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김정수) 찬송가 "속죄하는 어린 양의 피로써"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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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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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42
12. (김정수) 찬송가 "속죄하는 어린 양의 피로써" 가사의 문제 359
우리 예배용 찬송가 65장(새찬송가 255/ 통일 193)의 후렴 "더러운 죄 회개하는 보혈로 그대는 씻기어 있느냐"가 아무래도 "더러운 죄 희게 하는 보혈로 그대는 씻기어 있느냐"의 잘못인 것 같아서, 백 목사님 생전에 찬송가 책임자로 임명 받은 분에게 지적해 드렸건만 아직까지 고쳐 지지 않습니다. 새찬송가에서부터 이렇게 되어 있고, 영문 찬송가로는 "Are you washed in the blood, in the soul-cleansing blood of the Lamb?"에 해당됩니다. 4절 두째 소절 "샘물 같이 솟아 나는 보혈로 눈보다 더 희게 씻으오"를 참조하십시오. 보혈은 우리의 죄를 '희게' 하는, 씻는 것일지언정 '회개'하는 것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회개는 보혈이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것입지요. 함께들 검토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답변1) '희게'와 '회개'의 뜻을 아직 단정키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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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은 '희게'와 '회개'의 가사 선택 문제에 한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질문 내용에는 없지만 찬송가에 대한 몇 가지 참고드릴 내용이 있어 가상의 다른 질문자들을 고려하고 답변내용을 이왕이면 이곳에 덧 붙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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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답변자가 살펴본 찬송가들에는 일관되게 '회개'라고 되어 있습니다.
질문자가 지적하시는 뜻은 잘 알겠지만 답변자로서는 개개인의 의견보다 일단 새찬송가에 나오는 가사 자체와 그 가사가 공회찬송가로 이전되는 과정, 그리고 현재까지 사용되어진 공회찬송가에서의 존재했던 사실 자체를 확인하는 작업이 우선이겠습니다.
첫째, 새찬송가가 통일찬송가로 변형되는 시기와 전혀 상관이 없었던 1975년판. 둘째, 새찬송가가 통일찬송가로 흡수되면서 새찬송가가 없어지는 과정에서 공회는 비록 주일학교 용도였으나 기존 새찬송가에서 100곡을 선별하여 공회내부 사용 찬송가를 만들었던 1983년판. 셋째, 현재 공회 찬송가 초기 몇 판을 다 살펴보았으나 다 '회개'였습니다.
그렇다면 '회개'에 대하여만은 새찬송가와 마찬가지로 우리 공회찬송가도 일관되게 '회개'를 사용해왔고 이 부분을 포함한 200곡 전체 가사를 글자 한자씩을 전부 목사님이 직접 검토한 전 과정에 참가했던 본인으로서는 일단 단순한 실수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2.아쉬운 것은 생전에 목사님께 직접 의견을 제시하셨더라면 하는 점입니다.
답변자는 6장 찬송 '전능왕 오셔서'의 새찬송가 1절에 '마귀를 이기신 성부여'라는 대목은 성자에게 해당되지 성부는 마귀를 이기는 차원이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렸고 며칠이나 생각을 하시다가 이는 현재와 같이 수정하였고, 3장 찬송에서 '죄인들은 어두워서 볼 수 없겠네'라는 내용이 찬송하는 자신은 죄인에서 빠지고 남의 말로만 하는 듯 하다는 말씀을 드렸고 '죄인들은 어두워서 보지 못하네'로 변경된 결과는 뒤에 알았습니다. 