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질문) 뿌듯함과 자기교만 (쉬/1430)
서기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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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42
6. (질문) 뿌듯함과 자기교만 (쉬/1430)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뿌듯함과 자기교만과는 어떻게 구별해야 하나요?
이런 뿌듯한 자부심은 얼마든지 가져도 될런지요?
그 속에 이생의 자랑 요소는 없다고 여겨도 될런지요?
이생의 자랑 요소가 섞이지 아니한 내세에 대한 자부심은 가능하기는 가능한지요?
(답변) 여러번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는 분리가 어려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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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해 말씀 올립니다)
질문 자체가 짧은 답변이 곤란하여 '문의답변방' 차원에서 답변을 드립니다. 질문자께서 자세한 답변을 원하여 '문의답변방'에 올린 질문을 너무 짧게 소개할 때도 가끔 있으며, 또 짧은 답변을 기대하고 이곳 '쉬운문답'방에 질문을 올린 분들께 한번씩 긴 답변을 드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서로 이해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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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교만과 겸손, 자만과 감사
1.'자부심'과 '교만'이라는 표현보다는, '감사'와 '교만'이라고 표현을 바꾸겠습니다.
정말 어려운 중에 말씀대로 실행하고 많은 고난과 기도 끝에 주님 능력으로 두우셔서 기적이나 큰 복을 받고보면 크게 감격하게 됩니다. 다른 분들에게 간증도 하고 싶고 또 스스로 그 일을 생각하면 너무 감사하고 기뻐서 도저히 속에 눌러놓기 어려울 정도의 일을 우리는 가끔 겪게 됩니다.
부족한 자신이 그렇게 생각못한 일을 주님 은혜로 하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뿌듯함'을 느끼고 '자부심'도 가지게 되고 '큰 만족'으로 '기쁨'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뿌듯함' '자부심' '만족'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해도 이런 단어 속에는 자기 수고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벌써 이렇게 표현할 정도라면 위험한 벼랑끝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부심'과 '뿌듯함'은 자기 수고가 들어갔다는 표시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만족'이라는 표현도 교만과 너무 가까운 위치에 있습니다. 만족이 교만으로 넘어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그런데 '감사'라고 표현한다면, 큰 은혜나 기적이나 큰 복을 받은 사람들이 가장 안심하고 좋은 심리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감사'라고 하는 가장 좋은 상태에 있는 경우와 '교만'이라는 것을 가지고 구별해 보겠습니다.
2.'감사'와 '교만'
큰 은혜를 받고 나면, 그동안 마음 졸이며 고생한 것이 해방되는 기분과 좋은 결과를 보게 되어 너무 감사한 마음이 교차하게 됩니다. 고생이 심했을수록, 또 주신 은혜가 컸을수록 그 은혜를 받은 직후의 마음은 대개 건전한 것입니다. 인간의 심리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큰 고비를 넘고나면, 그다음 단계를 기다리는 마귀가 숨쉴 틈도 주지 않고 바로 따라 붙습니다. 지금까지 버티고 이기려고 하다가 패전한 마귀가 이왕 졌지만 이긴 우리에게 교만을 넣어주면 결과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이 끝난다음 교만이라는 단계도 넘어서야 사실 완전히 그 일이 끝난다고 보시면 됩니다.
마귀의 이름은 눅10:30에서 '강도'라고 했는데, 구역성경에는 불한당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불한당(不汗黨)은 자기 땀은 흘리지 않고 남이 흘린 땀을 자기 것으로 가져 간다는 뜻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방해만 했고 주님이 우리를 붙들고 모든 고비를 넘겨 최종 성공을 했는데, 성공한 성도 마음 속에다가 성공한 원인을 다른 데로 돌리도록 줄기차게 노력을 합니다.
