목회자 얼굴만 보면 속에서 미운 마음이 생기는 교인들을 겪어 보신 적이 없는지요? 교회들마다 목회자와 맞지 않는 교인들에게서 흔히 보는 현상이 아닌가요?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라고 6계명으로 말씀했습니다. 믿는 가정에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한 교회를 다니며 속으로 미워하기를 수십년 지속하는 권사님 집사님들을 보지 못하셨는지요? 한 교회에 김장로님파와 박장로님파로 나누어 주도권 경쟁을 하는 것은 전혀 보신 적이 없는지요? 그분들이 세상 말로 대통령 선거를 선의로 경쟁하듯 좋은 마음으로 순수하게 경쟁하고 지고나면 상대방에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과 사랑을 보내듯 교회내의 주도권 다툼도 그러하던가요?

심지어 부부끼리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서 다투게 되면, 이는 거의 다 습관적 반복적 죄입니다. 늘 함께 살기 때문에 전혀 새로운 문제 때문에 싸우고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습관 때문에 또는 남편의 말버릇 때문에 그런 면이 고쳐지지 않아서 오랜 세월 반복하고 있습니다.

5. 이 모든 문제들을, 수양 높은 학자들이 해석하다 보니까 일이 난 것입니다.

우리 평범한 교인들은 솔직하게 이제 말씀드린 이런 습관적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신학적 배경과 원어 해석과 성경 고고학적 환경은 몰라도 요일5:18 말씀이 만일 반복적 습관적 죄를 말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중생되지 않은 불신자들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접촉하는 이들은 전부 불신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해석이 나오는 것은, 원어와 신학에 조예 깊은 학자들은 사람을 전도하느라고 골목과 가정집 안 마당을 들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고 그 대신 대학교 연구실의 책 속에만 묻혀 세상 물정을 모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자기들처럼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죄는 짓지 않는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인격이 고매하며 지성적이고 자기감정을 통제하는 이들이며 수양이 높은 분들이어서 자기들 기준으로 생각하면 일시 실수로 죄를 짓는 수는 있어도 어떻게 예수님의 대속을 생각할 때 믿는 사람이 그렇게 반복적으로 또 습관적으로 죄를 짓겠느냐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된 대로 남을 보는 것입니다. 이곳은 본질이 나쁜 사람이고 믿은 이후에도 습관적으로 짓는 죄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사람이어서 바울처럼 죄인 중에 괴수이지만, 이곳과 반대 입장에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주석을 저술한 분들은 믿는 사람이란 그런 죄를 지을 리가 없다고 동사의 현재 시제가 뜻하는 바를 문법책에서 발견해놓고 그것을 성경해석의 잣대로 들이댄 것입니다.

죄송하지만, 학자들의 죄는 평소에는 없는 듯해도, 환란이 닥쳤을 때 학자치고 환란을 이긴 경우는 희귀합니다. 그들은 책 속에 숨고 현실을 도피한 상태로 유지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눈에 드러나는 죄와 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그들 세계에서 짓는 죄가 일반인들이 알지 못하는 광범위한 종류가 있습니다.

6. 질문 말미에 주신 말씀에 대하여 동의합니다.

교계와 이곳은 아주 반대로 나가고 있다고 평가하신 것은 이해합니다. 이곳이 옳다면 교계의 진행 방향은 180도로 전환을 해야 하고, 교계의 진행 방향이 옳다면 이곳은 대단한 착각으로 살고 있을 것입니다. 아마 정신병원에서 집중 치료를 받아야 할 중증일 것입니다.

질문자께서 이 홈이 잘못 가고 있을 수 있음을 지적하시고 이곳 답변자가 기분이 상할까 위로까지 해 주신 배려는 감사하나, 이곳은 이미 오랜 세월 이단이라는 표현이 오히려 귀에 익어 있고, 이곳의 이름도 '00교회'가 아니라 '백파'라고 일반 교계가 부르는 정도입니다. 이곳은 그런 비칭까지도 애칭으로 받아 이곳 홈의 이름을 정할 때 '백파 홈페이지'라는 뜻으로 ‘paikian' ’paikist' 좀 줄여서 ‘pkist'라고 하고 있습니다.

좀 논쟁적인 질문이나 반론을 대할 때,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글을 단장시켜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보다 전하고 싶은 내용을 바쁘게 적다 보니까 읽는 분들이 이곳에 반론을 했다가는 실컷 욕을 얻어먹는 것처럼 표현이 되어지는 것 같아 늘 죄송합니다. 오히려 답변을 읽어야 하는 질문자께서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곳은 자신의 틀린 점, 잘못된 점을 지적해 주는 분을 이 세상에서 가장 감사한 분으로 대하는 자세를 견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재질문 : 성경의 한 구절만 가지고 해석하는 것에 대하여

저는 이곳이 틀렸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방향성이 많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곳의 성경해석을 보면 먼저 전체맥락의 성경해석은 인정하며 올바르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 신학계와 다른 점은 원어를 거의 참고하지 않으며, 한 구절 한 구절을 뽑아서 끼워 맞추기를 해서 편집을 합니다. 그리고 그 성경이 쓰여진 시대배경이나 이스라엘의 문화 같은 것을 거의 배제합니다.

