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질문) 예배순서, 성가대 운영문제 1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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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질문) 예배순서, 성가대 운영문제 1369

자세한 답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 신앙정립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울러 다른 질문을 하나드리겠습니다.

1.예배순서
2.성가대 운영문제


(답변) 예배는 말씀이 중심입니다. 말씀을 중앙에 놓고 앞뒤에 찬송과 기도를 간단하게 정렬하셨으면

1.예배 순서를 살피기 위해, 먼저 알아야 할 예배의 몇 가지 원칙들

예배의 '순서'를 생각하려면 먼저 '예배' 자체를 바로 파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배를 전체적으로 살피려면 양이 많기 때문에 여기서는 예배 순서와 관련이 있는 면만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①예배의 중심은 말씀입니다.

예배는 말씀, 기도, 찬송이라는 3가지 요소로 이루어집니다. 말씀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고, 기도는 그 은혜를 구하는 것이며, 찬송은 그 은혜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요약한다면, 예수님으로 주신 구원의 길을 '깨닫고' '감사하고' '구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3가지 요소의 중심은 말씀입니다. 구원의 길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며, 그 구원의 길을 감사해서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질문하신 '예배 순서'는, 말씀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면 저절로 배열과 그 비중이 결정될 것입니다. 예배 순서 제일 가운데 '설교 시간'이 있고, 앞뒤로 찬송과 기도가 놓여져야 할 것입니다. 설교 전의 찬송과 기도는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시키는 한편 하나님께 그날이 말씀 은혜를 구하는 내용으로 기도와 찬송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 설교 뒤의 찬송과 기도는 그 날 받은 말씀을 새기면서 구하고 감사하는 기도와 찬송이라야 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순서를 말한다면 '기도 - 찬송 - 설교 - 찬송 - 기도'의 순서가 될 것입니다. 요는 말씀 기도 찬송 3가지만 있어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3가지 중 1가지만으로 예배를 드릴 때는 다른 2가지를 포함하면 됩니다. 예를 들면, 말씀과 기도를 찬송에 담아놓고 찬송 한 장만을 부르면서도 예배가 될 수 있고, 찬송과 기도를 말씀에 담아놓고 성구 한 절 읽기만 해도 예배가 될 수 있으며, 찬송과 설교를 기도에 담아 기도 한 줄로 예배를 대신할 수도 있습니다.


②예배는 '형식이나 절차'가 중심이 아니고 '은혜'가 중심이라야 합니다.

신약의 예배는 구약의 제사였습니다. 제사는 '형식'이 중심이고, 예배는 '은혜'가 중심입니다. 구약의 예배였던 제사제도는 율법으로 정해놓은 '형식'과 '절차'를 반드시 지켜야 그 제사제도 속에 담아놓은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제사의식을 지킨다고 해서 구원의 은혜를 다 받는 것은 아니지만, 제사의식을 통하지 않고는 아예 은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제사인 예배는 은혜가 중심입니다. 은혜는 말씀을 통한 은혜이니 말씀 증거가 곧 예배입니다.

따라서 예배는 형식과 절차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일 형식과 절차를 만들게 되면 예배가 아니라 구약의 제사로 되돌아가는 퇴행입니다. 말씀을 증거하는 일에 필요한 최소한의 형식과 절차가 곧 신약 예배의 형식과 절차일 뿐이지, 어느 어느 순서가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지정을 하게 되면 중세 천주교 미사를 거쳐 구약 제사제도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작입니다. 물론, 이런 순서가 더 은혜롭더라는 추천이나 소개는 필요할 것입니다.


③예배는 말씀과 은혜가 중심이라면, 두말할 것 없이 그 순서는 단순합니다.

구약교회는 형식과 절차를 먼저 주시고, 그것을 지키는 과정에서 은혜를 받도록 했으나 신약은 예수님이 오셨고 구원을 완성해서 우리에게 이미 주셨기 때문에 어떤 형식과 절차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오신 예수님, 보여주신 그 말씀을 그냥 증거만 하면 됩니다. 전하면 전해지는 말씀 속에 성령이 역사하여 각자에게 필요한 은혜를 주십니다.