3류대학 밖에 못갈 학생이 1류대학을 가게 되어 감사한 일이 있다면, 합격 소식을 받는 순간은 한없이 감사하고 주님 은혜를 잊지 않을 것 같은데, 1-2일, 혹 3-4일 정도 지나고 나면 저 마음 한쪽 구석에서 '그래도 나도 나 나름대로는 한다고 했지, 아마' 이런 생각이 들어갑니다. 이때부터는 '감사'가 '교만'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 이런 생각을 되새기거나 인정하는 듯하게 내 마음이 바뀌면 바로 교만이 되고, 그러면 하나님은 돌아 앉아버립니다. 이런 마음이 바로 자기에게 나타날 때는 하나님을 부인하라고 재촉하지 않고 그대신 '뿌듯함' '자부심' '만족' 등의 마음으로 먼저 우리에게 온 다음, 그런 느낌을 한두번, 두세번 자꾸 느끼게 되면 순간적으로 '그래도 나도 조금 수고는 했지, 그런 수고도 조금 도움은 됐겠지...'라는 생각을 마귀가 밀어넣는데 그 생각을 조금이라도 인정하는 듯 하면, 그 순간 교만으로 바로 돌아섭니다.
'교만'으로 나가지 않고 항상 '감사'로 남아 있으려면, 그 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자꾸 하나님이 해 주셨다는 것이 점점 더 강하게 실감있게 느껴져야 합니다. 그리고 말로만 감사하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고, 그 일의 진행과 마지막 결과까지를 볼 때 이것은 인간이나 다른 것이 개입할 여지가 없고 하나님 세밀한 계획과 추진으로 마치 요셉이 총리가 되고, 모세 앞에 홍해바다가 열리는 일로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구체적인 계산이 제시 되어야 그 감사가 계속 감사로 남게 됩니다.
그렇다 해도, 다른 사람에게 간증을 몇 번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 속에 교만이라는 요소가 하나님 은혜를 간증하는 그 간증 순간을 교묘하게 비집고 들어가서 슬쩍 자부심과 뿌듯함을 표시하게 만듭니다. 그 느낌을 느끼면서 '자기'라는 요소가 들어갈 틈이 있으면 귀신의 낚시바늘을 이미 물어버린 것이 됩니다. 이런 면 때문에 백영희신앙노선에서는 간증이라는 것은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만큼 조심을 시키고 있습니다. 간증을 하면서 '감사'로 출발해서 마지막에 '자기만족'이나 '자부심'이 스며들지 않는 경우를 보지 못했고, 그 간증 끝이든지 아니면 간증 후에라도 결국 교만에게 걸리지 않는 경우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3.'감사'와 '교만'은 숨쉴 틈도 없이 붙어다닙니다.
하나님이 해 주셨고, 하나님은 은혜 아니고는 우연으로나 인간의 노력이 조금이라도 개입될 여지가 없었고, 인간 노력이 개입된 듯 보였으나 그렇게 인간 노력이 개입된 것처럼 보인 것도 실은 하나님께서 일부러 인간노력을 앞세워 놓고 실은 그 뒤에서 전적 다 하신 것이라는 깨달음이 받은 그 은혜를 두고 끝없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되새길수록 하나님 은혜가 자꾸 커져야 하고, 자기라는 존재는 자꾸 없어지고 사라져야 합니다. 이것이 계속되면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사람이 되고, 이런 '감사'는 자꾸 되새기며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 자기 자신이 조금이라도 스며들면서 느끼는 감사는 만족이나 자부심을 통해 교만으로 치달을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므로 순간 그런 생각이 들 수 있는데, 무조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그 생각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 생각을 넣어주는 뿌리를 파 없애버려야 합니다. 없애는 방법은, 그 일을 두고 과연 하나님 아니고 가능했겠는지를 여러 면으로 차분하게 종이에 항목별로 적어보거나 명상으로 따져보는 것입니다. 자꾸 따지다 보면, 결국 실무적으로 실제 계산적으로 생각해도 이것은 하나님 단독 작품이라고 결론이 나게 됩니다. 이렇게 따진 결과 하나님 은혜라고 결론이 나오게 된 경우는 교만이 들어올 틈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야물게 교만을 막아버리면, 이번에는 귀신이 그때 그 일 자체를 쉬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자꾸 되새기면 하나님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만 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4.감사와 교만은 순식간에 바뀌며 몇번 크게 당해 봐야 실제로 교만하지 않게 됩니다.
