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질문) 이한나 사모에 대해서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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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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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42
13. (질문) 이한나 사모에 대해서 1016
자료실에 이한나 사모의 찬송듣기에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혹시 이한나 사모는 안식교 목사로서 일제 치하에서 순교한 최태현 목사의 사모가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이곳 정서와는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잘못 생각한 것인가요?
안식교는 이단이라고 하는데 혹시 이한나 사모님이 최태현 목사의 사모가 아닌 또 다른 분이신지 궁금하군요.
최태현목사에 관한 주소입니다. http://www.bostonsda.com/cgi-
아래 내용은 위 주소에서 발췌한 것인데......
진리 … 믿음 … 순교 …
최태현 목사 일대기 드라마 개봉
“이 목숨 다해 하나님 뜻대로”
감동의 90분 객석 눈물 바다, 주연배우 세차례나 교체 어려움
한국인으로서는 초대 연합회장이었던 순교자 최태현 목사의 일대기를 담은 드라마 ‘대쪽같은 신앙인 -최태현 목사’(연출 김영선 제작 글로리아 프로덕션)가 일반에 처음으로 발표됐다. <관련기사 13면>
지난 20일(토) 제1회 효행상 시상식과 자리를 같이해 열린 시사회에서 첫 선을 보인 이 드라마에는 침례교 신학대를 마치고 전도사로 지내던 중 원산 집회에서 진리를 깨닫고 재림신앙을 처음 받아들인 최태현 목사가 굳은 신앙과 절개로 순교하기 까지 겪었던 역사적 사실이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KBS와 삼육대학교의 기획으로 그간 물밑에서 진행 작업을 보이던 이 드라마는 지금까지 일반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던 북간도에서 마주친 마적떼와의 담판, 대회장 시절, 종로경찰서에서의 취조, 잔혹한 고문, 12번이나 기절하면서도 “고문이 더할수록 내 믿음은 더욱 커지고 있다”고 고백하며 순교하는 장면 등 감동적 일화가 당시 정황과 함께 그려져 있다.
이와함께 남편의 순교를 예감하면서도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은 어떻게 사느냐보다 어떻게 쓰이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훈계하는 이한나 사모의 믿음이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이 드라마에는 어머니 이한나 여사의 신앙심도 크게 부각되어 보인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으며 두 분의 가정생활은 어땠는가?
어머니는 아버지를 잃으신 후로도 8남매의 자녀를 일제치하에서 꿋꿋하게 신앙적으로 키우신 훌륭한 분이다. 77세의 나이로 이국땅에서 눈을 감을때 까지 목사의 아내로서 이웃이나 교회에서 모범이 되셨다. 두 분은 금요일이면 집집방문을 다니셨으며 해지기 전까지 안식일 준비를 모두 마쳤다. 특히 자모반 교사로 봉사하던 어머니에게 과정공부를 지도하시던 아버지와, 교회에서 가르치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답변) '이한나' 이름은 많은 것 같습니다. 안식교 쪽 '이한나'는 아닐 것입니다.
1.'이한나'라는 이름은 아주 많은 것 같습니다.
신앙의 가정에서는 딸에게 '한나'라는 이름을 아주 많이 짓는 것 같습니다. 신앙 가정의 자녀들이 중도에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신앙의 사람으로 걸어가는 확률은 아들에 비하여 딸이 많습니다.
신앙으로 헌신하면서 그 이름을 스스로 바꾸는 경우도 많은데, 결과적으로 '한나'라는 이름은 성경 인물이면서도 한글 이름으로 부르기에 좋아서 무두들 많이 사용하는 이름 같습니다. 한글의 '영희' '명희' '진희' 등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일단 '찬송 듣기'로 올려놓은 이한나사모님은 안식교가 아닐 것입니다.
1980년을 전후하여 이한나사모님의 찬송은 교계에서 보수적인 찬송으로 알려져 있었고 또 많은 교회에서 초청이 있었기 때문에 일반 교계 소식에서 그분을 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제 기억에 '합동'측 정도였고, 안양 정도에서 목회를 한다는 정도입니다.
당시 교계는 안식교를 여호와의 증인과 꼭 같이 볼 때였고, 지금과 비교해서는 대단히 엄할 때였기 때문에 안식교 목회자에 관련된 분으로는 교회 내에서 그렇게 활동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또 안식교는 다른 사이비와는 달리 비교적 소신이 있는 이단 단체이므로 자신들의 교리와 주장을 떳떳하게 내놓고 주장하는 편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이단으로 보고 있는 우리 교계의 '새찬송가'로 찬송 활동을 할 리는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2.찬송에 대하여, 질문과 상관 없이, 그냥 일반적인 면을 살펴보았습니다.
