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질문) 양계장을 할 경우 주일날 짐승 먹이 주는 것은 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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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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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42
20. (질문) 양계장을 할 경우 주일날 짐승 먹이 주는 것은 620
저희 동네는 양계를 하는 동네입니다.
그런데 주일날에도 일을 해야 합니다. 짐승의 먹이를 주고 주다 보니 다른 일도 하게 됩니다. 짐승의 먹이만주고 다른 일은 안했으면 하는데 그게 그렇게 되질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일 오후예배는 많이 출석이 저조 합니다.
그리고 양계를 하는 사람들은 한달 수입이 많이 될 때는 엄청납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일반 봉급쟁이 보다 적게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변) 주일은 그 기준을 먼저 아셨으면, 십일조는 계산법을 참고하셨으면. - 보충
주일문제
1.주일을 포함해서 모든 신앙생활에는 '기준'이 있습니다.
①주일을 두고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기준이 애매하다는 것입니다.
수도, 전화, 전기, 도시가스 등등은 전부 외상으로 사용하고 한 달 뒤에 돈을 내고 있습니다. 외상거래입니다. 외상도 물건을 사고 파는 매매에 속하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 분명히 옳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외상행위는 하면서 주일에 쌀을 가져오고 월요일에 돈을 주는 외상은 하지 않습니다. 또 월세와 전세로 살고 있는 사람은 한달 집세에 주일 사용료도 들어 있습니다. 이것도 외상이 됩니다.
너무 불편하고 큰 문제는 주일이라도 외상을 허용하고, 피할 수 있는 작은 문제는 금하는 것인가? 기준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주일에 할 수 있는 것이면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것이면 아무리 그 손실과 불편이 크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문제는 기준입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일'이면 할 수 없고 '생활'이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까지가 일이며 어디까지가 생활인가 구별하는 기준이 애매합니다. 사실 그 선을 두부 자르듯이 자를 수 없습니다. 주일 문제뿐이 아니고 모든 신앙생활의 기준은 양심껏 살아보려는 사람들은 자세하게 살펴보게 되는데 많이 연구하다 보면 결국 어떤 문제도 전부 그 선이 애매하다는 것을 바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불편해도 우리는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너무도 확실한 원칙이 있기 때문에 해도 되느냐 안 되느냐는 것만 문제이지 너무 불편이 많으니까 그런 문제는 그냥 넘어 가자고 하는 식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불편 여부를 떠나서 위에 열거한 외상 거래는 왜 되는 것이고, 주일날 쌀을 가져오고 월요일날 돈을 주는 것은 왜 금하는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말씀이 정확히 그렇게 하라고 요구한다면, 생명도 내놓아야 할 우리가 그까짓 불편이야 당연히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해도 되는 일을 잘못 깨닫고 포기한다면, 꼭 해야 할 일을 못하게 되는 또 다른 신앙손실이 크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일에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많이 생각하고 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주일에 일과 생활이라는 기준으로 선을 정하기 전, 신앙생활을 실제 깊이 하려고 하면 모든 문제가 애매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겠습니다.
②모든 신앙의 기준들이 마지막에는 전부 애매하도록 한 것은 유기적 양육 때문입니다.
사람을 기계와 같이 조립하여 제작하려 하신다면 0.001 mm 와 같이 수치 단위로 좌우를 자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유기적인 인격체로 만들었고 우리를 하나님과 같은 자유성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만들어가시려고 했기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는 상대성이 있고 대화성이 있으며 사랑과 정이 있는 신격과 같은 인격을 가지게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닮아가는 이 세상 기간 동안 우리를 길러 가시는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형편에서, 모든 존재들과 모든 형편으로 상대를 하면서도 원칙은 진리대로 하게 하시지만, 각각의 존재들과 접하는 모든 행동의 자세하고 구체적인 사항은 자기 속에 성령의 인도를 받아 신앙양심으로 처리하도록 해 두셨습니다.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같이 적용되는 것이고 성령이 각자의 양심을 통해 따로 지도하는 것은 사람마다 전부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너무 복잡고 귀찮고 번거롭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이는 우리를 만드신 창조의 목적에 대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그 뜻에 맞추어야지 우리가 귀찮다고 하나님께 목적과 방향을 바꾸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따지는 성격, 꼼꼼하게 살펴보는 본성을 가진 분은 예수 믿는 데 아주 큰 장점 하나를 가지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2.주일에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은 '생활'이냐 '일'이냐로 나눕니다.