그리고 36장 끝절에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의 표현이 우리 교훈과 정반대로 되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굳이 설교내용까지로 들어가면 그렇지만 원 작사자가 명확히 적은 가사이며 또한 교리라고까지 할 수 없는 내용이어서 그냥 알고만 있고 두자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어떤 내용은 아주 변경을 했고, 어떤 내용은 최소한의 방향으로 수정을 했으며, 그리고 어떤 내용은 더 시급히 수정할 내용인데도 굳이 이전 것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요는 이전 것을 변경할 때는 극히 조심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모든 찬송 한 자 한 자를 직접 오랫동안 생각하여 결정했다는 점에서 현재 찬송가는 대체로 그 가사를 존중하는 편입니다. 답변자는 당시 질문을 드려보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하여는 아쉬움이 없고 그 질문을 통해 수없이 유사한 경우에 적용하며 오늘도 그분에게 많은 것을 문의할 수 있게 된 경우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질문자께서 밝은 종이 있을 때 직접 질문을 하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가지며, 질문하신 내용을 제가 혼잣말로 자문자답한다면, '회개'라는 단어를 원문상 '희게'라는 단어 대신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아마도 36장 찬송가 질문과 같이 그냥 두자고 했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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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참고로, 백목사님 생전 각종 책임자 선정시 그 책임자의 의미)
어떤 임무든지 한 사람에게 독점적 수임은 하지 않는 것이 목사님의 신앙노선입니다. 물론 외부 표현이나 직책 임명은 그리하는 때가 있습니다만 실질적으로는 '좋은 결과' '하나님의 뜻에 맞는 정답을 찾는 이'에게 중심을 두는 편입니다. '누구 한 사람에게 맡기면 하나님의 뜻이 찾아질 것이라' 또는 '누구 한 사람이 맡아서 결정하면 나머지는 따르겠다'고 할 때는 외부 모양을 최소한 갖출 필요가 있을 때 예의적 표현이며 혹시 사람을 기르는 방편에서 책임을 맡으라고 격려하며 충성토록 자극하는 목회일 때입니다.
(*2.공회 찬송가는 예배용이라는 표현이 잘못 사용되는 경우)
덧붙여, 공회 찬송가는 '예배용' 찬송가를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 '찬송가'입니다. 이왕 나온 말씀이라 덧붙이고 싶습니다. 공회 '찬송가'의 서두에 '예배용'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는 공회 찬송가를 편찬하면서 과거에 많이 부르던 찬송가들을 빼게 되었고 그 빠진 찬송은 성탄 등 교회의 다른 행사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자연 '찬송가'는 예배용찬송가라는 의미심장한 말이 우리에게 와 닿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배찬송이라는 머릿말에서 참뜻을 아는 사람은, 믿는 사람은 전 생활이 예배요 따라서 예배찬송이란 모든 행사 모든 예배에서 불려질 공회신앙적 찬송이며 공회진리에 가장 깊은 은혜들의 총합이라는 일종의 '선포'였습니다. 이렇게 믿는 이들은 다른 행사에서도 최대한 공회 200여곡 찬송에 충실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그 곡들에 집중할수록 왜 그 200여곡이 특별히 선별되었는지를 갈수록 더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진영을 따라 가지 못해서 안타까웠던 분들은 예배시간에서조차 그 찬송을 사용치 않았고 결국 문익환, 김재준과 같은 비기독교인들이 지은 통일찬송가를 예배를 가리지 않고 사용하고 있으며, 이제는 그 통일찬송가까지를 벗어나 요즘 세상 가수노래 이상으로 나가는 현대판 복음송으로 갈증을 달래고 있습니다.
백목사님의 머릿말 표현, 그리고 집회 등 설교 때의 표현은 대단히 많은 신앙행태 전부를 고려한 것이기 때문에 쉽게 접하면 가장 신앙어린 사람을 위해 준비된 '표현'에 해당됩니다. 신중히 생각하시면 그 표현 속에서 가장 십자가의 첫길을 걸어야 할 사람을 위해 주신 '표현'으로 받게 됩니다. 공회찬송가를 예배용이라고 굳이 표현한 것은 목사님이 가장 잘 표현하시는 겸손과 지극히 작음으로 내려 앉는 표현법이며 동시에 그 속에는 가장 십자가 최고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외침이 동재하고 있음을 참고하셨으면 합니다.
공회소속 교회와 교인이라면, 그들의 본디 신앙노선은
이왕이면 조금 더 경건하게
이왕이면 조금 더 조심스럽게
이왕이면 조금 더 보수적입니다.