따라서 예배가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어떤 본질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면, 두말할 것 없이 예배는 간단해지고 단순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벌써 예배가 복잡해지고 어려워지고 순서가 많아지고 형식과 절차들이 자리를 잡게 된다면 말씀과는 멀어져 있다는 뜻이고 보이지 않는 은혜라는 것은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말씀의 은혜가 없어진 자리를 메울 때는 항상 찬송과 기도가 그 원래의 모습에서 변형되어 파행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교회가 타락하는 순서는 예배의 타락이 가장 먼저 나타나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이 단계에서는 사람들이 잘 느끼지를 못합니다. 초기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교회가 겉으로 경제부정이 있고 교권쟁탈이 있는 모습들을 가질 때는 암환자 4기가 지난 상태입니다. 예배의 중심이 말씀과 은혜에 있으면 교회는 타락할 수 없습니다. 말씀과 은혜가 약화되면 그 자리를 찬송과 기도가 대신 메꾸게 되는데 이때가 바로 타락의 방향을 감지할 수 있는 미묘한 변화가 외부로 감지되는 때입니다.

예배의 중심이 말씀과 은혜에서 흔들리게 되면, 찬송이 예술로 나가서 수준높은 사람의 음악적 감성을 즐겁게 하는 음악회적 예배가 되거나, 찬송이 수준낮게 나가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무당굿하는 예배가 됩니다. 기도는 멋있는 시낭송으로 나가든지 아니면 중염불하듯 중얼거리는 이상한 방향으로 나가버리게 됩니다. 예배의 본질을 아는 사람은 이 단계를 가지고 타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현상이라고 판정하게 되는데, 정작 본인들은 왜 찬송이나 기도를 두고 비판하냐고 펄펄 뛰게 됩니다. 태풍 전야의 고요함을 두고 한 쪽에서는 태풍이 닥친 것처럼 대비를 하 다른 한 쪽에서는 왜 그렇게 호들갑이냐고 꾸중을 하게 됩니다.

이 모든 현상을 가장 쉽게 간단하게 판정하는 방법은, 예배가 복잡하고 순서가 많아지면 벌써 타락의 본궤도에 올랐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과 내적으로 단절된 교회는 말씀 은혜만을 가지고는 예배와 교회를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예배를 단순히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살아있다면 그 예배가 말씀과 은혜로만 진행되기 때문에 단순하기 그지없게 됩니다.


⑤예배 순서라는 간단한 문제를 가지고, 신약 타락의 기로에서 방향을 잡았으면 합니다.

신약교회는 예배를 어떤 순서로 정하라고 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천주교는 예배 순서를 지정하여 구약 제사제도와 같이 모든 것을 '형식과 절차'로 진행했습니다. 그것이 틀렸다고 하여 개혁해 나온 것이 '개신교' 즉, 오늘 우리 기독교의 출발 모습이었으나 교회의 타락역사는 5백여년의 수레바퀴를 통해 한 바퀴 삥돌아 다시 천주교의 초기 현상을 지나고 천주교 전성기를 향하고 있습니다.

오늘 각 교단들은 그 헌법에 예배모범이라 하여 천주교를 무척이나 많이 닮아가고 있습니다. 구약 성전이나 천주교 성당을 본떠 강단 장식과 예배당 안팎의 치장이 화려해지고, 목회자 옷차림이 신부나 제사장을 닮아가고, 거룩하게 들리도록 연습된 목소리와 예배순서까지 격식과 절차 위주로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은 증거 위주가 아니고 강의로 내려 앉고 있으며, 예배 순서의 중심은 말씀 중심에서 찬송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고, 기도는 천주교 주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누가 기도하든, 언제 기도하든 붕어빵틀에 찍혀 나온 제품과도 같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 순서는 양손가락 10개, 양발가락 10개로 헤아려도 모자라도록 30가지 안팎으로 분화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완전히 미쳐버리게 되면, 예배에 말씀과 찬송과 기도 외에 다른 순서들이 들어와서 한 자리씩 잡게 됩니다. 건강강좌, 정치인의 인사말, 친교, 환영 환송 행사 등이 앉을 자리 설 자리도 모르고 끼어듭니다. 조금 더 나가면 이제 예배 자체가 둔갑을 해서 '월드컵 성공 기원예배' '남북화해 협력 예배' '광역시 통합기념 예배' '삼일만세 예배'로까지 나갑니다. 썩을 대로 썩어서 냄새도 맡지 못할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이런 예배들일수록 그 순서가 화려하고 복잡하고 거창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을 자랑으로 아는데, 유13절의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입니다.

