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질문) 신용카드 사용을 왜 금해야 하는지 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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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45
6. (질문) 신용카드 사용을 왜 금해야 하는지 769
목사님이 보험의 위험성에 대하여 설명한 글을 읽었습니다.
그기에 신용카드 사용은 엄히 금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신용카드는 "플라스틱 머니"라고 불리면서 개인당 보통 몇장씩은 가지고 있습니다. 매년 사용 금액이 50%이상 늘어나고 있으며 크게 두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현금 차입 기능 입니다. 카드당 보통 그 사람의 신용도에 따라 100~500백만원 까지 차입할 수 있으며 이율은 시중금리 보다 10%이상 비싼 17%정도의 이율을 카드사에서 받으며 그 다음달에 상환 하여야 하나 돈이 없을 경우에는 상환하지 않고 이자만 계속 부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둘째, 대금결제 기능 입니다. 보통 본인이 현금을 소유하고 있어도 결제의 편리성 때문에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경우가 있으며, 그리고 현재 자신이 현금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1개월 뒤에 갚기로 하고 카드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외상이면 소도 잡아 먹은다'는 우리 속담이 있듯이 보험의 위험성 보다는 신용카드의 사회적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카드 사업이 '황금알을 낳은 사업'으로 인식되어 카드사의 무분별한 카드 남발과 자기의 능력을 초월한 카드 사용으로 카드 관련 범죄가 만연하며 신용불량자가 250만명에 이르고 있다 합니다.
저는 회사 업무가 회계 업무와 관련이 있다보니 업무상 회사 카드를 사용할 일이 있습니다. 국가적으로도 회사에서 식사비등의 경비 지출을 할 경우 5만원 이상은 카드 결제를 하지 않을 경우 비용으로 인정을 받지 못 합니다. 개인사업을 하는 사람도 카드 기계를 설치하지 않으면 세제상 불이익을 받습니다.
세상은 빨라지고 지식은 더하여 지다 보니 새로운 기계, 제도등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인터넷, 휴대폰, 신용카드등 앞으로도 새로운것이 더 많이 나오리라 봅니다. 그럴때 마다 믿은 사람은 새로운 문화를 무조건 세상사람 처럼 따라하기 보다 따지고 또 따져서 구별하여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몇장의 카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험에서 지적하신 목사님의 글을 읽고 줄여 가고 있으며, 앞으로는 모두 폐기할 계획 입니다. 막연히 금해야 된다는거와 말씀으로 확정을 지우고 있으면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은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신용카드 사용이 성경적으로 왜 금해야는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답변) 금융과 신용은 떼어놓을 수 없는 친구입니다. 사취하는데 둘도 없는 공범입니다.
1.신용카드문제는, 성경의 경제관에 대한 성구와 신앙으로 접근하면 간단해집니다.
①제8계명을 우선 생각하셨으면 합니다.
제8계명은 성경 전체에서 물질면을 총괄 요약한 말씀입니다. 도적질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물질생활의 제일 외부적 범죄 하나를 예로 들었습니다. 남이 모아놓은 것을 담넘어 뺏어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석하고 들어가면 남이 흘린 땀을 자기가 먹는 것도 담을 넘은 도적질 이상의 도적질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더 이상 들어간다면 성경과 영감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어겨서 취하는 모든 물질은 하나님이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상대로 취하는 도적질입니다.
②타락한 사람에게 주신 첫 명령이 '땀흘려 먹어라'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생에게 땀흘려 일하라 하신 창3장 첫 말씀은 작아 보이지만 결코 작을 수 없는 명령입니다. 남자는 가족을 먹여 살리는데 죽도록 땀을 흘리게 했고, 여자는 남자가 벌어온 것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다시 찾는 길을 내셨습니다. 먹여 살리고 먹고 살아가는 생활이 생물학적으로는 인체의 생명 유지를 위한 활동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서 인생의 근본적인 방향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경제라는 것은 가장 표면에 나타난 활동이지만 볼 수 없는 그 사람의 모든 면을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하나의 지표가 된다는 점은 이런 면을 보기 때문입니다. 경제실패는 신앙실패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경제성공은 신앙성공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경제면을 보아 신앙면을 가장 빨리 그리고 쉽게 알 수 있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③잠28:8, 시109:11 등 고리대금을 금하는 말씀도 참고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라고 단정치는 않습니다만, '중한 변리'나 '고리대금'은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금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약한 이웃의 힘든 땀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경제법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치 않는 죄를 금한 것인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특별히 약한 이웃의 어려운 땀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을 더 중한 말씀으로 지적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몇 가지 경우를 예로 들어 경제 관련 말씀들을 하고 있지만 이것은 최소한으로 적어주신 것입니다. 이것만 지키면 전부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마약 담배를 말하지 않았으나 이것을 금해야 할 말씀과 예를 들어주신 것처럼, 경제문제도 신용카드 보험 주식 등을 전부 다 성경에 적지는 않았으나 알려면 얼마든지 알 수 있도록 적어주신 말씀으로 오늘 우리에게 닥쳐진 참으로 복잡하기 그지 없는 경제문제들을 다 추려놓고 구별할 수 있습니다.
