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질문) 부모님 사고를 접한 교인이 가질 신앙자세라면 286

주제별 정리      

                           5. (질문) 부모님 사고를 접한 교인이 가질 신앙자세라면 286

서기 0 23

5. (질문) 부모님 사고를 접한 교인이 가질 신앙자세라면 286

한 교인이 가진 어려움, 그러나 누구에게나 다 해당될 내용으로 문의 드립니다.
사고를 당한 부모님은 타 교단 소속 교회의 집사님 부부이며 아버님은 머리 손상이 심해 치명적일 수도 있었으나 현재 호전되는 방향으로 3일 정도를 지켜 보아야 하는 정도이며, 어머님은 다리 골절이 심하다고 합니다. 가해측은 보험이 들어 있기 때문에 경제 문제는 염려치 않아도 되지만, 일단 사건이 컸기 때문에 구속상태라고 합니다. 질문하는 분은 이곳의 신앙노선에 이해를 가진 분입니다.


(답변) 우리가 만나게 되는 모든 가정적 어려움에는 이런 면이 있습니다.

1.사고를 접할 때 모든 분들이 주의할 몇 가지

1)남이 당한 사고와 자기가 당한 사고를 너무 달리 취급합니다.

①남이 당한 어려움에는 우리가 다 선생의 위치에 있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고 하신 마7:12를 살펴보기를 특별히 권합니다. 신앙생활을 조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남이 당한 어려움을 두고 우리는 어떤 말씀들이 필요한지 상식 수준에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 이런 현실을 주셨으며, 이 어려움은 실은 하나님의 사랑의 다른 표현이니 알고 보면 야고보서 1장과 5장에서 그 해결을 찾을 수 있다는 등의 교훈입니다.

②자기가 당한 어려움 앞에는 우리는 참으로 나약한 한 '인간일 뿐'입니다.

문제는 그런 말을 하는 그 사람에게 그런 일이 닥쳤을 때입니다. 과연 그 사람이 자기가 남에게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할 수 있을까요? 있다면, 우리는 우리 시대에 또 하나의 성자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사참배를 이긴 성도들, 6.25전쟁을 초월했던 그런 성도들에게 비길 정도의 성자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여, 남이 당한 어려움에 자기가 던졌던 위로는 거저 위로의 마음이었으며, 표현은 미사여구로 빌려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③설교록이 그토록 어렵게 보였던 이유는 이런 때를 미리 늘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백목사님의 설교록을 이곳에서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그 설교록이 성경에 견줄 권위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성경이며 설교록은 아무리 탁월해도 설교록일 뿐입니다. 그러나 백목사님의 설교록은 그분이 평생 많은 교인들을 진정 말씀이 원하는 대로 자기 자녀와 같이 지도했고 자신이 그들에게 지도했던 말씀들은 자신 스스로 그 말씀을 따라 모든 고비를 다 넘겨보았던 말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설교록은 평소 때보다 이렇게 큰 어려움을 닥쳤을 때, 왜 그 설교록이 그토록 세밀했으며 많은 면을 포함시키고 있었는지, 또 그렇게까지 인간 심리의 깊은 면을 훑고 있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어려움을 당했다면, 설교록을 찾으십시오. 그 안에는 왜 우리가 환란에서 기쁨과 감사와 큰 성공을 얻게 되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망라하여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2)무작정 기도에 매달려서는 안됩니다.

①마7:7의 구하라 주실 것이라는 말씀만 빼내고 있습니다. 바로 이어 11절도 붙여야 합니다.

어려움 당한 성도가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는 것은 어렵게 찾아야 아는 것이 아니라, 수도 없이 찾아낼 수 있는 상식 수준의 성경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들을 찾아내어 위로도 드리고 또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말씀에는 앞뒤에 다 주의 사항이 붙어 있으나 그 주의 사항만은 빼놓고 드려서 좋은 표현, 읽어서 좋은 표현들만 인간들이 선별해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했고 의지했으나, 무지한 인간이 제 감정에 제 주관에 좋은 것은 가려 뽑아 '말씀의 위로'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붙여 놓은 그 말씀에 따라 가야될 '말씀이 주시는 주의 사항'은 부러 잊어버리기 때문에 말씀대로 했는데도 말씀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생깁니다.