*양해 말씀
우선, 이 글은 위에 질문한 내용과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적는 글임을 양해 해 주셨으면 합니다. 위에 질문하신 내용은 '이한나'라는 이름이 안식교와 관련이 있는지를 질문한 것이고 이 글은 이번에 '유재헌목사님' 찬송 때문에 처음으로 '찬송듣기'를 올려 보았는데 개인적으로 찬송가에 대한 관심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찬송가에 대하여 한번 참고드릴 말씀으로 적게 된 것입니다.
위에 질문하신 내용과 관련이 된 것 같아 보여서 대단히 죄송하게 되었으나 질문에 글을 적은 신분께서는, 질문과는 전혀 관련 없음을 이해 해 주시고, 또 혹 그렇게 보는 분이 있더라도 위의 질문이 익명이어서, 어느 특별한 분을 두고 오가는 내용이 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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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참고로, '이한나사모님' 찬송을 듣고 은혜 받았다는 연락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①이한나사모님 찬송을 듣고 개인적으로 많은 연락을 받고 있습니다.
질문과 답변을 하게 되면서 이곳에서 처음으로 찬송을 제공하였습니다. 3년만에 처음으로 찬송가를 제공하였기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 많은 연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많은 찬송들을 부르고 들었지만 이렇게 딴 세계 은혜를 받게 되었다는 등의 말씀들이었고 이런 찬송을 많이 올려달라는 말씀 등이었습니다. 이곳과 신앙 성향이 비슷한 분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는 표시로 들었습니다.
이한나사모님이 부른 찬송들은 찬송 자체가 은혜롭고 또 그 찬송을 부르는 분의 자세가 찬송의 은혜를 조심스럽게 전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도 아주 예외적으로 외부 자료를 소개했습니다. 사실 이곳에서 '찬송'에 대한 자료나 소개를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은 찬송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찬송을 대하는 자세나 신앙노선이 좀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②사실, 이곳은 찬송을 대단히 조심스럽게 대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곳에서 소개할 만한 찬송이 거의 없는 시대이고, 두 번째는 이곳에서 소개할 만한 수준에서 만들어진 것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한나사모님 찬송 테이프는 그 테이프가 너무 오래 되어 음질이 그렇고, 달리 연락이 닿지 않아서 결국 포기했습니다. 공회 찬송가와 같은 가사가 '새찬송가' 가사인데, 새찬송가 가사로 찬송을 녹음할 분을 찾는다는 것은 아마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시대일 것입니다.
혹 이곳에서 꼭 부탁할 만한 분들이 없지는 않습니다. 새찬송가 혹은 공회 찬송가 가사로 찬송을 부르되 그 수준이 누구에게나 공개할 수 있는 실력이 되는 분들이 있지만, 이런 분들은 자기 찬송을 외부로 공개하는 조건에서는 허락하지 않을 분들이기 때문에 아예 부탁을 해 보지도 못했습니다. 백목사님 장례 때 '네 어깨에 맨 대 사업'을 부르신 분 등은 성악을 전공했고 미국 교회들에서도 특송을 많이 한 분입니다. 이번 기회에 그분을 포함하여 가능한 몇 분들에게 부탁을 드려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추천하실 분, 또 그런 연락이 가능한 분이 계시면 이곳에서 크게 한번 신세를 지겠습니다. 여러 면을 생각하시고 한번 알아봐 주셨으면 합니다. 만일 성악 수준까지 있는 분들 중에서 허락하시는 분이 없으면 이곳 신앙노선에서 흔히 잘 사용하는 무모함을 가지고 아무에게나 부탁해 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③찬송문제를 두고는, 이곳은 늘 조심스럽습니다.
