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질문) 청년들의 홈페이지? 1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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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질문) 청년들의 홈페이지? 1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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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질문) 청년들의 홈페이지? 1275

대구공회나 부산공회(2)에 있는 청년들에 홈페이지를 보았습니다.
어떻게 보아야 하나요.
예전에 백목사님은 그러한 인터넷안에서의 모임을 어떻게 보셨을까
궁금합니다.


(답변) 청년 학생들의 끼리 모임, 또래 집단은 그 자체가 벌써 탈선의 온상입니다.

1.꼭 어느 부분이 문제라고 지적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목회자가 잠옷차림으로 설교를 한다고 해도 이곳은 놀라거나 잘못됐다고 비판하지 않겠습니다.
목회자가 강단 위 설교단을 치우고 물구나무를 서더라도 그것을 틀렸다고 지적할 교리는 없습니다.
목회자가 강단 위에서 세상 신문을 읽어주고 설교를 대신하더라도 사실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신약 강단은 구약처럼 옷차림에 대한 제도가 없고, 행동 강령도 없으며, 설교 내용이 복음 전하는데 필요하다고 우긴다면 무슨 내용도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배당을 천주교처럼 만들고, 세상 언론 해설을 설교시간에 하고, 기타를 들고 드럼셋트를 들고 춤을 춰도 할 말이 없습니다.


2.그러나, 현재 청년이나 학생들이 홈에서 보여주는 현상은 탈선이요 속화임에는 틀림없습니다.

①중고등부, 주일학교 학생들이 끼리끼리 모이는 것을 복음운동이라고 하지만

공회의 신앙노선은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로 교인들이 모이는 것 외의 일로 모이는 것은 아주 교회를 탈선시켜 세상으로 달려가는 타락으로 보고 있습니다. 특히 주일학생이든 중고등학생이든 대학 청년들이든 끼리끼리 모이는 것은 교회를 사교 단체로 만들어 교회의 뿌리를 썩게 만드는 대 원수로 보고 있습니다. 심지어 장로님들 또는 목사님들도 말씀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사이로 만나지 않고 또래집단으로 만나는 것이면 교계와 교단을 망치는 대마귀로 보고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일반 교회의 현상들, 특히 요즘 중고등학생들의 홈 운영을 평가해 달라고 한다면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유익과 그 나아가는 방향을 평가해 보라고 한다면 서슴없이 예배당 안에 멸망의 가증한 것으로 담뿍 쌓아놓는 짓이라고 하겠습니다.


②남녀 혼성이 극심하여 현재 상태라고 한다면 혼음으로 가는 현상으로 봅니다.

인류 문화사적으로 나타나는 공식 중에 이런 단계 진행론이 있습니다. 힘을 가지면 배가 부르게 되고, 배가 부르면 시 노래 그림과 같은 예술에 눈을 뜨고, 이런 주색잡기가 능하면 이성 혼란이 극심해지고, 이성 혼란이 극심해지면 근친 동성 문제가 나오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인간이 짐승 짓을 하는 수준이지만, 이 지경에 도달한 인간들은 진짜 짐승으로 돌변을 하여 사람이 아니고 짐승을 향해 미쳐 달려가게 됩니다.

지금 공회의 학생들 모임은 배가 부른지 한참 지났고, 예술의 이름을 뒤집어 쓰고 주색잡기가 무르익어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습니다. 이 단계도 지났다는 말이고, 이성 혼란을 성도의 사랑으로 포장하고 복음의 화음이라고 둘러대지만 그 실상은 그들 양심이 스스로 알 것입니다. 그들 양심이 아는 분들은 그 단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서서 혼자 양심에 괴로울 것이고, 이런 지적을 하는 이곳을 향해 분노하고 그렇지 않다고 펄쩍 뛰는 사람들은, 현재는 모르겠으나 그 다음 단계는 세상 문화사적 진행단계의 공식에 아마 해당될 확률이 거의 100%일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는 인류 문화사의 통계를 넘어설 수 있으나 세상 속에 들어 앉아 있는 사람들이라면 세상 돌아가는 그 통계와 공식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성경이며 역사입니다. 물론 다른 교단들은 30여년 이상 이런 면에서 앞서 가고 있지만 이번 질문은 공회 내부를 말씀하셨기 때문에 내부 문제를 위주로 보고 있습니다.


③지금 청년 학생들 위주의 교회들이 뜬다고들 난리들이지만

먼 나라 옛날 기록들은 잘 모르겠으므로 일단 접어두고, 우리가 직접 보고 접했던 이 시대 이 나라에 있었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시대를 들었다 놓았다 했던 운동들도 많았고 전국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던 이벤트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는 아직까지 진정한 복음 운동이 그렇게 불을 당겼다는 경우는 보지 못했습니다.

과거 영락교회로 사람들이 몰리던 때가 있었고, 순복음교회로 몰리던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 서울 어느 교회에 청년들이 몰리고 있다며 들려오는 소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당시는 더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그 운동에 동원된 사람들의 신발 갯수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 가는 방향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살펴볼 뿐입니다. 그들이 모여 흘린 눈물에도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김일성 죽은 송장 앞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 더 큰 눈물로 난리가 났었습니다.

지금 일반 교계가 타락과 탈선에 앞서 달려갔던 수도 없는 방법들, 그들이 수십년씩 사용하다가 이제 지겨워서 오히려 버리고 있는 폐품을 모아다가 하늘에서 떨어진 새기법이라고 사용하며 감격해 하는 공회의 청년들 학생들 젊은 교역자들을 보며 개탄해 마지 않습니다. 밥 팔아서 똥을 사먹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천국을 팔아 세상을 사며, 이 신앙노선을 팔아 타락과 탈선의 교계를 제일 뒤에 서서 따라가는 분들이 안스럽습니다.

더 이상 탄식하다가는 공회 내부 청년들에게 몰매 맞겠습니다. 그냥 이 정도로 해 두겠습니다. 그래도 백목사님을 먼 발치에서 따라 다닌 답변자는 세상에 물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 정도로 표현하고 말지만 백목사님을 되살려 이 시대를 향해 발언할 기회를 드린다면 강단에서 세상 쌍욕이 마구 쏟아질 것입니다.


(재질문)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이번 13, 14, 15일 ‘서울 지방 청년 엽합’ 수련회를 가졌습니다.
지난 ‘한 꿈 모으기’때처럼 아무 탈 없이 수련회를 마치게 해주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이번 모임 제목이 ‘회복’이였습니다.
수련회를 통해 모든 형제, 자매님들 몸과 맘에 깊은 상처까지도
모두 깨끗케 해 주셨음을 믿습니다!

아쉽게도 참석치 못한 형제, 자매가 있습니다.
그들과 더불어 모든 지체들이 회복 되어지길 원합니다.

주님!
세상 속에 부딪히고 깨지고 너무나도 쉽게 넘어지는 저들입니다.
이번 수련회를 통해 주께서 다 회복시켜 주셨으니,
또다시 깨지고 넘어져 아파하는 자가 없게 하시고,
주님 한분만 거룩히 섬기는 주의 자녀들로 삼으사 그들로 하여금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떨며 두려워하는 자가 없게 하옵소서.