①'일'은 할 수 없고, '생활'은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이며 '계속적'으로 필요한 것을 '생활'이라고 합니다. 생존에 관련 있는 것입니다. 숨을 쉬는 것, 물을 마시는 것, 밥을 먹는 것은 생활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교환원을 통하지 아니하고 바로 기계가 연결되는 전화는 생활이 되어 있습니다. 전화는 구두 의사 소통의 확장이라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출근해서 돈을 버는 것, 물건을 사고 파는 것, 집을 수리하는 일 등은 일에 속합니다. 주일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위에서 예를 든 것처럼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은 우리가 거의 듣고 아는 상식입니다. 그러나 왜 그것은 되고 그것은 안되느냐 하는 이유를 아는 분은 많지를 못합니다. 시키니까 무작정 따라 하는 것보다 이유를 살펴 아는 가운데 하는 것이 신앙이기 때문에 다른 설명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②그러나 일과 생활을 구별할 때는 이런 면도 아셔야 합니다.
물론 숨과 물을 섭취하는 것은 시대에 상관없이 필수적인 생존 문제였고 따라서 이는 생활이었습니다만, 먹는 문제는 아주 다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밥은 하루 한 두 끼 굶을 때도 많았고 또 세끼 밥을 다 먹는다고 하지만 실제 먹는 식사의 양이나 질로 본다면 하루 한 두끼는 먹고 한 두끼는 굶는 것이 고대 사회에서는 예사였습니다.
당시는 먹는 것을 위해서만 모든 활동을 다 하던 때이기 때문에 안식일에 먹는 것을 평일처럼 한다는 것은 요즘으로 말한다면 안식일이 평일과 같이 분잡고 바쁜 날이 되던 때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에는 불도 피우지 못하게 하여 다른 날에 먹는 그 문제를 위해 전력하게 하고 안식일에는 가장 중요한 주업을 가장 간단하게 최소화시켜 미리 준비한 것만 섭취케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은혜 받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 세상 일을 금한 것이 원래 취지이기 때문에 요즘같이 식사 문제는 안 먹기 위해 노력하고 또 먹더라도 그 노력이 전자렌지 스위치 한 두 번 누르는 시대이며 더구나 이 식사 문제는 생활의 가장 근본이기 때문에 주일에 불을 피워 먹는 문제 등을 해결하는 것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는 '생활'입니다.
즉, 구약의 안식 제도가 신약 주일에도 그대로 적용은 되고 있습니다만 구약에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한 것이 오늘 신약에는 불을 피워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하도록 한 데에는 '생활'과 '일'을 기준으로 금하고 또 허락하는 것이나 무엇이 생활이며 무엇이 일이냐는 '정의' 자체가 시대나 형편을 따라 변동되는 것임을 알아야겠습니다.
③양계장 일을 두고 예를 들겠습니다.
닭은 사람과 같이 생명체이므로 매일 사료를 주는 일과 같이 필수적으로 생존이 유지되고 또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처리는 할 수 있습니다. 기계 장치를 통해 자동으로 된다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만 사람의 손이 아직도 많이 가야 할 것이니 조심할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염소처럼 먹이만 주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흩어놓은 꼴들을 치워주어야 한다면, '청소'에 해당되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주일 외에 충분히 할 수 있다면 주일을 피하는 것은 당연합니다만 그냥 일상적으로 하는 정도로 해야 할 때는 자연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일어난 자리를 청소하는 것은 생활입니다. 그러나 헛간 청소에 장농 위에까지 청소하는 것은 주일에 피해도 되는 '좀 특별한 일'입니다.
