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질문) '사이버상의 예배'와 관련 '재독 설교'는? 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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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질문) '사이버상의 예배'와 관련 '재독 설교'는? 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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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질문) '사이버상의 예배'와 관련 '재독 설교'는? 639

1.오늘 논란이 있는 사이버상의 예배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습니까?

2.-참고로 교회와 신앙에서 사이버 예배에 대한 글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사이버 시대의 사이버 교회(2001년 12월호)

박일민
im_park@yahoo.com
칼빈대학교 교수(조직신학)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온 땅에 널리 흩어져 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사람을 지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고 하셨다. 그리고 사람들이 흩어져 살기를 거역하고 바벨탑을 쌓았을 때는, 그 탑 쌓기를 중단시키시고 언어를 혼잡케 하여 서로 흩어지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드셨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땅을 정복하려고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관심을 땅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바다와 하늘, 그리고 우주 공간으로 점점 더 넓혀왔다. 그것도 부족하여서 최근에는 가상의 공간까지 만들어 냈다.

지금은 의사소통, 정보교환, 물건거래 등 거의 모든 일들이 가상의 공간에서 편리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앞으로는 우리의 상상 수준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가상 공간의 이용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져 갈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교회도 가상의 공간 속에 세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과 함께 실제적인 작업들이 상당 부분 진행되고 있다. 현재의 추세로 볼 때, 그 주장은 앞으로 매우 거세질 것으로 예상이 된다. 그러면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복잡하거나 미묘한 문제일수록, 또는 새롭게 부딪히는 문제들일수록 그 근본으로 돌아가서 가장 단순화시켜 보는 것이 좋은 해결책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해서도 교회란 어떤 곳인가 하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해 보기로 하자.

사이버 교회와 관련하여 우리는 교회의 다음 세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 교회는 성도의 인격적인 교통이 이루어지는 모임이다.
성경에서의 교회의 의미는 구원에로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의 모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에서는 외형적인 건물이나 규모나 조직 또는 의식절차가 아니라 오히려 보이지 않는 내면적인 것, 즉 구원에로의 부르심과 그 응답, 그리고 그 구원에 대한 감사의 표현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가르친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기도 하다. 그런데 모임에서는 반드시 구성원들 사이의 교통이 생겨난다. 교회에서는 구원받은 사람이 자기를 구원에 이르게 해주신 성삼위 하나님과 가지는 교통, 그리고 구원을 받아 형제가 된 사람들 사이에서 가지는 교통이 있다.

성도가 하나님이나 성도들과 나누는 교통은 인격적인 것이다. 단순히 지식이나 정보를 서로 나누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차원의 교통이다. 그래서 긴 설명이 없어도 눈빛만으로 속마음을 알 수도 있고, 상대방의 필요를 위해서 수고와 희생을 기쁨으로 감수해내는 교통이다. 이 교통은 마치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경우처럼, “주님께서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는 상태로 표현되기도 하고,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수준의 사랑을 가지고 탄식을 하기까지 하며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상태로 표현되기도 한다.

2)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는 지정된 장소이다.
하나님께서는 안 계시는 곳이 없이 어디에나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어디에서든지 만날 수가 있다. 집에서든 들에서든 하늘에서든 땅 아래에서든 토굴 속에서든 물 속에서든 상관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우상을 만드는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적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을 만날 수 있는 장소를 따로 지정해 놓으셨다. 그것이 바로 성전 곧 교회이다(합 2:20).

이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디에서 살고 있든지 제사를 드릴 때나 절기 때마다 성전을 찾았고, 외국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도 온갖 불편함을 개의치 않고 예루살렘을 찾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예루살렘을 향한 문이라도 열어 놓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단 6:10).

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아담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혼자 있는 모습을 좋지 않게 여기셨다(창 2:18). 그래서 하와를 만드시고 아담의 돕는 배필을 삼으셨다. 이것은 사람이란 본래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 사회적인 존재임을 의미한다. 사람은 가족이나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서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고, 알지 못했던 것을 배우며,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간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서로가 지체들로 연합이 된 사람들이다. 이 연합은 교회 안에서 가장 잘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성도는 서로 지체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보기도 하고 섬기기도 할 뿐만 아니라, 두세 사람이 함께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함으로 성령이 임하시게 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상당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전에 형제에게 용서하지 못한 것이 생각나거든 먼저 가서 그 형제와 화해를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마 5:24).

근래에 사이버 교회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사이버 교회가 가지고 있는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장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1) 편의성
현대의 도시에는 높은 빌딩들이 많다. 그것은 평면적인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나 높은 빌딩들의 밀집은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인구의 밀도를 증가시켜서 각종 문제들을 생겨나게 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교통문제이다. 교통의 혼잡은 사람들의 이동을 어렵게 만든다. 반면에 시골은 도시에서 겪는 것과 같은 혼잡은 없어도, 그 대신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이동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가상의 공간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가상 공간의 세계에는 사람의 이동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가상의 공간에서는 움직이지 않고도 화면을 통해서 얼마든지 현장의 모습이나 의사를 전달한다. 가상공간의 이러한 특징 때문에 사이버 교회가 주목을 받는다. 사이버 교회는 예배를 위해 먼 거리 또는 복잡한 거리를 이동해 가야 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중하게 여기는 시간적·경제적·육체적 이익을 매우 크게 안겨다 주기에 충분하다.

