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질문) 침례교와 총공회의 비슷한 점 5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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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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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34
8. (질문) 침례교와 총공회의 비슷한 점 5847
어느 침례교회의 교회 운영 방침입니다.
총공회와 비슷한 것 같은데요.
이 중에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 주시고 우리들이
혹시 따라갈 부분은 없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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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목회자가 목사라는 직분 때문에 회중(성도)전체에 군림할 수 있다는 권위의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목회자의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직분상의 기능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 교회는 목회자의 권위주의적인 횡포나 월권을 막고 회중전체가 자율적인 교회운영에 참여하므로써 목회자 일인 체계에서 벗어난 보다 성경적인 교회운영을 합니다.
자율 헌금입니다.
따라서 헌금자의 명단이 발표되지 않으며, 일체의 헌금강요나 무리한 예산 책정을 하지 않습니다. 또한 율법적인 십일조와 타의나 압력에 의한 작정헌금 제도가 없습니다.
(특히 처음 교회에 오신 분은 헌금할 의무가 없으며 우리의 예배를 즐기시면 됩니다)
우리 공동체의 예배는 삶의 전부가 예배지만 주일에 함께 모여 예배의식을 갖으며 열린 예배마당으로 진행 합니다. 예배의 주체는 모든 지체이며 예배 사역자들에 의해 구성되고 진행됩니다. 특히 설교자 자신도 예배의 한지체로서 회중석에 참여하여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목사 안수집사 교사 반주자 그 외의 서리집사, 또한 사역자등의 직분을 인정하지만 직분에서 오는 높낮이의 계급 제도는 절대로 인정치 않습니다. 또한 본 교회는 전임 사역자가 아닌 기타 평신도 사역자들이 교회로부터 보수를 받는 것이 비성경적이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목회자 이외의 모든 사역자들이 모두 무보수 자원봉사자들입니다.
교회의 규모를 늘리기 위한 무리한 건축을 계획하거나 건축 헌금을 마련하기 위한 의도적인 간증 집회나 물질주의 축복사상을 불어넣는 부흥회를 갖지 않으며 기타 인위적이고 외형적인 교회 성장프로그램을 도입 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원리와 복음의 핵심이 분명치 못한 피상적인 도덕 설교 예화 중심의 설교는 구원의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가며 성도로써 성숙해 가는 일에 긍정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됩니다. 그래서 본 교회는 성경 본문 자체가 우리들에게 주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는 강해 설교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본 교회는 매주 충실하게 강해하는 강단의 말씀을 통해 복음의 본질과 성경의 가치관을 확인하면서 구원의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며 그분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답변) 어느 교회 하나의 사례이지 침례교 전체의 경우는 아닙니다.
윗글 소개한 교회의 분위기는
침례교식 노선은 맞습니다만 침례교는 개별 교회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어느 한 교회의 사례를 가지고 전체 분위기를 느껴볼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전체를 평가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1.목회자의 권위
목회자의 군림이나 횡포를 막고 교인 전체가 교회 운영에 참여하도록 한다는 설명은 전형적인 침례교식 행정노선입니다. 그러나 윗글 소개한 내용 중에서 '목회자의 권위가 강론하는 직분상의 기능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는 설명은 이 노선이 반대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든 누구든 직책이란 사람들끼리 편의상 대충 정해놓은 것이고, 한 사람의 실제 권위는 말씀에 맞는 것을 증거하면 그 말씀의 권위가 그것을 증거하는 사람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그 옳은 증거 때문에 권위가 생기는 것입니다. 목회자 한 사람에게 권위가 집중되든 전체 교인 모두가 교회 운영권을 공동으로 가지든 그 형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옳은 것을 주장한다면 목회자가 비록 한 사람이지만 그 한 사람이 전체 교인을 지도해야 할 권위를 갖게 되고, 전체 교인이 결정하고 민주적으로 동참한다 해도 그 결정이 옳지 않으면 이는 잘못된 교회입니다. 세상은 많은 사람이 참여할수록 민주화가 되었다고 좋아하지만 교회는 한 사람의 독재든 여러 사람의 귀족정치든 모든 사람의 민중정치든, 그 외형 모습이 아니고 그 내용의 정확성에 생명을 걸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천주교가 신앙있는 한 사람의 지도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다가 엄청나게 탈선했다 해서 그 반발로 교회 운영권을 무조건 많은 사람에게 분산시키면 해결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철없는 반발심입니다. 많은 사람의 분산이 좋을 때도 있고 어떤 경우는 한 사람의 귀한 종으로 한 시대가 살아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마 침례교도 이 면을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나 소개한 윗글의 분위기는 이 노선과 다릅니다.
