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질문) 인본주의 사랑의 간증에 감동받은 것은 1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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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질문) 인본주의 사랑의 간증에 감동받은 것은 1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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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질문) 인본주의 사랑의 간증에 감동받은 것은 1879

오늘 아침 인터넷을 보다가, 우연히 타교단의 간증하는 분을 인터넷으로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자세히는 소개하지 않겠습니다.

그 분에 대한 소개를 접하면서, 저는 약간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감동을 받아서가 아닙니다. 안타까워서.

왜 저런 큰 고난과, 고통을 받았는데도, 그런 큰 고난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생각하면서 이겨냈는데도, 왜? 왜? 인본 껍데기에 이용당하고 말까하는 안타까움에서의 눈물이였습니다.

제가 너무 편파적인가요? 제가 '신본주의'라는 이름아래 너무 냉정한 것일까요? 왜 세상 모든 기독교인들과 불신자들까지 감동받아 울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힘을 받아 열심히 사는 일들이 저에게는 '인본주의'의 한계로 밖에 보이지 않을까요?

글은 이렇게 써도, 저는 제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런 크나큰 고통을 당해보지 못해, 함부로 말하는 것이라면 할 수 없겠지만...

호세아의 고통을 인본찌꺼기들은 '아내사랑' 정도로 생각합니다.

저는 총공회 교인이라고 말하기에는 귀와 입만 큰 사람이지만, 이 길이 '신본주의'의 길임을 믿습니다. 지금은 귀와 입만 커도 나중에는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되길 소망하기에 자학하지 않습니다. 이 길이 홍수 속에서 노아의 방주에 탈 수 있는 길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답변) 잘못된 감사와 잘못된 사랑이 넘치는 세상입니다. 노아홍수만큼 넘치는 말세입니다.

1.들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2.그러나 어떤 간증이나 어떤 소식을 접해도, 우리는 2가지로 나누어 접하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진정한 감사가 있고, 잘못된 감사가 있습니다.
진정한 통분이 있고, 잘못된 통분이 있습니다.

나사로가 그 처량한 처지에서도 감사하던 감사는 진정한 감사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부요함에서 감사하던 감사는 부요함에 감사가 아니고 주님 동행을 감사했습니다.

목축하기 좋은 소돔과 고모라로 가게하신 것을 감사하는 롯의 감사는 잘못된 감사입니다.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해주려고 여러가지 시험을 주시는데, 이 시험이 고통스럽다고 불평하는 우리의 불평은 잘못된 것입니다.


3.우리는 감사와 통분할 일을 너무도 많이 혼동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교회가 건전했을 때는, 맞으면 회개를 했고, 주시면 은혜를 감사할 줄 알았습니다.
지금은, 때리면 매를 치우라고 하나님께 경고를 하고, 주시면 제 실력인 줄 알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의 감사는 감사할 것을 감사하는지, 애통해야 할 일을 두고 오히려 감사를 하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교회가 슬픈일을 만났다고 기도하자는 말을 할 때, 그 슬픈일이 과연 없어져야 할 슬픈 일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복으로 주신 것을 인간이 제 중심으로 엉뚱하게 말하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노아 때 홍수가 넘침같이 오늘 교회에는 잘못된 감사와 잘못된 통분이 너무 많이 넘치고 있어 이 홍수에 잠겨서 교회가 질식을 할 지경입니다. 다 그렇지는 않겠으나 분명한 것은 거의 전부가 그렇습니다.


4.어떤 간증을 듣고 그러셨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간증에 대하여는 단언치 못하겠으나.

깨어 있는 분들이라면, 너무도 외로움을 느끼실 것입니다. 교회는 넘쳐나고 믿는 사람은 가속도로 많아지는데, 정작 믿는 사람과 교회를 찾기 어려워 너무도 외로움을 느끼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세 세상을 또 하나의 광야로 비유를 했습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없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상황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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