②따질 것 없이 구하면 되는 신앙도 있습니다.

물론 어린 신앙, 또는 특별히 간구하고 애원하는 우리 모습을 보시고 싶어 주신 어려움은 우리가 열심히 구하면 기적과 능력을 보게 됩니다. 모든 교회들이, 오늘 말세 우리 교인들이 힘써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수없이 반복하고 그 실제 예도 많이 경험합니다만, 이번 어려움을 당한 분은 설교록에 대한 이해를 가진 분입니다. 그렇다면 급한 자신의 마음을 화급하게 해결하라고 주님을 찾는 것보다 마치 남의 일을 당한 듯이 약간 '고요한 냉정한 주님과 자신 단 둘만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먼저 요구하겠습니다.

③진정한 기도, 참 기도를 권합니다. 어지러운 세상에 '기도까지도' 너무도 어지럽습니다.

기도는 주님과 대화입니다. 대화란 가는 말이 있고 들은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대답을 들어 보고 또 다시 재질문에 답변이 이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거의 모르는 영아 수준의 교인이라면, 또는 신앙에 장애가 있는 장애 수준의 교인이라면 까다로운 절차를 요구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번 일을 당한 분은 단순히 주문을 외우는 듯 기도, 또는 효험 있는 유명인의 기도를 부탁하는 것보다 주님이 한 차원 깊은 '대화를 권하는 것' 같습니다.

3)이런 면을 우선 고려하셨으면. 물론 불난 집에 부채질이나 선지자라면 발표할 수밖에는.

①생사와 행불행은 오직 주님 소관입니다. 당신의 뜻입니다. 우리 마음대로가 아닙니다.

잘 살고 싶어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잘 살는지 못 살는지는 주님 결정이지 우리 결정이 아닙니다. 사고가 나지 않으려고 운전했지 사고가 나려고 운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 결정이지 우리의 결정이 아닙니다. 이제 병원에 계실 분들을 두고 대단히 죄송한 말씀을 드립니다. 살릴는지 데려 가실는지..... 내 마음이 아니며 부모님 마음도 아닙니다. 하나님 마음입니다. 사고나기 전 건강했던 분들이 이렇게 처참할 수가! 그러나 이렇게 엉망이 된 분들이 그렇게 깨끗하게 건강을 찾을 줄이야! 이것이 먼저 올지, 이 일 뒤에 저 일이 뒤 따를지 아니면 불편한 부모님 남은 평생을 뒷바라지 할 고난이 나의 갈 길로 정해 주실지.... 내 마음이 아니며 부모님 뜻대로도 아닙니다. 실은 담당 의사 역할도 아니며, 가해자 때문만도 아닙니다.

②그렇다면, 주님과 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소녀의 기도'나 '아베 마리아'와 같은 지성인들의 멋있는 기도는 배제하셔야 합니다. 주님은 까페 분위기에서 차 한 잔 시켜놓고 분위기 잡는 기도를 원치 않습니다. 성 프란시스의 '화평을 구하는 기도'나 달력에 흔히들 걸려있는 '미사여구'와 같은 발표용 기도도 치우시기 바랍니다. 노벨상을 받는 인권주의는 교회와 상관이 없습니다. '주소서, 아멘. 주소서, 아멘. 믿었습니다, 아멘. 진짜 믿었습니다, 아멘.....' 수도 없이 반복하는 기도, 이 기도는 하기는 하되 지금 이 시간 기도로는 순서가 아닙니다. 주님이 화가 나서 지나가던 차량을 한번 차 버린 것이 아닙니다. 영원전과 영원후가 한결같으신 주님입니다. 귀머거리 주님으로, 앞뒤 막힌 주님으로, 성질 괴팍한 주님으로 상대할까 삼가 두려워해야 합니다.