2.신용카드를 보는 신앙인의 자세
①카드는 '외상거래'입니다. 근본적으로 신앙인이 가져서 안될 항목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현실에 감사하고 충성'
주신 범위에서만 사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내일 주실 것은 소망으로 기대하며 살고 있지만 오늘은 주님이 내게 가장 필요해서 주신 나의 현실입니다. 현재 나 형편을 불구 자식으로 주셨다면 그 자식의 불구된 아픔을 안고 살라는 것이 주님이 요구입니다. 아멘 하고 순종하면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는 그 다음에 연구하고 찾아보는 것입니다. 그 자식이 죽은 다음 편하게 되어진 내일을 보고 살지는 않습니다. 부모를 향해서도 마찬가지며 부부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은 원리로, 우리에게 지금 주어진 경제는 바로 경제적 '현실'입니다. 없으면 없는 것이 바로 현재 내게 주신 가장 좋은 '형편'입니다. 불편하다고 하여 그 이상을 바라고 그 이상을 사용하게 되는 것은 신앙인의 모든 현실관에서 근본적으로 피할 일입니다.
'외상거래'는 현재 형편을 넘어선 것
오늘 주신 형편 범위 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외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흔히 말하는 '외상'은 현금거래의 반대개념이지만, 여기서는 주로 현금 여부에 상관없이 현재 지불 형편을 기준으로 그렇지 못할 경우를 주로 말하고 있습니다. 카드사용을 금하는 것은, 지금 나에게 주신 경제형편으로는 지출할 수 없으나 추후 돈을 벌게 되면 갚겠다는 것으로 이런 경제거래를 총괄해서 '외상거래'라고 하겠습니다. 현재 주지 않은 것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현재 내게 주지 않은 형편은 남의 것이라는 뜻이니 남의 것을 내가 사용하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신앙인의 경제 원리에 비추어 여간 문제가 많은 것이 아닙니다. 내일을 나에게 주실런지도 의문이지만, 우리 믿음이 그기까지는 이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내일까지는 내가 살아있다고 가정을 하더라도, 내일의 내 경제 형편이 갚을 수 있게 될런지는 참으로 예측 못하는 것입니다. 통계적으로 외상이란 갚는 사람보다 못갚는 사람이 많다는 인류역사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갚으면 좋고 못갚으면? 자기도 모르는 잠재의식 속에서 '떼먹는거지 뭐 사람이 어떻게 다 책임을 져?'라는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②카드는 '신용거래'입니다. 물질관계는 신용보다 탁월한 신앙조차도 개입시키면 않됩니다.
카드사용은 흔히들 '신용거래'라고 합니다. 신용이란 인격을 담보하는 것인데 물질을 주고 받는 일에 인격을 담보하게 되면, 물질문제 이상의 근본적인 문제가 생깁니다. 인신매매범에 준용될 범죄행위입니다.
남의 몸을 팔아먹는 인신매매범이 사회문제로 부각되어 있지만 그보다는 그 사람의 인격을 팔아먹는 사람은 더 흉칙한 범죄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인격을 남에게 돈 빌리는 일에 담보로 내어놓는 사람은 육체를 판다고 내놓는 옛날 기생들보다 더한 사람들입니다. 남이 침노를 하고 자기는 힘이 없어 당한 경우라 해도 신앙인의 양심은 둘을 꼭같은 공범자로 봅니다. 하물며 스스로 제 몸을 파는 사람의 죄겠습니까? 그보다 제 인격을 경제 이익을 위해 팔겠습니까?