이제 각자 처소로 돌아가 또다시 세상속에 뛰어들어야합니다.
그 속에는 많은 유혹과 불신이 가득하오니 저들의 마음을 강건케 하옵시어 범죄치 않게 하옵시오며,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더욱더 그 맛과 빛을 더하는 자녀되게 하옵소서.
내 생명 주의 것이니 내뜻대로 마옵시고, 영원 자존하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번 수련회를 통해 또한번 저의 보잘 것 없는 너무나도 나약하고 초라한 신앙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게 믿음 더하시어 내치지 마옵시고 붙들어 주옵소서.
믿음 더욱 굳센 자녀 되기 원하오니 마귀 악령 틈타지 못하게 주께서 늘 지켜 주옵소서.
부족한 죄인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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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인 목사님!!
저를 비롯해 교단 산하 거의 모든 청년들의 공통적인 기도제목인거 같습니다.
너무나도 어리고 연약하기 때문에 쉽게 넘어집니다.
금번 수련회 주제가 회복이었습니다.
신앙회복...관계회복...
서로 아껴주며 위해서 기도해주는 청년들의 모습을 이번 수련회를 통해 느꼈답니다.
혼자 감당하기 힘든 일도 서로 중보로서 헌신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과연 이런 모임..교제가 타락이라면 어떤 신앙관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겠습니까?
모임을 해체해야 바른길을 간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 안타까운 맘으로 하신 말씀이라면 고맙게 달게 받겠습니다!
힘드네요~~~
이 부족한 자를 머리로 쓰임 받게 하셔서 많은 청년들이 저를 통해 낙심하지는 않을까 맘이 아프네요.

주안에서 하나 되는 모임을 지향하며.


(답변) 아직까지, 서로 중심은 잘해 보려는 것으로 인정했으면 합니다. 문제는 결과입니다.

1.서울 청년회원들이 모여 은혜롭게 수련회를 가졌다면, 충분히 이해하겠습니다.

①어떤 모임이든 동기는 순수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까지는 부인치 않습니다.

이곳에서 주로 설명하고 소개하는 것은, 신앙 전면을 두고 발언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제 막 출발하는 연합 청년회를 두고 개별적으로 살피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그 중심이 잘해 보자는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백영희신앙노선은 의료선교 자선사업 교육활동 등 일체 사회사업을 시작하지도 않습니다. 그 동기를 전적 부인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물론 동기부터가 불손한 사람들은 순수 복음운동에 집중하는 경우가 드물고 대개 교회를 통한 사회사업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적 구원의 사랑에 불타는 사람이 그 구원을 전하는 방편을 찾는 중에 사회사업을 생각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운동의 이후 방향은 시작할 때 방향과 달리 탈선하게 됨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결과가 뚜렷하게 드러날 때쯤 되어 다시 이전날들을 차분히 되돌아보면 그 출발 당시의 동기도 아주 크게 오염되었음을 알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순수하게 출발한 본인 스스로도 이렇게 후회하고 아쉬워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런 면을 많이 보기 때문에 사회사업을 시작하는 곳이 있으면 설명의 극대화를 위해 그 동기부터 그 결과까지를 함께 놓고 비판합니다만, 우리의 동기가 100% 잘못이냐고 반문하는 분이 계신다면, 출발 때는 순수한 부분이 그래도 훨씬 많았다고 말을 슬쩍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드러날 때까지는 순수하게 봐 주어야 하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②서울지방 청년 연합수련회를 가졌다면, 일단 잘해보려는 중심이었을 것입니다.

연합 청년회의 모임에 눈물이 없다든지 회개가 없다든지 신앙중심으로 살자는 각오가 없다고 단정하지는 않습니다. 김일성 동상 앞에서 민족통일의 집념을 추모하면서도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흘려내릴 수 있는데, 하물며 일반 교단도 아닌 공회 신앙노선에서 자란 청년들이 예배 모임으로 함께 한 곳에 어찌 말씀과 회개와 감사의 눈물이 없었다고 단정하겠습니까?

지금 연합 청년회의 모임이 초기라고 한다면, 그 동기가 아직까지는 순수한 면이 더 많을 것이고 모인 분들 스스로가 느낄 수 있는 은혜가 있었을 것입니다. 중국집 음식이 맛있는 사람도 있고 양식이 잘 맞는 사람도 있고 한식을 먹어야 먹은 듯한 사람도 있습니다. 밥맛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밥먹은 사람이 배부르다고 하는데 남이 배부를 리가 없다고 말한다면 공연한 트집이고 억지밖에 더 되겠습니까?


③안타깝지만, 서울의 연합청년회 모임은 갈 길이 정해져 있습니다.

문제는, 그 연합청년회의 첫 모임은 얼마나 은혜스러웠는지 모르겠으나 그 나갈 방향은 딱 한 길로 정해져 있습니다. 100% 순수하게 모여 큰 은혜로 시작하더라고 앞으로는 반드시 타락하고 탈선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더 낫겠다고 방향 제시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 자신과 지도하시는 목회자의 결정이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이곳에서 단정하고 드릴 수 있는 말씀은,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선 서울연합회는 그 동기부터 100% 순수하게 볼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공회 내에서 1989년 이전부터 주일학교나 학생시절을 거치고 신앙생활을 해 온 분들이 청년 모임에 회원으로 있든지 아니면 지도 또는 주도하는 분으로 계실 것인데, 그분들의 동기는 잘못된 경우가 거의 전부라고 하겠고, 또 그 이후 세대라고 해도 공회의 이전날을 아는 분들이라면 그 동기에 문제가 많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상당수 참석 청년들이 적어도 그 부모나 교회 분위기를 통하여 현재 움직이는 연합회 방향이 공회가 원래 걸어오던 신앙노선이 금했던 것이라고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욱 그 동기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교단은 몰라도 공회 노선에서는 그런 모임과 그런 운영이 왜 잘못되었으며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를 그곳에 참석했던 청년들의 부모와 담임 목회자들이 이곳 이상으로 더 잘 알고 또 대부분 그렇게 과거에 가르쳐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④서울연합회의 모임은, 소속 교회와 공회가 과거 정죄한 모임입니다.

지금은 이곳만이 그런 모임을 단죄하고 있는 형편입니다만 사실 그런 모임과 활동은 현재 청년회 모임을 갖는 회원들이 소속한 자기 교회와 교역자 그리고 소속 공회가 과거에 정죄했던 사안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은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분들을 향해 일반적인 질문에 주로 답변을 드리고 있으며 또 구체적으로 질문이 있으며 개별 사안에 대하여도 답변을 드리지만 현재 재질문을 하신 분과 같이 서울연합청년회로 모였던 분이면, 그 모임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는 우선 소속 목회자와 공회를 향해 충분히 살펴보았어야 했습니다.

