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질문) 영적침체를 회복하기 위해 ccm을 듣는 것은 (쉬/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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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질문) 영적침체를 회복하기 위해 ccm을 듣는 것은 (쉬/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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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질문) 영적침체를 회복하기 위해 ccm을 듣는 것은 (쉬/545)

안녕하십니까? 목사님

이전에는 공익근무하면서 성경책도 틈틈히 보고
주님생각하면서 ccm 도 부르고 했는데

요즘은 성경 읽는게 .좀 힘이 안 납니다.
복 있는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자로다 라고 하셧는데
기도도하고 찬양도 부르지만 말씀 읽는게 힘듭니다.

*ccm = contempary christian music (기독교인의 현대음악)
제가 좋아하는 찬양 시편1편,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나 무엇과도 주님을
그리아니하실지라도 낮은자의 하나님..


(답변1) *답변이 아니라 설교입니다-'감사하는 공익'이라는 표현 앞에서

1.'감사하는 공익'이라는 표현에 우선 감사합니다.

현재 '공익'신분인데 감사할 일이 있다는 뜻으로 일단 읽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서 제 속으로는 '공익 근무라는 현실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지내고 있는 공익'이라는 자세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좋아서 가는 사람이 '자원입대'인데 공익은 그런 경우가 아니지요. 좋아서 장기지원한 사람이야 사서 고생을 하는 경우인데, 안 갈 수 없어서 군에 가는 분들은 오로지 세월 가기만 기다릴 뿐이라는 자세가 거의 전부입니다. 공익도 그 중에 하나겠지요? 의무복무에 해당되는 분들에게는 '징집'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마땅히 와야 하는데도 잘 오지 않으니까 데려간다는 뜻입니다.

따분하고 갑갑한 세월을 보내는 복무기간 중에서 감사할 일이 있다면 참으로 다행입니다만, 그보다는 공익 시절 자체를 감사로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그래서 '감사하는 공익'이 그야말로 공익 근무라는 현실까지도 감사하면서 지낼 수 있다면! 그렇게 된다면 믿는 생활의 최종이요, 최고봉에 도달하게 됩니다. 공익 근무하는 청년에게 무슨 성자가 앉을 자리로 논하느냐고요? 성자가 되고도 남을 교계지도급 목회자들이 바로 이 한 가지를 몰라서 경력은 다 쌓아두고도 늘 거짓선지급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제 어린 신앙밖에 안되는 청년이 이 한 가지만 깨닫고 잡으면 바로 성자가 앉을 그 곳에 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참 세계를 비로소 볼 것입니다.


2.요셉의 경우를 생각하셔서, 마음의 근본 자세를 바꾸어보셨으면 합니다.

요셉의 경우는 자원입대도 아니었고 의무입대를 위해 징집당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요셉이 17세에서 30세까지 13년간 애굽에서 고생했던 시절의 마음 자세를 생각해보셨습니까? 징집으로 입대하거나 공익근무 하는 경우라면 몇 년 세월이라도 떼우면 해결이 될 것인데, 요셉의 세월은 해결이 아니라 갈수록 더 태산입니다.

요셉의 13년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에덴동산인 줄 알고 그렇게 감사하고 기쁨으로 살았습니다. 믿는 사람의 현실관은 근본적으로 이렇습니다. 그렇게 바뀌는 데에는 신청서 작성하고 처리기간을 기다려야 하는 행정 절차도 무슨 자본 조달도 필요없습니다. 잠시 눈을 감으시고, 하나님이 요셉에게 왜 그 13년을 주셨는가? 요셉은 그 당시에 이유를 모르고 어쨌든 하나님이 주신 현실은 그 어떤 현실이든지 나를 복되게 만들어 주시는 에덴동산이라고만 깨닫고 그렇게 감사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뒤에 알고 보니까, 애굽을 다스릴 수 있는 총리의 자격과 훈련을 쌓는 혹독한 특수교육 과정이었습니다.

시위대장 보디발 집에서 종살이를 했으니, 노예 중에서도 가장 재수없고 고생하는 노예였을 것입니다. 고대사회의 시위대장이란 폭악하기 그지없던 때입니다. 감옥에까지 갔으니 억울하기 그지없었으나 정치범 수용소였기 때문에 애굽 정치의 겉이 아니라 이면을 완전히 다 들추어볼 수 있었습니다. 알고보니 요셉의 13년 고생은, 유학공부 13년의 수고였을 뿐입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고나서야 이런 사실을 다 알게 되었으니 또 얼마나 감사가 더했을 것입니다만 다행히 그는 주신 현실은 '일단' 감사하고.... 나왔기 때문에 요셉이었습니다.


3.공익근무 중인 분들, 여러 힘든 근무나 현실에 계신 분들을 향한 부탁입니다.

'감사하는 공익'이라는 표현 앞에 잠깐 서서 몇 가지 드릴 말씀을 메모하고 있는 중입니다. 현재 겪고 있는 현실이 괴로운 분들은 공통적으로 그 현실을 하나님이 주신 참으로 요긴하고 보배로운 선물이니 자기에게는 에덴동산과 같은 것이라고 깨닫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어려워서가 아니라 현재 고통을 짧은 눈으로만 자꾸 대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심호흡을 하며 잠시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고, 자기 현실을 돌아보실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믿어본 분이면 자기 마음 속에 담아 둔 몇 가지 말씀만 살펴보아도 자기의 현실을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질문하신 분이 앞에 다른 질문 속에서 몇 말씀하신 가운데에는 일반 군인들이 복무기간 중에 흔히들 하는 말, 느끼는 마음 등 여러 자세를 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것이 우리들의 솔직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바로 그런 마음과 생활을 일거에 뒤바꾸어 우리의 마음과 생활이 천국의 한 가운데로 수직 상향될 수 있는 길이 '십자가의 대속'으로 열려 있습니다.