2.연보
이 노선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연보에 관하여 강요나 명단공개나 허례허비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타교회가 연보를 강요하는 것을 무조건 비판하지는 않습니다. 신앙이 어린 경우나 개별 교회의 개별 형편에서 강하게 가르쳐야 좋을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무리한 예산 책정'을 하지 않는다고 표현했는데, 이 노선은 교회의 경제 운용에 있어 '예산편성'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현재 거의 모든 교회들이 연차계획으로 예산편성을 하고 있는데, 인간이 내년 일년의 경제 계획을 짠다는 것은, 아무리 그 계획이 검소하게 짜여졌다 해도, 다음 1년의 예산 편성 자체가 비신앙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 가지고 그다음 어떻게 쓰야 할지 살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나 작정헌금의 경우 또 처음 교회 나온 분에게 헌금 의무가 없고 예배를 즐기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가정으로 말하면 각 가정마다 가풍이 따로 있어 비판하기는 죄송하지만 신앙의 앞선 사람이 뒤따르는 사람을 지도하고 가르쳐야 할 책임면을 두고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표현입니다. 예배를 즐긴 사람이 연보를 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또 연보는 처음 나오든 오래 다녔든 믿는 사람의 기본 신앙모습입니다. 연보와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강제와 억지 연보입니다. 잘 이해를 시켜 자원함으로 동참하게 만든다면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일찍부터 연보할수록 그리고 많이 연보할수록 그 연보한 본인이 복을 받기 때문에 연보는 늦게 하도록 만든 것이 자랑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윗글 소개한 내용은
요즘 워낙 연보 때문에 불미스런 일들이 많기 때문에 교회 전도를 위해 첫 출석하는 분들에게 신앙생활을 오해없이 잘 시작하도록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아마 그 교회의 실제 마음이 답변자와 같으나 현재 불신자들의 피해의식을 생각해서 전도차원에서 부드럽게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3.열린예배
열린 예배에 대하여서는 언제 한번 이 게시판에서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쉽지 않은 문제이며 간단히 단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어
이전 오간 자료를 검색하여 일단 참고하셨으면 합니다.
4.직분간의 계급
교회 내의 어떤 직책이든
한 몸의 여러 지체와 같이 그 역할과 기능이 다를 뿐이지
높낮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목회자 외의 직분자들이 교회에서 사례를 받는 것을 반대한 것은 교인이 적은 교회의 경우일 것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보수를 많이 받는 것보다는 적게 받는 것이 낫고, 적게 받는 것보다는 안 받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나 받고 안 받는 문제를 따질 대는 받지 않고도 일을 끝까지 할 수 있는 경제력이나 시간이나 기타 건강이 따라가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5.교회 부흥을 위한 프로그램
교회 성장을 위해 무리한 건축이나 간증집회 등 세상식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것을 반대했는데 옳은 말씀입니다. 세상의 사업확장식 노력은 반대하는 것이 옳습니다. 다만 자연스럽게 충성하고 바른 길을 가다가 은혜를 주셔서 부흥되는 것은 성경적입니다. 그렇게 부흥되다가 순복음교회보다 더 큰 교회가 되어도 그것은 복입니다. 문제는 인본의 여러 방법론들입니다.
(침례교인) 침례에 대한 참고자료입니다. 2714
Ⅰ. 침례의 어의
종교의식의 용어로 사용되는 그리이스 원어(原語) 밮티스마(bavptisma)는 “물에 잠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Ⅱ. 유대인 사회의 개종침례
기독교 이전부터 유대교에는 침례의식이 있었습니다. 이방인(비유대교인)이 유대인으로 개종을 원할 때에는 남자의 경우 다음의 세가지 의식이 요구되었습니다 : 할례, 침례(浸禮), 제물을 드리는 일. 이 때 행하는 침례의 형태는 물론 침수(浸水)였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문화적으로 익숙했던 침례의식에 침례요한은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즉, 하나님께 회개함이 없는 계승신앙(유대인의 경우)이나, 개종(이방인의 경우)은 무의미한 것으로, 먼저 회개하고 침례를 받으라고 가르쳤습니다(마태복음 3:1-12)
Ⅲ. 예수님의 침례형태
예수님은 죄는 없으셨으나, 죄된 인간의 짐을 대신 지기 위해 당신도 사람들이 하는대로 따르는 것이 옳다고 하시며 침례를 침례요한으로부터 받았습니다(마태복음 3:13-17). 예수님도 유대인 사회의 일원이었으므로, 침수(浸水)로 침례를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마태복음 3:16).