왜 1989년 전에는 청년회라는 것이 나쁜 것이라고 했는지, 왜 연합청년회는 더 빨리 망하고 급속히 잘못되는 것이라고 했는지, 왜 남녀 청년이 또래 집단으로 어울리면 안된다고 왜 그런 노선을 걸어왔는지 자기 목회자와 자기 공회를 먼저 지적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일반 모든 교단들이 그 방법으로 청년들의 신앙을 길렀고 복음사업에 성공을 하여 오늘 신학대학, 대학원이 50개가 넘게 되었는데 과거 공회의 노선이 결과적으로 삐뚤어진 선택을 했던 것이 아니었느냐고 충분히 토론과 검토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1년이라도 먼저 연합회를 개최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왜 과거에는 이런 모임을 정죄했는지를 철저히 검토해서 잘못 된 것이면 잘못된 줄 알고 돌이켜 회개하는 심정으로 이제는 더욱 열심히 청년 연합회를 해야 할 것이고, 만일 따져 볼 때 그것이 옳다면 누가 무어라고 해도 이를 절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1989년 이전에는 하는 것이 죄였고 이제는 하지 않는 것이 죄라면 그렇게 단정을 한 다음에 해도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1989년 10월 총공회 때, 재독설교는 신사참배와 같은 우상죄라고 단정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회의와 내용과 가부가 무엇인지 모르고 손을 들었던 분들이 지금 그 당시 회의만 재론되면 숨을 곳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청년회로 모이는 분들은 그때 그 결정이 옳았다고 해도 죄와 의를 결정하는 교리문제를 연구도 토론도 안건을 읽어볼 시간도 없이 통과한 것을 두고는 성급했다고 해야 청년들의 의혈심일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들이 개최하는 연합회가 또한 그런 식이 아닌지를 반문치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여론에 밀려서 지도부는 막지 못하고, 또 청년들은 군중심리로 밀고가는 식으로만 보이고 있습니다.


2.이곳의 주장이, 오로지 수십년 전 과거만을 향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①이곳의 주장이 너무 보수주의여서 숨이 막힌다는 분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것이 옳다고 무조건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주변에 많습니다. 갑자기 장구를 치고, 창을 하고, 상투를 매고, 한복을 입고, 그리고 '우리 것'이라고 하면 무슨 지성인 같은 그런 분위기를 주변에서 많이 봅니다. 이런 자연주의 복고주의 민족주의 경향에 대하여 이곳은 아주 역겨워합니다. 우리 것으로 돌아가려면 한자와 제사 같은 중국제부터 없애버려야 하고, 불교와 유교 흔적도 다 없애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고유 것이 있기나 있습니까? 우리 민족이라는 종자부터가 수입산인데.

이곳은 옳은 면 원수 것이라도 배우고 틀렸으면 내것이라도 버리는 주장입니다. 왜놈들의 식민통치도 잘한 점은 배우고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은 심정이고 우리 조상들이 넘겨준 우리 것이라도 아주 흔적도 없이 없애버리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혹 이곳의 주장이, 변화와 개혁이라는 시대분위기와 방향을 극도로 반대하고 무슨 수백 수천년전의 박물관 전시물을 생활속에 다시 살려놓자는 폐쇄주의 보수를 위한 보수주의로 보는 분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식과 같이 잘못된 것은 수십 수백년 내려온 것도 교계에 가장 앞장서서 또 사회개혁보다도 더 앞장서서 수십년전에 전부 철폐하고 바꾸는 노선임을 고려했으면 합니다. 이곳이 그토록 집중하는 백영희신앙노선은, 틀렸으면 천하가 무어라 해도 바꾸고, 옳으면 천하가 무어라 해도 잡고 나가자는 주장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수일 수 없고, 이런 면에서 진보일 리도 없습니다. 옳으면 하고 틀린 것은 하지 않는 진리유일주의일 뿐입니다.


②아마, 이곳 답변자만큼 진보 자유주의의 깊은 곳을 거쳐본 분들도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1964-1970년, 1973-1975까지 총 12년 정도를 이곳 신앙노선과 아주 극과 극으로 반대되는 신앙노선에서 생활 전부를 해야 했습니다. 기독교 양심은 정치 독재자와 대항하는 것이라는 것, 관료 부패 정권의 지시와 명령에 자기 모든 것을 던져 반대하고 이를 위해 매일 기도하면 정의는 승리하는 법이라는 것, 남녀가 함께 공동으로 손잡고 어울리는 것이 건전한 것이라는 것, 예배라는 것은 설교 10분 이하로 진행해야 발전적 선진화가 된다는 것, 결혼식을 올리기 전 서로 살아보고 나서 결정하는 것이 좋다는 이유 등을 수도 없이 듣고 보고 겪었습니다.

그곳을 거치며 답변자 속에 심겨지고 만들어진 양심은 현재 국내 시민단체 기준의 '양심'이 바로 신앙양심이었고 내가 갈 천국은 그 양심에 깨끗해야 했습니다. 그곳을 운영한 인물이 해방후 기독교 학생운동의 첫불을 당긴 사람이었습니다.

이 양심 자체가 오늘 이곳에서 발언하는 양심으로 바뀐 것은 1977년 백목사님 밑으로 생활처를 옮겨 직접 배우기 시작하면서였습니다. 거주지를 옮겨 백목사님 밑에서 직접 배우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이곳은 기독교사회주의 노선에서 노동자 농민 소시민을 위해 사는 것이 참 신앙인 줄 알고 평생을 내버렸을 것입니다. 그 당시 이곳을 향해서 그 동기를 의심하고 이곳의 열심과 은혜를 의심했다면 이곳 역시 그 사람을 미쳤다고 대꾸했겠지요.

1984-1986년 기간에는, 예배시간에 티샤쓰를 입은 목사님이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대표기도를 하고, 남녀 전 교인이 예배당 안에 삥둘러 손에 손을 잡고, 큰 빵 한개를 한 사람씩 떼어 자기 입에 넣고 돌려 먹으며 성찬식을 하는 곳에서, 또 식당이든 어디든 아마 남자라도 아무 여자의 손을 마주 잡고 눈물로 서로 위해 기도하는 모습 등을 조용히 지켜보고 또 그 과정을 일일이 통과해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나온 몇 날들을 잠깐 소개하는 것은, 이곳이 서울청년연합회의 그 현장 분위기를 알 수 있도록 질문자가 소개하신 글에서 느끼는 그 은혜와 그 장면을 몰라서 그런 모임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연합회에서 있었던 그 장면을 1964-1975년까지 기간에 날이면 날마다 봤습니다. 그 시절 그곳을 그런 신앙으로 거쳤던 이들이 오늘 각 교단 선교단체 등에서 그런 신앙을 지도하며 활동하는 것을 남달리 파악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공회 내 청년들이 새로운 신개발 프로그램이라고 내놓는 선교, 중보기도, 연합회, 수련회, 찬양, 성경대회...... 그 어떤 것이라도 이곳은 그 형편 자체를 알지도 못하고 그냥 백영희신앙노선의 교과서만 읽고 이 소리 저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표현은 잘 해 보지 않으나 이번에는 사용하겠습니다. 적어도 공회 청년수련회를 지도하고 참석하는 분들의 선배로서 과거식 선배의 분위기를 아직도 행사할 수 있다면, 전부 뒷골목으로 데려가서 죽도록 패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13살 초등학교 6학년 남녀 학생이 우리도 성숙했니, 우리도 알 것을 다 아느니, 우리도 책임질 행동까지만 하겠느니..... 종알거리면서 연애를 하겠다면 이전 부모라면 불신자라도 몽둥이가 머리를 향해 날라갈 일이고, 요즘은 인권이 중요한 때이니까 어쩌겠습니까? 달래야지. 이곳에서 수도 없는 문장을 동원해서 그러면 안된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③결론은 그렇습니다. 공회라는 간판을 떼내버린 다음 하실 일입니다.

