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질문)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는 3034
서기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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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42
2. (질문)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는 3034
집회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는 성경적으로 어떻습니까?
그리고 귀신을 쫓아낸다면 어떠한 방법으로 해야지 올바릅니까?
지금 한국에서 부흥사들이 축사하는 것들은 어떻습니까?
(옳은방향인지, 손을대고 기도하면서 보통 합니다)
(답변) 안수와 귀신 문제 등에 관련된 몇 가지
1.귀신은 타락한 천사, 악령을 말합니다.
①악령이란 인간에게 죄를 짓게 하는 존재
악령은 믿는 우리에게 죄를 짓게 하는 것이 그 본업입니다. 악령의 위협이든 유혹이든 어떤 경우라도 악령으로 인하여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그 죄로 인하여 우리에게는 여러가지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②원죄와 본죄로 인간은 고통을 당하는 것
자기 스스로 지은 죄는 한번도 없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할지라도, 그는 태어나면서 원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원죄 때문에 죄로 인하여 당하는 모든 종류의 고통을 다 당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당하는 고통과 어려움이 다 다른 것은 하나님께서 만든 모양이 다 다르고, 또 주신 현실이 다 다르며, 또 각자가 짓는 죄의 종류와 정도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③믿는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
위에서 말씀드린 경우는 일반 사람의 경우입니다.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모든 죄값을 전부 없애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죄 때문에 당해야 할 고통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도 죄를 지으면 그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은 경험적으로 느끼는 바이고 또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윗이 죄를 지어 자식이 죽는 꼴을 봐야 했고,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당한 고통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분석한다면, 믿는 사람은 죄의 값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고, 그 죄를 통해서 고쳐야 할 바를 고치기 위해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의 죄는 그 죄값을 치르는 고통이고, 믿는 사람은 죄값에 대한 고통은 예수님이 없앴지만 그 죄를 짓지 않도록 그 죄의 실상을 배우고 그 죄로부터 돌이키도록 하나님께서 채찍을 들고 가르치는 훈계입니다.
이번 질문과 관련해서 한 가지 추가로 알 것은, 믿는 사람에게는 비록 죄를 짓지 않아도 우리 실력을 쌓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연단과 훈련을 시키는데 이것도 우리에게는 마치 죄를 짓고 당하는 채찍과 같이 느껴집니다. 믿는 사람은 죄 때문에 당하는 징계도 있고, 죄와 상관없이 의를 행하다 보면 당하는 십자가의 고통도 있습니다.
④귀신의 활동 모습
돈을 탐하여 죄를 짓게 하는 가룟유다 속의 '욕심'도 귀신의 활동입니다. 아벨이 예배를 잘 드리자 그것을 '시기'하게 한 것도 귀신의 활동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큰 것을 섬기겠다고 나선 아합왕의 '우상'죄도 귀신의 활동입니다. 하나님 주신 은혜를 잊게 만드는 '망각'도 귀신의 활동입니다. '십계명'을 어기게 하는 것도 귀신의 활동이니 주일을 어기는 것도 귀신의 활동입니다. 불효도, 거짓말하는 것도, 게으른 것도 다 십계명을 어긴 죄가 됩니다. 이것도 전부 귀신의 활동입니다.
⑤질문과 관련된 귀신들린 사람
물론 귀신이 그 사람을 크게 붙들게 되면 거짓말이나 불효나 게으른 것 뿐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다 장악해서 그 몸이 비틀어지고 그 몸의 근육의 움직임까지 틀어지도록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발작을 할 수도 있고, 귀신이 그 사람의 마음을 다 차지해버려서 그 사람의 심신의 행동이 발작으로 나타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머리를 다쳐 발작을 하는 사람은, 감기가 걸려 목소리가 변한 것이나 다리를 다쳐 절룩거리는 것이나 뇌를 다쳐 뇌가 몸 전체를 통제하는 전기 신호를 잘못 전달시켜 발작하는 것이나 꼭 같은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사고나 질병 자체도 원죄로 인하여 이 세상에 생긴 것이므로 아주 넓게 말한다면 귀신 때문입니다.