2) 경제성
교회는 예배당이라는 건물이 필요하다. 때로는 교육을 위한 교육관이나 친교실과 같은 부속 건물도 필요하다. 주차공간도 있어야 한다. 이러한 건물들을 마련하고 유지하려면 많은 비용이 든다. 한번 마련한 건물도 인구의 증가나 예술감각의 변화로 말미암아 증축이나 개축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교인들의 수고와 눈물, 그리고 경제적인 부담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이버 교회는 예배당을 짓거나, 늘어나는 교인 때문에 예배당을 증축을 해야 하는 경제적인 손실이 필요 없다. 주차장도 필요 없다. 기존의 교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약간의 비용이면 충분하다. 이 모든 문제가 클릭 한번으로 해결이 된다.

3) 신속성
성경에서 말세의 현상을 예고했듯이(마 24:5이하), 현대인들은 빠른 것을 좋아한다. 한국 사람은 더욱 그러하다.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가 번개의 거리만큼이나 가깝다. 지구촌 구석구석의 소식이 거의 실시간으로 전달된다. 가상의 공간에는 말세를 사는 사람들의 이러한 특징이 잘 반영되어 있다. 가상 공간에서는 수많은 각종의 정보들이 국경이나 대륙의 막힘도 없이 신속하게 전달된다. 한 사람이 올려놓은 정보라도 지체없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전파가 된다.

교회는 보통 일주일에 한번 모인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형편을 모르고 지낼 때가 많다. 때로는 각종 예배와 기도회, 모임 등으로 거의 매일 모이기도 한다. 그러나 분주함이나 많은 사람들 때문에 만나는 사람이 제한되어 있거나, 만나야 할 사람을 못 만나는 경우도 있다. 현대는 주변이 너무 빨리 변하고, 예기치 못한 일들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기에, 성도들 간의 진정한 교통이 더더욱 절실하게 아쉽다. 사이버 교회는 이러한 아쉬움을 손쉽게 해결해 줄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4) 익명성
교회에서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많은 유익을 얻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항상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상처를 입거나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것을 더 잘 배우기도 한다. 그래서 아무개 보기 싫어 교회 나가기 싫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라 하더라도 아직 완전한 거룩함에는 이르지 못한 수준의 부족한 사람들로 구성된 이 땅의 교회에서는 피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이버 교회에서는 익명성이 보장된다. 그래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보지 않아도 된다. 허물과 실수투성이인 사람들을 만나지 않아도 된다. 불필요하거나 부담되게 여겨지는 일을 맡지 않아도 된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혼자 숨어 있을 수 있다. 만일 사람에게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이버 교회는 익명성을 특징으로 하는 대중문화에 길들여진 현대의 교인들에게 신선한 대안처럼 여겨질 수 있다.

앞에서 제시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사이버 교회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1) 인격적 교통의 한계
교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과 구원받은 성도들 간의 교통이다. 이 두 요소에서 반드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인격적인 만남이다.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 없이는 구원이 있을 수 없고, 성도들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이는 지체들 간의 유기적인 관계가 생겨나거나 유지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이버 교회에서는 다량의 정보 교환이나 빈번한 의사 소통이 있을 수 있을런지는 모르지만, 진정한 의미의 인격적인 만남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인격적인 만남은 화면이나 문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직접적인 눈빛으로 통하고, 말없는 미소나 느낌, 또는 따뜻하게 한번 잡아주는 손길 속에서 더 많이 그리고 더 진하게 통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또 진정한 인격적인 교통은 인격적인 존재가 피차간에 나누는 교통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이버 교회에서는 쌍방적인 교통이 아닌 일방적인 전달만 있어지기가 쉽다는 한계도 있다.

2) 성별된 일정한 장소에 대한 혼란
교회는 구별이 있어야 한다. 건물이든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든 분명한 구별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세속적인 것이나 죄악된 것으로부터의 구별이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를 성령의 전이라고도 부른다(고전 3:16). 우리가 이러한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교회 건물만 보아도 은혜가 되기도 하고, 그 곳에 가고 싶어 사모하는 마음도 생겨난다.

그러나 컴퓨터는 구별되어진 대상이 아니다. 대부분의 컴퓨터는 업무용이고 오락용이다. 평상시에는 업무를 처리하거나 가벼운 마음으로 오락을 즐기던 컴퓨터 앞에서 과연 얼마나 구별된 의식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한 대의 컴퓨터를 따로 구분해 놓을 수도 있겠으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컴퓨터에 대한 인식 자체가 구별의식을 쉽게 용납해 들이지를 않는다.