이곳의 모든 주장은, 항상 백영희신앙노선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백영희신앙노선 자체를 틀렸다고 본다든지 아니면 교계의 여러 신앙노선 중 하나로 본다든지 하는 분들에게는 이곳에서 무슨 주장을 하든 그냥 듣고 흘려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백영희신앙노선이라는 것을 만일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공회 소속 교회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면 두말 할 것 없이 연합청년회와 같은 것은 내버리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혹 이 노선을 자기가 직접 걸어갈 길로는 받지 못해도 그 신앙노선의 사상에 장점이 많다고 좋게 보신다면, 교계 전체가 가지는 생각과 다른 시각을 가진 이곳의 논리와 염려를 꼭 참고하셨으면 합니다.


3.은혜라는 것은, 말씀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청년연합회의 모임이 어떤 순서로 진행되었는지 자세한 자료는 보지 못했습니다만, 홈에서 얼른 봐도 알 수 있는 것은 일반 교계에서 수십년 내려오는 그 식이지 별 다른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연합회가 우선 남녀의 자유로운 모임이라는 면을 배제하지 못하고는 바로 될래야 될 수가 없습니다. 뒤를 보시고 그 청년남녀의 눈빛과 뒤로 움직이는 심리를 보시면 알 것이고, 연합회가 또래끼리 모이는 것이 되어서는 신앙의 본질에서 곁가지로 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은 기독교역사가 가르치는 일입니다. 이래서 교회가 수백년씩 썩어가다가 한번씩 개혁이 일어날 때에는 남녀노소 배운 사람 못배운 사람 신분귀천에 상관없이 말씀을 배우는 경건한 예배모임으로 시작하게 됩니다. 감리교 웨슬레가 대학생 중심의 학생회로 시작하는데, 그 결과가 결국 감리교입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말씀의 은혜가 있었고 그 말씀으로 회개를 하고 서로 기도했다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 수련회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다 은혜로운 모임이라고 나가는 것은 지나친 비약입니다. 백목사님 생전 말씀 중심의 집회가 그렇게 은혜로웠던 집회였다고 이곳은 소개하고 있으나 그때 집회 모임 중에서 배식 때문에 싸운 사람도 있고 텐트 위치 때문에 마음 상한 사람들도 부지기 수였습니다. 그러나 말씀 중심의 그 집회는 모든 모순과 불편과 갈등을 다 덮어버리고 말씀 하나가 머리속에 남아 집회 후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으니 이런 점에서 그런 모임이 옳다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이번 청년회와 같은 모임에도 여러가지 은혜와 장점이 많았겠지만 청년남녀 또래들이 통제되지 않고 뒤섞여 즐기다 보면 그곳에서 받은 모든 은혜를 전부 다 까먹어버리고 그 수련회가 모일수록 그 수련회에서 사귄 남자친구들은 늘어가고 그 수련회에서 즐겁게 지냈던 추억만 남을 수 있습니다.

혹 그 모임에 주도 입장에 계신다면, 이곳의 비판을 참고하여 이곳이 염려하는 대로 나가지 않도록 노력하셔서 이곳의 비판이 공연한 우려였다는 결과를 만들도록 힘을 써보셨으면 합니다. 조롱이 아니라 우리의 진정한 노력과 방향이 그렇게 되어야 옳을 것입니다. 이곳은 그 표현은 강할지 몰라도 중심만은 구원운동 일념입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다른 모임은 탈선해도 그렇게 노력하는 한 분 때문에 예외적으로 특수한 은혜로 나갈 수 있을 것이고, 또 노력해도 되지 않을 때는 얼른 후속 조처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참고로, 백목사님도 청년연합수련회 주강사로 오랫동안 활동한 적이 있었습니다. 현재 CCC가 국내 최대 대학생 연합단체로 평가되지만 그보다 해방직후 고신에서 시작했던 전국학생운동 SFC가 1960년대까지는 훨씬 은혜와 조직과 운영면에서 국내 최대 운동으로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학생운동출신들이 현재 국내교계의 각계각층의 지도층이 되어 있는데 그 운동을 시작한 첫출발 7-8명 중 한명이 동성로교회 신목사님입니다. 국내 학생운동의 최고 원조입니다. 그분들로 시작하여 해방 교계에 신앙의 불을 지핀 이들은 남녀가 강단 위로 올라와서 그룹댄서를 하는 것으로 그 운영의 중심에 두지 않았습니다. 말씀과 기도와 전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운동도 초기를 지나면서 급격히 변질되었던 점을 참고하셨으면 합니다.

(감사) 답변 감사합니다.

읽는데만 20분이 걸리네요.
목사님! ‘요즘 성도들의 열심이 충만한 열심이 아니라 갈급한 열심이라'고
어느분이 말씀하시더라구요.
아마 우리 공회 청년들도 예전(10년전 같은)같은 말씀이 갈급하고 기도가 갈급하여 주님께 더욱 매달려보는 몸부림이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이번 수련회도 처음부터 윗분들의 반대도 당연히 있었습니다.
거의 작년 8월부터 12월까지 하냐 마냐하는 결정도 못내리고 있다가 12월 목회자 회의때 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한달여 동안 담당 목회자님들과 간사님 그리고 각지방 임원들이 열심히 준비하여 은혜 가운데 성공적으로 마쳤답니다.
처음이라 다들 열심히 준비된 마음으로 충성했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역사도 체험했고 은혜도 많이 받았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다른 시간들도 유익했고 은혜가 됐지만,
특히 저녁 영성부흥회(박상돈 목사님) 시간이 저에겐 충격이었습니다.
불같은 뜨거운 말씀으로 저의 무뎌진 정체된 신앙을 확 뒤집어 놓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이거구나~~
자기의 그릇크기만큼 쓰임받는구나~
누구나 똑같은 은혜를 부어주시지만 자기 신앙 그릇의 정도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타나구나~
그릇 키워나가는 삶(성화의 삶)을 살아야하는구나~~'
사실 보면 누구나 공감하는 말씀이고 늘 듣는 식상한 말씀이지만, 전 그 말씀을 뼈져리게 공감하고 그 말씀하나만 붙잡고 그산을 내려 왔다고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귀한 말씀이 었습니다.

혹 어떤 청년들은 찬양이 뜨거워서 좋았다.기도가 뜨거워서 좋았다고 할 것입니다.
이처럼 한가지만 놓고 봐도 신앙엔 단계가 있나봅니다.
너무 어리면 이유식을 먹여야되고 장성하면 밥을 먹어도 탈이 나지 않습니다.
아뭏든, 이 모임이 목회자님들의 바른 지도하에 6~70년대의 모습이 아닌 참 신앙을 가진 진정한 모임이 되기를 바랄뿐입니다.(시간이 없어 여기까지 몇자 적어 봅니다,두서없이 생각나는데로 적어서 죄송합니다)
항상 이곳에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길 기도드립니다!!



(재질문) 청년들의 신앙생활은 어떻게

많은 분들이 시대가 바뀌었다고들 합니다.
총공회 청년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여야합니까?
바른길을 알려주세요.