제가 목사님께 묻고 싶은 것은 만약 하나님이 성경을 어느 시대나 어디서나 어느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쓰셨다면 원어나 환경이나 문화적 배경을 완전 배제시키고, 그리고 전체맥락도 보지만 한 구절 한 구절을 절대 진리로 믿고, 전체 맥락에서가 아니라 그 한 구절에서만 말씀을 가지고 와도 해석을 해도 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그렇게 주신 것입니까? 물론 성령의 인도는 있는걸 기본으로 한다면, 그렇게 성경을 해석 하는게 가장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쉽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답변 :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합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이 제일의 원칙에 한 마디 설명을 더한다면, 성경은 한 구절이 나머지 성경 성구 전체를 해석하고, 또한 성경 전체는 그 성구 하나를 해석합니다. 그리고 성경해석이 바로 되었는지 아는 방법은 그 성구에 대한 해석이 창세기로 계시록까지 모든 성구와 다 맞아지고 모든 교리에도 다 맞아지며 실제 신앙생활에 적용해도 그대로 다 이루어지고 맞아져야 하며, 그 성구의 해석은 어느 사람 어느 환경에 따라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구 해석은 그 해석 속에 성령이 역사하는 감동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 감동의 역사는 그에게 어떤 인간으로부터 받게 되는 감동과 다른 차원이어야 합니다.

이곳에서 원어와 성경고고학적 환경을 무시하고 성경 내용 자체에만 집중하는 이유는 성경해석법의 가장 첫걸음이면서 마지막 원칙이어야 하는 성경적해석법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질문자께서 이곳 설교자료에서 성경해석에 대한 내용을 좀더 면밀하게 보셨더라면, 이곳에서 제공하는 성경해석은 원어와 고고학적 환경을 인용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그 대신 성경을 어느 한 성구만 좁게 해석하지 않고 성경 전체를 폭넓게 인용하여 전체 성경과 그 성구 자체와 또 주변 앞뒤 성구를 다 맞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3. 현재 이곳은 성경해석에 관하여는 집중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곳은 현재 시간을 쪼개가며 백영희신앙노선의 조직신학 정리에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다른 조직신학과 달리 백영희조직신학은 모든 성경해석의 근본 방향이 되고 또한 모든 신앙생활 현장의 행동을 안내하기 때문에 조직신학의 일차 정리는 교리정리에 그치지 않고 백영희신앙노선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에 전력하는 모든 이들에게 신앙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큽니다.

지금 질문자께서 이곳 성경해석이 너무 단편적이고 성경 한 두 단어의 좁은 시야만으로 무리하게 비약을 하는 것으로 느끼고 있는 것은 백영희 설교 자료를 면밀하게 보지 않은 모든 분들에게 공통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시간을 갖고 이곳 설교 자료를 보는 분들에게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가지는 분들에게는 이곳에서 제공하는 설교를 보다 면밀히 살펴보고 그 설교들 한편 한편이 성경전체를 어떻게 배경삼고 연결지어 나오게 되었는지를 새로 한번 살펴보시라고 요청할 뿐입니다.

조직신학 작업이 일차 끝나고 나면, 백영희신앙노선의 성경해석에 대한 면 등 다른 주제로 작업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어느 주제라 해도 그 하나하나가 다 세계교회사에서 위치하는 바가 적지 않다는 것이 이곳의 현재까지 판단입니다.

어쨌든, 일찍부터 이런 작업에 매진하여 현재 질문자와 같은 분들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성경해석까지도 일목요연하게 살펴보고 백영희설교자료의 성경차원이 어느 지경에 이르고 있는지를 마음껏 보여드릴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인데 이곳 답변자가 지난 세월 허송한 시기가 있었고 또 지금도 있는 힘을 다 기울이지 않는 여러 단점이 있어 자책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한번 더 요청하고 싶은 것은, 현재 이곳 문답방에 올려진 답변은 질문자들께 질문 내용 자체에 대한 답변도 적었지만 이번 질문자께서 특별히 관심이 많은 분야까지도 여러번 답변한 적이 있습니다. 이곳 문답방 게시판의 아래 윗쪽에 있는 검색창들을 이용하셔서 ‘성경해석' ’원어' ‘신학' 등의 단어로 검색해보신다면 이미 이번 질문에 대한 답변은 충분히 제공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곳 문답방 자료가 /문의답변/과 /쉬운문답/ 등으로 나뉘어 수천개인데 검색어에 찾아지는 목록 중 다른 내용도 많고 또 해당되는 내용이 있다 해도 다른 내용으로 보이는 답변 중에 섞여 있는 것이 많아서 활용하는 분의 불편이 많을 듯 합니다.

이 문답방에 올려진 자료도 조직신학 작업이 끝나고 나면 전체적으로 한번 정리를 하여 답변 내용을 주제별로 나누어 검색이 편리하게 되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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