3) 봉사와 헌신생활의 제약
바람이 불면 나무 가지가 흔들리게 마련이듯이,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수반한다. 그래서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리켜서, 영혼이 없는 몸처럼 죽은 믿음이라고 부른다(약 2:26). 믿음에서 나오는 행함은 성경의 교훈에 대한 실천으로 표현이 된다. 이 때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봉사와 헌신의 생활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눈에 보이도록 드러나지 않는 영적 세계의 정확한 상태를 평가하려 할 때, 봉사와 헌신의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모습들을 기준으로 삼기까지 한다.

사이버 교회가 정보의 전달이나 전도의 매체로 이용될 수는 있다. 그러나 사이버 교회에서는 가상의 공간이라는 것 때문에 성도의 의무인 동시에 보람이기도 한, 봉사와 헌신의 생활에 극도의 제한이 따른다. 그러므로 사이버 교회는 일상적인 성도의 삶을 유지케 하는 교회가 되기 어렵다.

우리는 지금 사이버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사이버 공간이 지니는 편의성, 경제성, 신속성, 익명성 때문에 사이버 공간에 대한 우리의 의존도 또한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사이버 교회는 분명히 우리에게 적지 않은 장점을 제시해 준다. 그러나 그 장점들 뒤에는 교회의 참 모습을 손상시킬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요소들이 숨겨져 있다. 장점을 뒤집어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약점으로 뒤바뀌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이버 교회를 무비판적으로 일반화시켜 수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보인다.

교회는 편의성보다 주님의 남은 고난을 채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골 1:24). 우리는 옷깃을 여미고 무릎을 꿇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모이기를 폐하거나 변경시키려 하지 말고, 모이기를 힘쓰라는 명령을 지켜야 한다(히 10:25).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는 익명이 아니라, 당당한 한 인격으로 나서야 한다. 세상은 날아가듯 변하여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진리는 어떠한 여건에도 변함이 없이 지켜야 한다.

하지만 사이버 교회가 가진 장점들을 활용할 수 있는 예외적 가치는 인정할 필요가 있다. 사이버 교회는 질병이나 신체적인 이유 때문에 이동이 불가능한 경우, 특별한 사정으로 고립이 되어 있는 경우, 분업화 다양화된 사회 특성상 불가피한 경우 등에 한하여 부득이한 예외로 도입해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2001년 12월호).


(답변) '싸이버'성격의 요소는 이미 이 시대 모든 교회와 예배에 깊숙히 들어와 있습니다.


(답변요약)

1.재독 설교, 싸이버 예배 문제에 대한 답변

'싸이버공간'이라는 말은 가상 공간이라는 말로 인터넷 등을 이용하여 오늘날 예배 등 신앙의 각 방면에 적극 활용되고 있는 문제의 중심에 있습니다. 공회는 비록 성경으로 정죄할 일이 아니라 해도 기존 해 온 것을 변경할 때는 극히 조심하는 신앙노선에 있습니다. 또 필요해도 그 사용 여부에 대하여 아주 조심하는 바, 재독 설교를 예배 설교로 사용하는 문제는 백영희목사님이 생전에 대단히 오랜 세월 연구하고 많은 면을 살펴 시행했던 것입니다.

이곳은 재독 설교에 대한 반론들이 당초 교권쟁탈의 정치구호로 사용되었거나 아니면 성경 오해 등으로 제기되었다는 결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반론에 대하여 논쟁을 하게 되면 목회 현장에서는 손해보는 면이 거의 대부분입니다만 이곳은 연구목적이 우선이기 때문에 예배와 총공회 신앙노선 등 여러 관련 면을 연구하는 차원에서 제기 되는 모든 문제를 언급하면서 동시에 조직신학 정리를 위한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답변은 필요 이상으로 그 양이 많다는 점을 늘 양해 구하고 있습니다.

2.간단한 요약을 원하는 분들은 (전체답변)을 보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재독설교와 싸이버예배 문제에 대한 답변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 교회는 '스피커'라는 기계운용 하나만을 가지고도 예배 설교를 육성이 아닌 기계음으로 만들어 사용했고 이 기계음은 자연상태에서는 생각도 못할 차원에서 싸이버공간을 창출하여 현재 교회들은 그 범위와 정도 문제이지 이미 싸이버요소가 빠질 수 없게 되었으니 싸이버예배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런 것이 '싸이버'라는 단어로 문제가 되고 또 '죽은 자의 비디오 영상 설교'라는 표현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연구적 자세나 교리적 중요성은 전혀 모르는 이들이 세상 유행을 따라 교회의 진퇴와 진로를 정하고 성급하게 세상화되는 과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앰프장치를 낫과 같은 차원의 연장으로 알고, 컴퓨터 네트웤의 본질을 전혀 파악도 이해도 하지 못하는 이들이 성급하게 세상 유행을 따라 교회 내로 이런 장치들을 도입했고 또 그 부정적 문제가 뉴스를 타고 세상에서 문제가 되니까 도입 때 성급했던 것처럼 그 문제점을 부각하는데 성급하고 있습니다.

