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질문) 중보기도에 대해서 (쉬/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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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질문) 중보기도에 대해서 (쉬/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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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질문) 중보기도에 대해서 (쉬/148)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며칠 전 중보기도모임을 청년부와 함께 가졌습니다.
그런데 한 형제가 중보기도라는 말에 있어 신학적 문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것은 '중보'라는 말은 예수그리스도께만 독립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지
이것을 함부로 중보기도니 중보모임이니 하는 '중보'라는 말을 써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이유인즉 '중보'라는 단어는 성경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중보'라는 것은 대부분 일반화하여서 많이 사용하는 것인데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지 그렇지 않는지 질문을 드립니다.

그럼 언제나 건강하세요...


(답변) 1.'중보기도'의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들 하지만, 마6:12이 있습니다.

1.중보라는 의미를 성경으로 먼저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중보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죄 때문에 끊어진 것을 하나님이 사람되어 예수님으로 오셔서 끊어진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예수님이 다시 이었다는 것입니다. 중보는 이렇게 양쪽을 연결시킨다는 의미를 갈3:20에서 말씀하여 중보는 한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했으며, 하나님고 사람 사이를 잇는 것은 한 분만이 할 수 있으니 딤전2:5에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는 한 분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중보 역할에 대하여 히8:6, 9:15에서 각각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까지가 일반 신학이 예수님의 대속을 '중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성경적 근거이며 따라서 죄를 지어 하나님과 끊어진 인간에게 죄 문제를 해결하여 다시 하나님과 하나 되도록 하는 중보란 예수님 만이 할 수 있고 예수님 외에는 어떤 존재도 할 수도 없고 또 없다고 단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도 당연하고 상식에 속하는 교리인데 오늘 교회들이 '중보기도'를 서로 하도록 하자고 하여 같은 교인이 다른 교인을 상대로 그를 위해 기도해 주면서 '중보'기도를 한다고 '중보기도'라는 단어를 너무도 당연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신학적으로는 큰 일 날 일이라고 난리들입니다.

2.그러나 마6:12, 주기도문은 분명히 사람의 중보기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본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뒷 부분은 예수님 만이 할 수 있는 중보입니다. 하나님께 지은 죄를 해결하여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시킬 분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그러나 이 주기도문의 앞 부분에 있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고 하신 것은 사람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된 죄 문제에 있어 우리가 예수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를 본받아 내가 희생하고 내가 손해봄으로 다른 사람이 죄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며, 그런 경우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 문제가 해결되는 일에 내가 할 희생을 하므로 그가 죄를 회개하도록 되었으면, 이런 우리의 노력을 보시고 우리에게 있는 죄로서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해결해 주시라는 기도입니다.

이 주기도문에서 가르치신 바, 우리가 힘씀으로 해결될 수 있는 형제의 죄를 우리가 희생하여 해결되도록 했다면 이는 우리가 기도를 하면서 애를 써야 할 것이고 이때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표현한다면 굳이 이를 틀렸다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질문하시는 '중보기도'라는 단어 사용이 문제가 되고 있는 일반 교계의 문제는 이런 점을 고려하고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2.현재 문제가 되는 교계의 '중보기도'는 큰 폐단입니다.

1.중보라는 말은 신학 상식으로는 예수님께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만 우리의 중보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끊어진 것을 대속으로 다시 잇는 것을 중보라고 합니다.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께만 해당되는 일입니다. 일반 신학은 기본구원에 해당되는 부분까지만 전념하고 있기 때문에 기본구원에 해당되는 용어들이 거의 전부이며, 중보 역시 기본구원의 범위에서 사용하는 것이 일반 신학이기 때문에 중보기도라는 말은 좀 심하게 말한다면 대속의 구주를 양산하는 극히 위험한 말입니다. 아마 총공회에서 먼저 사용했다면 전국 교회가 이단으로 정죄하는 제1번에 올려 놓았을 사안입니다.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일반 교계입니다. 다수 교회가 소속한 교단에서는 성경에 틀린 곳이 많다고 해도, 불교계와 예배를 같이 드려도 다수를 정죄할 세상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이 이 땅 위에 교계이며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다수결을 아주 우습게 여기는 곳입니다.

