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질문) 형제간의 결혼의 순서에 대해서 (쉬/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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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45
12. (질문) 형제간의 결혼의 순서에 대해서 (쉬/160)
우리는 보통 형제간의 결혼 순서를 지키려합니다.
상황에 따라, 그리고 남녀 구분에 따라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큰 문제가 아니라면, 형제간의 순서를 지켜, 먼저 태어난 자가 먼저
결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 말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형제간의 결혼 순서에 대해 조언을 주시고, 관리자님 교회에서는 어떻게 가르치시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전혀 지킬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어린 주위분들을 배려할 수는 있습니다.
1.출생의 순서는 하나님이 정하셨으니 지켜야 합니다.
출생 순서로 되어지는 일이 많습니다. 그 순서를 무시하거나 무리하게 뛰어넘다보면 다치는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정한 것으로 알고 지킬 것은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결혼의 경우 출생 20년 미만일 때는 하나님께서 결혼의 기회를 허락치 않았다고 봐야 하지만 20세가 넘어가게 되면 결혼 적령기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때는 너무도 다릅니다. 20세, 25세, 30세 등 몇 살에 결혼의 적기를 만들어 주실지는 모릅니다.
2.출생의 순서와 상관없는 것도 많으니 무리하게 출생순서를 적용하면 더 큰 폐해가 생깁니다.
20세가 넘은 형제들이라면 그때부터는 출생 순서가 아니고 적절한 상대방이 발견되는 때가 바로 결혼 결정의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인도라고 봐야 합니다. 비록 20세가 넘었을지라도 결혼하는 순서까지도 위로부터 되어야 한다면 지나치다고 봅니다. 공자가 장유유서로 또 형제서열로 엄격하게 가르쳤고 이것이 우리 생활 속에 너무 일반적으로 고정이 되다보니까 모든 것이 서열대로라는 것이 지나치게 적용되고 있으며 무언가 좀 이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결혼은 각자의 자기 성장과 자기 준비 과정에 따라 달리 진행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달리 주시는 각자의 길을 따라 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 신앙은 그러하지만 외부 인식에 따라 늦게 결혼하는 형이나 언니가 정상적 결혼에 지장을 받게 된다면, 그때는 서로의 형편을 보며 결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파트를 선호하는 젊은이와 단독주택을 선호하는 나이든 분 사이의 결정이란 진리 결정이 아니라 어떻게 조율하는 것이 진리겠느냐는 문제입니다.
이전과 달라 적당한 사람이 있으면 먼저 할 수 있다는 것이 요즘입니다. 또 좋은 사람이 혼기를 놓치는 경우도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동생보다 늦다는 것이 결혼에 큰 지장이 되지 않는 시절입니다. 반대로, 적절히 결혼할 상대가 있는데도 결혼을 늦추면 결혼 전 이성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또 주문생산을 할 수 없는 것이 결혼의 상대방인데, 다음에 그런 사람을 또 고르면 될 것 아니냐는 생각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입니다. 적당한 사람을 주신 현실을 가장 먼저 생각하고 형제의 서열은 단순히 참고할 일이며 문제가 있다면 설득하고 나갈 일로 생각합니다.
3.답변자의 경우, 전혀 상관치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답변자는 어촌마을에 목회합니다. 아직도 형제 결혼의 순서는 헌법과 육법전서 위에 있는 절대의 법으로 알고 계신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러하여 이제는 사람만 있으면 해야 한다고 바뀌고 있습니다. 하물며 다른 곳이겠습니까? '적당한 사람'이란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니고, 나중에 내가 원해서 선출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주실 때 해야 하는 대원칙을 크게 강조하여 지나치다 할 만큼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말세 가장 크게 주의할 일이 바로 이 면이기 때문입니다. 백영희신앙노선의 결혼관입니다.
(재질문) 독신의 은사
요즘 조혼보다는 만혼, 독신을 선호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결혼을 원하는데도 하나님께서 적절한 상대방을 주시지 않아 서른을 훌쩍 넘겨 버리는 경우도 많고 '신앙의 사람'을 찾다가 집안 성화에 밀려 결국 세상사람과 결혼해 버리는 사람들도 많이 봤습니다. (저는 총공회 교인이 아닌 통합측 소속 청년입니다. 이곳의 상황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교회에는 이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외적 조건에 혹해 자기의사로 세상 사람과 연애해서 결혼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경제적 자립이 가능하고 혼자 사는 것이 편하고 좋기 때문에 굳이 결혼하지 않으려고 하는 청년들도 간혹 있습니다. 이에 대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독신의 은사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바로 내가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답변1) 1.결혼이 늦어진다는 의미에는 수도 없이 많은 폐단이 있습니다.