주님은 인격의 원형이신 신격입니다. 대화를 원하십니다. 어려움 당한 이 가정에 주님은 대화의 '주제' 하나를 내 걸었습니다. 사고 당한 부모님과 이 사고 때문에 주님께 매 달리는 본인에게 결코 만만치 않은, 그러나 꼭 해결의 방법은 있는 대화 주제가 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주제는 그 성격상 평생에 몇 번 내 주시지 않는 대단히 큰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한 분을 데려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부모님들과 본인에게 인생 전체를 통하여 가장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또는 후유증이 장애로 계속된다면 그 장애의 정도에 따라 대단히 격변될 현실이 닥치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이 현재 귀하 가족에게 제시한 대화의 주제는 대단히 심각하게 진행되어야 합니다. '병원에 교통사고로 두 사람을 눕혀 놓았다'는 것이 대화의 주제입니다. 기도의 제목입니다. 왜 이리 되었으며, 어떻게 하시려는지, 두 분과 본인들이 각자 무슨 약속을 해야 하는지 등등을 '성경'과 '신앙양심' 두 가지를 가지고 찾아 나서야 합니다. 즉, 진정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③먼저 기억합시다. 기도가 시작된다면, 하나님을 깊이 만나 뵙게 될 것입니다.

이전에도 비슷한 경험이 계셨는지? 그러나 설교록 속에서 이 복음을 알게 되셨다면, 그리고 그 말씀에 깊이를 새겨 들어오고 계셨다면, 이제껏 감상적으로 믿던 세계와 다른 사건을 주시고 다른 신앙의 방향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도덕주의 신앙, 정치주의 신앙, 여가 선용주의 신앙, 써클 운영주의 신앙.... 그 이름이 수도 헤아릴 수 없도록 많습니다. 그러나 이곳이 소개하는 '신앙노선'은 평소에서부터 지난한 환란 한 가운데에서도 동일한 주님으로 하나로 나가는 진리의 길을 찾아 좁은 길, 생명 길로 가는 방향을 잡으라고 권하는 곳입니다. 실은 가장 큰 초자연의 경험을, 실은 가장 큰 하늘의 위로를, 실은 이 길이 아니고는 안 되는 십자가의 길을 권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2.구체적으로 이번 일을 새겨 보시기를 권합니다.

1)우선, 너무도 다급한 일을 만나셨으니 다급하게 주님을 찾으시되, 열심히 찾으십시오.

①진실로 열심히 주님을 찾는 자를 주님은 반드시 만나십니다.

혹 기도가 잘못되었을지라도 열심히 진실로 주님을 찾으면 주님이 오십니다. 어린 신앙이면 그 열심히 간구하는 간구만으로 모든 해결을 해 주십니다. 간구가 바로 된 것이라기 보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에게 하나님은 전능자시며 살아계신 참 하나님을 보여 주시고자 하시는 경우에 해당이 됩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그 방법이 여간 틀려도 일단 주님의 능력을 보여 주시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초기, 선교초기, 개척초기에 기적과 능력이 많은 것은 대부분은 여기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시기를 지나고 나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계셔서 이런 일을 만나게 합니다. 단언하고, 우연은 아닙니다. 우연이라 생각하고 다행스럽게 잘 넘겼다고 한다면 세상만사 중 하나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는 또 같은 일이, 아니면 더 큰 일이 반드시 따라 옵니다. 아마 우선 부모님께 고요한 시간에 심리적 안정을 찾으셨을 때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이런 일을 당할 만한 죄송한 일이 계셨는지'를 여쭤보십시오. 아마 믿은 세월이 있고 또 이번 사고가 이렇게 큰 사고인 것을 보아 본인들이 무엇인가 '신앙양심의 직감'으로 느끼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어쨌던 지금은 본인이 열심히 주님께 매달릴 때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열심을 보시고 기적을 주시던, 단순히 부르짖는 열심보다 무엇인가 대화를 원하신다는 면을 보여 주시던가 하십니다. 어쨌던 간절한 소원은 주님을 어떤 면으로든지 날 위해 움직이게 한다는 것은 성경입니다.

②주님과 단 둘의 대화를 위해 골방 깊숙이 들어가야 할 때입니다.