2.문제는 유행입니다. 대중을 잡을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린 교회가 없습니다.

순복음교회 조목사님은 '예슈 이름으로' '믿샤옵나이다' 라는 발음으로 1970년대까지 사이비로 늘 오르내렸습니다. 그러나 교인이 많아지면서 교회가 대형화되어지자 앞다투어 그 경영기법이 한국교회를 휩쓸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따라가지 않는 교단이 없습니다.

중보기도라는 단어는 무엇인가 우리들 마음 속에 따뜻하게 와 닿는 표현입니다. 단어의 사용이란 그 사용하는 사람들이 단어가 가진 시적 아름다움, 표현의 편이성, 대중에게 끌릴 수 있는 느낌을 담고 있으면 일단 유행하게 되어 있고 유행이 되고 나면 학자들의 이론으로 진압이 되거나 냉각이 되기는 사실상 어렵습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대중적으로 사용되어버린 그 단어는 원래의 뜻과 다른 의미를 추가로 보유하게 되고 그다음부터는 사전에까지 그 의미로 사용된다고 추인을 받게 되면서 과거 모든 논란을 다 잠재워버립니다.

여론과 대중성이 진리의 구별과 이치를 이기는 언어의 세계를 잠깐 설명드리고 있습니다. 즉, 단어 사용에서는 분명히 잘못되었으나 사용하는 사람의 머리숫자가 진리를 만들어내는 세상의 한 단면을 설명한 것입니다.


3.건설구원이라는 백목사님의 교리시각에서는 이렇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1.덧붙여, 중보기도를 백목사님의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의 시각에서 본다면

안 믿던 사람이 처음 예수를 믿을 때 기본회개라 하며, 그가 평생 자신이 생활 속에서 계속 범하는 죄를 회개하는 것은 평생회개라고 합니다. 기본회개는 기본구원을 얻기 위해 돌이킴을 말하고 평생회개는 건설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평생 계속할 자기 수정이며 자기 전환입니다.

아버지도 참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나 하나님께서 이용하고 사용하여 아버지 '노릇'을 하는 아버지가 각자 집에 모시고 있는 아버지입니다. 그래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만 정확하게 말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아버지시고 집에 있는 육의 아버지는 아버지처럼 사용되는 허수아비 아버지입니다. 이런 시각과 이런 표현법으로 '중보기도'를 굳이 사용해 보려고 한다면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곳은 '중보기도'라는 단어를 듣는 것조차 심히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만.

2.건설구원에 있어서는 우리에게 '중보'의 역할을 하라고 우리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중보란, 신인양성일위의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할 수 있고 이 사역을 중보라고 합니다. 우리가 '중보자'가 된다는 의미를 예수님의 기본구원을 대신하거나 예수님의 이 대속을 분담한다는 의미로 사용하지 아니하고 건설구원에 있어 우리가 예수님을 대신하여 마치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을 예수님처럼 가르쳐 길러가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을 하나님으로 더 가까워지게도 만들고 있으니 이것이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님을 본받아 중보의 흉내를 내고 중보 노릇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의미라면,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사용하는 지식을 가지고 그리고 다른 적절한 용어를 찾지 못해서 그 단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라면, 무작정 정죄부터 할 일은 아닙니다.

좀더 적절한 단어를 찾는 노력이 오히려 필요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일반 교계와 우리 총공회 교회들까지도 서슴없이 사용하고 있는 이 유행병은 이런 교리적 구별없이 그냥 유행을 따라 무작정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 위험성이라는 것은 그 단어를 사용하는 것만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든 그렇게 구별없이 마구잡이로 따라 나서는 유행성 신앙 모습이 큰 병폐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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