(답변) 시대가 바뀌지 않은 때는 없었습니다. 바뀔 것과 바뀌면 안될 것이 따로 있습니다.

1.시대가 바뀐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시대를 따라 바뀔 것이 있고 바뀌면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①시대가 바뀌는 것은 확실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죽고 아버지 어머니가 가정을 책임지는 때가 되었다면, 시대는 과연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도 죽고 이제 아들과 며느리가 자녀를 낳고 가정을 책임지며 살아야 되는 시대가 되었다면 세상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세상에 달라질 것이 많고 또 달라지고 나면 변화를 느낄 것도 많지만 결국 제일 큰 변화의 요소는 인간입니다. 자세하게 관찰하면 하루도 바뀌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불신자들의 경험과 통계에서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늙고 세대가 교체되는 것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주변 환경에 속하는 집들도 길도 바뀝니다. 산의 모습을 바꾸는 숲의 형태도 바뀌고 한번씩 강타하는 태풍과 집중 호우로 물길도 변하게 됩니다. 풍년과 흉년에 따라 세상 인심과 눈빛까지도 돌변하는 경우가 있는데 매년 그렇게 크게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10년 혹 2-30년이면 상상못할 정도로 변할 일들이 있습니다.


②지금 변하는 세상은, 예정도 측정도 무의미할 만큼 초고속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시대는 1에 1을 더하며 변해오던 6천년 인류역사 중에서 가장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1에 1을 더하는 식으로 변해오던 시절을 두고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이 속담이 정신도 못차릴 만큼 변하게 된 것은 우리가 막 살다가 빠져 나왔던 지난 20세기였습니다. 20세기의 변화는 1에 1을 더하는 것이 아니고 1에 1을 곱했습니다. 그다음에는 2를 곱했고 그다음에는 3을 곱했습니다. 그 이전 백년 수백년에 변할 것이 단 몇 년에 바뀌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 20세기를 마감하던 순간에 나타난 컴퓨터 사용의 대중화는 이 홈을 운영하는 시골 산골에까지 초고속 인터넷 전용선이 들어오면서 이제 2제곱 4제곱으로 곱하며 더 이상 변화를 예측하거나 측정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었습니다.


③현재 바뀌는 세상은 특이하게도, 변화를 상대하는 인간의 본질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세상이 바뀌면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변화된 현실에 적응하려고 대응을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세상이 바뀌고 주변 환경이 바뀔 때, 우리 인간이 보인 행동은 변화된 환경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고 또 어떻게 대응하여 보다 유리하게 그 환경을 이용하느냐는 자세를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환경의 변화를 대처하는 인간의 근본 자세에 중대한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 많은 것이 단숨에 바뀌어 왔고 그 변화된 환경에 적응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결과가 불과 한 세대에 여러번을 겪게 되었고, 최근에는 그 주기가 더 단축되어 불과 10여년 사이에 그런 일을 몇 번씩 겪게 되었고, 지금은 불과 몇 년 사이에 그런 황망하고 충격적인 상황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급변의 환경은 급기야 우리 인간이 환경의 변화를 대처하는 내적 대응 자세 자체를 바꾸어놓고 말았습니다. 환경의 변화를 어떻게 파악하고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느냐는 것이 원래 환경의 변화에 대한 인간의 기본 자세였고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외부 변화를 대처하는 인간의 본성을 잃어버리고 인간이 외부를 변화시키는 주체로 그 본질을 스스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지금까지는 환경의 변화를 외침으로 보고 인간은 방어선을 구축하여 생존전략으로 대비하는 방어군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는 인간이 하나님이 정해 주신 자기 지위를 떠났습니다.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지켜야 할 자기 주거가 있는데 그 주거 개념을 없애버리고 이제는 환경의 변화가 외침으로 오든지 말든지 인간은 인간대로 자기가 지킬 성은 버려두고 천하를 점령하기 위해 끝없는 원정길에 나서고 있습니다.


④변화에 중독이 되었고 변화가 자기 본능이 되어버린 이상한 인간들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인간에게 넣어 두신 자연 본능은 현실에 대한 순응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현실의 변화는 자기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파악하여 그 변화된 현실 속에서 자기가 대처할 바른 자세와 행동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만든 인간의 본질입니다. 이 본질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현실을 이리 저리 바꾸어 가면서 평생 우리를 길러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인간의 본질과 본성의 타락이 그 정도를 넘어서되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라도 가지고 있어야 할 마지막 인간다운 본질까지 내놓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변화를 대처하는 것이 아니고 변화라는 것 자체에게 중독이 되었고 그 변화가 이제는 인간 자기 내면의 기본 본능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머리를 떼서 발에 붙여 보아야겠고, 남자를 여자로 만들어보아야 하며, 동물과 사람을 뒤섞어 변종을 제 눈으로 봐야하도록 되었습니다.

인간이 편리하게 사용하려고 만든 로봇은 원래 '도구'의 개념인데, 이것이 어느날 인간처럼 자기대로 사상과 철학을 가지고 자기 중심으로 인간을 상대하게 된다면 '본질적인 변화'라고 할 것입니다. 주인에게 팔려와서 주인을 위해 존재하고 주인이 죽이든 팔든 할 수 있던 노예가 이제 시민권을 가지고 주인과 같이 시민권을 행사하는 상태가 되었다면 이는 본질적인 변화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넘어서는 안될 또 하나의 선을 넘어 타락의 종착을 향해 줄달음을 치되 지금까지는 타락의 레일 위를 달리고 있었다면 이제는 그 달려가는 길조차도 벗어나서 미쳐버린 열차 기관차가 된 정도입니다. 기관차가 이전보다 출력은 더 강한 상태에서 이제 레일을 무시하고 제 멋대로 사방천지를 제 가고 싶은 대로 제 멋대로 그때 그때 즉흥적으로 휘둘고 다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⑤이렇게 볼 수 밖에 없는 것은, 인간에게는 바꿀 것이 있고 바꾸면 안 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외부 환경이 변하고 인심이 변하면 그 환경과 접촉하는 인간들 틈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겨울 날씨를 위해 두터운 옷을 준비하고 여름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얇은 옷감을 개발하여 대처를 해 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이 변하는 환경을 상대할 때까지만 해도 '발전'이라는 개념이 있었고 '진보'라는 결과를 말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변하는 세상을 보면서 우리는 자연계시를 통한 현실인도와 그 현실인도를 순종하는 신앙걸음은 어떻게 되는 것이 옳은지를 참고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환경 변화를 전제로 인간이 어떻게 대처를 하느냐는 차원이 아니고 인간이 자기 힘대로 실력대로 마음에 내키는 대로 자기 환경을 얼마나 바꾸느냐는 차원이 되었습니다. 환경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는 새로운 행동이 있으니 이 하나님의 요구를 순종하는 것이 '정상적인 변화'이며 이렇게 변화되는 것을 발전이라 진보라고 합니다. 또 이 변화에 늦어진 것을 뒷늦게라도 따라 잡기 위해 시험전날 벼락치기 밤공부를 하듯 급하게 뒤따를 때 그것을 '개혁'이라고 합니다.