예배 순서 하나만 '말씀 중심' '은혜 중심' '단순 진행'의 원리를 지켜도 말세의 교회 타락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이제 말씀드리는 이 내용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와 천주교에서 막 나왔던 초기 개혁교회 역사에서는 아주 상식이었습니다. 현재 모든 신학교에서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배교과서에서는 그때와 다른 내용으로 신학생들을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2.백영희신앙노선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예배 순서들

1)예배 별 일반 사례

①주일 예배

설교 이전, 10-15분: 묵도 - 찬송 - 기도
설교 시간, 40-50분: 설교
설교 이후, 10분 : 기도 - 찬송 - 광고 - 찬송 - 기도


②밤 예배

설교 이전, 10분 내: 묵도 - 찬송 - 기도
설교 시간, 40-50분: 설교
설교 이후, 5-10분: 기도 (-찬송 - 기도)


③새벽 예배

설교 이전, 5분: 찬송 - 기도
설교 시간, 20-40분: 설교
설교 이후, : 각자 기도로 자유 폐회


2)보충 설명

①예배 순서를 맡는 분들도 단순화해야 합니다.

예배의 격식 때문이 아니고 신앙으로 기르기 위해 순서를 맡기는 경우는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전체적으로는 예배 순서 맡는 사람을 많게 하여 복잡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설교자가 예배 인도 전체를 맡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②혹 필요하여 예배 순서가 많아지고 복잡하게 될 때가 있지만, 그런 때도 원칙은 '단순'입니다.

목사나 장로를 안수하는 임직예배, 교단의 총회 개회 예배 등과 같은 경우, 또는 목회자의 연령이나 교회의 역량을 고려하여 예배 순서를 확대할 필요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필요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으로 늘릴 수도 있고 최소한으로 줄일 수도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원칙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옳습니다.


③예배의 개회나 폐회를 비롯하여 모든 순서에서, 고정적인 순서를 만들지 않습니다.

예배는 시편 교독문으로 시작하는 순서, 사도신경 고백을 예배 전에 하는 순서, 주기도문으로 끝내야 하는 순서, 성경을 봉독하고 나면 '아멘'이라고 합송하는 순서, 성경 봉독 후에 찬양을 해야 하는 문제 등 고정 순서로 인식된 것이 있다면 털어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일반적으로 은혜로운 순서라고 하여 참고 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예배드리는 식으로 인식되면 문제가 크집니다.

은혜스런 순서이기 때문에 꼭 그 순서를 따라서 예배를 진행하고 싶다면, 가끔 한번씩 일부러 순서에 변화를 주어 교인들에게 예배 순서는 고정된 것이 아님을 인식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④예배는 '예배를' 손으로 바쳐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인들이 예배라는 단어에 너무 집착하다가 예배의 본질을 잊어버리는 경우에 발생되는 사고방식입니다. 예배를 '예배를' 두 손으로 바쳐 하나님 앞에 올려놓아 드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인식 때문에 근엄, 엄숙, 경건의 모습만을 강조하여,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 오는 시간이라는 더 중요한 것을 잊어버립니다. 은혜가 생략된 이런 경건한 모습은 어느 한 순간 무당 굿판으로 떠들썩한 예배로 바뀌게 되거나 아니면 아주 석고화가 되면서 마침내 불교처럼 돌이 되어버리게 됩니다.

순서를 잘 익혀서 순서를 시원스럽게 진행하는 사람을 예배 인도에 익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순서를 더듬는 이들을 예배에 서툰 사람이라고 무시하는 것도 함께 고쳐야 할 폐단입니다. 예배의 엄숙과 경건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실감있게 대하는 그 마음의 자세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3.성가대 운영문제

①우선 성가대라는 명칭을 찬양대라고 했으면 합니다.