절벽 같은 어려움, 그다음은 간절한 기도, 그다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그래서 감사... 이렇게 나아가는 순서는 믿고 기도해 본 분들마다 다 겪어 본 순서입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만나는 교인들에게 스스럼없이 기도하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수많은 사람이 다칩니다. 결국 자기도. 중요한 일은 한번 당한 일을 다시 반복치 않도록 하나님께 이런 사고 이런 불행의 원인 그 이유를 가르쳐 달라고 동시에 간구해야 합니다. 왜 이런 일이 필요했는지를 문의해야 합니다. 이런 기도를 하려면 차분히 지난 날을 되새겨야 합니다. 감정보다 이성, 이성보다 신앙양심의 깊고 냉정한 세계로 내려 앉아야 합니다. 세상 분요함과 자신의 기도 세계를 차단해야 합니다. 골방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 모르는, 그러나 자기와 해당되는 분들은 알려면 알 수 있는 사고의 이유, 주님이 어떤 면을 두고 이런 일을 주셨는지를 연구해 들어가야 합니다.

쉽게 찾아지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더러는 상당한 세월이 가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쨌던 사고가 컸던 것을 보아 사소한 문제보다는 무엇인가 주님과 가족들, 특히 부모님과 사이에 늘 마음에 죄송했던 그런 보다 큰 문제가 없었는지요? 무슨 살인 강도짓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의 세계에서 당신들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남들에게는 아무렇지 않아도 어떤 분들에게는 보다 큰 문제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런 일은 하나님께서 일반적인 상대를 하지 않으시고 본인들의 주관, 본인들의 특별한 내부 형편을 두고 크게 생각하십니다.

③이 일이 지난 뒤 이 일에 베푸신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미리 하십시오.

이런 모든 과정 중에, 한 가지 빠뜨리기 쉬운 것은 이 문제가 만일 마음에 소원한 대로 좋은 결과가 있게 되면, 그 결과 이후 마음을 변치 않겠다는 약속을 미리 하셔야 구하는 힘이 훨씬 강해지게 됩니다. 그리 크게 잘못된 게 없다면, 낫게 해 주신다면 다시 가진 제2의 인생은 이렇게 살겠습니다 라고. 이루지 못할 것이리라 생각하여 지나치게 낮춰 잡지 마시고, 약간은 어려워도 이 정도는 반드시 내가 하나님께 약속을 해야겠다고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드려 본다면 본인들의 각오가 있게 될 것입니다. 뇌세포 회로 하나가 잘못되면 인생사 그냥 가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 감사가 거의 없이 살아온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이제 이전과 같이 걸음이 자유롭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또 완치가 된다해도 그 세월이 많이 걸릴 것입니다. 과거 그 걸음이 그렇게 자유로웠던 때, 주님 주신 발걸음의 자유를 잊고 살아온 것이 우리 전부 아닙니까?

잘못된 것이 틀별이 없다해도 이런 면으로 따져 본다면 지극히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고, 그동안 은혜 모르고 산 것이 죄송해야 하며, 건강 주신다면 머리 한번, 발걸음 한번을 늘 감사하고 살겠다고 약속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에는 늘 한 가지 또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두 번은 넘어가십니다. 그러나 횟수가 더해지면 대단히 감당 못할 큰 일들이 준비가 됩니다. 말마다 협박이 많아져서 죄송하나, 세월 속에 자신과 자신 주변에 닥쳐지는 일들을 말씀으로 차분하게 비교 연구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이 두려워지게 됩니다. 경험에서 나오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말씀 앞에 조심조심 사는 것이 못나서가 아닙니다. 간이 작아서가 아닙니다. 주님을 몇 번 경험하고 나면 그리 될 수밖에 없습니다.


3.이런 면을 참고 하셨으면 합니다.

1)가족의 불행에는 가족 간에 책임문제가 따를 수 있습니다.

①주로 어린 아이가 겪는 고생은 부모에게 하고 싶은 주님의 말씀인 경우입니다.