주일학생이나 장년반 하나를 공을 들여 겨우 전도를 하고나면 너무 대견스럽고 뿌듯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또 자기가 애를 써서 기른 교인이 너무 대견스럽게 보이면 보기가 좋습니다. 그리고 이제 신앙으로 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심도 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사람이 교회 출석을 그만 두거나 아니면 아주 크게 시험에 들어버립니다. 이런 일을 몇 번 겪고 나면 그런 심리까지도 하나님께서 교만으로 보셨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서 좀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분들이 자기 신앙의 식구에 대하여 이렇고 저래서 희망있고 그렇다며 소개를 하게 되면 얼마 가지 않아서 그 식구 탈 나겠다고 예측을 하면 거의 맞아 떨어집니다. 도무지 교만이 들어갈 틈이 없었는데도 그렇습니다. 신앙이 조금 자라올라가게 되면, 자기가 섞인 것을 자기가 느끼지도 못하였는데도 하나님께서는 나 자신도 모르는 깊은 심리 밑바닥에 깔려있는 조짐을 보고 이미 교만으로 판정내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은 이곳에서 어떻게 설명도 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일은 이제 비교적 작은 일들을 겪어면서 아까운 사람, 아까운 좋은 기회를 몇 번 놓쳐 봐야 그다음 감사와 교만의 한 차원 높은 구분법을 알고 익히게 됩니다. 이렇게 자꾸 한 차원씩 올라가다 보면, 하나님께서는 순간도 뒤돌아볼 기회도 없이 앞만 보고 전진하게 하도록 인도하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세계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도 있고, 그 보다 밑에 단계도 있고, 그 보다 더 밑에 단계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각 단계별로 하나님께서 교만과 감사의 선을 구별하는 기준을 달리 적용하십니다. 어리면 어린 대로 완화시키시고, 타락한 교회라면 타락한 교회 정도로 그 선을 아주 멀리 잡고 인도하십니다.
5.예를 들면
어떤 교회는 플래카드를 예배당 건물 전면에 써붙이고 또 동네 사거리 전봇대에도 대형 플래카드를 써붙이고 그것도 부족해서 기독교신문에다 대형광고까지 해서 '000목사님 박사학위 취득 감사예배' '000장로님 00회장 당선 축하'라고 거리낌 없이 내거는 경우를 수도 없이 봅니다. 주일학생 하나 요즘은 참 신앙생활 잘 한다고 생각 한번 퍼뜩 지나간 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너 그렇게 자만해서 되겠냐 하고 화를 내시는 얼굴을 대하는 주일학교 반사의 신앙도 있고, 자기가 박사학위 받고 무슨 회장 당선된 것을 온 동네 방네 다 떠들고 신문에 광고까지 하고 달력에 사진과 이름까지 박아서 마구 홍보를 해도 은혜롭게 목회하는 목회자 장로님들이 있습니다.
일반 교인들이나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그 주일학교 반사는 아무것도 아닌 교인 중 하나같고 플래카드 써붙인 이들은 한국교회를 움직이는 거물같아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베들레헴 골짝에 쳐박혀 있는 목동이지만 그의 이름이 다윗일 것이고, 또 한 사람은 이스라엘을 쥐고 흔드는 영웅호걸이지만 승전비를 세운 사울일 것입니다.
백영희신앙노선에서는 이름 석자 내밀거나 어디에 소개하거나 올려놓는 일을 단두대에 목을 들이미는 정도의 일로 보고 있습니다. 다른 일반 교계는 이름 석자를 내밀 수 있는 기회만을 바라보고 평생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이름 석자를 내밀 수 밖에 없는 입장에 내몰린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2류 신앙에 머물 수 밖에 없음을 탄식합니다. 그리고 평생 이름 석자도 내지 않고 목회할 수 있는 이들이 이 시대 하나님과 가장 깊이 동행하는 이 시대의 보배라고 부러워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