(답변2) '회개'에는 두가지가 있어 '희게'와 '회개'를 동일하게 사용가능한 경우도 있습니다.,
첫 답변에서는 여러가지 정황에 대한 말씀을 주로 드렸습니다. 현재 사용하는 찬송가는 그 필요성과 신앙노선상의 정통성에도 불구하고 가사 자체에 대하여는 수많은 지적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모든 종류의 제안에 대한 종합적인 입장을 말씀드렸음을 양해하시고.
현재 질문자께서 집중하시는 내용은 '더러운 죄 회개하는 보혈로 그대는 씻기어 있느냐'는 가사의 '회개'는 '희게'가 옳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같이 사용할 수 있는 한글 가사가 있다면 우리는 이왕이면 우리 입에 익어 있는 것이 좋겠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원칙에 동의하신다면, '회개'에는 기본회개와 평생회개가 있는 것이 우리 '세례 학습문답용지'에서도 요약하고 있는 교리적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기본회개가 포함하고 있는 바가 불신자가 예수님의 대속으로 기본회개를 하고 죄사함을 받아 씻음을 받는 것까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보혈로 회개한 결과를 중심으로 표현한다면 '희게'를 사용할 수 있고 만일 희게 깨끗하게 만든 그 방향 전환을 중심으로 표현한다면 '회개'도 사용가능합니다. 더구나 영어원문 "Are you washed in the blood, in the soul-cleansing blood of the Lamb?" 문장에서도 'wash' 와 'cleansing'이라는 두 단어가 '희게'라는 가사와 잘 어울리는 씻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기본회개라는 개념에서 본다면 다 포함되는 것이니 '희게'와 '회개'는 교차 사용가능한 찬송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물론 이 모든 설명은 '희게'보다는 '회개'를 유지하고자 하는 선입관에서,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논리를 찾아 본 것입니다. 결론은 가능한 논리일 것이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면, 양 뜻이 다 사용될 수 있다면 유지 보수를 선호하는 뜻이 있어 '회개'가 계속해서 공회 찬송가에서도 사용되고 있으며, 그 공회 찬송가 가사를 낱낱이 검토할 때도 이를 교체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방문자) 회개와 희게의 본질은 동일
<첫째>
보혈이 눈보다 희게하는데 (4절 둘째 소절)
보혈로 씻기어 있느냐고 우리에게 묻고 (후렴 첫째 소절)
더러운 죄에서 돌아서게하는 능력(보혈)을 입어라는 말이다.(후렴 끝절)
<둘째>
회개는 우리가 하지만은 우리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단독으로 회개할 수있다면
왜 예수님이 속죄의 어린양이 되었겠는가. (1절 첫째 소절)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독생자 예수님을 대속의 제물로 주셨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성령과 진리를 주시니
피와 성령과 진리가
우주적인 구속과 역사적인 구속의 완성을 이루셨으니
이 지극히 큰 능력이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요.
보혈의 능력이라.
이 보혈의 능력을 힘입어야 우리가 회개(희게, 씻는)할 수 있다.
(후렴 끝 소절)
(김정수) 뻔한 이치를 견강부회로 왜곡하기,
작사자나 번역자의 의도가 "더러운 죄에서 돌아서게 하는 능력(보혈)"이라면 "더러운 죄 회개 시키는 보혈로"라고 고쳐 불러야 합니다. 기본 회개의 보혈이라면 물론 "더러운 죄 희게 하는 보혈로"로 불러야 하겠지요. 이중적인 의미를 주며 고집하는 것은 억지스럽습니다. "희게"는 "회개"로 잘못 바뀔 수 있는 언어적인/ 문자적인 공통 요인을 충분히 갖추고 있고, 노래 가사가 이처럼 원작으로부터 멀어 지는 일은 아주 흔한 일입니다.
문법이야 좀 어기면 어떠냐 한다면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법이 도덕의 최소한이라 하듯이 문법은 정확한 언어 행위의 필요 조건입니다. 1910년대 우리 선현들이 번역한 개역 성경에는 비문법적인 문장이 별로 없습니다. 부정확한 어휘도 별로 없습니다. 헬라말 문법은 또 얼마나 정밀합니까?