주님이 대개 섭섭하거나 노하셔서 말씀을 하게 되는 순서는, 본인에게 충분히 알려면 알 수 있을 정도로 양심에 깨달음을 줍니다. 이 시기가 지나가면 그 사람과 신앙 지도 관계에 있는 사람을 통해 경고적 말씀이 반드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다음 물질 손실을 보여 주시고 그다음이 어린 아이입니다. 스스로 자기 신앙을 가질 정도면 그 본인과 문제도 있지만, 어린 아이들에게 닥치는 어려움은 거의가 부모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라고 보면 될 정도입니다. 그래도 모르면 자신의 육체, 마지막이 인생 자체를 두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게 됩니다.

②현재 부모님에게 대한 사랑과 책임의 면을 가진 자녀가 있다면

이미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이라면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부모님 사이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 부모님 때문에 마음에 고통을 크게 느끼는 자녀, 또 그 부모님이 후유 장애 등의 불편을 가지게 되면 본인이 부담을 해야 할 입장이라면, 부모님은 부모님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또 그 관계를 해결해야 하시지만, 본인은 본인대로 하나님 앞에 이 문제를 두고 자신이 고칠 점, 회개할 점, 또는 각오 결심할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모님이 후유장애가 심해서 본인이 뒷바라지를 많이 해야 하는 경우라고 가정한다면, 시간과 정력의 소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 여쭐 일이 '평소 효심이 부족하여 남은 평생 효도하라고 이 현실을 주셨는지요?' '바른 일을 하라고 했던 일들을 소홀히 하여 이제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도록 부모님을 불편하게 만들어서라도 이런 형편을 주셨는지요?' 조용히 한번 주님께 여쭤 보시고 지난날의 자신을 돌아도 보시고, 그리고 만일 본인의 마음에 효도 때문이라고 한다면, 평생 부모님 모시는 불편을 기뻐게 회개하는 마음으로 감수한다면 그렇게 감수하는 세월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부모님의 불편을 갑자기 고쳐 주시던지 하시게 됩니다. 또는 두 번째 경우라면 부모님을 모시는 바쁜 시간을 쪼개서라도 이전보다 더 주님 기뻐하는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 정성 그 회개한 자세를 보시고 생각지도 않은 해결을 훗날 주실 수 있습니다.
일단 현재 사고에서는 적어도 수개월이 지나 보아야 부모님의 불편을 확실히 예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사들이 무어라고 하던 그것은 일반적 물리이치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특별 간섭과 섭리가 계시니 하나님께서 본인의 자세를 보시고 고치시려면 의료 전문가의 판단에 상관없이 당신은 하십니다. 그러므로 일반 치료는 일반적으로 진행하면서 실은 내적으로는 하나님과 본인, 하나님과 부모님들 사이에서 모든 문제는 해결되어야 합니다.

2)참고로, 부모님께 대한 효도는 5계명에서 사은으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①딸들의 효도에는 인간적 요소들이 많습니다. 이는 정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는 반드시 사람을 통해 역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관계를 1-4계명에서 가르치시고, 그 하나님께 붙들려 나에게 하나님의 선물을 전달한 부모님은 하나님께서 5계명으로 요구하십니다. 인간을 상대하는 일로는 첫째입니다. 딸들이 부모에게 가지는 보다 애틋한 사랑, 그러나 이것은 십자가에 못박을 인정에서 발원된 것이 많습니다. 우리가 가질 사랑은 5계명에서 요구하는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효도입니다. 실은 후자 때문에 가진 효도가 더 힘있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딸들이 가지는 부모 사랑, 그중에서도 인격이 있고 부모 관계가 행복했던 딸들로부터 나오는 효도..... 그 어떤 종류라도 인간에서 시작된 것은 창12:1에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는 말씀에 의해서 부모님 몰래 혼자 마음 속에서 그 본질을 교체시켜야 합니다.