머리를 다치거나 혹 머리를 잘못 사용하다 보면 청각 신경이 예민해지는 경우가 있고 시신경에 이상이 생겨 사물을 이전과 달리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환청이라 해도 남들이 듣지 못하는 이상한 음을 듣게 되고 이상한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을 사고 때문에 뇌 기능에 이상이 생겼다고 알고 상대하면 될 것을, 이렇게 이상하게 들리고 보이는 것은 귀신이 아니냐고 생각하고 그 마음이 계속 귀신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면 진짜 귀신이 쉽게 들어와서 그 사람의 마음을 혼미시켜 귀신 들린 사람이 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을 치료하려면, 몽둥이를 들고 북한의 강제노동소처럼 정신없이 일을 하도록 만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치료가 됩니다. 또 신경안정제를 다량 투약하게 되면 발작이나 환청 등이 호전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안수해서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노동이나 약물로도 치료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귀신이 직접 발작하게 한 것이 아니라 몸의 이상 상태로 봐야 합니다. 이런 경우도 귀신이라고 한다면, 귀신에게 붙들린 불신자 의사나 강제 수용소 소장도 귀신을 쫓아낸다는 이상한 교리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2.귀신을 쫓아내는 일과 안수, 또는 축사
①축사보다 안수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고 기억
보통 귀신을 쫓아낸다는 분들의 행동은 머리에 손을 얹는 것까지는 공통인 것 같고 그다음 행동은 조금씩 다른 것으로 기억합니다. 따라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할 때는 보통 '안수'라고 하지 '축사'라고 표현하는 경우는 처음 들어본 것 같습니다. 질문과는 상관없이 드리는 말씀입니다. 답변자는 일반 교단의 상식에 어둡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합니다.
②성경에 기록된 모습과 오늘 우리 모습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조심해야
성경이 귀신을 쫓아낸 일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교회 어느 교인이라도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하고 또 행동을 한다면 그럴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정말 귀신을 쫓아내는 일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 중에 오늘 우리가 재현할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경기록'입니다. 이 외에 다른 기적과 병고침과 능력과 전도와 선행은 오늘도 그때처럼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그 외부 모습대로 그대로 오늘도 해야만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는 전부 헬라어와 히브리어로 대화하고 살아야지 한국어를 사용하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기록한 것은, 그 기록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오늘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해 직접 요구하는 것을 '지상 명령'으로 깨달으라고 성경을 기록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냈으니 오늘 우리도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고 기록해 주신 말씀인가? 만일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보리떡 5개로 5천명을 먹이고 12광주리에 남도록 해야 합니다. 또 배를 타고 가다 조난 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물 위로 걸어가서 구조해야 합니다.
오병이어를 기록하신 것을 두고, 하나님은 전능임을 믿고 순종하면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것을 보이심이라고 깨닫는 사람이라면, 주님이 오늘 나에게 다시 한번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라 한다면 그렇게 축사하고 그렇게 되도록 해 봐야할 것이지만, 주님이 오늘 나에게 다른 것을 요구한다면 우리 할 일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병이어와 갈릴리 바다 위를 걸어가신 예수님과 귀신을 쫓아낸 일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주셨지만, 그 성경을 읽고 그 성경대로 살아야 하는 우리의 일상 생활은 각자가 다 다른 것이 오히려 정상입니다.