Ⅳ초대교회의 침례형태
고고학의 발견은 초대교회에 침례탕이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후일 교리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늦게는 14세기까지 - 침수례(浸水禮)를 행했습니다.
Ⅴ.침례의 기독교적 상징의 의미
침례는 어디까지나 의식(儀式)이므로 그의식의 요소들은 상징적인 의미를 표현해야 합니다. 그 의미는 바울의 편지에서 발견됩니다: 로마서 6:3,4: 골로새서 2:12
침례의식의 요소들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침례 = 나의 죄인 된 옛사람이 죽어(물에 잠김) 장사(葬事)되고(물 속에서 잠시 멈춤)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 새생명 - 로 거듭남(물을 박차고 일어남)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씻거나 구원을 받기 위해 침례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구원을 받은 신자의 상징표현입니다. 침례를 받음으로 갑자기 성(聖)스러워지거나 신비한 능력을 수여 받는 것은 더욱이나 아닙니다.
침례는, 한 개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에 대한 소중한 기억물이며, 다른 회중들에게는 공적인 신앙고백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침례를 한 교회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교회회원권의 조건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는 공동체의 질서를 위한 일종의 예의규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Ⅵ. 이방종교사상의 유입으로 인한 의식의 개념변화 -침례형태의 변화 과정-
이렇듯 상징적 의미를 가진 침례의식은 일찌감치 그 의미가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1세기 중반부터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 반도)지방과 유럽으로 복음이 전파됨에 따라 많은 이방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이방종교는 의식(儀式)을 통해 신접(神接)할 수 있고 그 의식은 주술적(呪術的)인 능력이 있다는 개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 모든 무속신앙이 그러하듯이. 그러므로, 무형상(無形像)종교이며 의식이 필수적인 것이 아닌 기독교는 그들에게는 매우 새로운 것이며, 그들을 당혹하게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행해지는 침례의식과 주의 만찬 의식은 그들의 기존 종교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 통로였습니다. 그래서, 서서히 침례 때 사용되는 물이 신비한 의미로 해석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은, 그 물은 “죄를 씻어주는 능력이 있다”고 여겨지게 됩니다. 그 결과, 개인의 죄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나 하나님에 대한 주권인정이나 의지적인 신앙의 결단이 없이도 침례를 받게 되었고, 또, 그 침례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浸禮重生設). 그러므로, 유아이건 어린이이건 침례를 주게 되었습니다(유아침례). 아버지가 믿으면 전 가족을 침례 받도록 종용했습니다. 군부대에서 상급자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면 부하들에게 집단적으로 침례를 받도록 했습니다. 전쟁에 참전하게 된 군인들에게, 그들의 사후(死後)를 위해 집단으로 침례를 주었습니다.
이렇게 침례의 의미가 달라짐에 따라, 그 형태도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즉, 침례 때의 물이 죄를 씻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면 구태여 전신을 물에 잠글 필요까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한편, 사람들 사이에는 침례를 좀 더 나중에 받겠다고 지연하는 풍조도 생겨나게 됩니다. 어차피 죽을 때까지 죄는 지을텐데, 침례가 죄를 씻어 준다면, 지을 죄 다 지은 다음에 깨끗이 받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4세기에 노바티아누스(Nobatianus)라는 사람도 임종 직전에 침례를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중병이 들어 도저히 물 속에 빠질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지방 주교였던 화비아누스(Fabianus)는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노바티아누스에게 물을 들어부어(灌水禮) 침례를 행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침상침례(寢上浸禮)라고 부릅니다. 이 관수례(물을 붓는 의식형태)를 침례로 인정할 수 있는가에 대해 논란이 있었으나, 인정할 수 있다는 쪽으로 의견은 기울었습니다. 이후 침례의 형태는 세 가지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 물에 전신이 잠기는 침수례(浸水禮) ; 물을 머리로부터 붓는 관수례(灌水禮) ; 물을 몸의 어느 부위(주로, 머리)에 뿌리는 산수례(散水禮). 그러나, 14세기까지도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침수례였습니다. 1311년 라벤나 종교회의(The Council of Ravenna)에서 관수례가 공식적인 침례형태로 인준되면서부터 산수례로 급격히 바뀌어 가게 된 것입니다.