②자녀가 부모를 향한 것보다 더 강한 것은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께서 당신 자녀를 나에게 양육을 부탁하셨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자녀를 맡아 기른다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내가 낳은 내 자식, 특별히 우리 인식이 이 면에 있어서 만큼은 너무 지나쳐 그 병폐가 세상 사람들도 지적할 만큼 되었습니다. 우리는 믿는 사람입니다. 속속들이 다 알고 나면 불신자들이 피도 눈물도 없다고 할지라도, 주님으로 모든 인인관계를 가져야 그 관계가 천국으로까지 이어지고 그것이 참 사랑이며 영원한 사랑입니다. 말씀에 근거한 사랑이 아닌 단순한 인간 가족의 사랑은 결국 주님 인도를 자유롭게 따르지 못하게 하고 이로 인하여 '네 원수가 네 집안 식구'라는 말씀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장성한 자녀가 부모님의 자식사랑을 대화와 토론을 통하여 능동적으로 또 이해가 되도록 하여 결국 부모도 자녀도 서로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중앙에 둔 하나님 사랑으로 가족사랑이 되어야 비로소 인생사에 가장 큰 위로로 주신 가정의 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나는 부모님을 왜 사랑했으며, 그동안 내가 부모님을 향한 사랑은 그 사랑의 본질이 무엇이었느냐는 것을 깊이 분석해 볼 때입니다.

③주님이 주신 최고 귀한 선물, 주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기관으로 사용하신 부모라면,

기꺼이 우리는 우리 전부를 다 바칠 만한 분입니다. 주님이 날 위해 사용하신 은혜 기관이라는 의미에서는 어떤 물질, 어떤 시간, 어떤 무엇도 다 바칠 수 있는 분입니다. 따라서 참으로 신앙의 사람이라면 그 이상의 효자가 없고 그 이상의 효도가 없어야 정상입니다. 죄되지 않으면, 주님의 특수 개별 명령이 있다면 몰라도 일반적인 인생사에서 부모님을 향한 우리의 중심은 다 기울일 수 있습니다.

이런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평소 경제에도 대단히 근검절약하여야 합니다. 아무리 부모를 위한다 해도 남의 땀, 도적질로 모실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땀, 자신이 할 수 있는 자신의 것이라야 합니다. 따라서 평소 경제 생활과 건강 생활을 바로 관리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이미 부모님을 잘 모실 자격도 준비도 없는 사람입니다. 기름준비를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에 속한 실패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진정한 효도는 진정한 신앙에서 나올 수 있고, 진정한 신앙은 모든 것이 다 발원될 수 있는 보배입니다.

3)가해자와는 조심스럽게 합의를 하되 될 수 있으면 속히 해결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①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신인관계가 있는 동시에 사람과의 인인관계도 있습니다.

주지 않는 것을 지나치게 확보하려고 하다 복잡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랑과 용서 그리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 성경입니다만 무조건은 아닙니다. 무절제도 아닙니다. 음주운전 또는 상습적 교통사고 유발 운전자라면,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표시를 내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나 너무 쉽게 합의를 해주면 다음에 또 다른 생명과 가족에게 더 큰 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때로는 무책임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댓가를 거치게 하여 유익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저항주의, 무조건용서주의가 아닙니다. 진정 상대방에게 유익한 참된 유익을 보이지 않게 계산하는 진리의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진정한 도움이 될까를 생각하려면 가해자 형편을 알아 보셔야 합니다.

누구나 일반적으로 그럴 수 있는 실수였다면, 종합보험이 가입되어 있어 이 쪽의 경제 문제가 해결 될 수 있다면, 상대방의 신체 구속을 담보로 추가 합의금을 위해 지나치게 시간을 끄는 것은 곤란합니다. 물론 이런 경우도 집안 전체에서 자기가 가지는 비중을 생각해서 발언해야 합니다.

만일 이번 사고를 당한 부모님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즉각 생각나는 것이 있어 확실하게 이런 면 때문에 하나님께서 섭섭하셨겠다 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이런 경우는 하나님과 바로 해결할 일이지 인간과의 관계를 끌면 곤란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키 힘든 길, 주님의 노를 풀기 위해 내가 충분히 확보할 권리를 포기하면서까지 당신의 긍휼을 바란다는 표시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당사자 부모님이 충분히 이해를 해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옆에서 대신 처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또 부모님이 이해를 하신다 해도 훗날 괜히 그랬다 하여 후회하시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후회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일은 대단히 신중해야 합니다.