그 성경을 읽고 부엌에서 열심히 도마질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 성경 기록 때문에 남들은 희망없다고 포기한 사람을 10년 넘게 계속 전도하려고 기도하고 그 집을 방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 말씀 때문에 주일학교 반사를 열심히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 기록은 그 기록의 모습 그대로 오늘 살아야 하는 것도 있고 그 모습 그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 모습이 사실이니 그 모습을 봐서 오늘 나는 내 생활 속에서 어떤 모습을 가져야 성경에 기록된 그 모습과 같은 모습이 되겠는지 살펴봐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③성경에 귀신을 쫓아낸 예수님의 모습
성경이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낸 모습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 모습을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오늘도 꼭같이 그렇게 하라고 성경을 기록해 주셨다면, 우선 오늘은 귀신들려 미친 사람의 숫자가 그때와 비교해서 너무 적은 때이므로 이것부터 문제입니다. 마치 50년 전만 해도 나환자가 곳곳에 넘쳤는데 지금은 DDS라는 알약 하나 때문에 나환자 치료는 감기환자치료만큼 쉬운 때가 되어 더 이상 나환자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귀신들린 사람만큼 많이 기록한 나환자 치료 기록은 오늘 우리에게 소용없는 기록이 되었느냐고 반문해야 할 것입니다. 귀신들린 사람도 과거 30년전만 해도 부산 영선고개에는 마치 서울의 책방골목처럼, 동대문의류도매상처럼 골목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대나무에 삼색 깃발을 달고 수도 없이 늘어서 있었고 시골 동네마다 마을마다 귀신들린 사람들이 이 나라의 과거 분석과 현재 형편과 앞날에 대한 예측을 방송국 해설가들을 대신하여 맡고 있었습니다.
5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개인문제, 가정문제, 국가문제는 이 귀신들린 사람들이 분석했고 해설했으며 앞날이 이렇게 될 것이니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지 알려 주는 선생들이었습니다. 그 숫자가 이 나라 사람 전체를 지도하기에 넉넉한 숫자였습니다. 적어도 오늘의 학교라고 할 수 있는 서당보다 귀신 점쟁이 집이 많았고 오늘의 교사라 할 수 있는 훈장보다 귀신들린 사람의 숫자가 더 많았습니다.
오늘은 그때처럼 정말 신들린 사람은 거의 없고 돈벌이를 위해 호기심으로 책 몇권 읽고나서 하루 밥벌이를 위해 신들린 '척'을 하고 있는 사이비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몽둥이 하나만 들고 때리면 당장에 귀신이 나갈 사람들입니다.
④성경이 기록한 귀신들린 사람의 오늘 모습은
돈에 미쳐서 교회를 현대자동자 영업소처럼 생각하고 교회 경영을 마켓팅으로 생각해서 매출 실적을 올리기 위해 이벤트 행사를 하는 목사들의 그 머리가 완전히 귀신에 사로잡혔습니다. 오늘 무당집을 찾아가서 그들을 사로잡은 귀신도 기도해서 쫓아내야 할 일이 가끔 있습니다만 그런 무당은 한 도시 한 구역에 하나가 될까 말까 한 숫자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 도시에 수십 수백개 늘어선 교회마다 그 교회 강단 위에서 귀신을 쫓아낸다는 말까지 팔아가며 돈에 눈이 멀고 말씀에 눈이 먼 대마귀 큰 귀신이 들어가 있는 목사님들의 숫자는 너무 많아서 어떻게 다 해 볼 수도 없는 정도입니다.
2003년 오늘날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거라사 지방에 귀신들려 무덤 사이에서 자기 몸을 자기가 치고 있는 그 사람보다 더 급하게 귀신을 쫓아내 주어야겠다고 달려갈 곳은 서울의 망우리 공동묘지에 고함을 지르는 미친사람이 아니라 서울 시내에 유명한 교회들, 유명한 신학자들, 교계지도자들을 향해 쫓아가실 것 같습니다. 예수교와 불교를 혼동한 목사라면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린 사람보다 그 상황이 더 심하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린 사람 하나 속에서 나온 귀신이 3천 돼지를 몰사시켰다면, 오늘 대형교회 목사 하나 속에 들어가 있는 귀신을 쫓아낸다면 수만 교인을 건설구원의 옳은 길로 살려낼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교회가 남북통일을 위해 다른 종교처럼 사회단체처럼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신대 교수들의 신들린 상황도 심각하기 그지없습니다. 천국을 팔아서 세상을 사고, 예수를 팔아서 남북통일을 사고, 기독교를 팔아서 사회사업을 하고, 교회를 제 구멍가게로 삼고, 신학교를 재취업훈련센타로 알고, 목사를 구멍가게 개업면허증으로 아는 오늘 우리 전부가 다 완전히 미쳐버린 사람들이 아닌지요? 그런 사람들을 보며 우리의 마음이 아직도 평온하고 별 것 아닌 것으로 보고, 조금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우리들의 정신상태가 귀신에 너무 사로잡혀 희망도 없다 할 상태가 아닌지요?