찬송가를 택하는 것도 까다롭기 때문에 교계에서 통용되는 찬송가와는 공통된 찬송이 거의 없고, 또 그 찬송을 부르는 사람, 부르는 기술도 많이 따지는 편입니다. 이 모든 면을 다 고려하고라도, 또 하나 더 고려하는 것은, 찬송이란 우리 신앙생활 전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말씀과 기도가 앞설 때 그 뒤를 보충하는 정도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일반 교계는 찬송이 교회와 예배의 중심에 있지만, 우리는 아주 반대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곳에서 좋은 찬송이 있다 해도, 혹 찬송이 말씀보다는 보다 가깝고 쉽기 때문에 찬송만 늘 많이 대하고 그 대신 말씀을 대하고 연구하는 면이 상대적으로 소홀해질까 라는 면까지 생각하다 보니까, 찬송이라는 면은 아주 버리다시피 했습니다. 이제 조금 이 면을 보충하여,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편식이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즉, 백영희신앙노선의 교회와 교인들이 말씀과 찬송을 상대하는 시간이나 정도를 고려하여 찬송을 일부 제공하는 면을 노력하겠습니다.
2.더불어, 이곳에서 찬송을 대하는 기본 자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①첫째, 찬송은 말씀을 받기 위해 준비할 때 너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 위하여 마음을 모으는 준비로 찬송을 대하는 것이 하나입니다. 세상에서 복잡하게 활동하다가 예배 시간을 맞추고 급히 예배당 의자에 앉았을 때, 우선 기도로 마음을 정리하고 모으게 됩니다. 그러나 설교 말씀을 말씀으로 모시기에는 마음 전체의 간절과 사모가 아직도 부족함을 느끼게 되고 한편으로는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진리 사모의 자세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 찬송은 말씀으로 은혜 받은 것을 감정으로 표현한 찬양이기 때문에 찬송을 통해 말씀을 받을 마음 준비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②둘째, 받은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겨 놓는 일에 찬송이 도움이 됩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 은혜를 받게 될 때, 우리 마음은 말씀을 따라 회개도 하고 정리도 하며 각오도 하면서 점점 말씀에 의하여 마음이 요동하며 고온이 발생하게 됩니다. 들은 말씀을 가지고 그 사람 마음속에서 활동하는 성령이 감동하여 그 마음속에서 발생된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을 이곳에서는 '말씀의 은혜'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설교 시간을 통해 우리 속으로 부어진 말씀의 은혜는, 예배 후 우리 생활 속에서 계속 뜨겁고 유지되면서 우리 생활 전반을 움직이는 엔진이 되어야 합니다. 그날 배운 말씀의 이치가 뜨겁게 유지되도록 설교 뒤에 보온처리를 하는 것이 바로 찬송이 가지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입니다. 그날 받은 말씀 은혜를 보온병에 넣고 뚜껑을 닫는 것과 같습니다.
찬송이란, 우리 앞서 말씀의 은혜에 붙들린 종들이, 형언할 수 없는 그 내부의 감격을, 몇 마디 깊은 탄성으로 주께 감탄하며 뱉은 시의 노래입니다. 그분들이 가장 크게 은혜 받고 외쳤던 것이 오늘 우리에게 전해지는 찬송들입니다. 그들이 감격했던 바로 그 말씀의 세계를 체험한 오늘 우리 후배 성도들이 그날 받은 은혜를 마무리하되, 과거 가장 잘 찬송했던 그 찬송을 부르며 그날 받은 은혜를 간직해보면, 확실히 은혜롭게 간직된다는 것은 신앙세계의 공통적인 경험입니다.
우리보다 더 큰 은혜로 감격해 찬송했던 그 찬송가는, 그 찬송가를 다시 부르는 후배 교인들 속에 있는 작은 은혜로 하여금, 더욱 깊게 또 크게 만드는 것도 체험했을 것입니다. 받은 은혜를 짧게 간단하게 그리고 강하고 뜨겁게 요약하여 다음 예배 때까지 보온되도록 해 주되, 특별히 귀한 성도들이 자기 일생에 한 번 또는 몇 번 가졌던 큰 은혜가 찬송가 속에 보온이 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같은 성령으로 같은 진리로 은혜 받는 오늘 우리에게, 그들이 전해 준 찬송가는 그들과 같은 은혜로 감사하고, 그들과 같이 그 은혜가 계속 되도록 해주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설교 후 찬송이 갖는 의미입니다.
③세째, 찬송은 평소 생활에서, 가장 간단하게 예배생활을 지속하게 합니다.