침례의식의 명칭은, 영어권에서는 baptism이라고 그리스어를 음역(音譯)해서 사용했기 때문에 용어에 있어서는 문제가 없으나, 중국과 한국에서는 세례(洗禮)라고 번역됨으로써(세계적으로,“씻는다”는 의미가 있는 단어로 번역된 성경은 중국과 한국의 두경우뿐입니다) 용어부터 교단간에 불일치가 있는 현실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판단할 문제는, 침례와 세례는 명칭과 형태만 다른 것인지, 아니면 의식의 의미까지도 다를 수 있는지 하는 것입니다.
침례교회에서 침수로 침례를 행하는 것은 고집스러움을 보이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침례의식의 상징적 의미를 가장 적절히 표현하기 위해, 또한, 예수님이 행하셨던 대로, 그리고, 신앙의 선배들이 했던 대로-침수침례받는다고 무수히 순교도 당했지만 - 그렇게 할뿐입니다.
다음의 자료들이 더 구체적인 설명을 해 줄 것입니다(거의 모든 침례교회에 비치되어 있습니다)
도한호. “세례(침례교의 입장).” 성서백과 대사전, 6권. 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80. pp. 417-23.
베이커, 로버트 A. 「침례교 발전사」. 허긴 역. 서울: 침례회출판사, 1987. pp. 27-44.
럼프킨, 윌리암 엘. 「침례의 역사」. 노윤백 역. 서울: 침례회출판사. 1976.
Lea, Thomas D. "Baptism in the Early Church." Biblical Illustrator, 1984 Fall. Nashville: The Sunday School Board of the Sourthern Baptist Convention. pp. 30-33.
(답변) 참고하겠습니다. 또 이곳 /일반자료방/에 별도로 소개하겠습니다.
1.침례교에 대하여는 항상 반가운 마음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침례교는 그 행정 노선이 이곳과 가장 가깝고, 또 교리 노선도 전반적으로 세계 기독교의 보수 노선에 중심을 잡고 있기 때문에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침례교 목회자들은 교파별로는 과거부터 이곳 신앙노선의 설교록 자료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 친근감도 더욱 많습니다.
이곳이 교회를 언급할 때는 장로교 범위만으로 마치 한국교회 전부라고 표현하는 일이 많습니다만, 이곳의 활동 범위를 중심으로 표현한 것이지 침례교에 대한 중요성을 잊어 그런 것은 아닙니다.
2.올려주신 '침례' 자료에 대하여는 잘 참고하겠습니다.
이곳이 먼저 살펴보고 이곳을 방문하는 분들에게 참고 자료로 제공해야 할 자료인데 직접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 문답방에서 침례에 대한 질문이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올려놓을 자료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또 앞으로 일반 방문인들의 검색에서도 '침례'에 대한 자료가 제공될 수 있기 때문에 좋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침례교의 침례 형태에 대하여 이곳은 반대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장로교에 있지만 장로교와 침례교를 객관적으로 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장로교와 침례교의 교리 논쟁 중 가장 핵심적인 사항 중 하나인 '유아세례'에 있어서는 이곳 신앙노선은 침례교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장로교의 유아세례 주장에 대하여는 칼빈 이후로 장로교가 그렇게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지만 이곳 신앙노선은 장로교의 가장 대표적인 문제점 중에 하나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신약 교회에까지 육의 부모의 구원이 자녀에게 그대로 이어진다고 주장하는 구원론의 인식은 유아세례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이 되고 있는데 이는 구약적이며 천주교적인 면을 장로교가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 원인으로는 장로교의 주류 교인들과 그 초창기 인물들이 귀족적 색채가 있어 명문 대가의 프리미엄을 확보하려 한다는 느낌이 많습니다.
3.혹 침례교의 보수 정통적인 입장을 소개할 수 있는 자료들이 가능하다면,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침례교는 무척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기 때문에 적지 않은 교회들이 이단 등 잘못된 길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통제가 강한 장로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있는 일이며 오히려 장로교는 지도부 한 두 사람이 자유주의로 빠지면 교단 전체를 강제로 자유주의로 끌고 가는 단점이 있습니다.
