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질문) 허무함은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2415
서기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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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42
4. (질문) 허무함은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2415
가끔 '허무'합니다.
내가 왜 허무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믿음으로 바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허무한 것 같습니다.
또, 믿음으로 혹 바로산다 해도, 천국의 소망이 없기 때문인 것도 같습니다.
'결과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긴다'는 글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튼, 나는 충성도 못하고, 아주 가끔 충성을 해도 허무합니다.
대속 은혜를 주신 하나님 입장에서는 크게 노하실 일이라 생각됩니다만,
그래도 가끔씩 '허무'함이 느껴지는 것을 어쩌겠습니까?
'회개'하면 회개한 것으로 또 그 사람의 영광이 된다는 말씀을 기억해 보았습니다.
그러니 좀 더 힘이 납니다.
저도 제 형편이나 증상을 자세히 말씀드렸으면 좋겠는데,
그냥 한마디로 '가끔 허무하다'는게 제 증상입니다.
어쩔 때는 회사일을 하다가 '허무'하고
어떨때는 '예배 마친 후'에도 그런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혼이 쭉빠지도록, 일을 하면 '허무'를 잠시 잊겠지만,
혼이 쭉빠진 일이 끝나고 나면 또 허무합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좋은 '사상전'을 좀 알려주세요.
(답변) 질문 내용만 집중한다면, 믿는 사람 속에 들어있는 주인이 바뀐 것이 원인입니다.
1.범위를 좁혀서 질문 내용에만 한정을 하겠습니다.
무력감을 느끼는 것은 그 원인이 너무 많아서 전반적으로 설명을 드리는 데에는 답변의 양이 적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번 질문에서 말씀하신 분과 같은 문제로만 국한하여 따져보겠습니다.
'회사일을 하다가 또는 예배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느끼는 그런 허무감'과 같이 일상사에서 다른 사람에게는 크게 표시가 나지 않지만 혼자 속으로 힘을 잃는 경우가 질문하신 분의 문제입니다. 아마 이런 문제는 당장 다급한 일이 터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겪는 일이지만 대개 속으로 그런 감정을 숨겨두고 지나가고 있습니다.
특히 '혼이 쭉빠지도록, 일을 하면 허무를 잠시 잊겠지만, 혼이 쭉빠진 일이 끝나고 나면 또 허무하게 되는 정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바쁘게 움직일 때'라도 그 허무감은 일시 잊어질 수 있다는 대목입니다.
2.세상 흔한 예를 가지고 살펴보겠습니다. 공직에 있는 교인으로 예를 든다면
갑작스럽게 바쁜 일이 생기면 허무감은 없어지지만 그런 후에 또 다시 허무감이 찾아온다면, 지금 질문자께서는 너무 중요하고 시급하고 큰 문제를 잠깐 망각하셨다는 생각입니다. 등잔 밑이 어두울 수도 있는 법이고, 또 꼭 같은 일이 반복적으로 계속되는 안정된 현실을 갖게 되면 누구든지 저절로 원래부터 가졌던 더 큰 사안들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디까지가 시급하게 걸어가야 할 길이며 목표인가?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여 가정을 가지고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는 것까지를 지상목표로 삼은 청년으로 예를 든다면, 그가 합격을 하게 되면 급격하게 이런 현상이 다가오게 됩니다. 처음에는 일을 잘해보고 싶고 또 새로 갖게 된 직장일이 전부 새로 배워야 하기 때문에 그런 무력감을 느낄 여유도 없고 또 느낄 여유가 있다 해도 새로운 것을 접하는 자신의 내면 세계가 무력감이라는 것은 존재할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마치 너무 건강한 청년이어서 겨울철 유행성감기가 그에게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공직에 5년에서 10년 정도 지나게 되면, 뛰어봐야 별 것 없고 이제 어떤 직책을 주든지 비비고 견디는 재주도 터득했고 또 모든 면으로 그 공직이 자기 보금자리가 되도록 체질이 맞아지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에게는 무력감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에게 시장 자리가 주어진다든지 아니면 그에게 장관직이 주어지는 정도가 아니고 계장이 과장으로 진급하는 차원이라면 질문 내용에서 말씀하신 대로 일시 무력감이 해소될 뿐이지 얼마 지나지 않으면 또 같은 현상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3.문제는, 그 소망과 가야 할 노정에 대한 인식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취직 시험 때문에 고민을 할 때는 100대 1을 뚫고 합격을 해야 하는 그 공무원 시험이 자기에게는 인생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 다니엘이 사자굴을 두고 기도하듯 했을 것이고, 또 합격만 된다면 가나안을 소망하던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이 소원성취를 하는 것처럼 그렇게 감격할 문제입니다.
그가 이 일을 두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은혜를 구했을 것입니다. 믿는 사람으로 덕이 되게 해서 교회일에도 마음놓고 충성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전심을 다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심리를 잘 파악해 보면 그 깊은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를 믿는 신앙은 전혀 없고, 하나님 덕으로 취직을 해보자는 것인데 그에게 더 큰 목표는 바로 인생고를 해결하는 문제였습니다.