그런데 요즈음 교회 사람들의 언어 행위는 부정확하고 비문법적인 것이 아주 많고 지적해 주어도 고치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 내들면, 믿음만 쳐들면 그 정도는 면책이다, 하찮은 것 가지고 시끄럽게 하지 말라, 이런 완고하고 무지스러운 보수를 오히려 자랑합니다.
우리 모두 존경하는 백 목사님은 유연성을 잃지 않은 보수주의자였기에 이단시되기를 두려워 하지 않고 중대한 교리들을 파괴하며 건설할 수 있었고 죽기까지 교회 역사의 성장점을 지킬 수 있었던 분이라고 봅니다. 뻔한 이치를 견강부회로 왜곡하지 않나 돌아보기 바랍니다.
(답변) 그렇게 지적하신다면, 사실이 그렇습니다.
1.질문자의 이런 점에는 분명히 동감입니다.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어법적으로만 말한다면 질문자의 지적에 찬성합니다. 백목사님이라는 분의 유연성을 참고한다면 더우기 지적하신 분의 말씀이 맞습니다. 완고하고 무지한 외곽 보수에 머물고 있는 대다수 우리의 보수 노력 때문에 진정 보수되어야 할 내용 보수, 실질 보수가 묻히게 된 예는 답변자를 포함 이 신앙노선상에 있어서는 특별히 많습니다.
'희게'와 '회개'에 대하여는 결론을 보류하겠으나 다른 수많은 점에서는 분명히 무지와 완고가 원인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막고 있는 우리들임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통해 얼마나 복음이 전해지느냐는 것이 현재로서는 잣대가 아니라 우리를 통해 복음이 얼마나 어떻게 막아져 있느냐는 것이 우리 당면 문제라고 봅니다.
2.이곳은 신앙연구에 집중하는 곳이며 유품 유물 유지 관리처는 아닙니다.
본 답변자 외 또 다른 한 분의 의견을 전혀 상관치 않고 재 지적하신 내용만을 가지고 본 답변자가 첨부하고 싶은 의견은, 아마 질문자도 또한 이곳을 찾는 거의 모든 분들도 다음과 같은 답변자의 주장에는 동의하리라 생각합니다.
즉, 백목사님의 주장이거나 그분의 단정이라 해도 꼭 변경시켜야 더 옳은 경우는 변경시켜야 합니다. 이는 내용과 실질 보수에 중심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외부 변형이 필요한 경우라 해도 그 내용과 실질 보수를 위해 변경시키지 않으면 안될 정도일 때에는 그리해야 합니다.
이곳은 백목사님 노선의 가장 보수임을 자처하면서도 동시에 이런 원리에 의하여 그 외형을 꼭 변경할 것은 가장 많이 변경하였고 그래서 실질적인 보수를 가장 잘하고 있다는 확신에 있습니다. 이 입장까지를 완고하고 무지한 보수라고 지적하지는 않을 듯 합니다만 이 입장도 그리 말씀하는 분이 있다면 응당 받고 나가겠다는 결심이 아직은 변함없습니다.
3.질문자의 지적은 그야말고 '공회의 심의, 의논'과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현재 외형 공회들이 잃어버린 가장 귀한 그릇 중에 하나가 공회적 회의 방법이라고 봅니다. 서로의 깨달음을 조심스럽게 타진하며 보다 옳은 것을 발견하려는 자세, 그 목적을 위해 하나님이 어느 사람을 통해 어떤 형식으로 그 뜻을 보일지 모르니 어린 아이 하나의 이의가 있어도 결론을 미루고 따져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공회 교역자회 등에서는 어깨와 저돌성만이 남아 있습니다만 이곳을 운영하는 목표 중에 하나가 원래 공회적 회의 원칙이 실종된 상태에서 이곳에서는 옳은 것을 찾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점잖은 영국식 표현만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이곳 '문의답변방'은 원칙적으로 본 답변자 한 사람의 답변을 주로 상대하는 곳입니다. 문의와 답변 사이에 좀더 주제적으로 의논과 토론이 필요한 경우는 주제연구방이 보다 좋으리라고 봅니다. 의견 개진을 쉽게 하는 분들이 적지만 그래도 의견이 나뉜다면 보다 넓은 범위에서 연구하는 차원이 옳겠다는 것입니다. 혹 무반응 뿐인 결과가 있을지라도 이곳을 통해 옳은 것을 소리 높혀 주장했던 선견이 있었음을 남겨두는 것만으로도 현 공회 상황과 우리 신앙노선에서는 귀한 보배가 되겠다는 의견을 드립니다.