침례교는 아무래도 장로교보다는 제도적으로 자유로운 선택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이곳은 침례교를 대할 때 어느 교단이나 어느 교회들이 장로교보다 더 보수적인지 또는 어느 곳이 이단으로 향하고 있는지 등 거의 아는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혹 침례교 관련 자료를 인용하려 해도 그 자료 제공자의 계통 등을 따지다 보면 시간이 없기 때문에 자료를 아예 접촉조차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곳에 혹시 간편하게 제공할 수 있는 준비된 자료가 있다면 이곳을 방문하는 분들이 대부분 장로교 범위에 있고 침례교에 대한 이해를 바로 가지게 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셔서 /초기화면/연구실/일반자료실/에 제공해 주셨으면 합니다. 혹 앞으로 올려주시는 자료가 있으면, 관리자로서 올려주시는 자료에 대하여 일반인들의 열람에 편리하도록 위치 조정이나 여러 소개를 통해 적절하게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른 침례교인) 감사합니다.
이 목사님
목사님께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진리에 굴복하시는 분인 것을
침례교도에 대한 답변을 읽으면서 확정케 되어서 감사합니다.
유아세례를 인정치 않고 각인의 믿음에 기초한 구원관과 개교회주의라는 교회관에서부터 일치된 믿음을 보이고 있음을 감사합니다.
뿐만 아니라 침례회 형제들의 장점은 목사님이 보신대로 개인신앙의 자유성이 보장되어 있으며, 성경의 권위에 무엇보다도 순복하며 국가와 교회의 분리라는 원칙과 침례와 만찬이라는 두가지 예식만을 주님이 주신 명령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다만 목사님이 우려하신대로 침례교형제들은 어느 신학적이거나 학적인 배경을 중시하는 경향보다는 성경자체의 가르침을 중요시하기에 극단적으로 흐를 경우에는 어느 한쪽에 치우쳐 성경이 말씀하는 균형을 상실하는 경우가 역사적으로 많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의 거짓된 믿음에 대항하여 그 행실과 믿음으로 승리한 형제들이 있다면 바로 그들은 사도시대 이후 교회사의 주류에서 비록 밀려났지만 수많은 침례교형제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님도 지적하신 것 같이 한국에서 유력하다고 하는 기독교침례회 교단에 들어있는 침례교회들은 대부분 은사주의에 치우쳐 있습니다.
서울성락교회라고 하는 김기동목사라고 하는 분은 침례교회에서 나와서 한 10만명 교인 목회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리스도의 보혈은 강조하지만 은사주의 경향으로 치우치고 있고 거기에다가 진리면에서는 답을 갖고 있지 못할정도라고 여겨집니다.
그외에 독립침례교회들이 있는데 이분들의 주장은 교리적으로는 모두 백목사님과 거의 같은 선상에 있습니다. 다만 교리적으로 너무 치우쳐서 믿음의 실행이 보이지 않는다는 약점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한국교회에서는 거의 부정적인 시각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례회형제들 중에서 백목사님의 교훈을 잘 소화만 해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능력을 배운다면 아마도 침례회 형제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장점들과 조화를 이루어서 신약성경이 말씀하는 신약교회의 본질에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데 참예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저도 원래는 장로교교리에 서 있다가 침롓회 형제모임의 사역자로 있는 사람이면서 백목사님의 교훈을 늘 듣고 연구하는 위치에 있지만 말세를 감당할 복음의 분량을 만들어가고 세워 가는데에는 사람이 진리를 주관해서는 않되고 오직 진리의 거룩함을 이루어가시는 주님께 굴복하고 진리의 지식을 주시는 주님께 굴복하고 진리의 사랑을 행하는 일만이 거쳐 넘어지지 않는 비결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백목사님 신앙연구사이트가 장로교라는 썩은 고목나무를 베어버리고 성경이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의 기준만을 두려워함으로 나아가는 새가지가 되기만을 원합니다.
고전 3장에 말씀처럼 바울이 무엇이고 게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만물이 다 성도들의 것이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임을 늘 생각하고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하신대로 우리는 진리를 행함으로 그리스도만 높이는 일에 드려지기를 원합니다.
혹이라도 이 사이트에 들어오시는 분들이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받는 대신에 백목사님 개인의 경건에 마음을 빼앗길까 늘 두려운 마음이 큽니다.
그러나 진정 백목사님이 가르치신 교훈을 따라 성경으로 나아가서 주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백목사님이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며 그분 앞으로 영혼들을 붙이려했는지 알 것입니다.
이 목사님 늘 기도하겠습니다. 진리는 결코 무너지는 법이 없는 줄 압니다.
주님께서 늘 함께하셔서 이 모든 수고에 위로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