믿는 사람이 운영하는 가게에 들러 물건을 살 때, 그 사람의 신앙을 보고 물건을 믿거나 그 가격을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동기는 순수했을지라도 그 사람은 자기 스스로 남의 신앙을 담보로 세워놓고 자기 물건의 질적 가격적 안전을 확보한 사람입니다. 신앙이 아무리 싸구려가 된 세상이라도 물건의 품질과 가격을 위해 신앙을 담보물로 악용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런 개념에서 본다면 지금 이 나라에 차고 넘치는 현상 중에 하나가 신앙을 품질보증으로 내세워 돈벌이를 하는 분들입니다. '할렐루야 가게' '예수 시계방' '이레 백화점' '베드로 쌀가게' 하는 식입니다. '이 베드로' '김 사울' '박 성경' 등으로 아이들의 이름을 붙이는 것도 여러 면에서 그 손해되는 점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백영희신앙노선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의 이름이나 상호 등에 신앙을 담보로 제공하는 일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이름이나 매매에 앞세우는 상호 상표 때문에 상대방이 신앙과 상품, 신앙과 인품을 교환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도 지혜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관련 이름을 앞세우고 장사를 하려거든 모든 종류의 이익을 완전히 포기할 각오를 먼저 가져야 하고 반대로 신앙관련 가게에 들어가려거든 매매 후에 물건 때문에 신앙을 욕하는 일이 결코 없도록 스스로 먼저 다짐을 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개인끼리 돈을 빌려주고 빌려오는 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필요한 급전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은 돈으로만 담보를 세워야 합니다. 부동산을 잡든지 아니면 팔아서 돈으로 바로 교환될 것으로만 담보를 세우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지 않고 거래를 하려거든 그 돈을 다 잃어버릴 각오를 미리하는 것이 경제적 현실이며 양심이고 신앙입니다.
③현물에 가까운 이재(理財)법이 좋고, 현찰에 가까운 이재법이 그다음 좋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그림자와 실체를 구별하는 지혜
해 아래 새것이 없다 한 솔로몬의 지혜를 사람의 지혜로 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전도서로 기록해 주신 성경입니다. 지금 말세가 되어 사람의 왕래가 빨라짐으로 남의 돈을 훔쳐먹되 그 속도가 광속을 능가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 동원된 수단들이 지금 이곳에서 주로 말씀드리는 '신용카드'입니다. 현란하여 그 숫자를 다 헤아리지도 못할 만큼 되었습니다. 그러나 원리와 원칙은 해아래 새것이 없습니다. 주신 자연계시의 몇가지 근본원리를 생각하고 붙들고 있으면 복잡한 제도와 기술들이 간추려지게 됩니다. 복잡한 현대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사는 믿는 사람의 지혜일 것입니다.
돈이란 물품을 대신 한 것입니다. 물품의 그림자입니다. 돈 이후에 나온 신용카드 주식 증권 채권 등등 별별 단어들은 쉽게 말하면 돈의 그림자들입니다. 어떤 경제 운용에 동원된 것들이라도 '돈'이라는 하나에 다 집합하게 되어 있고 그 돈들은 물품 앞에 다시 세워져야 할 것입니다. 석유라는 물건을 돈이라는 표시물로 주고 받는데 물건과 함께 이 돈을 주고 받는 방법을 현대 경제학이 별별 제도와 수단으로 복잡하게 해 놓은 것입니다. 무엇보다 현금이 낫고 현금보다는 현물이 낫다는 것을 원칙으로 정해놓고 그 현물을 편리하게 하는 제도로는 성경에도 그 사용을 특별하게 금하지 않은 돈을 사용하는 정도로만 나가면 되겠다는 것입니다.
돈이라는 현금 사용 이상의 방법은 최대한 조심하는 것이 지혜일 것이고, 만일 현금 사용의 편리 정도를 넘어서 외상형태로 움직이는 것이 있다면 참으로 천만위험일 것입니다.
