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질문) 7계명에 관련된 질문들 (쉬/939)

주제별 정리      

                           2. (질문) 7계명에 관련된 질문들 (쉬/939)

서기 0 25

2. (질문) 7계명에 관련된 질문들 (쉬/939)

-------------------------------------------
제목을 조금 부드럽게 바꾸었습니다. - 관리자
-------------------------------------------

여쭈어 보기 민망한 것들이라서 여러번 망설였지만
음악이나 의례 음식과 마찬가지로 성생활도 이미 우리 현대사회에서
일정부분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때 그것에 대한 죄의 여부도
상당히 중요할 것 같아서 이렇게 질문 드립니다.

사복음서중 예수님께서 이르시길 간음은 직접 관계한것 뿐만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욕심을 품을 것까지도 포함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포르노물을 보는 것은 간음에 포함되는 것인가요?

창세기 38장에 보면 오난이 설정한 것이 죄가 된 이유가
설정한 그 자체의 죄 떄문인것인지 아니면 형수의 씨가 자기 것이
안될 것에 대한 일종의 욕심에 대한 죄인지도 궁금합니다.

덧붙여서 피임에 대한 죄의 여부도 궁금합니다.
피임이란 것이 성관계의 부차적인 쾌락만을 탐하는 나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원하지 않는 아이가 생겨서 낙태를 하는 끔찍한
비극을 막는 차원의 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궁금한 것들을 질문하였는데 혹시라도 목사님꼐 혹은 다른 분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았나 염려되는 군요.
문제가 된다면 삭제하셔도 좋습니다.
답변 부탁드립니다.


(답변1) 1. 7계명 - '보는' 것이 문제입니다. '보이는' 것은 피하면 됩니다.

1.죄 중에는 가장 큰 죄고 가장 많은 죄며 가장 위험한 죄입니다.

질문 내용에서 말씀하신 대로 반드시 살펴야 하는 죄입니다. 다만 이 죄는 다른 죄와 달라서 이 죄를 수색하고 잡으려 하는 이들도 거의 다 삼켜 버린 감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조심해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현재까지 이 홈을 운영하며 감사하는 것 중에 하나는, 이곳을 찾는 분들이 7계명을 질문할 때는 그 질문 내용까지도 조심하셔서 질문 내용으로 인하여 이차감염이 발생되지 않도록 배려해 주셨다는 점입니다. 많은 교회 홈들이 신앙상담이라는 이름에 7계명을 문답하면서 오히려 7계명을 자극하여 흥왕시키는 폐단들을 봤습니다. 7계명도 죄이므로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죄와는 그 연구나 대처법이 전혀 달라야 한다는 점을 질문자께서는 미리 알고 조심하셨으니 감사하고 또 이곳도 이 답변에서는 미리 한번 이 면을 말씀드립니다.


2.7계명의 죄는 특히 보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보이는 것'과 '보는 것'을 구별하셨으면

7계명의 죄는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필요한 모든 죄를 다 지을 수 있는 특별한 죄입니다. 보는 것으로 벌써 그 죄는 실행에 착수했다고 보시면 맞습니다. 다만, 현재 우리가 사는 사회 생활에서는 학교 가정 사무실 길거리 시내 장식 신문 방송 등 모든 면으로 '보이게' 되어 있는 현실 속에 있습니다.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은 성경입니다.

그렇다면 간단하게 요약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보이는' 것은 피할 수 없으나 '보는' 것은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을 피할 수 있는데 뻔히 보일 수 밖에 없는 형편을 만들고 그리로 찾아갔다면 '보여서 봤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둘째로 보이는 상태가 되었다면, 보이지 않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 본 것이 아니더라도, 보여졌다면 그 보여진 형편을 다시 보이지 않도록 하면 됩니다.


3.창38:1-11에서 오난의 죄는 10절의 '악하므로 죽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오난은 9절에서 '자기의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악하므로'라고 그 죄를 정하고 있습니다. '악'이라는 죄는 자기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미개한 성도들에게 정해 놓았던 법이 있었는데 그 법에 의하면 형님의 이름으로 아들을 하나 만들어 려야 하지만 오난은 '자기의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행동했습니다.

따라서 오난의 죄는 '자기 중심'의 악입니다.


(답변2) 2.출산 - 주시는 대로 낳는 것이 복입니다. 물론 한 가지 참고할 것도 있습니다.