닭이 낳은 계란이 만일 그날 그날 회수를 하지 않으면 썩는다든지 하게 되어 바로 회수를 해야 한다면 그것도 할 수 있습니다. 며칠에 한번씩 방역을 하는 것이면 주일을 피해서 해야 할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가축은 어떤 종류의 업보다도 주일에 할 수 있는 행위가 가장 많은 것입니다. 사람보다는 못하지만 거의 사람과 비슷하게 해야 할 '생활'이 많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속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가장 주일을 안 지키는 사람들과 같이 보이지만 그 업의 성질이 '생활'의 범위가 다른 업의 '생활'과는 다르다는 것을 아셔서 좀더 마음 편하게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정도로 아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만일 닭은 수 만 마리를 기른다면, 그리고 그 닭에게 모이 주는 일로만 하루 10시간을 계속해서 일을 해야 한다면, 닭 모이 주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주일에 예배 등으로 은혜 받는 일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가장 중요하고 큰 원칙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주일날 잠 자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잠만 자고 있다면, 주일날 잠을 잤기 때문에 죄되는 것이 아니고 주일날 해야 할 일, 즉 예배 보고 은혜 생활해야 하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주일날 소가 새끼를 낳는데 그것을 방치하지는 않습니다. 그 생명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새끼빼는 것만으로 주업을 삼은 사람이 주일날에도 자연출산되는 새끼가 많으니까 하루종일 새끼빼는 '생활'을 한다고 하면 안될 것입니다. 생활이 아니고 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생활이니 할 수는 있겠지만 그 생활이라는 양이 너무 많아지게 되어 일이 되는 업은 축산업이 가장 많이 해당됩니다. 자연히 문제가 많아지겠지요? 결국 어느 정도 수입을 줄이느냐는 문제입니다.
④여기에서 중요한 원칙이 적용됩니다.
주일에 이것 저것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은 전부가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금해놓은 것들입니다. 일하지 말고 돈 사용하지 말고... 한 것은 은혜를 받도록 하나님만 상대하도록 하기 위해 누구에게나 방해가 되는 것을 법으로 다 금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지 말라는 것은 '일'이니 일만 하지 않으면 된다 하고 '생활'은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데에만 집착하여 '생활'의 양을 늘려서 '생활'에 속한 행위가 주일날 원래 해야 하는 은혜 생활에 지장이 된다면 이미 그 '생활'은 '생활'의 범위를 벗어나 '일'이 된 것입니다 .
닭장에서 무엇은 하고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하는가? 생활에 속한 것들, 즉 닭을 기르는 사람이 닭에게 매일 매일 꼭 필요한 조처는 계속해 줄 수 있지만 그 조처도 주일의 시간을 얼마나 차지 하느냐는 양을 생각하여, 생활은 그 날에 가장 필수적인 시간에서 조절되어야 합니다.
주일에 우리가 은혜받는 일을 '일'이라고 한다면, 평일에 일을 대부분 위주로 많이 하고 생활은 그 배경이 되는 것처럼, 주일날 은혜 받는 일은 주업이 되어야 하고 주일에 꼭 해야 하는 생활은 주업을 위해서 주업에 지장이 없도록 지원하는 정도에서 양과 종류가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⑤이렇게 정리를 하게 된다면, 그동안 양계업을 하면서 하던 일을 새롭게 보셔야 합니다.
주일날 닭 배설물 한 무더기가 저 귀퉁이에 보이는데 이왕 닭장에 나온 김에 그냥 치웠다면, 마음 한 편으로는 양심에 좀 걸리면서도 늘 하던 일이고 이것보다 더 많은 수고가 필요한 먹이주는 일도 했는데... 라고 위안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엄격히 구분하는 사람입니다. 더 많은 시간이 들어갈 일도 해야 할 것이면 하고, 손 하나 까딱 할 일도 금할 것은 금해야 합니다.
생활과 일이라는 기준으로 '생물'인 닭을 상대하면서 매일매일 꼭 필요한 일은 하시되 다만 시간적으로 오후예배를 빼야 할 정도로 '생활의 양'이 많아졌다면 하시는 행위는 '일'이 아니라 생활이라도 그 양 때문에 생활이 '일'이 되었다고 보겠습니다. 이렇게 환하게 일이 되었다면 나머지 문제는 본인이 결정할 일입니다.
물론 양계의 경제성을 생각하면 한꺼번에 많이 먹일수록 수입이 늘기 때문에 대규모로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만, 주일날 사용할 시간이 지나치게 많다면 결국 선을 넘어가게 되는 것이고 또 질문자의 신앙이 양심에 가책을 느낄 정도라면, 언젠가 결산을 내보면 헛고생만 했다는 때가 올 것입니다. 양계는 어느 한 순간 전염병 지나가고 나면 그냥 허무하게 끝나는 것이 아닙니까? 만일 하나님 앞에 이런 저런 자세한 문제까지 양심에 개운치 않으시다면 이미 양계의 양을 조절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양을 조절하신 다음,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기준은 '생활'과 '일'로 구별하셨으면 합니다.
