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질문) 연보기도에 대하여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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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질문) 연보기도에 대하여 1813

목사님 평안 하신지요?
저는 서부교회 교인입니다.

순교하신 백목사님은 주일오전 예배후 기도시 오전에 증거한 설교 내용을 가지고 기도하시고 새로 임명되어 직책을 맏은 분이나 새로 출석한 새신자를 위한 기도를 한후 기도를 마칩니다.

순복음교회를 보면 말씀 증거후 준비한 예물을 드리자는 연보를 위한 기도를 하고 연보위원들이 연보를 받은후 연보에 대한 감사기도를 하는 것을 가독교 방송 설교를 통해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형식은 다르나 예배 후 어느분이 특별연보를 어떤 내용으로 얼마의 금액을 연보했는가를 발표합니다. 또 주보에 십일조는 금액은 밝히지 않고 성명만 기록하며, 특별연보는 성명과 금액을 기재하여 주보에 실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백목사님은 설교시 십일조나 연보에 대한 중요성을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예배후 연보통을 들고 연보하는 것은 하지 않고 예배당 들어오는 입구에 연보함을 설치해 놓고 자유로이 연보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예배 후 연보통을 가지고 연보를 받으면 다른 사람의 이목 때문이라도 부득이 연보해야하는 점과 연보할 돈이 없어서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본 바로는 백목사님이 연보 기도한 것은 집회시 목요일 집회장소 경비 등을 위한 특변연보를 위해 연보 하기전과 한후 감사기도를 하는 것을 보았고 일반 예배시에는 일반교회처럼 연보를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은 서부교회 서목사님이 최근 주일오전 예배후 기도시 빈손으로 오지 않고 십일조,헌금,헌물,특별연보 등을 가지고 주님에게 감사의 예물을 드리게 됨을 감사한다는 기도를 항상 기도 마직막에 하고 계십니다.

이 기도를 들으면 교인으로서 연보를 준비하지 않고 빈손으로 온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이 됩니다.

백목사님는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을 제가 본 적이 없으며, 서목사님도 하지 않았으나 근래에 연보기도를 하니 다소 생소하고 궁금한 점이 듭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혹시 오해를 살 수 있을까 하여 개인메일로 질문을 드릴려다 제 주위에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어 공개적으로 질문을 드립니다. 서목사님이 백목사님과 다르다 하여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은 추호도 아니며 단지 의문점을 풀기 위해 오랜 망설임 끝에 질문을 드립니다.


(답변) '빈손으로 오지 않게 함을 감사'한다는 정도의 기도라면, 할 수 있는 범위

(바쁜 일정 때문에 내용을 정서하지 못하였습니다. 빗질하지 못한 머리같은 글이어서 죄송합니다. 후에 시간이 되면 다시 정리하겠다는 뜻으로 '우선답변'을 붙여두었습니다.)

1.한 시대를 하나님 앞에 책임진 정도의 목회자가 있었던 교회였기 때문에 여러 문제가 있습니다.

부산서부교회는, 이곳 홈의 시각에서는 1900년대 후반의 세계를 하나님 앞에 책임지고 섰던 시대의 종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런 종이 직접 목회했던 교회에서 은혜받던 일반 교인들로서는 성경과 교리의 이론은 잘 몰라도 그분이 평소에 가르치고 행동으로 보였던 것을 기억하며 신앙의 큰 힘을 삼기도 하고 또 후임 목회자를 평가할 때 과거 그분이 했던 것을 기준으로 삼아 비교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경우, 3가지 정도로 조심할 것이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앞서 가신 그분의 걸음이 너무 특별하기 때문에 일반 목회자로서는 그렇게 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그런 면은 후임 목회자가 아무리 부족해도 기다려주고 오히려 위하여 기도하는 교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설교에 은혜가 없어 갈급을 느낀다든지 교회가 부흥이 되지 않는다든지 목회자에게서 존경할 점이 없다는 이런 문제는 교인으로서 오랜 세월 기다려야 할 책임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 앞서 가신 분과 후임 목회자와 하나님께서 서로 맡긴 면이 다르기 때문에 두 분을 수평비교하는 것 자체를 삼가해야 하는 면이 있습니다. 백목사님은 덕유산 개명 출신으로 초등학교 5년이 교육의 전부였고, 40대가 되도록 똥장군을 지고 농사를 하던 분입니다. 그리고 후임 목회자는 유복한 가정 출신으로 대도시에서만 자랐고 명문 중.고.대학교를 거쳐 미국에서 10년 유학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만일 전임 목사님이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했는데 후임 목사님이 양변기를 사용한다고 해서 이런 문제로 비교를 한다면 이는 비교하는 교인의 잘못입니다. 소에게 도둑을 보고 짖지 않았다고 야단하거나, 개에게 구루마를 끌지 못하다고 책망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셋째, 전임과 후임이 실력이 다르고 사람이 다르고 출신과 배경과 학벌이 다르다고 해도 달라서 안되는 것도 있습니다. 신앙노선입니다. 신앙노선이라는 것은 어느 길을 택하느냐는 것입니다. 부산서 서울을 가려면 경부고속도로를 타야하는데 전임은 시속 100키로로 교인을 데려 갔으나 후임은 시속 10키로로 교인을 데려갈 실력밖에 안 될 수 있고, 전임은 수동기어를 사용하여 연료가 적게 드는데 후임은 장애자여서 자동기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앞에서 말한 첫째 둘째 경우입니다. 그러나 만일 전임은 서울을 가는데 경부고속도로를 탔는데, 후임은 동해선이 좋다고 그쪽으로 방향을 틀어버리면 이런 것은 문제입니다. 동해안선을 타고 계속 올라가면 금강산이 나오고 시베리아가 나와 버리기 때문입니다.