현재 세상 변화의 본질은, 과거처럼 하나님께서 환경을 바꾸어 주셨으니 이 바뀐 세상 속에서 나 할 일이 무엇이냐는 차원이 아니고, 하나님이 바꾸어 주기도 전에 또 하나님이 바꾸어 주시지도 않는 것을 인간이 먼저 나서서 바꾸어 놓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겨울로 세상을 바꾸니 무슨 옷으로 대처할까, 부모를 일찍 불러갔으니 어린 나이지만 생계를 어떻게 할까, 세월 속에 지식이 누적되어 차가 굴러 다니는 세상이 되었으니 이 빠른 기계를 어디에 쓰라는 뜻일까 하는 것이 정상적인 변화와 그 변화를 대처하는 인간의 대응입니다.

지금 인간의 본질 자체가 변질이 되었다고 거론하는 것은 이제 예를 든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바꾸어놓고 있습니다. 명백하게 10번째 계명을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를 부모로 만들고 부모를 아이 자리로 내려 앉혀놓고 그것을 개혁이고 변화라고 하며, 이런 변화로 인하여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고 하는 발광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바꿀 것이 있고 바꾸어도 되는 것이 있으며 바꾸지 않아도 되는 것이 있고 절대 바꾸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제 부모는 내버려두어 고려장으로 죽듯 해놓고 옆집 아파트 개 죽은 것을 두고는 새댁들이 모여 앉아 울고 불고 난리를 하는 변화는 이전의 변화와는 양상이 다릅니다. 그런 새댁들 그런 젊은이들이 인권을 주장하는 세대라고 나서는 변화는 진정한 의미의 변화와는 정반대 개념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이곳은 변질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초식동물에게 육식사료를 먹여 그 소가 미쳐버린 것이 광우병이라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이런 변화들도 변화라는 이름으로 이 말세 대로에 나서고 있습니다. 그런 변질들이 이 말세 대로를 완전히 점령을 해버렸습니다. 바꿀 것이 있고 바꾸면 절대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⑥바꾸면 안될 것까지 바꾼 배경에는, 악령의 말세 경영전략이 숨어 있습니다.

발전적인 변화, 하나님이 인도하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진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꾸도록 주신 현실을 따라 바꿀 것을 바꿀 때에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바꾸어도 되는 것을 바꾸는 것까지는 그래도 그 동기와 목적이 좋을 것이라고 위안하면서 지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꾸지 않아도 될 것을 바꾸고 나서는 세대를 볼 때는 4차선 대로 안에서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보듯 합니다. 만일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을 바꾸는 일이라면, 이것은 '변화' 또는 '개혁'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 것입니다.

아담의 첫 범죄 이후 지난 6천년간 악령은 역사 속에 거쳐간 수도 없는 죄를 내놓았고 그 죄는 그 당대를 어지럽히며 교회의 복음운동에 맞서 왔었습니다. 이제 역사 세계의 최종을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악령이 자기 시대를 마감하며 마지막 가장 큰 무기를 준비하고 사용할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말세를 마지막으로 경영하기 위해 악령이 내놓은 전략이 바로 첫 타락으로 시작한 인성을 이제 그 뿌리까지 본질적으로 다 바꾸어 자연상태에서조차 창조의 형태를 없애버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을 악령이 훼파하되 말세 직전까지는 신앙내적인 것에 주력을 했고 이제 최종 순간이 다가오자 자연계시에 해당되는 세상에 속한 것까지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창조에 속한 것은 그 모습과 그 본질, 그 흔적까지 모두 도말하고 있습니다. 죄가 죄를 낳아 죄를 길러 온 역사 중에서도 이 죄는 가장 최악의 죄일 것입니다.


⑦인간의 본질 자체가 '변화'라는 문제를 두고 변질되어 버린 원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악령이 '변화'에 대처하는 인간의 본질 자체를 통째로 바꾼 과정은 우선 변화를 통해 모든 문화와 기술이 발달되고 현저하게 좋아지게 된 결과를 보여 준 것이 먼저였습니다. 특히 지난 수백년, 그 중에서도 지난 1백여년 동안 모든 인류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까지도 넋을 잃고 악령이 문화 과학 기술을 통해 재주를 부리는 것을 경탄만 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후천년설이라는 교리는 기독교 핵심 보수쪽의 다수가 믿고 있는데 이 교리는 이렇게 좋아지고 있는 세상을 볼 때 주님 오시기 전에 천년왕국이 먼저 임하고 있다는 정도입니다.

의학의 발달, 경제의 발달, 문화의 발달로 인하여 이만하면 지상천국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았으며 이 정도 발달이 좀더 지속되면 하늘의 천국이 이 세상에 이루어진 정도겠다고 하는 교리입니다. 보수측 정통신학이 이 정도였으니 교회는 그렇게 눈에 좋도록만 보이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 이면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도 교회도 전부가 '변화'라는 것은 '발전'과 같은 말이고 '발전'이란 '행복'이라는 것이라고 통일을 시켜버렸습니다.

악령이 이렇게 세상을 좋게 만들되 '변화'라는 모습을 통해 그 목표를 이루게 되자 이자 '변화'라는 것은 무조건 발전이며 행복이며 지상낙원을 향한 필수코스라고 단정하게 됩니다. 세상 분위기를 이렇게 통일되자 교회도 그 통일이 지금 어디를 향하는지도 모르고 함께 동승해버렸고 20세기의 변화만큼이나 교회도 덩달아서 변하게 됩니다. '변화'라는 귀신에게 교회가 통째로 씌이게 된 것입니다. 이후 100여년 오늘까지 세계교회사의 흐름은 그 주제가 '변화'에 있었습니다.

'변화'란 세상 뿐 아니라 교회에게도 항상 옳은 것이고 좋은 것이며 그것은 개혁이라는 진통을 겪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을 말하는 사람은 한 시대를 앞서 보는 선지자가 되는 판이고 그것을 행동으로 보이는 사람은 양심가가 되고 그것을 주장하다 손해를 본 사람은 말세 교회를 살리려고 희생한 순교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를 가마솥에 넣고 통째로 삶아 치운 것임을 아는 교회는 현재 우리가 알기로는 백영희신앙노선밖에 없습니다. '변화'를 뒤집어 쓰고 나타난 말세 귀신이 말세 교회에게 복음을 전하는 천사로 환영받았다는 말입니다.



2.교회가 시대를 따라 변해온 면을 두고 살펴보아야 할 마지막 시점입니다.

①이곳이 아는 수준에서만 본다면, 이곳이 이런 주장을 하는 마지막 세대가 될런지!

개를 주인 안방에 모셔놓고, 그 주인은 대문 앞 개집에 가서 집을 지키는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끓는 가마솥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철부지들이 세상을 경영하고, 그 할애비 할미들은 양민이 되어 통치받는 묘한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모든 세상과 모든 교회들이 개혁이며 발전이며 지상낙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일치 떠들고 있는데, 이곳은 그 반대로 알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발언하고 있습니다.

