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질문)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는 어떻게? (쉬/1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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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질문)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는 어떻게? (쉬/1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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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질문)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는 어떻게? (쉬/1875)

1.개인이 회개하는 것. (회개하지 않는 교회안에서)
2.교회가 회개하는 것. (회개하지 않는 교단안에서)
3.교단이 회개하는 것.


(답변) 1.죄를 회개할 때 원칙 몇 가지

1.회개의 몇 가지 원칙들

①자원자발적 회개

회개는 본인이 좋아서 하는 것이지, 남이 강제로 시켜서 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강제로 죄를 막은 것은 죄를 중단시킨 것이지 회개가 된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이 자원자발적으로 회개를 할 수 있도록 협조할 따름입니다. 서로의 관계에 따라서 어리면 매가, 머리가 굵어지면 이해가 되도록, 그리고 이웃 사이라면 가랑비 옷 젖는 듯 조심스럽게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②공개된 죄는 공개적으로, 은밀한 죄는 은밀하게

남이 아는 죄는 알게 회개해야 합니다. 공개된 죄를 은밀하게 회개하겠다는 것은 아직도 완전한 회개에 이르지 않은 증거입니다. 은밀하게 지은 죄는 공개적으로 회개하겠다면 더욱 좋은 것이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갈 때는 그 사람을 위해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결정은 남이 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자원자발적으로 해야 합니다. 공개된 죄는 공개가 원칙이나, 은밀한 죄는 은밀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지 은밀한 회개가 원칙이라고 하면 곤란합니다.


③단체가 지은 죄는 단체로, 개인이 지은 죄는 개인적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지은 죄는 교회의 이름으로 회개해야 하지만 교회가 금하는데도 본인이 혼자 개별적으로 지은 죄는 교회가 지도의 책임은 있다 해도 교회 자체가 져야 할 책임은 아닙니다. 교회가 주일날 돈을 사용해도 된다고 한 죄의 회개와 교회가 금하는데도 본인이 몰래 혼자 주일날 돈을 사용한 죄의 회개는 차원이 다릅니다.


④말과 함께 행동과 결과가 있어야 비로소 회개

옆 사람을 한 대 때리고 그 자리에서 '회개한다'하고, 다시 한 대 때리고 다시 회개한다며 통고하기를 반복한다면, 그 회개는 인간끼리 주고 받는 표현일 뿐이지 하나님 앞에서 회개가 되지는 않습니다. 회개가 바로 되었다면 이전과 반대로 행동하고 살게 되는 결과가 있게 됩니다. 결과가 있어야 회개를 한 것입니다.


2.신사참배로 예를 든다면

1.신사참배를 했던 교단의 경우

첫째 자원자발적으로, 둘째 공개적으로, 셋째 공식적으로 회개를 해야 했고, 네번째로는 회개의 행동이 있어야 했습니다. 한국교회는 해방 후 모두들 친일파들을 욕하는 세상이 되다보니까 '공개의 원칙'과 '단체의 공식 원칙'은 지켰는데 그 동기는 마지 못해서 했기 때문에 '자원자발성의 원칙'에 어긋났고, 신사참배 승리자들을 도륙한 결과를 봐서 그들은 '결과적 회개'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자원함이 없었으니 연극이었고, 결과적으로 회개를 하지 않았으므로 이권타산에 따라 행동한 정치적 회개였습니다. 인간의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데 하나님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라도 과거 신사참배를 회개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고신측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한국교단들에게 다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정답은, 그 죄를 회개할 수 있는 그때를 다 지내보냈기 때문에 이제는 회개할 기회조차도 없습니다. 최근 각 신학교 논문이나 여러 발표문에서 신사참배는 잘못된 것이라고 한 목소리로 떠들고 있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해도 아무도 잡아가지 않고 또 자기 직장에 어떤 문제도 생기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금 회개를 하고 신사참배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이들은 교과서를 읽고 있는 녹음기라고 혹평을 할 수 있습니다.


2.교단이 신사참배를 회개하지 않을 그 당시의 교회와 교인의 경우

신사참배를 회개했어야 하는 마지막 단계가 1960년 안팎 정도입니다. 그때는 신사참배 문제로 무릎을 꿇고 회개를 하려면 굉장한 손해를 감수했어야 합니다. 그때 그런 문제를 알고도 회개하지 않은 교회나 개인이 있다면 앞서 말씀드린 교단의 경우에 해당됩니다. 이제는 회개할 기회조차 없습니다.