출산을 피하는 죄는, 단순히 태어날 다른 생명을 막은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①출산은 다음 세대의 등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부가 사람되는 데 긴요합니다.

낙태는 어떤 죄가 되느냐는 문제일 뿐입니다. 장차 주시는 생명을 거부했으니, 그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것은 비록 예정되어 있었지만, 피임한 사람은 생명이 존재되는 것을 거부한 죄를 지은 것은 사실입니다. 살인죄라는 차원에서 살펴 볼 문제입니다.

또한 출산과 양육의 고통을 타락한 인생에게 주셔서 죄의 결과를 실감 체험시키려 하심인데 이를 거부했으니 어느 한 생명을 거부한 죄도 죄지만 출산을 피한 죄는 넓은 범위에서 본다면 더 큰 손해입니다. 출산과 양육을 통해 부모된 사람이 비로소 사람이 되는데, 이를 포기했으니 사람되기를 포기한 죄가 됩니다. 이 죄는 그냥 죄목 하나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 죄 하나 때문에 파생되고 연결되는 죄는 그 사람이 평생 짓는 모든 죄에 거의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아이를 하나 둘 낳은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이를 하나 둘 낳고도 사람이 된 사람이 있다면, 그가 아이를 7-8명 가졌다면 성자 성녀가 되었을 것입니다.


②아이를 가졌으면 낳는 법만 주셨습니다. 부부로 만났으면 이제 죽어라 고생하게 된 것입니다.

원치 않는 출산으로 끔찍한 결과가 예상되는 경우는 흔히 낙태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짧게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아도, 훗날 결과적으로 생각하면 착각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뱃속에 넣어두셨으면 태어나야 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낙태와 출산을 두고 인간에게 어떤 것을 결정할 것인가 걱정하라고 위임하지 않았습니다. 가졌으면 힘 닿는 대로 낳는 것만을 인간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부부가 자연스럽게 즐거웠으면 그 결과가 출산으로 이어지고 평생 죽도록 고생해야 할 한 길만이 있습니다.

옆 사람이 먹고 내 배가 부른 경우가 없고, 옆 사람 배가 부른데 내가 화장실을 가야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체제를 인간에게 창세로부터 부과시켰는데, 인간이 이런 자연 이치를 흔들어 놓았다면, 그 행위는 하나님께서 더 큰 매를 준비하셨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③아이를 가지지 않는다면, 이런 면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여자쪽의 건강이 따라가지 않는 경우는 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없는 것은 복없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부모를 주지 않으면 가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자쪽의 건강이 심각하다면 아이를 가질 복이 없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지지 못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당당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목회 현장의 지도적 의미에서 드리는 말씀이지 기준으로 제시할 문제는 아닙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내용들은 출산과 관련하여 가장 극단적인 말씀만 드렸습니다. 무슨 다른 의도로 더 심하게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런 문제를 대할 때는 이런 면은 조심하시고 또 고려하셔야 합니다. 주일오전예배는 빠지는 사람이 새벽예배를 지키겠다고 남편과 가정 불화까지 일으킨다면?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믿는 첫신앙이라고 한다면 야단칠 수는 없고 그대신 신앙에 주력할 순서를 지도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게을러서 30세 넘도록 부모에게 얹혀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이라서 아이는 주는 대로 낳겠다고 3명 4명을 낳는다면? 이런 경우는 이쁘게 봐 줄 구석이 없습니다. 이런 경우는 말이 아니고 매가 먼저 나가고 해결해야 할 경우일 것입니다. 이전에 어느 분이 공회 노선의 목회자들을 조롱하며 던진 말 한 마디가 있습니다. 어지간한 비판과 조롱은 답변해보지 못한 적이 없으나 이 한 마디는 아직도 답변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회 교역자들은, 백목사님이 지도하는 다른 것은 순종하지 않아도 아이 많이 낳으라는 것 하나는 참 순종도 잘 하더라!'

이제 앞에서 말씀드린 출산 관련 원칙은, 출산으로 말하면 순생을 각오해야 걸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순생이란 우리가 다 목표하고 걸어가야 할 정상적인 성도의 걸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러 면에서 부족하여 그 표준에 미달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기서 가장 엄하고 철저한 원칙을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가 목표로 삼고 걸어갈 길이 어디라는 것을 알기는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