이 재독 문제와 싸이버 예배, 나아가서 앞으로 싸이버 교회라는 개념이 일반화 될 때를 미리 앞두고 이런 점을 깊이 생각해보는 것은 오히려 좋은 일입니다. 문제는 대세와 유행을 따르지 않고 고요히 예배의 본질을 생각하고, 예배의 본질이 규정되었다면 그 예배의 본질상 허용되고 사용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조용히 해부 분석하면 된다고 봅니다. 여기 '싸이버'라는 표현으로 요약될 문제들과 관련된 여러 사항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미 이곳은 1989년 재독에 대한 반론이 처음 제기될 때부터 스피커 사용까지를 포함한 넓은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재독문제를 정죄하는 것은 막가는 행위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지금도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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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답변)

1.싸이버예배의 성경적 이해

(1)싸이버 공간에 대한 이해

전통적 예배는 장소를 기준으로 볼 때 별개의 공간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최근 과학 기술의 발달로 자연 상태에서는 별개의 공간으로 분류될 장소에 있는 사람들이 동일 장소에 있는 것처럼 교류 교통 활동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 가상 공간이라는 개념을 예배에도 적용하여 다른 장소에 있는 교인들이 가상 공간에서 함께 하며 예배를 드릴 수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우선 싸이버 공간을 정의해야 싸이버 예배를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싸이버 예배가 무엇인지를 확정지우게 되면 여기에 대한 신학적 고찰을 성경으로 할 수 있게 될 것이니, 무조건 지지나 무조건 반대에 앞서 우선 냉정하게 사실을 사실대로 확인부터 하는 것이 연구하는 신앙일 것입니다.

①싸이버 공간이란

가상 공간이라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자연 상태에서는 거리나 지장물 때문에 별개의 공간이 존재하게 되는데 이런 분리된 공간을 과학 기술을 사용하여 자연상태에서의 한 공간과 같이 사용되는 것이 가능한 경우를 '싸이버공간'이라고 세상이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 공간과 싸이버공간의 구별은 우선 그 한계를 정확하게 그을 수가 없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자연상태에서 사람의 오감(五感) 거리'가 실제 공간인데 이 '오감 거리'라는 것은 사람마다 각기 다를 수 밖에 없고 또 공간에 설치된 여러 구조에 따라 그 범위는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듣는 청각과 보는 시각이 공간적으로 가장 범위가 넓기 때문에 자연상태의 실제 공간의 범위는 시각과 청각의 범위에 따라 맞추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②싸이버 공간을 적용한 사례

자연 상태의 오감 거리를 벗어났기 때문에 실제 공간은 아닌데도 사람의 과학과 기술로 자연 상태의 공간에 변형을 주는 대표적인 경우는 안경과 스피커입니다. 참고로 여기서 주로 살펴보면 문제는 공간인데, 공간이라는 특성은 직선 거리가 10배 넓어지면 면적은 100배로 넓어지고 직선 거리가 10배 넓어지면 공간은 3차원으로 넓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하급수적으로 넓어지는 만큼이 자연상태에서는 사용치 못하던 공간인데 과학 기술이 가상공간으로 확보해 준 것입니다. 자연상태를 기준으로 말한다면 안경과 스피커는 인간이 정상적으로는 가질 수 없는 공간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10m 거리의 사람을 전혀 인식치 못하는 이에게 안경이라는 도구는 100m 이상의 거리를 실제 사용 공간으로 제공하게 되는데 거리가 10배 길어지면 면적에 있어서 100배로 넓어지고 3차원의 공간개념에서는 기하급수적으로 그 범위가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생활 속에 이미 평범하게 자리를 잡은 안경을 뒤 따라 스피커 역시 공간을 넓힌 면에서는 안경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한 강의실에 100명이면 육성으로 진행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대형 강의실에서 스피커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뒷자리에 앉은 이들은 시각적으로는 동일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청각적으로는 전혀 별도의 공간을 형성하여 별별 짓을 다하게 됩니다. 이런 점 때문에 각급 학교는 그 교육의 질을 높이는데 절대적으로 갖출 요건을 제시할 때마다 시각과 청각의 범위를 고려하여 실제 공간으로 강의가 진행될 수 있도록 교실 여건을 갖추라고 하는 것입니다.

같은 원리가 되겠지만 청력을 잃어가는 노인들의 보청기, 동일 사무실 안에서 직원들 각자의 집기나 서류는 딴 공간으로 분리하면서 보고 듣는 시청각 범위는 동일 공간으로 유지시켜 주는 투명 유리 칸막이, 1층과 2층을 동일 공간으로 만들어 주는 건축 기술 등도 가상 공간을 살펴보는 데에는 반드시 참고할 문제들입니다. 이런 이해의 연장선에서 현재 우리 생활 속에 들어온 인터넷 가상 공간도 같은 원리이며, 앞으로 닥칠 가상 공간 문제는 인체 자체의 이동으로 좁혀질 공간문제도 예상하고 있어야 합니다.