요셉의 13년 애굽 노예와 감옥생활을 생각하시고, 모든 면으로 비교도 못할 이 짧은 기간의 땀 몇 방울 흘리면 그만인 때의 수고는 훌쩍 초월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런 경험은 사실 근무 초기인 쫄병 때에 있었어야 했습니다. 이제 고참이 되고나면 많은 쫄병들의 눈물과 고생을 방석으로 깔고 앉아 즐기게 될 것인데, 그때 나오는 감사와 만족은 하나님 주신 현실을 앎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나 쫄병도 이를 갈던 그 옛사람의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아직도 고생을 해야 한다면, 얼른 요셉을 생각하고 자세를 바꾸시고
만일 이미 고참이 되어 편한 때가 되었다면, 다른 고참과는 달리 쫄병생활을 새로 하는 고참이 되어 그 쫄병들 마음 속에서 감격해할 수 있는 사랑과 배려와 솔선과 수고를 아끼지 아니해야, 주신 잠깐의 그 기간을 복되게 보내시게 될 것이고, 그때를 그렇게 보낸 사람이라면 앞날 사회생활에서도 남다른 하나님의 은혜 생활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답변2) 현재 좋아하는 찬송들은, 깊은 말씀으로 들어가기는 어렵습니다.

1.찬송하는 감사생활과 말씀을 읽으며 나오는 감사생활의 비중이 어찌 되시는지요?

찬송으로 감사하는 생활이 8-90%가 되고 말씀으로 감사하는 생활이 1-20% 되는 것이 보통일 것입니다. 어디서 나오더라도 감사는 감사고 그 감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니까 그 사람의 감사생활이 찬송에서 나오든 말씀에서 나오든 처음에는 별로 표가 나지 않습니다. 학생 청년 때 신앙생활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에 대한 감사가 늘어나고 말씀에 대한 감사가 깊어지는 사람은 찬송으로 감사하는 생활이 저절로 따라오게 됩니다. 그러나 찬송을 입으로 부르는 시간과 기회는 줄어드는데 그 깊이는 이전과 측량못할 만큼 깊어집니다.

그러나 찬송을 부르며 감사하는 생활이 위주가 되어 찬송을 부르는 시간과 기회를 자꾸 늘려나가는 분들은 말씀에 대한 연구와 접촉과 은혜는 '성경공부'를 의무적으로 하는 것처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 속에서 진정 감사를 느끼는 것은 흐미해지고, 그 말씀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은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2.타고난 것도 있고, 우리가 노력해서 얻도록 하신 것도 있습니다.

숨쉬는 것, 먹는 것, 말하는 것, 이동하는 것 등 인간에게 절대 필수적 기능은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면서 타고나게 했습니다. 과외가 필요없습니다. 그러나 건강 유지, 식생활 조절, 견문, 예절 등등은 본인의 노력에 거의 맡기다시피하셨습니다.

예수믿는 것도, 중생과 같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우리가 모를 때 당신이 다 주셨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믿고 어느 길로 힘쓰며 어느 면을 조심하느냐는 것은 각각의 노력에 거의 맡기다시피 했습니다. 앞에 것을 기본구원의 은혜라 하고 뒤에 것은 건설구원의 은혜라고 합니다. 건설구원에 해당되는 면을 질문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찬송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조금씩 말씀 공부하는 시간과 기회로 옮기셔야 합니다. 막상 해보시려고 하면,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울 것입니다. 라면과 쵸콜릿은 우선 손이 쉽게 가고, 하루 3끼 밥은 좀 밋밋한 것이 우리의 솔직한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이런 노력을 미루시면 말씀의 은혜는 자꾸 더 멀어지고, 그대신 손쉽고 감정에 호소되는 찬송은 자꾸 더 커지게 됩니다. 찬송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접촉을 멀리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3.좋아하시는 찬송곡들은 찬송의 가사가 아니라 곡에 중심이 있는 것들입니다.

찬송은 그 찬송을 지은 사람의 음악성에 따라 가는 것이 아니고 신앙에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음악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좋아하신다며 예를 든 찬송들은 음악성이 좋은 분들의 어린 신앙에서 나온 찬송가입니다. 따라서 신앙어린 분들의 음악성에는 잘 맞겠지만 그 찬송을 부르는 사람의 신앙을 깊은 곳으로 인도할 찬송은 되지 못합니다.

이런 찬송을 계속 부르시게 되면 말씀과는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이 현상은 교회 안에서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요즘 젊은 분들의 내면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찬송에 감격하여 흘리는 눈물의 성분을 분석해 보면 말씀은 들러리가 되어 있고 순수한 인간 감정이 자극을 받고 흘려낸 것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해드렸다가는 맞아 죽기 좋을 만 하겠지요?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셔야 할 문제입니다.

이제 드린 말씀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신다면, 말씀을 접하며 말씀의 은혜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은 다른 기회에 다시 답변하겠습니다.


(감사) 답변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답변 감사드립니다.

수십년전에 정말 깊은 신앙에서 나온 찬송과 그렇지 못한 찬송이 있었듯이
ccm 중에서도 깊은 신앙에서 나온 찬양과 그렇지 못한 찬양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차를 타는 동안 그리고 공익 생활하는 동안 ccm을 계속 들으며 또 찬양도 부를 것입니다. 감사하며 찬양하지 않는 입술에는 불평과 불만이 어느새 자리잡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ccm이 말씀을 읽는것에 방해가 되는지 안 되는지는 솔직히 저도 모르겠습니다.
방해가 된다면 말씀 읽는 시간을 빼앗는 정도일 것입니다.
근데 저는 말씀을 읽을 수 없을 때 찬양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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