찬송은, 기도요 설교요 찬양입니다. 찬송 치고 그 속에 기도가 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몇 마디 표현으로 압축되어 있으나 한없이 풀어놓을 수 있는 양의 기도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찬송 속에 들어있는 말씀의 은혜는 앞에서 간단히 살펴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찬양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묵상의 기도로 평소 모든 복잡하고 어려운 것을 다 해결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이 어린 사람들은 복잡한 차안에서 오고가는 길에서 깊은 묵상으로 들어가기가 힘이 들고 또 따로 예배 시간을 가지는 것도 어렵습니다. 가장 간단하게 바로 예배로 들어갈 수 있고 또 그런 자세로 세상 복잡한 속을 헤집고 다닐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찬송입니다. 남들이 없으면 크게 부를 수 있고, 남들이 있다면 마음속으로 혼자 흥얼거리면 됩니다. 남들이 보면 입술로만 노래하는 요즘 미친놈들 중 하나로 보겠지요만, 우리가 주로 부르는 찬송은, 이 시대에 참으로 직접 듣기는 거의 불가능한 '설교'입니다.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예수 더 알기 원함은 크고도 넓은 은혜와.....'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하소서.........'
이 정도 찬송가들이 가진 말씀보다 더 은혜로운 강단, 더 은혜로운 설교를 만나 볼 가능성이 있는 교회가 혹시 있겠습니까, 오늘 이 시대에? 백목사님이 신앙초기 강단에 섰을 때, 찬송가 한 곡을 70번 그 자리에서 반복해서 부르고 또 불렀던 기억을 말씀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찬송이란, 우리의 모든 일상 생활에서, 늘 우리에게 가장 간단하게 쉽게 강하고 뜨겁게 계속해서 예배로 계속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3.찬송을 두고는, 현 교계의 교회들과 교인들의 행태를 아주 비판하고자 합니다.
①찬송이란, 말씀의 은혜가 시적 함축과 음적 감정을 입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찬송이란, 어디까지나 말씀의 은혜가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도록 성구를 살피는 것은 설교라고 하고, 말씀의 은혜가 함축되어 음율로 표현이 될 때 찬송이 되는 것이므로, 만일 찬송의 은혜가 말씀의 은혜를 벗어난다면 이는 세상 음악이 되어 버립니다. 마치 성령의 감동과 진리의 이치가 빠진 성경은 세상 도덕 신화 역사가 되는 법이고, 사이다에 김이 빠지면 맹물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②찬송의 변화 형태를 면밀하게 보셔야 할 때입니다.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 교계의 찬송은 그 찬송의 중심에 있어야 할 말씀의 은혜는 미아보호소에 모여있고 그 대신 찬송이라는 이름 속에는 세상에서 마저 풀지 못한 여흥만 우굴 거리고 있으니 이를 조심해야 할 시대입니다. 말씀의 은혜와 시적 함축 표현과 음률이 어울리되, 음률은 시적 함축 표현을 보좌하고, 그 표현은 전부가 말씀의 은혜로 구성되어 있어야 정상일 것입니다.
시적 함축 표현만 나돌아다니면, 나이 많은 분들이 잘 부르는 대중가용 중 흘러간 옛 노래들이 주로 다루는 주제와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인생의 허무를 노래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들입니다. 이 수준의 복음성가가 적지 않습니다. 또한 시적 함축 표현조차도 뒤로 숨고 음률이 앞서 나서게 되면, 이는 세상 철없는 아이들의 발산 또는 발광하는 최신식 노래가 되어 버립니다. 입술의 발음만 남거나, 입술의 발음은 보조를 맞추는 정도고 그들의 얼굴 손발 전신이 떨기를 마약 먹은 쥐처럼 된 상태입니다. 약간 환각 상태로 들어가면 TV 밤노래에 흔들거리는 그들이나 교회 안에서 기타 들고 흥얼거리는 그들이나 심리적 상태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약간의 환각은 약간의 낙원을 만들어 줍니다.
교회인지 밤무대인지, 예배당인지 대학교 써클 모임인지, 좀 건전한 교회라고 한다면 사교모임인지 성도의 교제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치닫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 닮는 것을 두고 세상 속(俗) 닮을 화(化), 속화라고 합니다.
③이곳은, 찬송이라는 주제 하나를 두고도 신앙노선을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곳의 시각이 이렇기 때문에 공회 안에까지 일반화되고 있는 기타 드럼 율동을 곁들인 요즘식 찬송은 찬송이라고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찬송에 성령의 은혜로 감격했다는 등의 표현이 나오면 이곳은 하늘을 보고 하품을 한번 하는 정도입니다. 이곳의 입장이 이렇기 때문에 이곳에서 자주 주장하는 내용에 대하여 하품이 나오고 기가 막히는 분들의 입장을 이곳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 은혜 세계를 모르는 이들이, 악기와 율동과 개그와 앰프 조작을 통해 흉내만 내는 것이 요즘 찬양활동인데, 나쁘게 욕한다면 '발광'이지요. 제 정신이 아니라 남의 정신으로 내 몸을 흔들 때 나타나는 비정상적 움직임입니다.