공간과 관련되어 확대되는 범위는 물질의 이치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인간의 정신 세계까지 가상의 공간과 과학 기술의 조작은 가능하도록 하나님이 미리 만들어 놓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놀랄 것도 없고 새로울 것도 없는 해 아래의 것입니다. 성경을 알되 몸과 마음이 물질로 만들어진 것을 알고 세상 모든 현상은 하나님께서 이 땅 위의 운영에 사용하시는 물리의 이치 범위 안에서는 앞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람의 지식이 더하며 왕래가 빨라지리라는 말씀은 수천년 고대사회에서부터 우리 교회가 가지고 있던 상식입니다.

③싸이버공간의 근본이해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주신 하나님의 자연은총

그런데 이런 문제를 살펴보는 일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은, 애당초 싸이버 공간이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 있느냐 하는 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 공간과 싸이버 공간을 구별하는 것은 자연상태냐 과학기술이 첨가된 상태냐는 문제인데, 과학기술이란 자연상태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즉, 돌 하나에 돌 하나를 더 쌓은 것은 자연축조이고 돌 사이에 이긴 진흙을 바르면 과학 기술이냐는 것입니다. 자고 일어나면 눈꼽이 끼어 시야가 짧아지는데 물로 눈을 씻어 시야가 넓어지는 것은 과학이 아니며 이는 인간의 기술이 아니냐는 문제입니다. 빛이 직선으로 굴곡되는 것은 자연이고 그 빛이 물 속으로 들어가면서 일정 각도 꺽이는 것은 과학이냐고 반문을 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것은 자연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에 존재하는 수정이나 유리를 통해 물체를 확대해서 보는 경우, 소리가 잘 울리는 곳에 여러 사람을 모아 놓고 육성으로 말하는 경우, 돌을 쌓아 육성이 잘 울리도록 하는 경우 등등을 면밀하게 살피고 연구하게 되면 실은 이 땅 위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현상은 전부가 자연현상입니다.

모든 종류의 과학과 그 모든 발전 모습은 실은 넓은 범위에서 본다면 하나님이 물질계 우주 안에서 주신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며 사용하는 종류의 다양화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과학발명품과 그로 인한 것 전부는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영계의 것과 물질계의 것으로 나누었고 그 중에 물질계의 것을 자연이라 또는 과학이라 하는 것이며 이치로는 물리라고 하는 바 이는 전부 자연상태입니다. 자연상태가 아닌 것을 발견했다면 중생 후 우리가 보게 된 하늘나라 뿐입니다. 이것은 자연상태 안에 있는 과학으로서는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자연상태가 아닌 것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중생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만들어주신 하늘나라에 속한 것이니 이것은 과학이 만들래야 영원히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야 좁은 인간이 영계가 있음은 알지 못하고 자연 속에 갇혀 그것만 전부인 줄 알기 때문에 이전에 없던 것이 나오면 새로 창조한 듯이 새로 알게 된 듯이 난리들이지만 물질계의 물질의 이치이니 곧 자연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의 한 현상일 뿐입니다.

과학의 기술을 죄라고 단정하는 물질 개악설이나 극단적인 문명기피론자가 아니라면 자연 현상 안에서 극히 먼지 만큼 일어나는 자연 현상을 두고 그렇게 소동하고 난리부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고 있어야겠다는 것입니다.

(2)싸이버예배에 대한 여러 고려할 문제

①싸이버공간을 사용하는 싸이버예배 문제에 선행 논쟁이 되었어야 스피커 사용 문제

설교자의 살아있는 생생한 육성만이 예배 설교에는 사용되어야 하는데 그 살아있는 인간의 자연육성을 스피커 장치를 통과시키면 끓인 물은 죽은 물이듯이 그 육성은 이미 죽은 음성이요 좀더 과학적으로 표현한다면 기계음이 될 뿐입니다. 물론 과학의 발달로 그 기계의 음이 흡사 인간의 육성을 지속적으로 닮아가고는 있지만 종류로 분류하면 기계소리일 뿐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있는 설교자가 현장에서 바로 전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토록 강조하면서 그들이 정작 전달하는 자신의 말은 기계 부호화 하여 정보제공의 기술만이 움직이도록 하고도 소위 '산 사람의 살아 있는 산제사 예배'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기계음은, 기계에 의하여 의사전달의 문장적 전달은 정확하게 이루어지지만 그 의사전달이 육성에 담기면서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음색 음감 음질 등의 작용으로 인하여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많은 것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감정에 그칠 수도 있지만 성령에 감동된 영감이 문장 내용 이상으로 역사할 때 이는 기계에 의하여 삶겨진 물과 같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혹 스피커도 음질 음색 등 음이 가진 모든 요소를 다 재생하지 않느냐고 할 사람도 있겠으나 이는 연구적이지 못한 자세입니다. 기계의 흉내이며 모방일 뿐입니다.