⑥교회 전체적으로 양계업이 많다면
두 말 할 것 없이 주일이 흐려지겠습니다. 양계의 경제성 때문에 마리수는 최대한 늘여야 할 것이고, 결국 생활과 일로 기준을 세워두어도 합법적으로 생활은 할 수 있다 하여 생활에 속한 일은 꾸준히 많이 할 것이고 결국 양을 늘려서 주일을 충분히 어기는 데까지 나갈 것인데, 신앙 어린 사람이 먼저 그리하고 애매하니까 그 다음 사람 그 다음 사람 그리 하다가 결국 전체 분위기가 그리 되어버리면 이미 주일 문제에 관한 한 선이 없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애매한 선은 하나님께서 그리 크게 손을 대지 않고 신앙에 따라 알게 모르게 본인에게만 조금씩 알려가며 길러가시는데 개인도 그 정도가 심하면, 또 교회가 교회 전체적으로 뚜렷하게 그 선을 넘겨 이제 누가 보더라도 주일문제는 아주 선을 넘겼다고 할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손을 대시되 그 손 대는 범위가 대단히 크게 나타납니다. 처음 몇 달 몇 년은 주일 문제는 좀 있어도 그만 그만 재미가 있기 때문에 그냥 했는데 이것이 수년을 지나면서 아주 지극히 감당 못할 큰 문제로 하나님께서 막으실 때는 평생에 다시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끝내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때가 오면 잘 믿는 사람부터 큰 손실이 오도록 하십니다.
그러니 말이 통할 수 있는 분들에게 생활이기 때문에 해도 되는 것이 거의 전부이지만, 그 양이 결국 많아지면 개인과 전체에게 닥칠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잘 이해시켜 스스로 두려운 마음들을 가지고 자제하도록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 일은 기독교사와 한국교회사 그리고 보수교회들에 있어서는 아주 공식과 같은 일임을 잘 기억하시고 말씀하시면 어느 정도 신앙있는 분들은 두려움을 가질 듯합니다.
주일의 기준이 애매한 것이 많기 때문에 굳이 말을 만들어가면서 할 수 있다고 자꾸 반론을 대는 사람에게는, 물이 좋기야 얼마나 좋습니다만 한 드럼통을 마시면 죽는 것입니다. 밥이 좋기야 말 할 수 없이 좋지만 한 자리에서 두끼씩을 계속 먹으면 언젠가 큰 탈이 나는 것입니다. 따뜻한 안방이 얼마나 좋기야 좋지만 그 온도가 100도를 넘기면 집에 불이나고 사람이 타서 죽는 것입니다. 조절이라는 큰 원칙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속의 끝없는 욕심, 즉 무저갱의 위험으로 우리를 삼키는 또 다른 적이니 양가죽을 쓰고 나온 이리, 즉 주일에 생활은 할 수 있지 않느냐는 양가죽을 쓰고 나온 무저갱의 욕심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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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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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십일조는 법입니다.
십일조는 그 양이 많아질수록 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사업하는 사람치고 십일조를 제대로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교회 체면, 하나님 앞에 두려움 때문에 인사조로 하게 되지 그리 다 계산키는 어려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도 주일과 마찬가지로 신약교회에 주신 법입니다. 구약의 제도와 법을 거의 전부를 폐하면서도 신약교회에 살려놓은 것이 10계명과 십일조 뿐입니다. 따라서 실제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는 것이고 문제는 십일조에 손을 댄 사람은 그 손을 댄 것만큼 반드시 다른 면으로 경제 손실이 간다는 점을 알게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②신약에도 남아있는 특별한 법이기 때문에 그 결과도 아주 엄격합니다.
주일문제와 함께 십일조는 신약교회에 법으로까지 명한 것이기 때문에 특이하게도 이 두 문제는 구약시대와 같이 하나님께서 세밀하고 확실하게 외부로 표시가 나도록 치는 사안입니다. 일반 교계에서 아주 그 예수 믿는 방향이 넓기를 한이 없어도 십일조만은 그렇게 두려워합니다.