4.이곳이 알고 있는 찬송의 세계가 옳을 것입니다.
①찬송의 은혜는, 말씀과 성령이 마음 안에서 역사하고 그것이 밖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찬송이란 말씀의 은혜를 전제로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 속의 진리가 우리 마음에 틀린 것을 지적하게 되면 우리 마음이 인정을 하게 되고 따라서 생각을 바꾸거나 회개를 하거나 새로운 결심들을 하게 되는데, 이는 우리 마음속에서 말씀을 통해 역사 하는 성령의 활동이기도 합니다. 이런 마음 내부에서 일어난 감동이 외부로 표현되면서 함축적으로 몇 마디가 나오면 시가 되고, 음률이 보조를 맞추게 되면 찬송이 됩니다. 따라서 신앙의 시나 신앙의 찬송은 그 음 하나 그 표현 하나에 담겨 있는 세계는 말로 이루 다 할 수 없는 광대한 세계가 있습니다.
②현재 교계의 찬송은, 외부에서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여 반응을 유도하는 차원입니다.
오늘 교회들의 찬송은, 이제 말한 것처럼 말씀과 성령이 마음 내부에서 역사하고 밖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외부에서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여 반응이 나오도록 하고 있습니다. 즉, 고음과 함께 효과음을 내는 앰프나 악기의 작동 기술, 그리고 적당하게 인체를 주무르거나 아니면 그런 시각 효과를 가지고 오는 율동, 아니면 사람의 감정을 가장 쉽게 이끌어내는 개그 등을 교인들 안으로 강하게 밀어 넣으면 반응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온과 고압의 감정을 교인들의 눈과 귀를 통해 밀어 넣게 되면 그 에너지 대부분이 비록 그 밀어 넣는 과정에서 유실이 되지만 그 중 일부가 마음속에 있는 감정과 접촉을 하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이런 외부 강압에 의하여 시작된 마음의 감정이 다시 외부로 나타나게 되면서 입에서 소리가 나고 손발과 몸이 움직이게 됩니다. 이곳에서는 이런 찬송을 '밤무대 흥풀이'라고 아주 무시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발언 때문에 흥분한 분들이 극언을 서슴치 않는 것도 알고 있지만, 충분히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그 깨달음에 따라 그렇게 다를 수 있으며, 그래서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를 연구해야 하는 것이라고 이곳은 더욱 더 조심하고 있습니다.
③진정한 찬송이란, 말씀과 성령이 우리 마음을 감동시켜 변화를 일으킨 결과라야 합니다.
외부적으로 볼 때, 이곳은 다른 교회들처럼 박수도 치지 않고, 아멘을 합창하지도 않으며, 벤드나 강대상을 뚜드리는 등으로 교인의 흥분을 유도하거나 자극하는 일이 전혀 없습니다. 예배당을 건축할 때도 건물 외형이나 내부를 시각 효과에 전혀 상관없이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비를 피하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공간 확보를 하되 최저 경비로 진행하는 정도가 전부입니다.
우리 마음이 말씀의 지적과 성령의 활동 때문에 여러가지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게 되면 이 마음은 고온으로 내압이 상승한 압력 밥솥과 같은 상황을 맞게 됩니다. 생짜배기 맨 쌀 한 줌이 비로소 맛있고 좋은 공기밥으로 바뀐 것입니다. 물론 설교 말씀을 들으며 이미 그 마음 속에서는 새 은혜를 받았고 새 사람으로 다시 변화가 되었지만, 그 말씀을 붙들고 또 한번 새로운 은혜를 받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된 그 마지막을 찬송으로 고요하게 때로는 힘있게 마무리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 은혜를 받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찬송으로 예배 초반 찬송으로 부를 때, 그날 받을 말씀을 준비할 수 있는 심령으로 변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설교가 끝나고 다시 이런 찬송으로 찬송을 부르게 되면 그 날 받은 말씀의 은혜가 더욱 깊어지고 또 그 말씀의 은혜가 그 찬송을 인하여 잘 보존이 되어지기도 합니다. 평소 세상 속에서도 이런 찬송으로 찬송을 할 때, 마음속으로 부르는 찬송 한 절로 그 날 하루의 피곤도 털 수 있고, 또 잠깐 잊었던 감사도 되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