2.질문하신 연보 광고 내용 정도라면, 첫째와 셋째 경우를 함께 생각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우선, 하나님 앞에는 빈손으로 보이지 말라고 성경이 말했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한 것이라고 한다면 목회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설교이며 기도입니다. 그것을 강조했다면 목회자의 목회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연보에 대한 문제니까, 전임자로 말하면 하나님과 교인 각자를 직접 대면시켜 연보를 하도록 했고 후임자로 말하면 아무래도 그렇게 하는 면이 전임자보다는 조금 부족하다고 짐작을 합니다. 그래서 후임자가 '말씀이나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인 각자를 직접 연결시켜 교인들이 자기 마음 속에 하나님을 보며 연보를 하고 그 액수를 결정하도록 노력은 하는데 실제로는 그런 면이 전임자보다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임이든 후임이든 꼭 같아야 하는 신앙노선이라는 세번째 문제는 일치되기 때문에 교인으로서는 전혀 문제 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말씀하신 그 기도내용이 예배 때 연보문제에 대하여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모금운동이 될 수 있는 행정이나 절차나 설교나 기도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전임자의 신앙노선에 대하여, 후임자가 생각을 달리 해서 나는 복음에 필요한 기금을 조성하는 일에 필요하면 큰 무리는 하지 않아도 목회자로서 할 수 있는 정도로는 노력하겠다고 생각을 했다면, 이는 지극히 작은 문제 같아도 신앙의 노선을 변경하는 문제가 됩니다.

만일 연보냐 기금 조성이냐는 두 신앙노선을 두고 연보라는 교회의 노선을 기금 조성으로 방향을 바꾸는 성향이라고 한다면 이는 아무리 적은 문제라도 적게 넘어갈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어느 도로를 택할 것이냐는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기도 중에 '빈손으로 오지 않게 함을 감사' 한다는 내용만으로는 목회자의 중심과 가는 방향이 어느쪽인지 선뜻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확실하지 않다면 교인으로서는, 속으로는 경계하고 지켜보는 마음을 가지되, 외부적으로는 목회자가 복된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교인된 도리입니다.

질문 내용에 대하여 직접 답변을 드리자면, 전임자와 다른 것은 목회자가 다른 사람이니까 당연히 다른 내용으로 표현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고 동시에 연보를 기금으로 보겠다는 노선의 변경일 수도 있으나, 현재 나타난 표현만 가지고는, 내심으로는 노선의 변경을 위해 나타나는 초기 조심스런 변화가 아닌가 하고 지켜봐야 하지만, 외부적으로는 전혀 문제 삼을 일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3.원래 이런 문제는, 2년 이상 된 문제인가 2년이 넘은 문제인가 라는 또 하나의 기준이 중요합니다.