젊을 때, 여간 신앙이 아니라면 대개 급한 나머지 이런 문제를 두고 하나님은 수단이 되고 직장 문제는 최종 목표가 되는 심리 상황이 자기도 모르게 형성되는 것이 거의 대부분 청년 교인들입니다. 그들이 주일학교 때부터 원래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직장 문제가 현실 문제로 다가오면서 서서히 그리고 장기간 압박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자신의 중심에 있고 취직과 같이 걱정되는 문제는 변방의 걱정거리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변방에서 쉴사이 없이 공격하는 것이 잦아지게 되면 나중에는 그 일만 눈에 부각이 되고 결국은 그 문제가 자기 중심 제일 깊은 곳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어느새 하나님은 주변에 밀려나 앉고 중심에는 취직문제가 들어와서 자신의 모든 심리를 주도하는 형국이 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취직 문제만이 아닙니다. 개척교회 목회자에게는 자립이라는 당면 목표가 처음에는 변방이었으나 막상 목회를 하고보면 순식간에 그 목회자 중심의 최대 목표가 되어버립니다. 그리되고나면 교리와 신앙노선을 내 주더라도 교인 확보만 할 수 있다면 결정하지 못할 일이 없는 목회자로 변하게 됩니다. 훗날 원하는 목표치에 도달하게 되면, 이미 그에게는 자기의 제일 중심에 하나님이 아니고 목회라는 사업의 성공이 있었기 때문에 사업을 성공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고 그 이상 걸어갈 곳이 없게 됩니다. 그때부터는 그가 비록 목회자이며 천국소망을 가지라고 강단을 부러지도록 뚜드리며 설교를 하는데 자신 속에는 자신을 괴롭히는 큰 원수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무력감입니다.
교회 경제가 넉넉하여 목회자가 마음 먹는 것은 못할 바가 없고, 교계적으로도 날로 고위직을 두루 가지게 되어 명성을 얻게 되어 명예도 부도 권세도 생활 여건까지도 가지지 못한 것이 없게 되는 바로 그 순간, 교계 지도자로 성공한 그 사람 속에는 그 사람을 내면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낚시 바늘이 하나 생겨서 아가미를 꿰어 놓아버렸습니다. 바로 무력감입니다.
4.믿는 우리에게는, 너무도 쉽고 간단한 길이 앞에 있습니다.
고교 1학년 첫 달 성적이 1등으로 나온 학생이, 그 성적에 흐뭇해서 더 이상 공부도 하지 않고 놀기만 한다면, 그 학생은 대학입학이라는 최종 목표를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만일 그가 고3년을 마치고 일류대 입학을 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다면 고1의 첫달 시험이라는 것은 하나의 참고사항이지 목표 도달치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시골학생들을 보면 너무 안타까운 면이 하나 있습니다. 시골에서 1등을 하는 학생들은 자기가 천하에 제일 똑똑한 줄 알고 더 이상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시골학생이 인근 도시로 가면 1등이 10등밖에 못하는데, 또 그 인근도시에서 10등하는 학생이 서울 강남으로 가면 40명 중에 30등 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반면에 강남의 30등은 자기 앞에서 한발 차이로 달려가는 학생들이 마구 보이기 때문에 자만하고 놀고 있을 리가 없습니다.
믿는 사람이, 세상 이런 저런 생활고나 주변 일상사를 자주 접하면서 그것이 처음에는 신사참배와 같은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까짓 것이야 언제든지 마음 먹으면 이길 수도 있고, 또 그까짓 직장이 안된다면 노동이라도 하면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 문제는 이런 문제가 한두번으로 끝나지 않고 세월을 통해 계속해서 그사람을 물고 늘어지면 결국 가랑비에 옷이 젖어버리게 됩니다.
이와같이 직장 문제라는 것, 목회자라면 목회 성공이라는 것, 취직을 한 사람이라면 진급문제 등이 그 사람 속에 진정한 목표가 되고 그 사람의 전부의 전부가 되어야 할 하나님과 하늘나라를 슬금슬금 밀어내고 어느새 주인으로 들어앉아버렸습니다. 그 이후에는 시간문제이지 허무감이라는 것은 찾아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 것은 물질에 속한 것이므로 가지기 전까지는 그렇게 크고 좋아보이지만 막상 쥐고 보면 그렇게 허무한 것입니다. 처음 먹어본 쵸콜릿은 그렇게 달콤해서 혓바닥을 녹여놓지만 100개만 먹인다면 고문이 될 것입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만 하면 천하를 다 얻은 듯 기쁠 것 같았는데 손에 넣고 보면 결혼의 기쁨은 1주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면 갈수록 기쁘고, 가면 갈수록 만족이 되고, 가면 갈수록 그 끝이 한없이 넓고 무한하게 나가는 것은 하나님과 하늘나라를 상대해야 하는데에만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영계이므로 제한이 없습니다. 물질계는 제한이 있어 쥐고보면 그것이 전부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그냥 껍데기, 보이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5.따라서, 믿는 사람은, 세상 어떤 문제를 두고도, 또 어떤 현실 속에서도 잊어서 안 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순간, 그의 속에 들어올 것은 세상 밖에 없고, 그의 속에 세상이 조금 들어왔을 때는 그렇게 가지고 싶어 안달이 나지만 가지면 가질수록 자기 속에는 기쁨과 만족이 크질 것 같았는데 반대로 허무가 크지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세상 대소사를 두고 꾸준하게 접촉하는 바로 그 속에서, 자기 속에 하나님과 하늘나라를 잊고 그만 세상이 들어와서 주인이 된 결과가 말씀하신 문제의 원인입니다.
여러가지 말씀으로 살피면 살펴볼 일이 많겠으나, 이번 문제를 두고는 이 면 하나로만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과 하늘나라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소망으로 삼고 하늘나라를 내가 앉아야 할 내 자리로 아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에게는 마지막 숨 넘어가는 순간까지 허무라는 감기가 들어올래야 들어올 자리가 없고 그런 병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세계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