조절 조정 가능한 환청현상입니다. 과학의 기술로 가능하다는 것은 판명이 되었으나 이런 음성에 말씀이라는 내용을 정보제공 차원에서만 전한다면 그것이 예배의 본질에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있다면 다른 수많은 싸이버적 기술들이 같은 원리로 가능할 것이고 이것이 안된다면 두 말 할 것 없이 안된다고 할 것입니다.

②스피커 사용은 육성을 죽이면서 동시에 싸이버공간을 만들어 싸이버예배를 만들고 있습니다.

얼굴을 보며 설교를 하고 말씀을 듣는 것이 정상적 예배의 공간 활용이며 이것이 예배의 한 본질이라고 주장하지만, 스피커의 사용은 한 교회 안에 유아실이나 여러 부속실을 두고 본당의 설교로 함께 예배를 드리도록 하고 있는데 이미 얼굴을 볼 수 있고 육성으로 들을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이런 장소에 있는 교인들은 싸이버공간에서 싸이버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대형 예배실이나 전세로 빌린 예배당의 경우는 설교자가 가리는 곳이 많아 기둥 뒷쪽 등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게 되는데, 이 영상은 목회자의 얼굴이 아니며 기계로 조작되고 조절되는 환상입니다. 심리에 문제가 발생되면 환청과 환상을 보게 되는데 이런 경우는 의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지만 스피커를 통한 기계음과 스크린을 통한 기계화면은 외부에서 환상 환청을 기계적으로 조작하는 것입니다.

신학은 작은 우상은 섬기고 큰 우상은 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상에 한번 절하는 것은 넘어가고 습관적으로 절하는 것은 따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싸이버공간의 싸이버예배가 문제라면 싸이버라고 정의될 수 있는 기계 기술적 요소들을 전부 삭제해야 합니다. 당연히 자연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동일 공간의 예배를 말하게 되는 것인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자연상태라는 것은 과학과 신앙에 분별이 필요없는 일상사에서 기준없이 사용할 때 주로 사용하는 것이며 만일 구별하여 사용하게 된다면 이 땅 위에서 불신자들도 할 수 있는 모든 작용은 전부가 자연현상입니다.

③싸이버예배를 논하기 앞서 변형해서 안될 예배 공간을 이동 변형한 경우들

예배의 본질에서부터 살펴나온다면 언급치 않을 수 없는 사안입니다. 교인들이 바닷가로 피서를 간다하여 목회자가 예배당을 두고 피서지 주차장 안으로 강단을 옮겨가서 배달 설교를 한 것이 '적극적사고방식'으로 1970년대 세계 교회를 풍미한 LA Garden Glove Church 의 슐러목사님입니다. 예배가 구약성전에 드리던 짐승 대신 산사람이 산채로 드려져야 하는 것이니 경건하기 이를 데가 없어야 한다는 재독 반대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배당을 들고 인간의 향락 뒤를 따라다닌 죄로 처벌해서 마땅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와 그의 교회는 오늘까지 모든 성공한 대형교회들의 표상이 되고 그의 뒤를 이어 오늘 모든 교회가 교인이 즐길 수 있는 예배, 교인들이 즐길 수 있는 강단의 형태, 교인들이 즐길 수 있는 이벤트식 예배, 젊은 이들을 위해 젊은 이들의 예배를 만들지 하나님 앞에 그들의 주관과 취미 그들의 유행과 사적인 감정을 잡아 들이는 예배는 없습니다. 결국 큰 죄는 그쪽에서부터 시작되고 그쪽이 더 큰데 유독 싸이버예배를 정죄하는 것은 너무 감정적이며 서툴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대개 자기 목회에 당면한 과제가 되면 못할 것이 없도록 전부 다 시행해 온 것이 적어도 한국교계이며 총공회입니다. 성경과 신학이 그러하다면 어떤 목회의 성공 권위 교인 문제가 생겨도 흔들리지 않았던 예는 일반 교계와 총공회 재독 반대측에서는 본 적이 없습니다. 이론으로서도 성립될 가능성이 없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배뿐 아니라 예배보는 공간 자체를 날품팔이 행상처럼 들고 다닌 이들은 싸이버공간을 이용한 싸이버예배를 반대할 자격도 없다고 한다면 야외예배를 위해 그 거룩한 장소적 제단을 옮겨다닌 이들도 정죄되어야 하고, 제단 위에 구약의 제물 대신에 올려 놓은 인간들이 기타나 드럼을 치며 산토끼처럼 깡총깡총 뛰는 행동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욕을 총동원해야 할 경우입니다.