신앙노선의 명백한 변경이 아닌 경우는, 목회자의 목회에 대하여 교인들은 참고 기다릴 의무가 있습니다. 백영희신앙노선 상에 있는 교회들은 공통적으로 그 기간을 2년으로 잡고 있습니다. 이 2년이라는 의미는 일반 교인들이 일반 신앙생활에 있어 대단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목회자의 목회에 대하여 신앙노선 자체의 변경 문제가 아니라 실력 문제거나 자라가는 과정의 시행착오 등일 때는 2년 동안은 무조건 참고 기다리겠다는 하나님의 앞에 서약이 바로 2년 시무 신임투표제도입니다. 한번 모신 목회자거나 한번 시무투표를 통과한 목회자에게는 다음 2년간은 신앙노선의 변경 문제 외에는 전권을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대신 2년이 지난 다음에는 이번에는 교인들이 무슨 죄목이 있거나 중대한 실수가 있는 경우에만 목회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의 주관 느낌과 감정에 현 목회자가 은혜롭지 못하다고 판단되면 목회자 직책을 회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무투표가 지난 후 2년 동안은 목회자가 전권을 가지고 소신있게 목회할 터이니 교인은 지켜보고 따라오고 좋게만 봐 주시라는 책임이 있고, 2년 후 시무투표에서는 목회자가 교인들이 어떻게 투표를 하든, 심지어 부표 운동을 벌여서 부표를 내도 무조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라는 사전 약속이며 하나님 앞에 서원이며 전체가 서약을 하고 있습니다.

질문하신 내용이, 서부교회에서 2년 이상 된 문제라고 한다면, 질문자든 다른 교인이든 이 문제 하나 때문에라도 다음 시무투표 때 그 목회자를 불신임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시무투표 2년 제도를 가지고 있는 서부교회나 백영희신앙노선에 있는 교회에서는, 어느 교회 교인이 자기 목회자의 목회에 대하여 의문이 있거나 반론이 있다면 2년이라는 기간의 의미가 대단히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현재 서부교회는 목사님이 부임한 지 이제 13년째 접어들고 있고 11년 전에 한번 시무투표를 한 다음에는 한번도 투표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일반 교회인 경우에 드릴 수 있는 답변과 시무투표를 하는 교회인 경우의 답변과 서부교회처럼 시무투표를 거부하는 교회의 답변은 각각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시무투표가 없는 교회라면 10년 이상을 기다렸는데 이제 더 이상 못 기다리겠다고 한다면 이는 교인 각자가 자기 신앙과 인내에 따라 달리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시무투표가 있는 총공회 교회로서는 부임한 지 2년이 안됐다면, 백영희신앙노선에서는 교인들은 최대한 참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2년이 넘어서게 되면 그때부터는 교인들이 2년마다 있는 시무투표를 통해 마음껏 반대를 하도록 교회가 앞장서서 교인들에게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2년 마다 시행하는 시무투표를 통해 이런 불만을 반대하게 된다면 목회자 배척하는 죄가 되지 않고 고라가 되지도 않으면서 얼마든지 개인과 교회 전체의 신앙을 생각하여 결정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서부교회는 10여년 째 시무투표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서부교인으로서는 현재 누가 어떤 불평이나 불만을 한다 해도 교회나 목회자로서는 그런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인으로서는 법적으로는 표현할 수 있지만, 스스로 하나님께 조심해야 할 의무는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백영희신앙노선의 시무투표제도는 그 제도의 의미와 범위가 교회 정치제도의 대개혁안이 되는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재 백영희신앙노선의 제일 중심에 있고 모교회라고 할 수 있는 서부교회에는 현 지도부나 반대측이나 목회자들이나 교인들 어느 쪽에도 그런 인식이 기본적으로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놀랄 일이고 믿어지지 않는 현실이나 사실이 그렇습니다. 물론 신앙노선에 대한 개념이 이렇게 초보적 수준에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오랫동안 분규가 지속되고 있는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라고 이곳은 보고 있습니다.


4.마지막으로, 이 문제는 연보에 대한 문제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예물'에 대한 개념입니다.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믿는 우리를 교회라는 단체로 하나되어 믿게 한 역사를 살펴본다면 구약은 성전이고 신약은 교회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솔로몬 때 일차 건축을 하는데 이 성전에 앞서 출애굽 당시 광야를 이동하면서 성전 대신 천막으로 성전을 대신했으니 이를 성막이라고 합니다.

출25장에서 40장까지에는 이 성막생활에 대하여 자세한 명령이 있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교회 생활을 하는 기본 방향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막을 만들 때 많은 재료가 필요한데 이 재료들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 모시고 사는 생활에 필요한 재료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재료를 가져오라 하고 그다음 성막을 만드는 방법 성막의 위치 구조 내용 등을 출애굽기 40장까지 설명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설명의 제일 첫 시작 부분인 출25:1에서,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만드는 재료를 말씀하기 전에 그 재료를 가지고 오는 성도의 근본 자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자세는 바로 '예물'은 가져오고 예물이 아니면 가져 오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으로 말하면 성막이나 성전, 또 이후 모든 제사생활에 있어 하나님께 올 때는 빈손으로 오지 말고 무엇인가 가져와야 하는데 그 가져오는 것은 반드시 '예물'을 가져오라는 한결같은 하나님의 명령이 있습니다. 신약교회 오늘 우리가 드리는 연보는 바로 이 예물 중에 한 가지입니다.


