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질문) 도성인신 사활대속의 사랑에 대하여 2780
서기
신앙
0
22
2023.03.13 21:42
2. (질문) 도성인신 사활대속의 사랑에 대하여 2780
도성인신, 십자가대속 공로, 부활
이 모든 것이 주님의 희생과 사랑입니다.
그러나 가슴에 찡하게 와닿지 않습니다.
이 세가지 사랑을 세밀히 설명좀 해주세요.
도성인신의 사랑을 깊이 있게, 대속에 사랑을 깊이 있게,
부활에 사랑을 깊이 있게 설명을 해주시면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매일 매일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성을 입고 부활하신 것을 고통이라고
표현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왜 고통인지요?
(답변) 두 질문에 연관성이 있어 한 자리에서 답변하겠습니다.
1.첫 질문에 대한 답변
이번 질문처럼 은혜나 감동을 원하는 경우는, 답변자가 해야 할 역할이 거의 없습니다.
백목사님 설교록의 중심 중의 중심은 주님의 대속의 희생입니다. 그 사랑에 미치고 그 사랑에 사무쳐 죽어드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하는 설교가 백목사님의 설교입니다. 이곳 홈 /초기화면/활용자료/설교/녹음본/ 등에 제공된 설교 중에서 '세례 성찬' 관련 설교를 찾아 보시면 거의 이 면에 대하여는 깊은 말씀을 집중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20여년 전 밤예배를 마치고 수천명 교인들 쏠려나오는 가운데 안경을 낀 30세 가량의 청년 한 분이 자기 집과 정반대 골목으로 하늘을 보며 땅을 보며 만취한 사람처럼 가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음날 그 동생 되는 분이 어제 자기 형님이 밤예배 말씀 중에 주님 대속 설교에 감격하여 정신을 잃은 채로 예배 후 귀가길에 한참을 딴 길로 가다가 정신을 차렸다면서 감격을 전한 일이 기억납니다.
백목사님 서부교회 주력 교인들의 은혜는 박수가 아니고, 율동이 아니고, 써클 활동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설교 시간에 가슴 속을 파고 드는 대속 관련 말씀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셨다는 기독교 상식의 말씀, 바로 그 말씀 속에서 천하를 발로 밟고 생명을 아낌없이 던질 수 있는 교인들이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이곳 홈 /초기화면/활용자료/설교자료/에서 제공하는 내용은 당시 그 말씀들을 그대로 옮겨놓았습니다. 율동과 박수와 환호와 써클활동 등은 그 현장을 다른 곳에 옮겨놓을 수 없지만, 말씀의 이치를 가르쳐 은혜의 불을 일으켰던 역사는 이곳 녹음과 문자를 통해 그대로 재생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이곳 답변자는 이곳에 제공하는 설교를 교인으로서 뿐 아니라 직업으로서도 수없이 들었습니다만, 지금도 한번씩 새로 듣거나 읽어보면, 그때보다 더 큰 은혜와 감격을 받습니다.
그 감격의 설교를 이곳 답변자를 통해 듣게 되는 것보다, 이곳 답변자를 완전히 흔들어놓은 그 설교에 직접 감전 당해 보시라고 권하는 것이 순리일 것 같습니다. 이유를 알고 싶고 또 왜 그렇게 전개가 되는지 안내를 받고 싶은 분께는 이곳 답변자가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은혜, 그 감동과 감격이 사모되는 분에게는 100볼트짜리 이곳의 저압선보다 몇 십만 볼트 초강력 고압선에 바로 선을 대 보시라고 권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2.두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
부활은, 죽을 인간에게는 좋게 들리지만 원래 하나님이셨던 분에게는 한없는 불편입니다.
인간은 죽어야 합니다. 죽을 인간에게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부활이 있다면 이보다 더 큰 기쁨과 다행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이기 때문에 부활이라는 개념은 최고의 소망이요 희망사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어 온 것은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화장실 구더기가 된 것을 두고 구더기들은 박수를 칠지 모르지만, 그 집 주인이 그 환호성에 취해서 자기 집 구더기가 되겠다고 나설 사람이 있겠습니까?
죽은 예수님이 인간으로 다시 살아난 것을 두고 인간은 죽음 너머 부활만 생각하고 좋아하겠지만, 하나님이 사람을 입고 영원히 산다면 이는 얼마나 불편하고 고통스럽겠습니까? 기준을 하나님에 둘 때 부활은 불편이고 고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