성경이 틀렸다는 것만 평생 연구하는 신학자가 교회 안에서 권위있는 학자로 대우받고 그의 말 한 마디 때문에 교단이 성경의 정확무오라는 입장을 철회하였다면 그 교단과 그 신학자 머리에다 안수하여 그 속에 귀신이 빠져나가도록 하는 일이 오늘 우리가 해야 할 귀신쫓아낼 일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 일상 생활 속에서 일반 사람이 해야 할 생존의 기본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기도하여 바른 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런 사소한 귀신도 바로 고치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겠지만, 안수하여 귀신 쫓아내는 일만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교회를 향해서 그 방향에 일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이번 답변에서 잠깐 지적하고 있습니다.
⑤순수하게, 우리가 생활 속에서 쫓아내야 할 귀신들린 사람의 경우
성경에 기록을 해 주셨고 또 오늘 우리 생활 속을 차분하게 살펴봐도 진정 그 사람 스스로 벗어날 수 없도록 귀신이 그의 심신 전부를 장악하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를 귀신으로부터 구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안수라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어린 신앙이거나 아니면 안수라는 방법을 오해하여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는 문제있는 신앙일 것입니다.
어려서 실수하고 어려서 전체를 바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는, 귀신을 쫓아내는 문제 외에 모든 신앙생활에서 다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오해가 어릴 때 조금 나타나다가 저절로 수정이 되어 바로 잡혀야 되지 어려서 그런 것이 그 방향으로 계속 나가서 굳어져버리면 그것이 바로 이단이 되는 여러 경우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안수를 통해서 나간다고 해서 한때 안수기도가 온 나라 교회들을 휩쓴 적이 있었습니다. 1970년대 1980년대 20여년간 부산서부교회 강단에서 백목사님이 이 귀신 쫓아내는 문제, 안수 문제 등을 수도없이 강하게 외쳐서 한국교회를 이 문제로부터 많이 고쳐놓기는 했지만 아직도 곳곳에 숨어서 그렇게 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안수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간다면 팔없는 지체장애자는 안수기도를 할 수 없다는 말이며, 하나님의 능력은 그 사람의 팔 길이만큼만 진출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팔길이를 벗어날 수 없다면 이단이라 비판을 해도 할 수 있는 발언입니다. 성경이 일부러 안수를 말하고 그 손을 얹어 기도한 것은 '손'이나 '팔'은 사람의 행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행위, 하나님의 조처를 가르친 것입니다. 다른 의미로는 하나님의 행위, 하나님의 조처란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대로 순종하는 데에서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함께 해 주시니 필요하면 손을 내밀어 안수를 할 수도 있지만 안수가 필수조건인 줄 알면 이는 성경을 벗어난 것입니다.
손을 내밀어 머리에 얹으면 안수를 받는 사람이 그 마음에 느낌이 달라지는데 이는 육체적 접촉으로 인하여 느껴지는 마음의 신뢰감입니다. 사실 이런 것을 제거하고 전적 말씀으로만 고치는 것이 옳습니다. 말씀 외에 다른 방법을 자꾸 사용하다보면 그것이 바로 신앙의 퇴보요 타락이요 나아가서는 탈선으로 이어집니다. 백목사님은 집회 기간 한번에 수백명씩 병을 치료한 기록이 수도 없이 많지만 초기에는 그 발표도 조사도 하지 않았고, 마지막 몇 번은 일반 교회의 혼란을 중화시키려고 몇 번 조사해서 발표하도록 한 적이 있었으나, 손을 얹어 안수해서 병을 치료한 적은 없습니다. 단지 설교 말씀을 듣고 깨달아질 때 또 그 말씀으로 교인들이 기도할 때, 자기들의 깨달음과 기도를 통해 나았기 때문에 그 중간에 백목사님의 설교나 기도가 들어 있기는 했지만 이는 평범하게 설교한 것이었으므로 사실 사람이 고치려고 노력한 것도 또 그렇게 하려고 다른 방법을 사용한 적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 집회에서 병이 나은 것은 전부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직접 역사하셨습니다.