지금 질문 내용 중에서 '빈손으로 오지 않고 예물을 가져오게 해서 감사'하다고 했는데, 그 기도 내용 중에 표현된 '예물'의 정의는 바로 출25:1- 이하에 있습니다. '즐거운 마음'이 들어 있으면 예물이고, 만일 즐거운 마음이 들어 있지 않으면 그것은 모금운동이 되든지 하나님이 불쌍해서 드리는 동냥이 되든지 아니면 복을 많이 받게 해달라고 하나님과 거래하는 매매대금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 날 대속한 것을 생각하고 연구해 보니 감사해서, 그 감사의 표시를 해야겠는데, 주님이 나에게 주신 형편과 입장과 경제는 이 정도이니 나로서는 그 무한한 감사를 나 형편에서 이 정도 표시하는 것이 적당하겠다 하고 드리면 이것은 '예물'이 됩니다. 따라서 구약의 '예물', 신약의 '연보'는 그 속에 즐거운 마음이 들어 있으면 예물이고, 즐거운 마음이 들어 있지 않다면 연보봉투에 무엇이라고 표시를 하고 그 금액이 얼마가 되든지 이는 모금운동이든지, 동냥이든지, 매매대금이든지 그렇게 되지 하나님 앞에 예물이 되지는 못합니다.


5.지극히 작아 보이는 연보 광고 하나를 두고 백목사님이 그렇게 조심하신 것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서부교회는 전통적으로 가난한 거지들의 교회입니다. 노동 현장이나 대로 변 보따리 장사 수준에서 연보하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백목사님은 그 자신이 누구보다 돈에 대하여 아끼는 분이고 고생해서 돈을 벌어 본 분이어서 그 연보 액수와 그 연보하는 사람들의 심리와 형편을 환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어려운 중에, 하나님께 드린다고 해서 비록 적지만 귀하게 연보를 하는데, 그 연보가 성경의 이 '예물적' 연보가 되지 않게 되면 그 아까운 돈마저도 헛돈이 되고 복이 없게 됩니다. 따라서 이왕 하게 되는 연보라도 그 연보하는 사람들이 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한번씩 연보에 대하여 설교를 하면, 연보를 많이 하라거나 강조하는 내용은 없고 연보의 본질이 무엇이며 연보할 때 주의할 점이 무엇인지를 깊이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오늘 질문에서는 연보 문제 중에서도, 연보의 자세가 문답의 핵심입니다. 강단의 목회자에 의하여 연보가 혹시 너무 강조되는 것은 아닌가, 적어도 서부교회라는 어느 한 교회의 환경에서만 본다면? 이런 내용입니다. 그 정도 내용이야 다른 교회에서는 하등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또 서부교회에서도 그 내용이 문제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 백목사님이 연보를 어느 시각에서 어떤 성경말씀에서 어떤 면을 특별히 조심했느냐는 것을 아는 분들이라면, 충격이 지극히 클 수도 있습니다. 지금 질문하신 분과 같은 경우입니다. 그러나 질문하신 분과 또 혹 몇 분 더 그런 분이 계실지 몰라도 질문 내용처럼 느끼는 분들은 자신들이 느끼는 것을 교회를 향해 발언을 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과거 받은 은혜가 있고 또 자세한 이론은 몰라도 무엇인가 신앙본능에서 느껴지는 변화나 변질을 감지했다면 통증을 느끼는 것은 아직도 신앙이 살아 있고 그래서 주변 대기환경의 변화가 있다면 이를 느낄 수 있는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백목사님의 연보에 대한 언급은 사실은 그 강조가 대단히 무서운 분입니다. 연보에 대한 강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지만, 평소 그의 모든 설교는 전부가 예수님의 대속이 얼마나 감사하며 그 대속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역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깊이 설교했었습니다. 그리고 모두들 그 설교에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서부교인이라면 예수님의 대속에 대한 감사는 일반 조직신학 전문 교수들이 근접도 못할 수준에 이르고 있습니다.