질문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희게'와 '회개'는 너무도 확정적인 사안이라 할지라도 상대방이 강퍅하면 먼저 깨달은 사람이 할 일은 설득이며 심방일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가 어려서 중심은 옳으나 이해가 따라 오지 않을 때는 결국 교육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경우가 되던 많은 반복과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곳 운영의 기본 자세이며 인식입니다.
최소한 이곳의 답변은 알면서 무지와 완고에 머물기는 원치 않으며 그 자신의 부패성을 하나님으로 포장하여 안주하고 싶은 심리에는 질문자와 동일한 분노를 가지고 있습니다. 혹 답변 표현이 질문자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게 했다면 실력문제이나 중심이 동일했고 표현이 바로 되었다면 2가지의 의견이라고 보고 그렇다면 공회적 회의법을 통해 해결한다면 정답이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1970년의 백목사님은 1980년의 백목사님에 의하여 정죄될 일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도 깨달아 점점 진행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1970년까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질문자의 주장이 단정적으로 옳다고 해도 그 주장을 2001년에 따르지 않던 이들이 2002년에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면 2001년에 주장했던 이는 선지의 상을 받을 성격이 아니겠습니까?
진리전원일치의 내부적 목표, 공회라는 용어의 출발인 개별영감, 성경법 유일주의라는 길 등 모든 것이 이 하나의 의논을 가지고도 적용되고 있음을 보았으면 합니다.
(방문자) 견강부회?
견강부회?
참 어려운 단어 쓰시는군요.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이치에 닿지도 않는 말을 끌어대어 자기에게 유리하게 꿰어 맞추는 것'으로 되어 있군요.
내용 또한 많은 사람들을 무시하는 듯한 표현이 제법 들어 있네요. '무지한 보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모두가 백목사님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은 하나님 아닌 피조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 없는 하나님은 어떤 입장이실는지? 사람은 모두 자라가는 중이고 성화되어 가는 중이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답변에 대한 답변 내용이 합당하지도 않은 것 같고 공적으로 쓸 수 있는 예의 갖춘 단어나 문장은 아니라고 생각되어 한 말씀드립니다. 언어라는 것이 원래 상대방이 알아듣기 쉽고 좋도록 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 아니겠습니까?
혹 인신공격처럼 보여지면 지워도 상관없지만 인신공격 목적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옆에서 끼어 들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 독자 *
(김정수) 견강부회?
마음을 상하게 해 드린 데 대해서 깊이 사과합니다. 앞으로는 좀 더 쉬운 말로, 좀 더 부드러운 말로, 예의를 잃지 않고 표현하도록 힘쓰겠습니다. 지적해 주심에 대해 참으로 감사합니다.