주일문제는 생활과 일의 기준이 애매하기도 하지만 십일조는 너무도 확실하게 1/10입니다. 계산에 다른 여지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응과 보상 역시 그렇게 숫자적으로 갑니다. 때문에 아주 넓게 믿는 교회들이라도 십일조는 그렇게 두려워 하는데, 그것은 신앙이 있어서라기 보다 매를 즉각 즉각 맞아보면서 느낀 것이 있기 때문에 신앙의 본능이 십일조에 대하여는 겁을 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③아무리 큰 일이 닥쳐도, 강제하고 야단할 수는 없습니다. 조용히 설득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켜야 할 법과 따라가는 징계의 두려움을 간증으로 다른 사람의 예로 차근차근 알게 하여 서서히 느껴지도록 하는 것만이 다른 교인들의 행동을 두고 자기가 할 일입니다. 표 나게 징계하거나 변론을 하게 되면 비록 옳을찌라도 상대방 속에 들어있는 마음의 철벽이 닫혀 버리게 됩니다.
④십일조 계산의 방법만은 알았으면 합니다. 대개 오해가 많습니다.
한가지, 십일조와 관련하여 대개 매출의 1/10으로 생각하고 드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소득의 십일조가 십일조이기 때문에 그 돈을 버느라고 투자된 돈은 빼고 순수한 수입에서만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옳습니다.
월 수입 1000만원, 사료값 200만원, 양계장 융자 이자 100만원, 양계장 수리 증축비용 200만원, 인건비 300만원이 그 달의 결산이라면, 순 수입은 200만원입니다. 그렇다면 십일조는 20만원입니다. 인건비 중에는 함께 사는 가족의 수고는 품으로 계산하지 않습니다.
답변자가 목회하는 곳도 시골이어서 이런 점을 많이 보고 느낍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냥 인식이 되어 있어 쌀 10가마가 추수되면 1가마를 십일조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하답니다.
어디까지나 십일조는 십일조이고, 그 이외에 또 연보를 하고 싶으면 다 바친들 마음에 차겠습니까? 그러나 십일조에 대한 계산이 철저해서 뺄 돈은 빼는 사람이 되어야 아는 가운데 자라가는 사람이고, 이렇게 철저해야 후에 막대한 돈을 벌어도 또 내야 할 십일조를 아낌없이 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⑤십일조 계산법이 잘못되어 공연히 죄짓는 분들이 많습니다.
양계업 첫 해에 시설 투자 1억, 수입 8천만원이면 대개 십일조를 8백만원으로 하든지 아니면 매달 들어간 비용만 빼고 순 소득 계산으로 십일조를 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그러나 시설 투자 1억은 비용이기 때문에 수입 8천에서 계산을 한다면 첫해의 수입은 적자 2천만원입니다. 십일조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 사업한 사람이 수천만원 벌었다는 소문과 표시가 나는데도 연보봉투에 십일조가 없으면 장로님으로 또 집사님으로서 민망하여 십일조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국 십일조를 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안면으로 하는 것이니 나중에 형편과 사정이 달라지면 해야 할 십일조도 하지 않을 사람일 것입니다.
꼭 사람보기에 오해가 되겠다 싶으면 시설비를 2년이나 수년에 나누어 계산을 해서라도 뺄 것은 빼고 할 것은 해야 합니다. 위에 예를 든 것처럼 어떤 때는 시설비 계산을 하지 않고 십일조를 했다가 뒤에 빚이 누적되어지면 남 보기에는 큰 돈을 번 것 같은데 2년 전 빚진 것, 5년 전 융자 갚을 것 이런 것은 다른 사람 보기에 다 감추어져 있고 이번에 몇 천만원 번 것만 눈에 보이니까 남들이 볼 때는 십일조를 안 내는 사람, 자기 양심으로는 내야 하는데 안 내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경우 자세히 계산해보면 비용을 빼야 할 때 안 뺀 것, 또 시설 투자비 같은 것을 처음부터 바로 구별해서 했더라면 처음에는 십일조를 좀 덜했어야 했고 지금은 십일조를 좀 더 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것이 거꾸러 되어 가지고 처음에는 실제 계산보다 훨씬 십일조를 많이 했다가 후에는 해야 될 십일조조차도 대폭 빼버리는 경우가 됩니다.
같은 십일조를 하면서도 앞에 했던 십일조는 계산치 않은 성의없는 십일조가 되었고 뒤에 십일조는 현저하게 십일조 도적이 되는 경우입니다. 비슷한 연보를 하면서도 앞에는 남들이 볼 때는 십일조를 떼먹는 사람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계산하여 정확한 십일조'를 냈고, 초기 비용을 비용으로 계산했기 때문에 후에는 다른 사람에 비하여 십일조를 많이 내는 것처럼 보여 신앙있는 사람으로 보이는데 실은 여전히 정확한 십일조로 계속하는 사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