없는 데에서 창조하였으니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은 주님 것이고
생명바쳐 대속하셨으니 구원 받은 나의 모든 것은 영원히 주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살려놓은 우리에게 남은 생명 다 해서 이 복음 전하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바칠 수 있는대로 항상 그 사랑에 감격하고 그 대속에 감격하고 그 창조주의 크신 은혜로 숨쉬고 물 한모금 마시는 은혜까지를 생각해서 그분에게는 드리지 못할 것이 없어 환장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분에게 바칠 기회만 있고 바칠 여유만 있고, 그렇게 바치도록 주신 씨만 있다면, 씨라고 계산해서 나오는 것은 언제든지 다 바칠 각오에 불타는 사람을 평소 설교에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받고 그렇게 깨달은 사람이라면, 그런데 그 사람이 이번 주일날 연보 5천원을 해야 하겠다고 자기의 '씨'를 계산했다면, 이 씨를 뿌리는 연보에 대하여 어떤 자세가 나오겠습니까? 이렇게 복음을 위해 뿌릴 수 있는 종자를 주시고 기회를 주셨으니 연보하는 그 순간이 기다려지고, 연보할 수 있는 돈이 너무 이쁘고 귀해서 얼마나 준비 준비 하다가 연보를 하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백목사님의 설교는, 그 듣는 교인들로 하여금 연보 액수나 횟수나 강조가 전혀 없는데도, 대속에 감격하고 그 사랑에 취해서 주님을 위해 죽어드리지 못하는 것이 죄송한데, 5천원 연보할 수 있도록 씨앗을 손에 쥐어주셨다고 생각을 하고 연보를 하게 된다면, 그때 그 교인들은 그 연보가 세금 납부처럼 마지 못해서 하는 수가 없을 것이고, 거지 동냥 주듯이 건방지게 연보를 하는 자세도 있을 수가 없을 것이고, 모금운동에 자기 몫을 내는 사람처럼 복잡한 심리도 존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단 마음으로, 자원함으로, 기쁨으로 하게 됩니다. 출25:1- 이하에서는 '즐거운 마음'이 들어 있어야 '예물'이라고 단정을 해놓고 그 단어에 대한 해석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고후9장의 연보 주의점에 있어서도 억지로나 인색함으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대속에 팔려서 또 주님이 복받도록 기회를 주심에 '즐겨내는' 그 사람이 되고 그런 교인이 된 상태에서 연보라는 형식을 취하라는 말씀입니다.


6.그렇다면, 서부교회라는 어느 한 교회에서 있었던 연보광고는 이런 면에서 다시 평가해 보셨으면 합니다.

평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대속에 팔려 죽어드리지를 못해서 환장하는 사람으로 교인을 만들기를 노력하고, 그러나 아무 때나 죽는 것은 자살이니 주님 원하는 시기와 장소와 종류를 찾는 계산적인 교인을 만들어, 그들이 평소 주일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연보를 드릴 때, 이런 평소의 작은 연보쯤이야 참으로 너무 작게 요구하셔서 오히려 섭섭한 심정을 가지는 교인들이 되게 하고, 혹시 주님 더 큰 것을 요구하시면 더 기뻐게 드릴 교인들로 만들어 두었는지?

전임자 백목사님만큼 그렇게 교인들을 잘 만들지는 못해도 현 후임자가 그런 노선에서 노력은 조금이라도 하는 분인지, 그 연보의 방향은 그렇게 잡은 상태에서 노력을 하는 중, 비록 백목사님이 연보와 관련해서는 예배 때 사용하지 않던 순서나 표현이라도, 후임자는 부족하니까 한 마디 보충을 더해서라도 전임자의 옳은 노선을 쫓아가려는 후임자의 노력에서 나왔다면, 교인들로서는 복되게 보셔야 할 것입니다. 그 동기는 복되게 볼지라도 실제 일반 교인들로서는 서부교회가 연보에 대하여는 초월했던 신앙이었는데 일반 교인들의 느낌에 서부교회도 연보가 기금조성차원으로 바뀌었다고 느낄 것 같으면 충분히 건의해 볼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후임의 근본 시각이나 자세가 연보에 대하여 백목사님의 신앙노선과 다르다면, 현 서부교회 형편으로 볼 때는 건의나 정정 노력보다는 본인들이 조용히 있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지금 세상 법정에서 수십건의 소송이 오고갔고 주변 경찰 검찰에서 고소 고발이 너무 많아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정도인데, 어느 교인이 진정 서부교회의 신앙 내면 문제라고 해서 발언을 해도, 또 반대측이 공연히 트집을 잡는다고 상대방이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임을 참고해야 할 것입니다.

옳은 말은, 그 말 자체도 옳아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말을 발표할 수 있도록 기회나 자격을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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