염려스러운 것은, 혹 이곳이 이런 발언을 하는 마지막 세대가 될런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대에 소망이 없고 훼파되어 돌 위에 돌 하나도 첩놓이지 않고 끝장이 났던 예루살렘 꼴이 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염려는 현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배당의 남녀반을 섞는 것이 변화고 개혁이며 그것이 사랑의 동산이 된다는 그 논리와 주장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남녀 7계명이 금한 사랑을 기준에서 본다면 분명히 옳습니다. 그러나 7계명을 금한 구원의 사랑을 기준에서 본다면 예배당을 연애당으로 만드는 타락이 아닙니까?

교회가 지금까지 변하여 세상을 닮아왔고 세상을 따라갔으니 교회가 변하고 변하며 이루어낸 마지막 결과는 교회인지 세상인지 구별을 하지 못하도록 되어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심은 것은 애매해서 단정하기 어려웠으나 현재 교회들의 사랑과 행위와 운영과 그 모습이 세상을 닮아가고 있지 과연 초대교회를 닮아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은 곳이 없는 때임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면을 지적하며 오늘 시대 전체를 두고 탄식하는 소리 자체가 잦아들어버리니 이곳이 이것을 외치는 마지막 세대가 될까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②고신으로 예를 들어 미안하지만, 너무 좋은 본보기이니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고신이 신사참배 환란을 통해 그렇게 진리 파수를 외쳤습니다. 시대가 어떻게 변하고 세대가 어떻게 바뀌어도 신사참배는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고신의 반대측에 있었던 현 총신의 합동교단과 장신의 통합교단은 조선이 망했으니 일본국민이 되었다는 것을 '바뀐 시대' '변한 세상'이라고 부르며 '변화'란 좋은 것이고 변화란 발전이며 변화란 역사의 진보라고 반대 논리를 폈었습니다. 그러니 일본 국민이 일본 신사에 절하는 것은 애국행위가 되는 논리가 나오게 되고 결국 한국 장로교가 신사참배를 공식결의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고신은, 세상이 몇 번 뒤집어져도 신사참배는 하지 않아야 진리고 그런 진리는 세상이 바뀐다고 따라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계속 견지했었습니다. 고신은 그들의 그런 행위를 신앙적으로 '보수' '진리파수'라고 했고, 부부로 표현하자면 '정조' '지조'라고 했었습니다. 물론 일제 식민지 시절 내내 신사참배라는 변한 세상을 인식한 이들은 발전을 계속하여 해방 후까지 그 교권을 장악하고 오늘까지 국내 교회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고신은 세상 기준에서 교세를 따지는 것이 아니고 진리 기준으로 교회를 따지는 것이라고 하며 해방을 맞았습니다.

해방 후 고신은 출옥성도라는 환영식을 받으며 잠깐동안은 들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주장이 결국 옳기 때문에 이제 한국교회는 통째로 자신들의 손에 들어올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찬바람이 나자 결국 해방 후 교회도 다수결로 모든 것은 결정되었고 고신은 교세 없는 진리가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불과 10년도 채 되지 않은 세월 속에 고신은 비로소 세상이 무엇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소위 철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고신도 신사참배를 하면서까지 변한 세상을 따라 잽싸게 간에 붙고 쓸개에 붙는 것이 남는 장사고 벌어놓아야 큰 소리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됩니다.

합동측 통합측으로 이루어진 총회파에게 10여년 세월 배우고 또 배운 것을 토대로 하여 고신은 총회파가 분열될 때 그 중에 한쪽인 합동측을 붙들고 교세 늘리기에 나서게 됩니다. 그때 백목사님은 고신이 죽었다고 선언하고 반대했지만 그렇게 반대하는 백목사님을 도려내고 끝까지 변한 세상을 따라 민첩하게 챙길 것을 챙기는 것이 훗날 웃을 수 있는 지혜로운 결정이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고신의 오늘까지 행위 중 해방 후 불과 몇 년을 제외하면 그들이 그렇게 욕했던 신사참배 가담자들이 사용한 '처세술' '변하는 세상을 따라 변신'하는 세월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③고신으로 예를 든 것은, 무슨 소리를 해도 결국 '변화'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를 따지면 교인이 줄어듭니다. 기독교의 고유 교리를 따지면 국내 종교사회계 대표 모임에 목사가 앉을 자리가 없어집니다. 교회가 변해야 산다고 외쳐야 하는 이유입니다. 교회가 성경을 그대로 지키지 않았던 것을 회개하고 이제는 성경을 그대로 지켜 사는 교회로 '변화'되자고 해야 그것이 바른 변화인데, 지금까지 성경만 제일이고 유일인 줄 알고 살았던 그 '성경유일주의'를 탈피해서 교회 교리가 시대를 따라 변하지 않으면 교회가 이 국제 문화 사회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고, 청소년의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오늘 '변화'를 외치는 교회들의 논리들입니다.

물론 이곳의 발언에 펄쩍 뛰며 부인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의 발언이 감정에 치우쳐 실언하는 것이 아니므로 반론을 하고 싶은 분들은 우선 가만히 따져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교회가 천주교와 공동번역 성경을 내고 또 교파의 진리를 비빔밥으로 만들어 통일찬송가를 만들었던 것은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귀신들의 합작이었지 진리 운동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통일찬송가가 기어코 한국교회의 유일한 찬송가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대세론이었습니다. 상황이 변했다는 상황논리였고 막대한 경제 수입이 예상되는 밥그릇논리였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은 대세가 그렇기 때문에 따라 갈 수 밖에 없다는 대세주의였습니다.

2002년에 급박하게 추진되었던 한국교회 모든 교단들의 총연합회 운동에 고신까지 찬성하고 나섰는데, 이 역시 진리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남북통일 지상주의를 외치는 문익환씨의 기장교단 노선과 보수개혁 지상의 칼빈주의 고신교단이 복음운동을 같이 한다면, 진리 기준에서는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대세를 파악하여 한국교계에서 또 한번 도퇴될까 하여 대세를 따라 간 것입니다. 고신이 대세에 밀려 손을 내민 그 기장교단은 현재 불교 천주교와 손을 잡고 남북통일에 앞장 선 진보교단입니다. 천주교와 불교는 세상 속에 깊이 들어 앉아 있는 우상종교들입니다.

결국 무슨 소리를 해도 마지막에는 세상이 변하는데 따라 함께 변하고 변한 세상 속에 같은 물을 들여서 그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으면 교단은 교계 영향력에 손해를 보고, 교회는 교세에 손해를 보고, 목사는 교인 확보 손실로 인하여 명예와 경제와 노후 대책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가장 깊은 중심에는 이 것을 깔아놓고 그다음 그들의 변질을 포장하는 데에는 교회 역사를 동원하게 됩니다.


④교회에 피아노가 들어온 예를 들어 드럼을 들여놓고 있습니다.

예배당 건축이 바뀌어 왔으니 교리도 바꿀 수가 있다는 논리
예배당 남녀 칸막이를 했다가 없앴으니 남녀 혼석으로 가는 것이 발전이라는 논리
한복 입던 목회자가 양복으로 바꾸어 입었으니, 세상을 따라 변해야 교회라는 논리입니다.