(공회원) 첫 질문자의 요지는 단어의 의미가 아니라 문법적 오류를 바로 하자는 뜻으로 한 줄압니다
첫 질문자의 내용은
"회개"와 "희게"의 단어의 의미를 지금 논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라는 단어와 그 다음에 붙는 단어들과 결합할 때 문장의 문법상 맞지않다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이것을 문법적으로 바르게 고치는 방법으로 "회개" 대신 "희게"를 넣음으로 문법상 흠없이 하자는 뜻이라고 봅니다
"회개"와 "희게"의 단어의 의미는 둘 다 깨끗함을 말함이고 실상은 동일한 뜻이며
그 의미를 구태여 구분한다면 "희게"는 더러움이 없이 완전히 깨끗함을 말함이며
"회개"는 더러운 데서 완전히 깨끗으로 돌아선다는 방향전환의 뜻이며
결국 깨끗이라는 의미상 동일하다고 보며
"회개"와 "희게"의 의미 안에는 기본구원, 건설구원이 다 들어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찬송가 가사를 고치는 문제는 교리상 틀린 것은 당연히 고쳐야하며
교리상 틀린 것 보다는 덜 중요하나 문법상 틀린 것도 가능하면 기회(전체 개편 등)를 보아 고쳐야 한다고 봅니다
문법상 정확하지않으면 교리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으나 지금 제기된 경우는 교리가 달라지는 문제는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더러운 죄 회개하는 보혈로"를 이것을 풀어보면
회개의 대상이 누구냐를 볼 때 우리지 보혈은 아닙니다
보혈은 우리를 회개하게하는 원동력이지 회개의 대상은 아닙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말하면
보혈로 하여금 우리를 회개하게 한다 ---회개대상은 우리--보혈의 힘으로 우리가 회개한다----(o)
보혈이 회개한다----(×)
"더러운 죄 회개하는 보혈로"를 바로 문법적으로 나타내면 "더러운 죄 회개하게하는 보혈로"로
해야 옳을 줄 압니다
이렇게 하면 가사의 글자 수가 많아지니 "회개" 대신 "희게"를 넣으면 글지 수도 맞고 내용의 의미도 같고 문법상도 맞으니 질문자가 제안한 것이라 봅니다
질문자의 "우리가 회개하지 보혈이 어찌 회개하겠느냐" 라는 내용에 대한 김바울선생님의 지적은
"보혈의 능력을 힘입어야 우리가 회개(희게, 씻는)할 수 있다"라고 하셨는데
질문자도 이 이치를 모르고 "우리가 회개하지 보혈이 어찌 회개하겠느냐"라고 한것은 아니고
다만 "회개대상은 우리이므로--보혈의 힘으로 <우리가 회개한다>"라는 뜻으로 한 줄압니다
(김바울) 훌륭한 번역과 정확한 번역
첫째
회개나 희게는 동일이라 하였고
둘째
여러분이 방문하는 곳이라 혹 오해하는 분을 염려하여 글 쓴 부분이 있으며
셋째
이치는 쉬우나
진리는 평생을 다 하여도 깨달지 못하며
넷째
총공회 찬송가
46장, 48장, 52장, 57장을 참고하며
다섯째
천사의 말을 할 찌라도 사랑이 없으면(고린도전서13장1절) 하셨고
하물며...
여섯째
외국 현지에서 일할 때 통역자의 수준을 크게 3등급으로 구분하는데
1등급은 (훌륭한 통역자)로
2등급은 (정확한 통역자)로
3등급은 (부족한 통역자)로 구분한다.
부족한 통역자는
말 전달이 제대로 안 되며
정확한 통역자는
말은 정확히 전달한다.
훌륭한 통역자는
말과 함께 그 뜻을 잘 전한다.
저자가 되어서 번역을 시켜보면 어떤 번역자를 선택할 것이며
찬송도 불러보면 어느 것이 더 은혜가 되는지 알 것이다.
찬송가 번역의 수정 수준을 어느 정도에 기준을 두는지 잘 정하고
가사 수정의 목적이 구원을 위한다면 같은 뜻이면 구원에 더 유익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주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는
어학자가 아니요
신학자도 아니요
신앙가 인 것을 성경을 보아서 알 수 있다.
(방문자 언급) 찬송가 "속죄하는 어린 양의 피로써" 가사의 문제!
>>♪속죄하는 어린양의 피로써~ 라는 찬송에서 회개가 희게의 잘 못 표기됨이
아니냐고 하셨는데요...또 회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것 이라고...??
>>글쎄요..!!! 과연 회개가 우리의 힘으로 되어지고 우리가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회개란? 돌이킬;회 고칠;개 를 써서 우리의 죄로부터 돌이켜 고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데요
그렇다면 회개란 이전까지의 죄에서 돌이켜 고치는 것 즉 죄를 떠나는 것을 의미하겠죠~!!!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아니고는 즉 속죄하는 어린 양의 피가 아니고는 우리는 절대 어떠한 죄에서도 돌이켜 고침을 받을 수 없음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부족한 자가 감히 한 글 적어 봤습니다.죄송합니다.
>>주 안에서 한 지체이기에 한 성령께서 의도하는 바를 깨닫게 해 주실 줄 믿으며 주의 말씀을 늘 사모하시는 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