이제 예배 공간을 두고 가장 큰 문제는 예배볼 예배당을 건립할 때부터 어디에 자리를 잡아야 목이 좋은가를 생각했지 어디에 터를 잡아야 예배다운 예배가 되겠는가 라는 문제를 생각하는 경우는 참으로 희귀하다 못해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목회자들의 양심문제이니 지적하기 죄송스러우나 오늘 예배당의 위치를 영업에 유리한 입지조건을 생각하듯 선정하는 것이 모든 신설 예배당의 첫째 고려조건이라고 한다면? 김현봉목사님과 백영희목사님만 아마 예외가 될 듯 합니다.

더하여, 주일 대예배로 드려야 할 예배를 여러 예배로 시간을 나누어 주일에 세상 볼 일을 다 보고 짜투리를 이용하여 예배를 보도록 하는 행위는 싸이버예배의 본질 문제가 예배문제이니 예배가 예배로 존재해야 한다면 이 역시 아주 예배 분열 행동일 것입니다. 예배의 숫자를 줄여 나가면서 동시에 한번 볼 예배를 아무 때나 예배드릴 사람이 편리한 대로 골라잡는 식이면 이 예배는 이미 소위 '드린다는 예배' 축에도 들지 못합니다. 예배가 예배로 존재되어야 할 본질이 바로 설 때 그 예배 본질에 충실한 사람에게서 허용될 수 있고 없는 예배의 여러 모습과 요건들이 자연스럽게 도출되기 때문입니다.

(3)싸이버예배는 그 용어가 아주 고약한 유행어

①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을 '신령'이라고 합니다. '싸이버'라는 유행어를 혐오합니다.

세상이 유행시키는 단어들이 설교 강단에서 산제사로 구약의 제사를 대신하고 있다는 목회자들 입에서 그리 천박하게 나돌아 다닙니다. 입이 숯불에 지져져야 한다고 봅니다. 싸이버라는 단어가 초기에 첨단의 의미로 사용되던 순간에는 개떼와 같이 그 단어를 입에 오르내리던 이들이 뉴스에서 범죄나 여러 문제점이 있다고 부정적으로 한번 언급하자 앞다투어 싸이버를 잡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용어부터 괘씸하나 이번 답변만은 반론자가 우선 사용했기 때문에 의사소통의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수없이 사용하고 있는 중입니다.

②싸이버예배는 신학적으로 잘못이라 해도, 여전히 교회란 보이지 않는 교회만이 교회

다시 생각해 보아도 우리의 관심은 보이는 시공에서 보이지 않는 시공으로 나갈 자라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비록 싸이버예배가 성경으로 금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더라도 싸이버예배의 사용 여부에 대한 신학적 검토와 별개로 우리가 이 문제를 대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신앙의 속성은 갇힌 공간에서 갇힐 수 없는 무한으로 초월하고 나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독재를 비난하다보면 질서가 나쁜 것이 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좋은 독재냐 나쁜 독재냐 라는 문제는 별개로 해 두고 질서라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지킬 것입니다.

싸이버예배가 비록 성경적으로 틀렸다고 증명이 될찌라도, 한가지 분명한 것은 신앙의 본질은 요즘 세상 유행어로 표현하자면 싸이버화 되어야 진정한 발전이라는 것입니다. 예배당 종탑이 눈에 보이고 성탄절 흰눈이 내리면 신앙에 도움이 되고 복잡한 시내 거리에 나갈 일이 있으면 그곳에 있는 세상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디에서나 언제든지 우리는 몸은 주신 현실에 내맡기고 있어도 우리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모시고 보이지 않는 성도의 교통으로 보이지 않는 천국을 실제 보는 하나님으로 상대하고 보는 성도와 보는 천국으로 보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덧붙인다면, 교회의 정의 중 가장 최상위 개념은 바로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공간적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란 하나님과 진리와 믿는 사람의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의 하나됨입니다. 오히려 싸이버라는 말로 표현해야 가장 가까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유행을 따르는 데에 극한 거부감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사용하지도 않지만 이미 우리 교회는 교회사 시작부터 보이지 않는 교회만이 교회라고 정의하고 왔습니다.

③신앙의 모든 본질은 전부가 육체를 초월하여 신령에 나가는 것

우리 신앙세계에서는 눈과 귀를 중심으로 한 오감거리라는 것은 애당초 가장 유치하며 가장 초월해야 할 첫 단계로 알고 있습니다. 시공을 초월하고 영원히 자유해야 할 인간이 자신의 육체 오감거리에 제한되어 있는 바, 이것이 결국은 나타난 우상숭배로 진행된 것은 벌써 구약부터 있어온 일입니다.

구약은 그래도 육체에서 시작하여 신령으로 나아가게 하였으나 신약은 출발부터가 신령에서 시작하여 신령에 이르도록 했습니다. 물론 연약함으로 육체적 한계를 일부러 가지고 살도록 하신 것이 없지 않으니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을 교회가 전통으로 지켜 온 것이라든지 예배당으로 출석하여 자리에 앉음으로 은혜의 시작을 가지도록 한 것 등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 중심은 신령에 있는 것이니 시공에서 시작을 하고 시공에 제한을 받으나 우리가 평생 노력하고 힘쓸 것은 오늘부터 시공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 면에 대하여는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 수도 없는 성구로 제시를 할 수 있으나 신약교회의 타락 역사는 초월할 시공을 오히려 바꾸어 시공에 제한 받을 교회로 만들어온 것이니 역연 구약의 타락역사와 그 타락의 속성은 동일하다 할 것입니다.