성경을 성서로, 말씀을 메세지로, 예배당을 성전으로, 성경의 붉은 칠을 금박으로 변경해 온 과정을 면밀히 살펴본 분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의 내면은 타락을 시키면서 교회의 외부와 명칭은 자꾸 상향시키는 것이 악령의 전형적인 방법입니다.

일본이 조선을 삼킬 때, 중국의 속국이었던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높여 부르게 하고 왕을 황제로 높혀 부르게 했었습니다. 조선의 대외의존도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있는데 그 명칭은 자꾸만 세계 열강과 어깨를 겨루는 제국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통구이로 먹기 위해 요리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교회가 사용한 명칭은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내용이 올라가야 좋지 이름만 올라가는 것은 속화를 감추는 전형적인 방법입니다. 찬양대라는 명칭이 그리워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해서 '찬양'하는 것을 찬양대라고 합니다. 그 목소리가 뚝빼기 깨지듯 해도 하나님께 구원의 감사로 찬양하면 찬양대원이 될 수 있습니다. 성가대라고 하면 그 이름은 더욱 고귀하고 높아진 것 같지만, '성가'라는 이름 속에는 찬양대의 찬양은 점점 줄어들고 찬양대의 기술과 기교만 점점 고급화되는 느낌입니다.


②찬양대 운영은, 남녀 이성 문제가 없도록 가장 초점을 두셔야 합니다.

찬양대 운영을 두고 가장 염려하는 것은 교회 내 남녀 이성 혼탁의 시작이 거의 다 찬양대 활동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내 교인의 수준을 냉정하게 파악하는 사람이라면 여반으로만 찬양대를 운영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을 동의할 것입니다. 남녀반을 함께 운영하는 한 남녀 이성문제를 피할 수 있는 교회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 주장에 대한 별별 반론을 다 들어보았으나 예외적으로 인정해야 하겠다고 느껴 본 적은 없습니다. 현재 남녀 찬양대로 모여 재미있게 활동하는 분들은 이 글에 대하여 분노하겠지만, 찬양대의 이성문제가 어느 지경까지 또 어떤 면으로 위험성이 있는지에 대하여는 아마 그분들이 더 잘 알 것으로 생각합니다.


③찬양대 운영은, 말씀의 은혜를 위해 제2선에 있는 위치임을 항상 기억했으면 합니다.

찬양대는 예배의 한 순서를 보조하고 있는 모임입니다. 당연히 예배의 중심인 말씀을 준비하고, 또 받은 말씀을 찬양하는 면으로 그 활동의 규모와 시간과 노력을 조절해야 할 것입니다. 찬양대가 정상적으로 잘 운영되는 교회들을 보면 한결같이 찬양 연습과 발표의 그 순간이 찬양대원들의 신앙의 전부가 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눈썹이 이쁘면 보기가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눈썹이 그 사람의 얼굴을 절반 이상 덮어버린다면 짐승처럼 보일 것입니다.

현 교계의 수준을 평가한다면, 설교는 5-10점을 헤매고 기도는 10-20점을 헤매는데 찬양수준은 110점 120점을 넘고 있다는 것이 이곳의 시각입니다. 집에 돌아가서 오늘 배운 말씀이 무엇이더라?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 그날 말씀은 맹물을 마셨기 때문에 듣기는 들었으나 남는 것이 없고, 아니면 사이다를 마신 정도였기 때문에 톡 쏘는 몇 마디 자극적인 농담이나 비유만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도 찬양대가 찬양하는 재미로 예배당 가는 것을 손꼽아 기다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찬양대는 말씀을 은혜롭게 받도록 어지러운 심령들에게 고요함을 주고 또 강퍅한 마음들에게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을 만들어 말씀을 준비하는 정도로 준비하고 노력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수준 높은 음악가들의 기준에서 완성도를 더하려고 노력하게 되면 너무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투입되는데, 찬양에 기울인 그 노력만큼 성경읽고 말씀 은혜 준비하는 데에는 소홀히 될 수 밖에 없습니다. TV에 출연을 해도 될 만큼 음악적 완성도를 높이려고 찬양을 연습하는 대신, 그런 고도의 노력은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 속에 있는 진리를 찾아 그렇게 한없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찬양에 조예가 있는 분들은 찬양을 듣다보면 찬양의 그 음을 따라 자기가 한없이 빠져들어간다며 음악의 세계를 자랑하는 것을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실력과 노력은 그런 곳에 개발할 것이 아니고 말씀의 세계 속에 그렇게 한없이 빠져 들어갈 수 있도록 진리 은혜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 자라가는 신앙인이라고 생각합니다.