②이렇게 갑작스런 사고를 당하면 모든 분들이 심리가 약간 흥분되며 묘하게 움직입니다.

슬픔으로 말하자면 어떻게 표현치 못하겠고 그래서 이런 저런 순간적 처리를 먼저 제시하는 분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대개 쭉 따라 가기도 하고 그럽니다. '뱀같이 지혜롭게 비둘기같이 순결하게' 처리할 일입니다. 마음 안에 있는 중심의 눈은 주님만 바라보고 대화하며, 외부의 세상사 처리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령의 이중 삼중 별별 장난에 그렇게 쉽게 휘말리거나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종류의 전문가들이 많으나 실은 한 방면의 전문가는 대단히 그 판단이 잘못될 수 있습니다. 고도로 판단이 어려운 때가 되면 최고 전문가 의사들도 의견이 갈리게 됩니다. 마지막 칼 잡은 의사가 그냥 눈 지끈 감고 동전 던지기 심정으로 한 방편을 택하게 됩니다. 아직도 의학이 아는 부분보다는 모르는 부분이 더 많으며, 특히 한 사람에 대한 치료는 각 사람의 특이한 성향이 있어 그냥 통계학적으로 처리하기에는 너무도 아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이니 우리는 일반적 처리에 맡겨두고 일단 하나님과 자신의 대화, 즉 깊이 들어가는 기도로 주님께 인도를 주시라고 할 수밖에 없고, 비록 실수가 될지라도 자신의 신앙으로 자신이 주님 앞에 충성으로 노력하고, 나머지는 만유주 아버지의 사랑과 주권에 맡겨 버려야 합니다.


4.결국 우리는 이 복음의 사람입니다. 모든 시작과 앞으로의 진행은 설교록을 참고하십시오.

성경은 질문자의 경우를 당한 경우 어떻게 가르치는지, 목회설교록에는 너무도 많은 부분, 너무도 자세한 안내들이 있습니다. 당장은 설교록을 들고 앉을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바쁘게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몸은 바쁘게 움직이시고 마음은 골방 속에서 주님과 쉬임없는 대화를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두 분이 긴급 조처가 끝나게 되면 장시간 누워 대기하는 경우가 될 것입니다. 그런 때에는 설교록을 차분하게 읽어보시고 질문자의 형편에 필요한 말씀들을 너무도 잘 소개하고 있을 것입니다. 마치 모르는 문제를 받아 쥔 학생이 문제 풀이집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리고 그 풀이를 차근차근 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풀이를 따라 가다보니까 그 풀이 과정 전체가 이해되고 정답이 딱 맞아 떨어지게 된다면, 그리고 그런 종류의 문제는 앞으로 얼마든지 어떤 각도로 나와도 이제는 자신이 있겠다고 느껴진다면, 그 학생은 학생으로서는 한 차원을 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야고보서 1장 2절의 말씀이, 어려움을 시험이라 하고 그 시험은 일단 기뻐해야 될 결과를 위해 주신 것이며 그 과정은 '시련'이라고 하여 쇠를 녹이는 듯한 고통이 잠시 있을 것을 가르쳤습니다. 더하여 꼭 이런 어려움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고 싶거든 5절에서 하나님께 물어 보라고 했습니다. 5절에서 주신다는 것은 내가 내놓는 청구서대로 집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부족하거든'이라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현실을 주셨는지를 모르거든, 이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순종하여 온전히 기뻐해야 하는 결과까지 이어질까 하는 면을 모르면 '지혜가 부족'한 것입니다. 대화의 기도, 깊이 새겨보는 바가 있어야 하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런 것 때문에 이렇게 하셨구나! 무릎을 치게 될 것입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꼭같이 주신 과정입니다. 야고보와 같은 훌륭한 제자에게만 주신 야고보서가 아니라 믿는 우리 전부에게 주신 우리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