이것은 백목사님과 같은 특별한 목회자가 특별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오늘 믿는 모든 교회 모든 목회자들이 꼭같이 가지고 있는 성경과 꼭같이 행하는 설교나 기도를 통해 꼭같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단지 그 말씀을 얼마나 더 확고하게 믿고 설교자가 주님께 자신을 더 맡겼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 객관적으로 역사한 능력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안수나 물을 뿌리거나 어느 특별한 곳으로 끌고갔거나 아니면 두툼한 돈봉투가 오가는 방법들은 전혀 없었습니다.
3.오늘 교회의 어지러움은 아합시대 교회의 어지러움에 비할 상황입니다.
왕으로부터 백성 하나에 이르기까지, 비판을 하자면 비판으로만 평생을 보내도 시간이 모자랄 때가 아합왕 시절입니다. 오늘 모든 교인들이 대형교회 목회자들 비판하기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그들의 비판 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할 마음은 없으나, 한 가지 지적을 하고 싶은 것은 오늘 모든 교인들의 모습은 비판을 받지 않아도 될 훌륭한 교인들이냐는 것입니다. 오늘처럼 교인들이 자기가 교회를 자기 원하는 대로 택할 수 있고, 좋은 목회자가 있다면 어디라도 갈 수 있도록 모든 사회 경제 교단들의 환경이 이렇게 조성된 적은 일찌기 없었습니다. 교인들이 목회자 욕을 하려면 한도 없겠지만, 목회자가 교인들을 향해 교인 자세를 욕하려면 욕할 것이 더 많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교회의 어지러움은 아합시대에 비할 때입니다. 전부 다 쓸어버려야 할 때이지만 구약 엘리야는 칼을 들고 쓸어버릴 수 있었고 신약 우리는 기도와 말씀 증거 외에 다른 방법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조용히 기도할 때요, 바른 말씀을 힘있게 증거할 때입니다. 이 시대 전체가 미쳤고, 오늘 교회 전체가 다 미쳤습니다. 전부 죄짓게 하는 귀신에게 완전히 장악이 되었다고 보시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바른 말씀, 신앙의 바른 길을 전하는 일입니다. 말하자면 이곳 홈 운영은 오늘 이 시대를 향해 이 시대 교회와 목회자들과 신앙인들을 향해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오늘 21세기형 귀신을 쫓아내는 안수기도를 손접촉 대신 인터넷 접촉으로 하고 있습니다. 손이 가든 인터넷이 가서 접촉을 하든, 아니면 서로 마주 대할 때는 대화로 하든 그 접촉의 형태는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그 내용입니다. 성경 말씀 내용이 바로 전해지면 그 사람 속에 그를 붙들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악령의 역사가 줄어들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고 역사는 역사는 더 강해질 것인데, 이것이 바로 귀신을 쫓아내는 일입니다.
이곳은 비록 내용은 바로 전하고 있다 해도 그 내용을 전하는 담당자의 자체 신앙이 너무 미미하여 과연 몇 명 속에 든 귀신을 쫓아냈는지는 모르나 많지는 않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는 데까지는 하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일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귀신은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을 비정상적으로 만드는 것이 귀신입니다. 성경대로 정상적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전부가 귀신에 붙들린 것입니다. 귀신이라는 표현보다는 악령이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성경대로 살지 않고 그래서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말씀대로 살 수 있게 가르치고 안내하여 그가 말씀으로 가까와진다면, 그것이 바로 귀신을 쫓아내는 일입니다. 이 외에 무슨 신기법을 사용한다거나 신기한 도구를 동원한다면, 작은 귀신을 쫓아낸다면서 혹 더 큰 귀신을 불어 넣는 것은 아닌지 걱정할 정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