1.조혼보다 만혼, 독신을 선호하는 경향은 대표적으로 말세지 말이라는 표시판입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 하리라 하신 말씀대로 세상의 마지막 절단은 7계명에 관련된 음행 간음문제입니다. 음행이나 간음이라는 문제는 결과적인 표현이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만혼과 독신주의입니다. 정상적으로 만들어졌다면 상대를 찾도록 하나님이 해 놓으셨는데, 늦추면 그 세월만큼은 남자된 사람 속에는 상대를 찾는 맹수성이 발효를 하게 되고 여자된 사람 속에는 몸을 팔 수 있는 유혹성이 어지럽게 나타나게 됩니다.
정상적 결혼보다 10년이상이 늦어진 시대이니 한 해 대입수험생 70여만명을 계산한다면 수백만 마리의 맹수와 몸파는 사람이 이 시대와 이 거리를 휩쓸고 다닙니다. 조혼이 아니라 사실 적혼인데, 적혼하는 사람은 이 시대를 구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목회하는 교회에서는 대부분 20대 초반에 결혼시키고 있습니다. 그 장점이 적지 않습니다.
꾸미는 문제, 노출 문제, 성범죄 등등에는 결혼의 시기가 늦어진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자연연령을 따라 20 안팎에 결혼을 해버린다면 세상이 거의 다 깨끗해질터인데. 참 한탄입니다. 만혼의 원인은 눈이 높아서 그런 것일 뿐이고 자기를 보지 못했으니 자기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믿는 사람이 믿음도 붙들고 세상도 함께 붙들려니까 문제입니다. 둘 중에 하나를 손해 보아야 십자가의 길이겠지요? 상대를 좀 낮추고 믿음에 자유를 갖느냐, 세상을 가질 만큼 가지고 그 대신 혼기를 늦추는 등 신앙 손해를 보겠느냐는 결정입니다.
(답변2) 2.독신의 은사를 받은 분은 한 시대에 한 사람이 날까 하는 정도입니다.
1.결혼을 통해 우리를 고치시고 기르십니다. 그것이 필요없을 정도의 신앙은?
독신은 사도바울에게 주신 특별한 은혜입니다. 루터와 칼빈에게도 주지 않은 은혜입니다. 답변자나 질문자 수준에서는 그런 분들도 계셨다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 독신의 은사는 그 결심의 초기 열심이 너무 강해서 사도 바울보다 루터 칼빈보다 더 강한 믿음의 열기를 가졌다고들 옆에서 말이 나올 정도라야 가능할 것입니다.
1960년대까지는 우리나라 교회들마다 독신의 여전도사님들이 많았습니다. 그분들은 해방 전후 큰 은혜를 받고 주 앞에 평생을 맹서한 분들인데 그 시대가 전체적으로 오늘에는 비할 바 없는 은혜의 시대였습니다. 오늘에 그런 류의 신앙이 나오기도 어려운데 그 많은 독신 각오의 여전도사님들이 50세 넘는 나이까지 그 결심이 지속된 분은 거의 없었습니다. 독신을 결심한 시작 때는 수도 없는 사람이 그리했으나 중년이 지나면서 전부들 후회했고 나이가 들면서는 아주 덕되지 않을 일들이 많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연보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치는 것은 좋으나 훗날의 후회가 문제입니다.
2.혼자는 살지 못하게 설계하고 제작한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피할 일이 아닙니다.
둘이 하나되어 살라고 하나님이 설계 제작한 자신을, 자기가 나서서 하나님이 설계를 잘못 하셨습니다, 제작도 잘못 하셨습니다 하여 구조변경을 한다는 말이 됩니다. 안될 일입니다. 혹시 경제나 생활의 편리 등으로 독신에 나가는 분들이 적지 않으나 이 역시 결혼을 남녀가 함께 사는 것으로 보았지 결혼 속에 담아두신 본질을 잊은 사람들입니다.
경제자립이 가능하고 생활이 편하기 때문에 결혼을 피한다는 말은, 결혼의 이유가 경제와 생활의 편리를 기준으로 보았다는 반증이 되는데 질문자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오늘 일반인이 그러하다는 생각에서 비판을 하겠습니다. 남자를 돈벌어오는 수입원으로, 여자를 살림꾼으로, 또 서로를 정욕풀이로, 생활공간의 멋있는 장식물로 상대하는 정도이지 그 사람을 상대로 주님 날 위해 다하심같이 내가 나 전부를 다해 그를 위할 사람으로 생각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는 성도이니 이런 정신이라면 못났을수록 흠있을수록 좋아야 할 것이니 진정 자신을 한 두 단계 낮추어버리면 서로 오겠다는 분이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김현봉목사님은 선보러 갔다가 들러리로 따라 나온 곰보 아가씨를 보고 나 아니면 시집가기 어렵겠다 하여 그리로 정했습니다.
결혼을 통해 자기를 고치며 결혼을 통해 주님 날 위한 희생을 상대방에게 해보며 서로가 주님을 닮는 일에 필요한 상대입니다. 겉으로는 세상이 말하는 그런 결혼생활이었는데 그 평생을 통해 추수할 자기 인격이 있습니다. 이 추수를 위해서는 수많은 갈등 투쟁 고성을 다 통과해야 합니다. 농부의 고통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