경제적 순기능 전부를 함축한 단어는, 현물
더구나, 사람에게 주신 자연본능은 현물이 가장 눈에 가깝고 확실한 것이며 그 다음이 현금입니다. 현금을 대체하는 다른 무엇은 현금을 대신할 정도가 없습니다. 아무리 친숙해져도 근접치에 이를 뿐이지 대체될 정도는 아닐 것입니다. 인간을 현품에서 현금으로, 현금에서 또 다시 다른 복잡다난한 현대의 다른 결제방법으로 다양화시켜 놓은 것은 인간들을 현혹시켜 그 차익을 상상도 못할 만큼 빼먹는 인간의 죄악성, 즉 제 땀은 최대한 흘리지 않고 남의 땀을 송두리째 뽑을 수 있는 도적성이 그 최후 조종자이며 그 혜택자입니다.
인간은 제 땀 흘려 제가 먹고, 제가 고생한 것만큼 느낌이 있고 행동이 따르게 되며 이 어렵고 고통스런 평생을 통해 비로소 하늘을 바라보고 살려주시라는 원래 위치로 돌아오게 됩니다. 인간 전체에게 주신 가장 기본적인 이 회귀의 길에 충실토록 주신 것이 현물에 대한 초보적 본능 곧 물욕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흐려버리고 인간이 고생은 하되 왜 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길조차 다 잊어버리게 하여 자연상태의 인간 회복성마저도 강탈해버린 것이 바로 현물에서 현금으로 세상을 바꾼 것이고 이제는 현금조차 없애버린 것입니다. 즉 세상은 실체가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림자만 남아있습니다. 현물이 현금의 실체요 현금이 각종 신용결제들의 실체입니다. 실체에 가까울수록 결국은 좋을 것입니다.
월급도 통장으로 결재되는 것이 10여년 넘은 일이지만 그래도 사장이 현금을 봉투에 담아서 손으로 일일이 넘겨주는 원시적 방법이 측량못할 큰 뜻과 장점이 있을 것입니다. 공중전화도 카드를 사용하는 것보다 동전을 사용하는 등, 할 수 없어 밀려가면 몰라도 앞서서 세상 제도를 누리고 이용하며 그 첨단에 서는 것을 신앙인들은 속화적 요소가 다분하다 보며 역사나 경험으로 볼 때는 지극히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런 저런 세상 편리한 일을 미리 다 해본 최첨단의 지식인들은 원시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이 시대의 진정한 최첨단이라고 하여 행동으로 나선다는 소식을 간간히 듣습니다. 그 인간들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문명에 미치도록 한 원인자들인데, 마치 공산주의 최고위층들은 혁명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서 벌써 그 폐해를 알았고 멋모르고 그들을 따르는 이들만 오늘까지 그것이 좋은 것인 줄 알도록 한 것과 같이 보면 될 것입니다.
이 나라 오늘 우리의 형편이 망할 것도 남이 다 망해 보고 결론까지 내린 것을 이제 막 주워 들고 시작하는 것이 적지 않습니다. 더하여 민족성이 한 두가지에 집중하면 그 면으로는 끝을 내는 성향이 많기 때문에 그 정도가 세계적으로 집중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신용카드, 이동통신 등이 그런 경우일 것입니다.
④물론 쉽게 돈버는 것과, 지혜롭게 돈버는 것까지 혼동하지는 않습니다.
이 모든 설명에도 불구하고, 믿는 사람이 노동만 해야 한다든지 내일을 보고 저축을 하거나 투자를 하는 것까지 현실을 벗어나는 죄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양심으로 판단하여 주신 현실의 현재를 넘어서는 범위인지, 아닌지는 각자가 자기 형편에서 자기만의 판단으로 확정할 일입니다.