3.교단은 당시에 회개하지 않았으나, 현 교회와 교인은 그 이후 시대에 출발했다면

신사참배와는 직접적으로 아무 연관이 없고 책임도 없기 때문에 그 문제로는 직접 회개할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이 비록 조상들의 죄로 나라가 바벨론에게 함락되었고 자신도 조상의 죄로 포로되었으나 조상탓을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에게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이 했던 진짜 회개는, 말씀을 지키려면 사자굴에 들어가야 하는 문제가 생겼을 때 조상들은 살기 위해 말씀을 어겼으나 자신은 죽어도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바로 그 행동이 조상의 죄가 자신의 죄는 아니지만 조상의 죄로 진노한 하나님의 진노를 그 자손된 자신이 풀어드려서 자기 당대에는 조상의 죄가 더 이상 계속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신사참배를 했던 교단에 속한 교회와 교인이 그 교단의 과거 지은 죄를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이제는 선배들의 지은 죄의 결과로 인하여 자신들에게도 복없는 걸음이 계속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오늘 자신들이 과거 선배들이 신사참배를 하게 될 때와 같은 현실이 닥칠 때 자신들은 선배들과 다른 행동으로 하나님 앞에 어떤 희생을 당해도 말씀대로 걸어가는 길을 견지해야 합니다.

신사참배는 그 죄가 죄인 줄 몰라서 지은 것이 아니고 그 죄를 짓지 않으면 너무 손해가 많기 때문에 그냥 대중속에 묻혀서 걸어갔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분명히 말씀대로 걸어가는 길을 알지만 그렇게 하면 세상 손해를 보겠다 싶어 포기한다면, 마23:31-32 말씀처럼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하게 되고 '조상의 양을 채우'는 일이 됩니다.


4.지금 신사참배를 잘했다 하는 이들은 없으나, 2004년 현실의 신사참배는 다 하고 있습니다.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를 하게 된 이유가 좋아서가 아니고 매국노여서도 아니었으며 친일파라서도 아닙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것이 옳으나 그렇게 하면 교회 담임을 못하니까, 교인들이 흩어지니까, 가족들이 어렵게 살아야 하니까, 자신도 시달려야 하니까, 신학교 교수를 하지 못하니까, 한 쪽 구석에 쳐박혀 썩어야 하니까 그래서 굴복한 것입니다.

오늘은 그때와 달라서 그래도 고문 고형에 사형은 시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교인의 숫자를 확보하기 위해 목회자가 교리적 양심을 어기면서 하는 일이 있고, 교단지도부의 결정이 잘못된 줄 알지만 찍히면 앞날이 막히니까 입을 막고 있습니다. 교수의 강의내용이 틀렸으나 점수를 받고 안수를 받기 위해서 교수가 성경이 틀린 전설이라고 말을 해도 참고 견디고 있습니다. 과거로 말하면 전부 신사참배를 할 사람들입니다.

과거 신사참배와 상관이 없는 이들이 만일 오늘도 그때 신사참배와 같은 성질로 자신을 위해 말씀을 묻어버리는 일이 있다면 그가 바로 신사참배를 하고도 회개하지 않은 자기 교단 조상들의 자손됨을 인정하고 그 조상들이 당시에 채우지 못했던 죄를 자기가 마저 채우고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진 10지파 북쪽 이스라엘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의 경우는, 자기 교회 안에서 잘못 된 결정이 있을 때 욕얻어 먹을까 봐서 따돌릴까봐서 목회자에게 찍힐까봐서 또는 귀찮아서 그냥 포기한다면 앞에서 말한 경우가 될 것입니다.


5.한 가지 조심할 것은

투쟁을 해야 할 때 하지 않음으로 신사참배를 했듯이, 어떤 때는 투쟁하지 말아야 할 때인데 제 주관으로 남들을 정죄하며 또 그 문제로는 그렇게 싸울 일이 아닌데도 생사를 건다면, 그는 정작 신사참배와 같은 일을 당할 때는 주저앉아 아무 할 일이 없는 죄를 지어야 합니다. 좌로 치우쳐도 우로 치우쳐도 실패입니다. 의지로만 가는 길도 아니고, 투쟁으로만 가는 길도 아니며, 더구나 날랜 처세술과 말장난으로 도망가는 인격으로는 꿈도 꾸지 못할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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