④잘 준비하고, 잘 운영되는 찬양대의 찬송 한 곡은 그날 설교 전체를 능가할 때도 있습니다.

찬양이 예배 속에서 자기의 위치와 역할을 바로 알고 찬양하게 되면, 그 찬양의 보조로 인하여 그 예배에 받게 되는 말씀의 은혜가 얼마나 더해지는지, 이 면을 생각한다면 찬양대를 유지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귀하고 비싼 곰국에 간이 조금 들어가며 제대로 맞춰지면 정말 좋은 것처럼, 찬양이 제 자리를 바로 잡고 제 할 일을 바로 할 때 온 몸에서 어느 한 지체도 빼버릴 수 없는 그런 찬양대가 됩니다. 앞니가 이쁘다 하여 사람의 앞니를 토끼의 두 앞니처럼 크게 만들어 놓고 웃는 사람처럼 그런 찬양대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찬양이 예배 시간에 설교와 경쟁을 하거나 설교를 밀어내고 주인 자리에 앉으려고 싸우는 현상을 아마 이곳 답변자보다 이곳을 찾는 일반인들이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설교자가 찬양대 발표를 위해 설교의 시간과 양을 조절해야 하고, 그날 교인들의 눈에 설교자보다 찬양대가 더 돋보이는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신부 뒤에 선 들러리가 너무 이쁘면 신부 얼굴이 죽어버리는데, 그것도 모르고 들러리로 나설 사람이 자기 얼굴을 알리려고 애를 쓰고 있다면?

찬양대의 찬양소리는 예배 때 말씀 은혜를 준비할 정도로 조절하고, 그대신 그들의 마음이 그 날의 말씀을 사모할 때, 2가지 반응을 상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일반 교회의 성가대 수준에 익어 있는 분들은 그런 찬양을 들으며 '시시하네. 저것도 찬양대라고....' 이렇게 반응하실 것이고, 찬양에 대한 시각을 이곳처럼 가진 분들은 '아, 오늘 찬양 한 곡에서 벌써 오늘 받을 말씀의 은혜를 다 받았네'라고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⑤현재는 모르겠고, 백목사님 생전의 찬양대의 찬양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여학생으로만 된 서부교회찬양대의 찬양이 이곳 /초기화면/활용자료/찬송/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주일 오전 오후 예배 설교가 끝나고, 그날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며 기도하고 나면 마지막으로 백목사님의 기도와 축도가 함께 이어집니다. 이 순간, 그날 받은 말씀은 설교를 들은 자신의 전신에 핏줄을 통해 쫙 번져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백목사님 기도가 끝나고 '아멘' 하는 소리와 동시에 나오는 중간반 여학생들의 찬양은, 그 찬양하는 음 하나 하나가, 그 가사 한 자 한 자가 이 말씀으로 변화된 나를 붙들고 이 말씀으로 살아갈 영원한 천국의 이 곳 저 곳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찬송의 마지막이 '아멘'으로 끝날 때, 그 찬송은 듣는 사람을 천국에서 다시 한번 세상 자기 현실로 내려놓고 있었습니다.

다음 예배 때까지 어떤 힘들고 어려운 현실을 만나도 이미 말씀의 은혜와 그 말씀의 실상이 되는 천국을 직접 받아놓았기 때문에 넉넉히 감당하고 이길 수 있었습니다. 어떤 변화무쌍한 악령의 유혹이 와도 그 말씀으로 기뻐하며 찬양하면서 한 주간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그 찬양대를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그 찬양대의 1/10 만 접할 수 있어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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