예를 들어, 현금거래를 넘어서지 않고는 현대 금융업이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 제도 일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식이라 하더라도 저금리 시대이므로 초장기 주식을 사두는 정도의 투자라고 한다면 순수한 의미에서 '투자'라고 인정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이 얼마되지 않고 수시로 변경시키는 것은 세상이 아무리 '투자'라고 해도 자기 양심까지도 투기라 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노름이지요. 이자의 개념도 불로소득이 목적이 아니라 주신 힘대로 늘 일하고 또 근검절약하여 저축하는데 그 저축을 저금으로 은행에 둔다고 남의 땀을 먹는 도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 사람의 경우 현재도 주어진 여건에서 자기 흘릴 땀을 자기 수준에서는 계속 흘리고 있는 사람인데 여분으로 하나님이 맡기신 경제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 문제가 된 것입니다. 남이 나의 경제를 가지고 자기 경제창출에 사용한다면 당연히 '세금' 또는 '사용료'를 내야하는 것이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그 예를 들자면 한이 없으나 땀흘리는 것의 의미를 망각하여 그것을 축소하는 노력으로 쉽게 돈버는 방법을 택하는 것은 불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땀흘려 일하고 근검절약의 방법으로 경제법을 삼고 또 자라감에 따라 또 다른 종류의 땀흘리는 법으로 좀더 쉽게 돈벌이를 할 수 있는 길을 주신다면 우리는 은혜로 그 길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점을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쉽게 돈 버는 방법을 가진 현실을 가지고 복음에 더 바쳐 사는 쪽에다 시간과 땀을 쏟든지 등의 행동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⑤돈을 상대하면서, 돈을 경제로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이제 신용카드를 보시면서, 그 경제 운용면의 편리만 보지 마시고 그 신용카드를 통하여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 자체를 보셨으면 합니다. 10년 직장 생활을 통해 카드빚 1천만원 빚진 사람과 같은 기간 5천만원 저금을 한 사람과 경제력만으로 비교치 말고 그 카드와 저축을 가지고 그 사람 자체를 봐야 합니다. 결혼주례 때마다 백목사님의 입에서는 한번도 빠지지 않는 부부의 경제원칙으로 '근검절약'이라는 말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근검절약의 사람이면 5천만원 저축을 했을 것이고 그 반대라면 신용카드로 그 빚이 있을 것이고 아니면 과다사용이 있었을 것입니다. 백영희신앙노선에 있는 사람들로서는 평생에 신용카드종류를 단 한장 가입한 이력도 갖지 않고 사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신용카드를 많이 사용해본 분들이라면, 아마 마음 깊은 속으로 카드를 한번도 발급받아 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부러워할 것입니다. 여간 경제가 든든하지 않고는 그리 되기 어려운 일입니다.
물론, 현금을 먼저 적립한 다음 그 돈 범위 안에서 지출하는 직불카드 기능만 가진 경우는 일반 대출용신용카드 사용과는 다를 것입니다. 이런 직불카드라 해도 장애자들에게 직불카드만으로 감세분을 돌려주는 제도라면 몰라도 현금과 두 가지를 겸할 수 있는 경우라면 현금을 선호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덧붙이는 것은, 현금 소지로 육체의 안전에 문제가 있는 것은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것이 우리의 몸이니 천하 돈 전부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보충 질문) 국가에서 제도적으로 권하고 있는 경우에는
국가적으로도 투명한 세원 관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신용카드 사용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개인에게는 신용카드 사용자에게 카드복권당첨 제도를 두고 있고 또한 연말정산시 소득세 공제 혜택을 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욱더 신용카드 사용을 권장 하리라고 봅니다. 국가에서 제도적으로 적극 권장하고 있는데는 어떻게 대처 해야 할까요?
(답변) 세금계산을 위한 업무용 신용카드와 개인용 신용카드를 구별 사용하셨으면
국가 제도가 강제력을 가지고 있을 때는,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죄되지 않는 한 해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물론 그 강제력 때문에 당하는 손해를 감당할 정도라면 손해를 당하는 대신 신앙수입을 가지는 것이 우리 신앙의 또 다른 원칙이며 신앙의 본능일 것입니다.
카드사용 때문에 부가되는 손해액이 감당할 정도면 손해를 보고 카드사용을 피하여 입게 되는 액수가 많게 되면, 그때는 카드사용을 할 수 있습니다. 요는 카드사용 자체는 죄되는 것이 아닙니다.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 정확한 선은 각자가 여러면을 생각하여 자기 양심으로 자기 신앙수준과 신앙형편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는 최종의 원칙을 적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고로, 세무소에서 강제시행으로 나가려고 하는 사업용 지출의 카드사용은 우리가 엄격히 회사 지출용으로만 보유 사용하면 되고, 자기 가정용은 가지지 않으면 될 것입니다. 즉 구별가능하고 또 조심가능할 것입니다. 자기가 신용카드의 문제점을 확실히 알고 조심하고 피하려고 한다면 어떤 세상이 되어도 신용카드의 위험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나 만일 신용카드에 대하여 애착을 가진 사람이 남의 눈을 의식해서 카드를 회피한다면 그에게는 신용카드라는 이름을 가지지 않고 다른 형태로 다가오는 수없는 형태의 금융판매술에 결국 깊숙히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