(4)'싸이버'라는 유행어와 같이 고약한 말 한 마디

싸이버예배를 정죄하거나 싸이버예배가 문제 있다고 해야 한다면, 그분들은 교인들을 예배당 출석 거리 이내로 교인들을 이사시켜야 합니다. 예배가 그토록 중차대한 문제라는 것을 인식한 것은 복있는 일이고 반가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배가 정상적으로 예배로 진행이 된다면 점점 예배를 중심으로 예배생활을 하게 됩니다. 예배가 모든 생활의 중심에 서게 되면 예배당을 중심으로 생활공간이 형성되는 것이니 예배가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교회의 교인들은 예배당 주변에 거주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유독 재독을 찬성하고 좋아하는 교회는 교회 주변으로 교인들이 모여들고 재독을 반대하는 교회들은 이전에 예배당 옆에까지 와서 살다가 예배당에서 공간적 거리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들이야말로 싸이버예배가 설사 죄가 된다하더라도 그 죄를 짓고서라도 예배 흔적을 가져야 할 사람들입니다. 주일에 돈 사용하는 것이 죄라면, 예배당 옆에 와서 살아야 그 죄를 짓지 않고 살게 됩니다. 시내 버스 한 시간 거리로 주거는 옮겨놓고 주일에 돈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은 예수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교회를 욕하는 자세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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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보수측 교회를 중심으로 제기되는 '싸이버' 예배, '싸이버'교회에 대한 비판

지금은 대세가 싸이버예배에 대하여 부정적이기 때문에 싸이버예배를 반대하는 주장들이 있고 또 그 주장들이 아주 경건한 보수적 신앙으로 인식을 받는 면이 있습니다. 아주 논문처럼 형태를 갖추고 근엄하게들 이런 저런 말들을 하는 모습을 보며 며칠 지나지 않으면 오늘 했던 말을 손바닥 뒤집듯 할 것이니 그냥 웃어 넘길 뿐입니다.

일제 때 일본침략을 위한 기독교운동, 점령한 인민군 시절 공산 치하 지지 기독교, 이대통령 때 UN군 철수 반대운동, 이대통령 당선을 위한 기독교선거운동, 새마을 기독교, 전대통령 지지 기독교운동, 88올림픽선교, 월드컵선교, 북한돕기, 심지어는 환경운동 기독교연합 등등 그 수를 다 헤아릴 수도 없도록 교회는 세상 유행과 세상 정치 운동을 따라 들러리를 서고 세상 이상으로 미쳐 나온 것이 '교회사'입니다. 재독을 반대하는 교회들과 교계들이 소식도 더 빠르고 더 잘 아는 일일 것이니 이곳에서 굳이 강의할 일은 아닐 것입니다.

요는, 교회란 옳고 그른 것을 충분히 확인한 후 나가는 것인데 이 면이 너무 없었던 과거를 다시 한번 새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싸이버예배를 논하려면 싸이버공간의 개념과 예배의 개념이 먼저 확정되어야 하고 이 두 관계를 다시 생각하면서 풀어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면을 심각히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3.싸이버예배가 신학적으로 별 문제가 없다 해도 재독을 찬성하는 이들은 매사에 주의하는 편

이제 싸이버공간과 예배를 살펴보면서 일단 성경적으로 결론을 내리겠지만 그 이전에, 이곳의 근본 신앙성향은 죄되는 것이면 무조건 할 수 없다는 것이 확고하며 그다음 죄되지 않는 것이라 해도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모든 면에서 가장 신중하게 조심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된다면 하던 것이 좋고, 바꾸되 꼭 바꿜 만한 이유가 없다면 이전 사용하던 것을 그대로 지키는 것입니다. 싸이버예배는 성경적으로 정죄할 일이 없습니다. 이미 모든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바입니다. 싸이버 공간의 개념이 예배에도 교회 운영에도 신학강좌에도 생활에서도 어느 한 곳에서도 빠진 것이 없도록 사용되어 왔는데 이제 와서 '싸이버'라는 말이 세상에서 범죄 등에 사용되면서 세상 유행어가 되며 그 역기능이 강조되자 교회들도 이를 지적하고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애당초 '싸이버' 공간이 만들어질 때 가장 먼저 설치고 그 세상 유행에 호들갑을 떨며 나섰던 이들이 그들이니 그 세상 유행이 방향을 틀면 따라서 그러는 것이고, 결론은 싸이버 예배를 걱정하고 나서는 소리가 교회의 소리가 아니라 세상의 소리밖에 되지 않으니 한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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