한복입던 한국사회가 양복으로 바꾸었으니, 바꾸는 것이 변화고 변화는 발전이라고 한다면, 입으로 먹던 밥을 이제는 항문으로 먹어야 발전이겠는가? 입 안에 이빨이 28개 있던 것을 이제 다 뽑아서 목에 걸고 다니는 것이 과거와 달라진 개혁이고 발전인가? 이렇게 반문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바꿀 것을 바꾸고, 또 바꾸어서 좋아질 것을 바꾸는 것이 발전인데, 있던 것을 무조건 없애고 바꾸고 고치기만 하면 전부가 발전이라고 해 버리는 것이 현재 교회의 모든 행태입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교회는 거의 00대를 사용하여 문서를 만들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인쇄를 했습니다. 1990년대 이후로는 컴퓨터 출력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속도가 단순히 빨라지고 종이의 질이 좋아지는 것을 변질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타이프로 치던 것을 워드프로세서로 편리하게 대체하고 그것을 컴퓨터로 입력하여 오늘처럼 자료를 이렇게 잘 사용하는 것을 두고 야단치는 것도 아닙니다. 발로 심방하던 것이 자전거로 또 자동차로 움직이는 것을 두고 본질이 변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⑤문제는 이 백영희신앙노선에 있는 교회들과 그 청년들입니다. 입장은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

질문자께서 질문 내용 중에서 던져주신 숙제로 돌아오겠습니다. 이미 시대가 바뀌었고 이 바뀐 세상에서 총공회 신앙노선으로 살아야 하는 청년들이 문제입니다. 백영희신앙노선 외에서는 이미 그 머리되는 지도자들부터 교단차원에서 다 세상 속으로 자진해서 항복하고 들어갔다고 표현할 정도가 되었기 때문에 살펴볼 가치가 없다고 보겠습니다. 그러나 이곳이 아는 바로는, 지난 20세기 후반부를 한국교회와 세계교회 속에서 유일하게 성경 진리에다 못을 박아놓고 흔들리지 않고 걸어왔던 노선이 있다면 이곳이 중점으로 연구하는 백영희신앙노선입니다.

이 노선에 속한 사람들이라면, 현재 그들의 친구들을 따라 기호를 따라 드럼을 치고 남녀 혼성으로 예배당 안에서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즐기고 있을지라도 이러면 되고 이러면 안되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1970년대 한국교회적으로 급격히 탈선이 진행되던 때 술 담배 논쟁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선교사들의 업무 지침이었느니, 성경에 없는 것이라느니.... 했습니다. 이제 2003년이 된 지금, 그분들에게 다시 권합니다. 담배, 실컷 태우십시오. 자녀에게도 실컷 권하시고, 술독에도 푹 빠지십시오. 아마 간이 그 정도는 견딜 정도로 튼튼할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그것도 목사님들이 술 담배를 할 수 있다고 우겨대던 1970년대 1980년대 그들은 세상이 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언제까지나 교회가 이것 저것에 매여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그것을 주장하는 분들이 자기들 깊은 양심에 진정 술 담배가 나쁘다는 것을 몰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몇몇 못된 신학자 목회자들 빼놓고는. 대개는 군대나 사회 생활 중에서 주위 눈치를 이기지 못하고 술 담배를 배웠는데, 자기 행동 합리화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뿐입니다.

지금 이 신앙노선에 있는 청년들이 남녀 혼성으로 대학 써클 같이 움직이고 세상 이벤트식으로 나가고 하는 일은 그들 나이에 그들 주변 분위기 때문에 물이 들고 또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설마 그들이 성경에 근거를 두고 신학 이론을 정립하여 본 그 결과를 가지고 실행차원에서 하는 행동은 아닐 것입니다. 못된 청년 한 둘이 예배당 안에 이쁜 여자애들 욕심을 내고 접근하는 방법으로 시작을 했든지 아니면 주색잡기가 체질이어서 놀자판을 만들었을 것이고, 대개 선량한 청년 학생들은 배운 것이나 어릴 때 교육 받은 것에 의하면 문제가 있지만 대세를 거부하지 못해서 따라 나선 일입니다.

하다보니까 늦게 배운 도둑놈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이제 공회 교회들은 청년회 학생회 노는 것을 이제 시작했기 때문에 다른 교파들이 수십년 전에 재미보고 버렸던 것을 줏어들고 신기해 합니다. 그 신기해 하는 것을 감동이라 하고 그것을 영감이라고까지 한다나요! 어쨌든 교리 정립과 노선 검토가 없이 먼저 일을 벌여놓고 뒤에 와서 이곳에서 공개적으로 난타를 하기 때문에 자기 합리화를 위해 다윗도 여호와 앞에서 댄스를 했고 구약에도 악기 종류를 다 동원해서 여호와를 찬양했다는 다른 교단 논리를 동원하고 있습니다.

공회 신앙노선을 부인하고 발언하려면 가능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공회 신앙노선을 전제로 두고 발언하려면 얼른 입을 막는 것이 옳습니다. 그들 위에 있는 그들의 담임목회자가 지금 인사권을 쥐고 있는 장로님 딸, 회계 집사님 아들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제대로 말을 못할 뿐이지, 그 목사님들이 1989년 이전에는 거의 다 그러면 안 된다고 그 이유를 가르쳤던 분들입니다. 이제는 각 공회와 교회의 목회자 자녀들이 먼저 북을 치고 장구를 치고 강단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때입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을 것이니, 교리와 성경 원리로 말하면 금할 일이지만 대세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⑥우리의 변화 기준은 성경입니다. 성경에서 멀어지면 변질이고 가까와지면 발전입니다.

백목사님 밑에서 현재 이곳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답변자와 함께 제일 강하게 주장했던 분이 백목사님 생전 주일학교 총무입니다. 그분도 1998년 답변자와 만났던 마지막 대화에서 교인이 많이 모이게 하려면 할 수 있는 방법은 전부 다 해겠다고 했고 그후로는 이곳은 두번 만나지 않았습니다. 길이 다르면 욕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따로 만날 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향해 바쁜 걸음을 움직여야 하는 실무자들입니다. 길이 다른 분들과 서로 허비할 시간은 없어야 정상입니다.

백목사님 밑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직접 모시고 일을 했던 최고 보수 강경파까지 다 이렇게 흩어진 마당에 지방교회에서 친구 따라 드럼셋트를 치고 있는 청년들을 향해 이곳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다. 목적도 좋고 동기도 좋았을 것이고 또 이해도 한다고 말은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주변과 지도자를 핑게댈 수는 없습니다. 좋은 동지가 있고 바로 외치는 종이 있으면 더 좋고 없으면 성경 들고 자기 힘대로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백목사님처럼 당시 현실과 환경 전부를 이기고 신앙노선 뿐 아니라 교회 부흥까지도 이룰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으나 오늘 그 신앙노선을 걷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자기가 걸어온 신앙노선을 지키는 정도이지 그 노선에서 부흥으로까지 나가기는 어려운 시대를 만나고 있습니다.

부흥은 있으면 더 좋고 없으면 실력이 없는 것이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러나 신앙노선이라는 것은 어떤 이권을 위해서도 내놓을 수 없습니다.
무조건 지킬 뿐입니다. 예배당 의자 길이를 6자로 하느냐 7자로 하느냐, 예배당 차량을 12인승으로 하느냐 15인승으로 하느냐는 문제를 두고는 타협도 양보도 협상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노선 자체를 두고는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변하는 시대 속에서 그 신앙노선을 지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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